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락이 잘 닿지 않는 친구가 하나 있다.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실패를 겪고 지금은 전문직에 종사하며 프리랜서로 돈 잘 벌고 살고 있다. 2년 전인가, 마지막 통화를 할 때, 나이는 먹어가고 아이는 없고 홀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아주 약간의 두려움 같은 걸 내비치긴 했다. 그치만 친구도 알고 있었듯이 본질적으로 그 친구는 결혼제도에 잘 맞지 않는 성향을 띄고 있었다. 친구도 두 번의 실패를 겪고 보니 스스로 그런 점을 인정하고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걸려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사귀는 연하의 남성은 있었는데 결혼 제안을 할 때마다 핑계를 대며 물리고 있다고 했다.

 그 친구의 첫남편은 동갑 과커플이었는데 순정파 그 남자의 성은 모氏였다. 졸업을 할 무렵 본격적으로 결혼 말이 오고가고 하던 어느 날, 순진한 내 친구가 진지한 얼굴로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속으로 깜짝이야~ 했다. 서방! 나도 친구도 그런 낱말을 가까이서 듣기로는 처음이었던지라.

 하루는 친구가 그 남자를 집에 초대하여 식구들 모두 인사를 했나본데 그 자리에서 친구 어머니가 ‘某 서방’이라고 부르며 대우했고 나머지 식구들에게도 이제부터 모 서방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언질을 놓으셨나 보다. 그러면서 친구는 “우리 엄마가 ‘모 서방’ 그러니까 되게 듣기 좋더라. 글쎄 우리 모 서방이 ~ 어쩌구저쩌구~ ”

 “야, 너는 모 서방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이~.”

 “아니, 울엄마가 다들 그렇게 불러야 된다던데...”


2.

 남편의 남동생에게 부르는 말은 두 가지다. 그 남동생이 미혼이면 도련님(되련님, 되렴), 결혼을 하고나서부터는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서방님’ 알러지가 있는 터라 그렇게 부르질 못한다. 남편의 두 남동생은 모두 결혼하여 아이들도 있지만 난 서방님이라고 못 부르고 아이들이 부르는 식으로 ‘삼촌’을 빌린다. 예법에 맞지 않다는 건 알지만 ‘서방님’은 어째 간질간질하다. 심하게 윤색된 사극 탓인지, 드라마 속 ‘서방질한다’는 말 때문인지.. 아무튼 무슨 부작용인 것만은 확실한데,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3.

 친정부모님에게는 박 서방이 둘이다. 큰사위, 작은사위 모두 박氏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는 큰 박 서방, 작은 박 서방, 이렇게 부른다.

 

 명절이면 그동안 일에 바빠 처가 나들이를 자주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박 서방들’이 심히 힘든 때이기도 하다. 여자들만 명절증후군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박 서방들(김 서방, 이 서방, 정 서방, 마 서방 모두모두 포함)도 못지않게 마음 쓰이는 구석이 많다. 먼 거리에 꽉 막히는 거리를 뚫고 안전운행 해서 가야지, 물질적으로도 섭섭치 않게 써야지, 동서들끼리 모여앉아 있으면 이래저래 감정싸움도 안 보이게 하면서 가오도 세워야지. 더군다나 처가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놀아줘야지.

 여기서 옆지기 자랑 살짝 하자면, 친정부모님께는 큰 박 서방인데 진심으로 앞서서 마음 써주고 챙겨드리고 하니까 살갑지 못한 맏딸로서 참 고맙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면서 제일 원하는 건 당신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인데 무엇보다 '큰 박 서방'은 그걸 잘 한다. 살아오시면서 아무에게도 말 못한 사연들, 남에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이라 공감을 얻지도 못할 것 같은 이야기, 생각할수록 회한밖에 안 드는 슬픈 이야기들을 어디다 내뱉고는 싶었을텐데..

 “이런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줘도 좋아. 밖에 나가면 누가 뭐 내 얘길 구구절절 듣고 있으려고 하나?  난 이렇게 말만 할 수 있어도 한이 풀어지는 것 같다구.”

 큰 박 서방은 오래 듣고 앉아 있었다. 아빠는 다음에 또 할 요량으로 아쉬운 듯 북쪽 고향이야기를 남겨두시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씨암탉도 한 번 못 잡아준 처가지만 그저 "박서방 고맙네", 그렇게 속으로 말씀하시는 것 다 알 거라 믿는다.

 

 사위를 두고 백년손님이라고 하는 건 그만큼 귀히 대접하는 말이고, 동시에 그만큼 딸을 잘 대해달라는 바람이기도 하였을 터, ‘서방’이라는 호칭을 다시 찾아보았다.

‘서방’은 순 우리말이다.

 

우리의 모든 '박 서방들' 다 수고하셨습니다! (찔리는 사람도 있으려나)



4. '우리 말글 바로 쓰기'에서 찾아 옮겨봅니다.



옛날에 “서방맞다·서방하다(시집가다)·서방맞히다(시집보내다)”라고 했다.
지금도 함경도에서는 “서방재(신랑)·서방가다(장가가다)·서방보내다(장가들이다)”라고 한다.
여기에 쓰인 ‘서방’이란 말은 순우리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네 국어사전들은 기어이 ‘서방’에다가 ‘書房’이라는 한자말을 달아놓았다. “남편은 일은 안 하고 책방에서 글이나 읽는 사람이어서”란다.


