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절판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87쪽

내 삶은, 마치 그것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무감각한 기계 장치인 듯, 힘 있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어린 로에 의해 움직였다. 아이들의 세계가 강건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일념으로 그녀는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183쪽

치한(the rapist)과 치유자(therapist)라는 말은 글자로는 큰 차이가 없다.... 정상적인 아이-정상적이라는 걸 명심해-는 자기 아버지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막연한 남성을 미리 본다.('막연한'이라니 좋구나, 폴로니우스를 걸고 맹세하지)-204쪽

현명한 엄마(너의 불쌍한 엄마도 살아 있었더라면 현명했겠지)라면-진부한 표현을 용서해라-여자애가 아버지와 접촉하는 동안에 사랑과 이상적 남성형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북돋아주었을 것이다. -204쪽

나는 역사적으로 보아, 연극을 원시적이고 타락한 형식이라고 믿어 싫어했다. 개별적인 천재는 많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석기 시대 의식 같고 사회 전체의 부조리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예술양식, 예를 들면 독자가 방에 혼자 앉아 기계적으로 술술 외우는 엘리자베스 시대 시처럼 말이다.-272쪽

일어나고 있는 운명은 정말이지 잘 짜인 추리 소설 같은 게 아니다. 그런 소설 속에서 독자는 그저 단서에 잔뜩 눈독을 들이면 된다. 젊은 시절에 나는 실제로 해결의 실마리가 될 만한 곳을 이탤릭체로 강조해 놓은 프랑스 추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맥페이트의 방식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어떤 막연한 암시를 감지한다 해도.
(맥페이트는 운명의 여신으로 험버트를 조종한다. 우연에 의해서)-286쪽

본능적으로 나는 화장실이나 전화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내 운명을 걸고 넘어지는 대상들처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운명적인 물체들을 갖게 마련이다. 반복되는 경치일 수도 있고, 어떤 숫자일 수도 있다. 신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조심스레 선택한 것. 여기서 존은 늘 비틀거리고, 저기서 제인은 늘 가슴이 아플 것이다.-287쪽

웃으면서 하는 친선경기 여행은 패스포트와 스포트의 차이를 지운다.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325쪽

그 사나운 환상 속에는 나의 거친 기쁨을 완벽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그 영상은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잿빛의 위대함이여.-359쪽

이제 비슷하게, 얼핏 스치던 광채, 현실의 약속-유혹적으로 그런 척할 뿐 아니라 고상하게 지키던 약속-이 모든 것을 우연은 망가뜨린다. 창백하고 사랑스런 작가의 더 왜소한 인물들로 바꾼다. 나의 환상은 프루스트적이고 프로크루스테적이다.-360쪽

잘 알려진 인물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런저런 발전을 거친다 해도 그의 운명은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X는 그가 늘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이류교향악과 전혀 다른 불멸의 음악을 만들 수 없다. Y는 결코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Z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 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361쪽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은퇴한 핫도그 장사가 가장 위대한 시집을 출간해 내었다고 밝혀질 경우 우리는 차라리 그 이웃을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362쪽

'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무릎은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그녀의 깊은 마음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지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런 공간이었다.-388쪽

선의였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질적으로 성급함과 지루함으로 감추었다. 반면에 나는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인위적인 음성을 사용하면서 필사적으로 초연한 듯 얘기했기 때문에 듣고 있던 롤리타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무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나의 불쌍하고 상처받은 아이여!-~388쪽

나는 일이초쯤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던 것 같ㄷ. 아, 여러분의 흔한 죄인들이 그러하듯 있던 일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그런 뜻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두 내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아주 잠깐, 나는 내가 부부의 침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했고 침대 위에서 병든 샬로트를 보았던 것 같다. 퀼티는 굉장히 병든 사람이다.-415쪽

내가 들은 것은 바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였다. 대기가 너무도 맑아서 이 뒤섞인 소리들의 화음 안에서, 장엄하고 미세하고, 아득하면서도 요술처럼 가깝고, 솔직하면서도 신성하게 신비스런 아련한 소리들 속에서 때때로 까르르 터지는 선명한 웃음, 탁 치는 방망이 소리, 장난감 마차가 덜그럭대는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나 환히 떠오르는 골목마다에서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기에는 나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 그리고 그때 나는 알았다. 가망없이 가슴 아픈 것은 내곁에 롤리타가 없어서가 아니라, 저 소리들의 어울림 속에 그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임을.-420쪽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가는 그림 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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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8-23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선물해달래서 선물해주곤 전 아직 못 읽어본 작품이에요.
논란이 좀 되는 작품 같던데 맞나요? ^^;;

프레이야 2007-08-23 10:46   좋아요 0 | URL
무척 흥미로운 문체에요. 물론 원문해독이 안 되니 번역의 힘만 믿지만요..
당대에 논란이 많이 되었던 건 내용의 외설스러움보다 표현의 극단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나보코프의 뜻은 그걸 넘어 그 위에 있었어요.
인간본성의 외로움, 연약함. 미학적인 상징과 은유들, 빛나는 말장난들,
고전에 대한 지식과 현실적인(당시의) 법안들에 대한 상식이 바탕되어
읽히는, 좋은 책이었어요. 고전의 힘!
진달래님, 좋은 아침이에요. 바람이 좀 선선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