8월 초, 광안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홀에서 수상자의 아내가 대신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왔다. 민소매조끼를 걸치고 있는 모습에 입을 삐죽거리는 어르신들이 좀 있었는데(여성분) 나는 시원해 보여 좋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제 11회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을 받은 시인 이윤길이다.

 그는 19살,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를 졸업도 못한 채 원양현장 실습이라며 그해 10월 라틴아메리카의 수리남으로 갔다. 그렇게 시작된 원양어선의 승선이 근 30여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자를 만났고 결혼을 했고 딸아이 둘을 낳았고, 실습항해사에서 3등, 2등, 1등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되었다. 그의 시집 속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동안 난 삼각파도를 뚫는 괭이갈매기처럼 씩씩하게 한 끼의 밥값을 위하여 이 바다 저 바다를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삭혀왔다.”고 했다. “소금물에 절인 마음과 달빛에 부서진 마음, 태양 볕에 달구어진 마음들, 태풍 속에서 오금저린 마음도 있었다. 그런 마음들을 모아 놓은 것이 오늘의 영광이 되었다. 존재는 말 그대로 환상인 것이다.”라고도 했다. 책날개에 있는 그의 사진을 다시 넘겨보았다. 희끗한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풍채 좋은 59년생 남자였다.

 아내 차미선은 지금 러시아 해역 바다 한 가운데에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헌책 냄새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라고 말하는 두 딸 자랑도 했다. 단칸방 가득 책을 쌓아두고 읽어대고 배움의 갈증을 못 이겨 시인을 찾아가 스승으로 삼고, 수많은 날들을 습작하고, 그런 세월을 오래도록 지켜본 아내는 경남 통영 사람이었다. 그녀는 특유의 억양으로 적어온 걸 읽어갔다. ... 새벽에 만취해 들어오는 남편은 아파트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자기존재를 확인하려했다고...

 

 

 난 그 대목에 가슴이 아렸다. 술 취해 객기와 난동을 부리는 남편, 아버지, 시아버지...  이 시인이 스스로를 칭한 말처럼 ‘황금빛 찬란한 유산이 없어 흔들리는’ 우리의 그들을 봐주는 눈이 조금은 유연해지고 있다면 나도 정말 중년의 여인인가. 뱃놈이 무슨 시를 쓰냐고 주위에서 말했다고 겸양을 떨어놓았지만, 화기애애한 시상식장에 앉아 그의 시들을 죽 읽어보니 망망대해의 생명력이 꿈틀대며 달려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대양의 품에조차 안겨보지 못한 나이지만... 

 

 

 바다에 몸을 담고 부딪히며 쓴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시들, 그 중 표제시 하나를 옮겨본다. 다른 시들보다 여성적인 감성이 느껴진다. 떨어져있는 시간이 더 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늘 사랑하는 일에 서툴고 어리석게 마련인가. 그래도 실러갠스의 새로운 비늘 하나를 꿈꾸며..



진화하지 못한 물고기 한 마리

-이윤길




눈 뜰 때 포프라기 되어 매달리는
세월 갑옷을 걸친 마흔 여자의
스물아홉 의식으로 사랑은
심연에서 화석이 되었고
백만 년 동안이나 변화하지 않고
화석으로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
비늘에다 그리움을 빗금으로 남기다
뻐끔하고 세상 밖에 숨 뱉어놓은 날
기포에 쌓여진 지난, 사랑 하나가
수묵처럼 번지는 파문 만든다
계절이 바뀌면 꽃들도 달라지는데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백만 년 전의 사랑이나
현재의 사랑이나 변하지 못한다
말들의 통로를 따라 연비 되어진
아줌마가 간직한 눈물에 슬픔들이
아저씨 가슴에 비 되어 흐른다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 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어찌하여, 여인 만나게 된 걸까
창 너머 바다에 달빛이 부서진다
실러갠스* 새로운 비늘이 생긴다.

* 실러갠스 : 화석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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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8-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문진 수산고등학교...저희 동네에 있던 학교인데...
뱃내음, 바다내음이 비릿한 그의 시가 어떨런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07-08-20 12:54   좋아요 0 | URL
어머, 잉크님 주문진이 고향이세요?
전 주문진까진 못가봤지만 그 부근 속초까지 가봤지요.
왠지 오늘은 잉크냄새 대신 바다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

twinpix 2007-08-20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닷물에 절여진 마음이라, ^^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0 23:21   좋아요 0 | URL
트윈픽스님, 네^^ 화석이 되어버린 변하지 않는 마음,
부패되지 않는 마음이요..^^ '진화하지 못한 지느러미로 앞보며 앞으로만
뒷걸음 걸었는데' 이 구절도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