사위를 부를 때 ‘김 서방, 박 서방!’이라고 한다. 호사가들은 그 ‘서방’에다가 ‘西房’이라는 한자를 붙이기도 한다. “사위를 서쪽 방에 묵게 했기 때문”이란다.
남편이 ‘농사꾼’이면 ‘농방’(農房)이라 하고, 사위를 동쪽 방에 묵게 했으면 ‘동방’(東房)이라고 할 셈이었던가?


무엇이든지 중국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말밑이라고 우기는 판이니까. 중국에 ‘書房’이란 말이 있으니까, 뜻이야 맞건 틀리건 소리라도 같으니까, 우리말 ‘서방’이 바로 그 ‘書房’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書房’은 소리는 같아도 뜻은 ‘서재, 서실, 서점’이지 ‘남편’이 아니다.


‘서방’의 ‘서’는 “사벌·사불(상주), 서라벌·서벌(경주), 소부리(부여), 솔부리(송악·개성), 쇠벌·새벌(철원)” 들의 ‘사·소·솔·쇠·새’처럼 ‘ㅅ’ 계통 말이다. “새롭다, 크다”라는 뜻도 있다.
‘서방’의 ‘방’은 “건설방(오입판 건달), 만무방(염치 없는 사람), 심방(만능 무당), 짐방(싸전 짐꾼), 창방(농악의 양반 광대)” 들의 ‘방’이다. ‘房’이 아니고, ‘사람’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서방’은 ‘書房’이 아니고 “새 사람, 큰 사람”이란 뜻이다.
저런 우리 국어사전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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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7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7-09-2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임서방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어요. 일단 옆지기 입장에선 처가가 너무 가까이에 있는데다 남자가 없다보니 자질구레하게 힘쓸 일들이 생길때마다 시시때때로 가서 챙겨야 하는데도 군소리없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까지 너무 당연시하게 생각해 오진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임서방~.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 2007-09-27 18:38   좋아요 0 | URL
어? 홍수맘님, 댁도 박서방 아니었나요?ㅎㅎ
임서방이었군요.^^ 남자들도 여자들도 다 힘들지요, 수고하셨구요^^

순오기 2007-09-2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우리 '선서방'은 명절에 처가에 한번도 간적 없습니다. 1988년 이후로 지금까지...
그래선 전, 절대 '고맙습니다'라고 죽었다 깨어나도 못합니다~~~~~흑흑
'서방'이란 말이 이렇게 좋은 우리말이라고 알려주셔서 추천!

프레이야 2007-09-27 23:1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우째 그런일이? 선 서방은 무신 이유로 그러신대요. 흑흑..
서방,이란 말 좋은 우리말이더라구요^^

Mephistopheles 2007-09-2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씨가 아닌게 이리도 서러울 줄이야....흑흑흑...

프레이야 2007-09-27 23:16   좋아요 0 | URL
메 서방 고맙네, 라고 속으로들 생각하실 걸요.ㅎㅎ

nada 2007-09-28 01:17   좋아요 0 | URL
메 서방이래, 메 서방이래. 키킥 -.-

애교 많으실 것 같은 혜경 님이신데, 은근 '서방'에는 약하시군요.^^

프레이야 2007-09-28 08:46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 메 서방~ 히힛
'서방'은 우째 거시기허네요^^

바람돌이 2007-09-2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로 시비걸때 "어이 서방!!"
애교 떨때 "서방님~~~" 근데 남들앞에서는 그 말 안나오던데요. ㅎㅎ (참고로 우리집도 박서방은 아닙니다.) ㅎㅎ

프레이야 2007-09-28 00:40   좋아요 0 | URL
전에 본 기억이 얼핏 나는데 박서방 아니고 ?서방 맞습니다^^
님은 그래도 애교 떨 때 '서방니~임~' 이렇게 하시나봐요 ㅋㅋ
전 그렇게도 안 한답니다. 이 나무토막을 우째야 쓰까나..

시비돌이 2007-09-28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방은 서방 세계에 쓰는거 아닌가요, 라고 했다가 맞을 수도 있겠죠? ㅜ..ㅠ

프레이야 2007-09-28 08:50   좋아요 0 | URL
동방, 서방, 이 아니라 순우리말이라구요, 지 서방~~(이렇게 불리죠?^^)
요새 영화, 감독을 말하다, 참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시비돌이 2007-09-28 09:47   좋아요 0 | URL
서평은 이번에도 안쓰실거죠? ㅠ..ㅜ

프레이야 2007-09-28 09:51   좋아요 0 | URL
이번엔 좀 써보려고 하는데 잘 되려나 모르겠어요 ㅜ..ㅜ
조심스럽기도 하구요. ^^ 이게 뭔 말이래요?
아무튼 좋은아침이에요~~~

전호인 2007-09-2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칭찬하는 것으로 듣겠습니다. ㅎㅎ, 박서방! 듣기 좋은 말이지요. 이종사촌 형수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시동생뻘이니까 저에 대한 호칭은 "서방님"으로 하시면 됩니다 했더니 남편외에는 그 말을 쓰고 싶지않다나 모라나, 뻘쯤한 적이 있었습니다. 잘 지내고 계셨지요?

프레이야 2007-09-28 09:53   좋아요 0 | URL
어머, 그동안 어디 갔다 오셨어요? 전호인님은 정말 처가에도 참 잘 하실 것
같아요. 전서방은 아닐 것 같고 아무튼 우리의 박서방들에 포함되시는 거죠?
ㅎㅎ 결혼한 시동생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게 좀 걸끄러운 사람들이 꽤 있나봐요. 저만 그런가 했네요.^^ 여전히 바쁘고 건강하게 지내시지요? ^^

아영엄마 2007-09-2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울 남편에게는 이제 최서방~ 하고 불러줄 장인 장모가 안 계시네요.. ㅡㅜ 근데 저도 시동생에게 서방님~ 이라는 표현이 잘 안 써져요. (-.-)> - 울 남편에게 가끔 서방님~ 하고 부르다 보니..

프레이야 2007-09-28 11:03   좋아요 0 | URL
에고 그러시구나.. 그렇게 불러줄 사람이 있는 것도 복이네요.
아영엄마님이 옆지기님께 서방님~하고 부르시다니, 이건 배신이에욧.ㅎㅎ
전 죽어도 몬 하는기라요..

소나무집 2007-09-2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주말에 친정에 갑니다.
우리도 "강서방, 고맙네!" 소리를 듣고 오도록 미리 교육 좀 시켜야겠어요.
'서방'의 진짜 뜻을 저도 처음 알았어요.
새 사람, 큰 사람이라 앞으로는 그 의미를 새기면서 남편을 불러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07-09-28 16:42   좋아요 0 | URL
네, 소나무집님 잘 다녀오세요^^
친정어머님 병환은 어떠신지요.. 다정한 이야기 잘 나누고 오세요^^

실비 2007-09-2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는 뜻도 여러가지 쓰이네요.
어찌보면 쓸때 부끄러워지기도 할것 같아요.ㅎㅎ
서방님들 대단합니다!

프레이야 2007-09-28 16:43   좋아요 0 | URL
서방, 많이 여러 경우에 쓰는 말이죠.
약간 간지럽지만 원래 뜻은 좋은 뜻이니 좋은 말이에요, 실비님^^
 
카불의 책장수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지음, 권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미고자라드 Migozarad! (지나가리라!) - 카불의 어느 찻집 벽에 적힌 낙서라고 한다. 진부한 말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럴싸한 글귀로 시작하는 이 책을 읽으며 한숨이 푹푹 나왔다. 예언 같은 저 말은 5년이 지난 지금, 아직은 맞지 않다는 사실에 더욱 안타까워졌다. 지나갈 것이라는 희망의 주술은 ‘먼지 냄새’ 가득한 그곳 여성의 갇힌 몸만큼이나 뿌옇고 암담하다. 종교경찰이 횡행하던 탈레반 시절, '희망은 곧 악몽'이라고 생각한 여성들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일은 저자를 따라 술탄 칸의 가족들과 밀착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이곳저곳을 동행하는 것이다. 파키스탄 출장길, 죽음의 폐샤와르를 지나 파키스탄, 알카에다 추적, 저잣거리, 대중탕, 결혼식과 그 준비과정, 알리의 영묘 순례, 사원, 카불의 현대식 호텔, 학교, 교육부, 경찰서와 감옥까지. 그래서 문장이 현재형이다. 보고문학으로서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로 그들과 한 해(2002년) 봄 동안 동거하며, 보고 들은 것에만 기초하여 글을 썼다고 밝혀두었다. 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자는 인물들의 섬세한 동작과 표정의 변화에서도 말 못할 내밀한 고통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심리까지 그렇게 묘사해낼 수 있었던 것을 저자는,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한 것까지 술술 이야기해 준 그들의 공으로 돌렸다. 받아적을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풀어놓은 이야기가 더 많았다는 말에서 그들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다.

 2001년 10월, 9.11사건의 주모자로 추정되는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비호했다는 명목으로 미국과 영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해 11월, 북부동맹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 아래 카불에서 탈레반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2001년 11월은, 탈레반이 무너진 아프가니스탄에 저자, 오스네(서구젊은여자종군기자)가 카불에 도착하여 술탄 칸을 처음 만난 때이기도 하다. '머리가 희끗하고 품위 있는 남자.' 그에 대한 그녀의 첫인상이다. 유엔인간개발지수 순위 177개국 중 175위, 문맹률과 유아사망율이 극도로 높은 최극빈국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분명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술탄 칸의 집. 영어를 할 줄 아는 가족이 셋이나 있고,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가 있고, 최상의 보살핌으로 대접 받으며, 충분하고 멋진 음식을 날마다 먹을 수 있다는 점 외에도, 이들 가족에 밀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술탄 칸이 책장수를 하는 문화사업가, 수완 좋은 장사꾼, 진보주의자 내지는 소위 중산층이라서도 아니고, 저자는 그들에게서 '글을 쓰고 싶은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외국병사들에 의지하더라도 다시는 내전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들, 탱크 잔해와 지뢰와 철골뼈대 앙상한 건물이 널브러져있는 카불의, 봄에 대해서도.

 2002년에 이 책을 썼고 지금 5년이 지난 아프가니스탄. 그들의 재건은 참담한 상태로밖에 안 보인다. 종교경찰이 사회, 문화, 예술을 비롯해, 샴푸통에 그려진 여자얼굴까지도 검은 유성매직으로 지우게 했을 정도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칼을 댄 탈레반은 지금도 테러를 일삼으며 암암리에 공세를 퍼붓고 있다. 게다가 아프간 정부는 군벌과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아프간인들을 농락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가장 진보적 정권기로 특징지어진 1960년대와 70년대(다우드 대통령)는, 뻥 뚫린 건물의 구멍을 메우고 부서진 창유리를 갈아 끼우는 작업에 한창인 카르자이 정권이 수복할 수 없는, 다 지나가버린 시절 같다. 전쟁을 겪은 경험으로 나이를 어림하는 아프간인들의 얼굴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약탈과 지배를 겪어온 그들의 슬픈 초상이다. 그럼에도 2007년, 군벌이 80%를 차지하고 있는 아프간 의회는 ‘과거 25년간 전쟁범죄 면책’ 입법을 ‘국가의 화해’라는 이름으로 통과시켰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범죄를 저지른 군벌들을 재판정에 서게 하는 대신 고위직에 임명하고 있다고 한다. 아프간 국민의 80%가 과거 전쟁범죄와 잔혹행위에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한 검찰조사를 원하고 있고 그 길만이 아프간의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올해 4월, 아프간 최연소 국회의원 말라라이 조야(29)의 감동적인 연설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2003년 아프가니스탄 제헌의회에서 군벌타도를 외치다가 추방된 말라라이 조야는 "저 년을 강간하고 창녀로 만들어버려라." 는 노골적인 협박을 의회에서 듣고 네 차례의 암살 위기에 처하면서도 지금 세계를 돌며 아프간의 비극을 전하고 있다. 내가 본 연설문은 올해 4월10일 로스앤젤레스대학교에서 했던 강연의 전문이다. 아프간 민중(특히 여성)의 유린된 인권과 그들에게 주입하는 ‘마피아식 시스템’에 부들부들 떨리며 읽어 내려갔었다.

 『카불의 책장수』를 다 읽고 나서 그 기사를 다시 읽다가 콱 걸리는 이름이 나와 놀랐다. 비비굴! 아프간에서는 흔한 여자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카불의 책장수인 술탄 칸의 어머니, 아프간 여성의 아픔을 몸으로 담고 살아온 상징과도 같은 그 이름이 말라라이 조야의 연설문에서 언급되다니. 동명이인이겠지. 그 내용이란, '자살만이 암담한 현실의 탈출구'라고 생각하는 아프간 여성들이 실제로 자살한 예를 몇 들었던 것인데, 이를테면 ‘비비굴이라는 또다른 여성은 마굿간에 자신의 몸을 결박시키고 불을 질러 자살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유골뿐이었습니다.’ 이런 글이었다. 건강을 생각해 기름진 음식을 자제해야 하지만 오로지 술탄의 입맛을 위해 막내딸 레일라는 기름진 음식을 매번 올려야 하고 그렇게 입맛이 든 늙고 뚱뚱한 비비굴은 카펫 아래 아몬드를 숨겨놓고 건강을 염려하는 딸의 눈을 피해 먹는다. 책 속의 비비굴이 맛보는 그 아몬드의 맛이란 나일론천으로 둘러싸여 숨쉬기도 힘든 부르카를 잠시 걷고 카불의 먼지바람이나마 들이키는 순간의 짜릿한 맛과 비슷했을 것이다. 비비굴은 억압받는 아프간의 많은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자위해도 책 속에서 딸을 (돈에 팔아)시집  보내거나 (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시집 보내지 못하면서 아픔을 삼키던 그녀가, 자살했다는 그녀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저자는 서구여성이다. ‘서구’라는 점은 보고문학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시각에 어쩔 수 없는 편중이 있게 했고, ‘여성’이라는 점은 양성자의 자격으로 아프간의 남자와 여자에게 모두 다가갈 수 있게 한 장점이 되었다. 저자가 남성이었다면 여성들의 이야기를 내밀하게 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관습으로는 남성이 미혼의 여성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경악했고 그것은 책 속에서 일관되게 부르카의 음침한 환영이 되었다. 아름답고 훤칠하며 흰 피부의 그녀가 파란색 부르카를 입어본 경험은 그녀에게 세 가지의 느낌을 동시에 준다. 익명성이 주는 해방감, 아프간 여성으로서 느끼는 이중적인 모호한 감정,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르카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물건인지를 깨닫게 되기까지.

 저자는 술탄 칸이라는 책장수야말로 '아프가니스탄 문화사의 살아 있는 한 부분이자, 두 발로 걸어다니는 역사책'이라고 느꼈다고, 먼저 밝혀두었다. 이 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어렵다. 저자도 고백했듯이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전형적인 가족이 아니란 점, 그럼에도 그를 중심으로 주변의 크고 작은 가지로 엮여있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많은 부분을 시사해준다. 술탄의 꿈은 '책의 제국'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 하나만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은 희생되어야 하고 한눈을 팔아서도 안 된다는 게 술탄의 철학이다. 소련 공산주의자, 무자헤딘, 탈레반들이 릴레이라도 하듯 술탄의 책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지나가고, 책들을 불태우고, 감시하고 압수하고 그를 감옥에도 넣었다. 이 모든 수난을 지혜롭게 이겨내고 때로는 교묘하게 피해간 술탄은 이제 평화유지군에게 제일 잘 팔리는 아프간 엽서를 파는 일에도 매달린다. 사진 이미지를 이용하여 수많은 엽서를 만들고 파키스탄과 이란 등으로 출장도 다녀오는 오십대 초중반의 술탄. 그는 16살의 두 번째 부인 소냐와 행복한 시간을 갖는 일에도 열중한다. 하지만 그녀가 돈에 팔려오면서도 자살하지 않은 건 그녀의 성품 탓도 있을 테고, 술탄 가족들의 배려와 술탄의 자상함, 그와 동시에 술탄이 집에서 부리는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이기도 하다. 책의 제국,이 다분히 독단적이며 위압적으로 들린다.

 이 책은 술탄 자신의 개인사와 가족사를 들려주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교육, 정치, 종교 그리고 부르카가 작용하는 여성억압과 인권탄압의 악령을 보여준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가리고 오로지 먼지 폴폴 날리는 신발만 보여주는 부르카 안에서도 요동치는 게 있었다. 부르카가 덮어 가리지 못하는 것들. 야릇한 설렘의 손가락질이나 눈웃음도 저자의 눈에는 다 보인다. 그 안에는 동경과 욕망과 실망이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부르카는 원래 귀부인들의 의복이었다. 귀족이 먼저 벗어던졌던 부르카를 아직 벗지 못하는 여성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짓밟힌 삶을 떨치고 나갈 엄두도 도저히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부르카를 벗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녀 그리고 그들은 체념이거나 순종, 아니면 혁명밖에는 방도가 없어 보인다. 진보주의자를 스스로 표방하는 중간 지식 계급의 술탄이 뼈가 앙상한 아이들에게 베풀 동정심은 눈곱만큼도 가지지 못하고, 집에서는 더없이 가부장적이며 억압적인 독불장군의 자세를 취한다는 점은 아쉬운 정도를 넘어서 있다.


 

 
 
 
레일라 역시 그럴 생각이 꿈에도 없다. 탈레반은 카불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레일라와 비비굴과 샤리파와 소냐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이들은 탈레반 시대가 끝나서 기쁘다. 이제는 음악을 연주해도 되고, 춤을 춰도 되고, 다른 사람 눈에만 띄지 않으면 발톱에 메니큐어를 발라도 된다. 그들은 안전한 부르카 속에 숨을 수 있다. 레일라는 내전, 물라 통치, 탈레반 정권이 낳은 진정한 자식이었다. 두려움의 자식. 그녀는 속으로만 울었다. 벗어나려는 시도, 독립적인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 배우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P226)
 
   

 

 

 저자는 카불에 도착할 당시 북부동맹군들과 한동안 숙식을 해왔다. 그녀는 탈레반의 잔학성에 대해 고발하고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일에는 과묵하다. 그녀의 관심사는 우선, 호기심을 자극한 한 중산층 책장수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저자가 의도한 방식으로 읽히기에 오히려, 한 편의 소설처럼 생생하고 흥미롭다. 저자는 그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감정적으로 기우뚱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고 한다.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문장의 서정성을 잃지 않았다. 앞장에 간단한 지도 한 장을 그려넣고, 글속에 나온 장소들을 사진으로 찍어 책의 가운데에 16면 정도로 넣어두었다. 파란 부르카를 입은 저자도 볼 수 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사진이 있다. 탈레반이 물러간 지금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벗고 학교에 가는 여자아이가 포착되었는데 그아이가 어깨에 매고 가는 가방에 쓰여진 글자가 한글이다. 한글? 가만히 들여다보니 '백암체육관'('암'자가 희미하지만)이라는 노란글자에 빨강노랑 배색의 가방이다. 그 옆의 사진은 밝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인데 참 해맑다. 그 사진 아래, '그 얼굴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희망을 본다'고 쓴 저자의 글에는 당시 저자의 바람이 담겨있지만, 5년이 흘러 무색하고 공허한 소리가 되어버려 안타까울 뿐이다.

 

 기원전에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던 카불, 시내중심가에는 카불강이 흐르고 과실이 무성한 과수원에 비옥한 들녘을 가진 땅덩어리가 온통 흙빛의 척박한 땅이 되어버렸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탓으로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알라께서도 죽는가?" 

지가르 쿤 Jigar khoon (너무 가슴이 아파요.) - 아리아나 항공의 비행기로 뉴델리를 향해 날아가려던 항공관광부장관이 여행사의 사기로 탑승을 거부당한 메카 순례자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동안 수태 '자라보고 놀란 가슴들'은 온갖 추측으로 술렁이며 음모론을 내어놓고, 그 사람들 틈에서 술탄의 막내아들 아이말이 호텔청소부에게 한 말이다. 죽은 장관 때문이라기보다 잃어버린 유년시절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 오자 확인 :

p304 첫줄 ;    페로자는 목이 멨지만 어떤 항변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 페로자 ---> 타지미르 (문맥상))
p350 중간쯤 ; ... 군부 쿠데타가 있어나 목숨을 잃는다.
                     (있어나 --->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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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9-2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간 여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어 안타깝긴 하지만, 서구인들이 보는 빈민국의 생활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과연 저 여자가 '조선 시대'의 규방에 가서 인터뷰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전족을 한 중국 여인들과 인터뷰를 했다면...
부르카로 대표되는 여성 차별은 성당에서 미사포를 써야하는 차별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책도 안 읽고 웬 이상한 얘기가 많았습니다. ^^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9-21 13:00   좋아요 0 | URL
그럴거라 생각합니다. 환경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아요.
저자는 노르웨이의 씩씩한 종군기자이지만 여성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고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성본능이 엿보이는 부분들도 많았구요.
그 나름으로 당시 아프간의 초상을 보는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하늘바람 2007-09-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굉장한 서평이에요 저도 읽고 보고 프네요

프레이야 2007-09-21 16:08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태은이가 방긋^^ 반가워요^^
읽어주셔서 고맙지요. 여성 특유이 부드러움이 보이는 기록이에요.

2007-09-21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1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결 2007-09-22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방외인의 시선이 내부자의 그것보다 더 적실하다 여겨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서구의 '눈'이 결함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치명적이라 생각되진 않아요.
그러한 차원에서 이 멋지고도 아픈 기록을 무시할 순 없겠지요.

혜경님의 리뷰를 읽으며, '지가르 쿤 Jigar khoon'했어요. 위의 댓글처럼 그 현실의 고통과 아픔이 오롯이 전해져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정말 정말 좋은 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9-22 20:59   좋아요 0 | URL
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거란 점에서요. 다양한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다양한 눈이 다양하게 보고 느끼는 것들이 그대로 인정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읽어볼 만하고 흥미롭습니다.
바람결님이나 제가 느낀 대로 '지가르 쿤', 저자도 이렇게 느꼈음인데, 자기
감정을 객관화하여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정적인 서술이 장점이더군요. 공감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sokdagi 2007-09-2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대단하시네요. 컴터가 말썽을 부려 오랜만에 들러봅니다.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07-09-27 09:0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읽어보시면 괜찮을 거에요.
몸은 힘드시진 않은지요? 건강 잘 챙기세요.^^
서재에 오랜만에 들렀어요, 어제요..
 
카불의 책장수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지음, 권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5년 11월
절판


수많은 신발들이 먼지 속을 걸어간다. 사방에 갈색 샌들, 더러운 신발, 까만 신발, 낡은 신발들이다. 한 번은 꽤 말쑥한 신발 한 켤레와 리본 달린 분홍색 플라스틱 신발이 보인다. 심지어 흰색 신발도 있다. 탈레반은 그들의 깃발이 흰색이라는 이유로 흰색 사용을 금지시켰다. 또 딱딱한 굽이 달린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이 걸을 때 소리를 내면 남자들 정신이 산만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116쪽

마지막 의식이 남아 있다. 와킬의 누이 한 명이 샤킬라에게 대못과 망치를 건넨다. 샤킬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침실 문으로 다가가서 문에다 못을 박는다. 못이 제대로 박히자 모두들 박수를 친다. 비비굴이 훌쩍거린다. 이것은 샤킬라가 자신의 운명을 이 집에 못박았다는 뜻이다.-136쪽

멀찍이 떨어진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미크로라욘은 구소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시가지와 흡사하다. 사실 이곳 건물들은 러시아인들의 선물이었다. 소련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기술자들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하여 이른바 '흐루시초프 블록'을 건설했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을 가득 메우게 된 이 블록은, 카불이든 칼리닌그라드든 키예프든 어디나 방 두서너 개가 딸린 5층짜리 아파트 건물들로 이루어진 획일적인 형태의 구획이었다.-144쪽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이곳이 이토록 초라해 보이는 까닭이 흔히 생각하기 쉬운 소련의 쇠락 때문이 아니라 총알과 전쟁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현관 옆 콘크리트 의자마저도 박살 나 난파선 잔해처럼 나뒹굴고, 한때 아스팔트였던 도로는 곰보처럼 움푹움푹 패여 있다.......

미크로라욘의 아파트는 소비에트식의 평등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지만, 분명 아파크 내부에서는 어떤 평등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아파트를 건설한 배경에는 계급 없는 사회에서 계급 없는 주거지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미크로라욘의 아파트들은 중산층을 위한 주거공간으로 여겨졌다.......-145쪽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잃고 모든 것이 과거로 역행하는 이 나라에서 중산층이라는 단어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한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수돗물도 지난 10년 동안 우스갯소리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1층에서는 매일 아침 몇 시간 정도 냉수가 나온다. 그게 다다.-146쪽

전통적으로 무슬림은 새해에 마자르-이-샤리프에 있는 알리Ali의 영묘로 순례 여행을 떠나지만, 탈레반은 이도 금지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순례자들은 알리의 영묘로 몰려가, 죄를 씻고, 용서를 구하고, 병을 치료하고, 새해를 맞았다. 아프가니스탄 달력으로는, 새해가 3월 21일이에 시작한다. 이 날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이기도 하다.-166쪽

순례자들은 금색으로 칠한 벽 옆에 서서 소원을 빌 수 있다. 앞서 들었던 애국적인 연설에 이어서, 만수르는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한다. 언젠가는 아프가니스탄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주십사고. 언젠가는 나 자신과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주십사고. 그리고 언젠가는 아프가니스탄이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국가가 되게 해주십사고. 하미드 카르자이도 이보다 더 감동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으리라.

온갖 광경과 소리에 취한 나머지, 만수르는 정화와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잊어버린다. 마자르까지 온 진짜 이유를. 거지소녀와, 소녀의 작고 마른 몸과, 커다랗고 옅은 갈색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까맣게 잊고 있다.-191쪽

먼지 대부분은 공중으로 날려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집에서는 먼지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먼지를 없애기는 불가능하다. 먼지는 레일라의 움직임과 몸과 생각을 뒤덮는다..... 지금 레일라가 몸에서 벗겨내려고 애쓰는 것이 이런 먼지때다. 도톰하게 말린 때가 목욕탕 바닥에 떨어진다. 그녀의 삶에 달라붙은 먼지들.-206쪽

그녀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사회라는 진흙과 전통이라는 먼지가 만든 교착 상태에. 수백 년 된 전통에 뿌리 내린 체계 속에서, 그리고 인구의 절반을 불구로 만드는 체계 속에서 그녀는 옴짝달싹 못한다. 교육부는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30분. 레일라는 무언가를 위해 투쟁하는 일에 익숙치 않다. 오히려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틀림없이 어딘가에 탈출구가 있다. 그녀는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237쪽

아이말은 차마 자기가 거리으 ㅣ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말은 부유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말의 아버지는 부유한 책장수였다. 문학과 역사에 그토록 열성적인 아버지, 책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꿈과 계획을 품은 아버지. 하지만 의심이 많아 가게도 아들들에게만 맡기고, 춘부에 새해맞이 축제 이후로 다시 문을 연 카불의 학교에 아들들을 보낼 생각도 하지 않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이말은 애원하고 매달려보았지만 술탄은 단호했다.

-256쪽

"나중에.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모두 힘을 합쳐야 해. 지금은 책의 제국을 건설할 기초를 닦을 때야."
-257쪽

"난 구식 아내는 필요 없어, 당신은 진보주의자의 아내지, 근본주의자의 아내가 아니라고."
술탄은 여러 면에서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이란에 갔을 때 소냐에게 서양식 옷도 사주고, 부르카를 억압적인 감옥에 비유하곤 했으며, 새 정부에 여성 장관이 포함된 사실에 흡족해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이 현대 국가로 거듭나기를 마음으로부터 소망했고, 여성 해방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었다.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서 술탄이 본보기로 삼은 이는 단 한 사람, 자기 아버지뿐이었다.-334쪽

레일라는 삶이, 젊음이, 희망이 어떻게 그녀를 버리고 떠나는지, 그녀를 살리지 못하고 떠나는지 느낀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외롭다. 영원히 짓밟히도록 저주받은 돌덩이처럼. 레일라는 몸을 돌리고, 문까지 세 발짝 걸어,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짓밟힌 마음도 두고 나온다. 곧 창문을 통해 날아든 먼지가, 카펫 위에 살고 있는 먼지가 그녀의 짓밟힌 마음과 뒤섞인다. 그날 저녁, 레일라는 이것을 쓸어 뒷마당에 갖다버릴 것이다.-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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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09-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미디어책이 좋은 것같아요

프레이야 2007-09-21 12:39   좋아요 0 | URL
아름드리미디어 전 이번에 처음인데요.. 그런가요?
 

 

빈 의자




                                                                      문태준




걀쭉한 목을 늘어뜨리고 해바라기가 서 있는 아침이었다
그 곁 누가 갖다놓은 침묵인가 나무 의자가 앉아 있다
해바라기 얼굴에는 수천 개의 눈동자가 박혀 있다
태양의 궤적을 좇던 해바라기의 눈빛이 제 뿌리 쪽을 향해 있다
나무 의자엔 길고 검은 적막이 이슬처럼 축축하다
공중에 얼비치는 야윈 빛의 얼굴
누구인가?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지그시 쓸어내린다
가을이었다
맨 처음 만난 가을이었다
함께 살자 했다

 

 

 - 문태준 <가재미> 중, 문학과지성사

 

 

 



                                                                           <가을햇볕 따사로운 9월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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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9-2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인데 햇살이 아직 너무 뜨겁네요. 올려다보기에 너무 눈부시기도 하고요.
오타 : 자재지 -> 가재미

프레이야 2007-09-20 11:16   좋아요 0 | URL
잉크님, 고쳤어요^^
비 그치고 나니 가을햇살이 쨍하네요.
그래도 가을햇살은 참 부드러운 느낌이에요, 늘. ^^

겨울 2007-09-2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다운 시네요.
고단한 누구라도 와서 쉬라고 놓인 빈의자는 바라만 봐도 좋지요.

프레이야 2007-09-20 14:21   좋아요 0 | URL
우몽님, 네.. 비어있어서 더 충만해보이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죠? 그래도 딱 그말이 맞는 것 같아요^^
가을, 어떻게 지내세요? ^^

춤추는인생. 2007-09-20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가을햇살이 찡해요~~
그래서 애틋하고 아쉬운 느낌이예요 ^^

프레이야 2007-09-20 20:55   좋아요 0 | URL
계절마다 햇살이 다른 느낌인데 가을은 참 특별하다는 생각이었어요.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했는데 님의 말, 그거에요. 여백이요!!
빈 하늘, 빈 의자, 빈 손, 빈 가지를 준비하는 나무..
님이 가을이면 읽는 '나목'이 떠올라요. 고요한 저녁, 편히~~ ^^
 

 

바구니 속의 계란


                                       최영숙




나는 아름다운 장기수
탈출을 꿈꾸지
결혼해 일년 반, 임신 육개월의 배를 끌어안고서
주위를 둘러싼 소리 없는 장막
저 찬란한 가을햇살을 찢고 달아나는 탈출을 꿈꾸지

 


꿈꾸는 성
꿈꾸는 태아
문지방에 기대앉아 대문 밖을 보노라면
나가자고, 자꾸만 머얼리 저어가자고
뱃속의 태아가 툭툭 발을 차네
소싯적 내 젊은 어머니, 가을 마당 햇빛 속에 물끄러미 서 계시네

 

 
나는 치밀한 탈옥수
냉정을 가장하네
뒷덜미를 끄는 햇살, 파도를 밀고 나가면 어디가 될까
갈대방석 위에 양팔 벌리고 누워 두웅-둥
나 누더기 되어 난바다로 떠내려가네
파란 하늘 파아란 구름 힘껏 들이마시며
뱃속의 아이에게 들릴 만큼 놀랄 만큼
소리질러야지
“계란 사시오, 계란 사시오오-”

 


깨지는 건 순간이야
앞뒤 구멍 내서 날계란 후루룩 마실 때의
비릿한 뒷맛
손에서 미끄러지면 끝장인 껍질
삶의 껍질을 끝까지 벗겨본 적 있던가
바구니 속의 계란 삼십개
고이 들고 온 이것이 인생의 황금기였나
미끈, 바닥으로 떨어뜨리면
한꺼번에 계란프라이 해먹어도 좋을
잘 달구어진 가을햇살, 햇살



- 최영숙 유고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 중

 

 

 


                                                                                             - 9월 가락, 김해평야

                                        

 

                               

                                   삶의 껍질을 끝까지 벗겨본 적 있던가, 라고

                                                절명한 시인은 묻는다.   

                                              가을햇살 아래, '난바다'가

                                                         어지럽다

                                                      살아가야한다

 

                       (옆지기 사진, 내 단상 그리고 최영숙 시인의 가슴저린 싯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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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9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2:00   좋아요 0 | URL
이렇게 쨍쨍한데 또 비가 온대요? 적당히 와야할 텐데요..
저 시인의 시들이 참 절절해요.
추석 다가오는데 이래저래 마음 바쁘시겠어요.
풍성하게 건강하게 보내시기 바래요, 님^^

비로그인 2007-09-1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백이어도, 보입니다.
구름 사이로 찬란하게 대지로 내려앉는 한낮의 오로라, 저 오로라.
그리고 날개없이 날아다니는 공룡도 보이네요.(웃음)

I can fly without wings~♬ I can fly without wings~♬ I can~ fly~~

나는 치밀한 탈옥수
냉정을 가장하네
뒷덜미를 끄는 햇살, 파도를 밀고 나가면 어디가 될까

겨울 지나 봄이 와, 인간의 숫자 계란 한판이 되면 -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요. 내가 있고 싶은 그 자리에 자신이 서 있는지.

프레이야 2007-09-19 16:55   좋아요 0 | URL
공룡박사 엘신님, 호호 공룡 찾으셨어요?
계란 한 판이면 내년 봄에 님, 스물네 살 맞지요? ㅎㅎ
파도를 밀고 나가자구요, 우리..

비로그인 2007-09-20 10:01   좋아요 0 | URL
오옷. 계란 한판의 새로운 정의로군요! +_+
흐흐흐흐흐흐...그거, 써먹어야겠습니다. (씨익)

가시장미 2007-09-1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 정말 멋있네요. 어떻게 저런 표현을 생각할 수 있을지 궁금해요. -_-;
사진도 눈에 쏘~옥 들어옵니다요! 살아가야하는데..살아가야하는데..잘 살고 있는건지..
매일 매일 생각해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살아가야죠.. ㅠ_ㅠ 으흐

프레이야 2007-09-19 16:58   좋아요 0 | URL
그죠? 확장성 심근증으로 43세에 유명을 달리한 시인인데 고정희시인의
제자였다고 해요. 싯구들이 절절하더군요. 좋아졌어요, 최영숙시인이요.
암요, 살아가야죠, 가시장미님^^

씩씩하니 2007-09-19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재미난 시인걸요...
이 곳은 오늘 정말,,후덥지근이에요..
멋부리느라 목티 입구 왔는데..이러다 목에 땀띠 나겠어요....흑..
글보다 더 멋진..사진...늘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7-09-19 16:59   좋아요 0 | URL
발상이 신선하지요? ^^
오늘 여기도 좀 더웠어요. 땀 나던걸요.
목티 입고 나갔으면 진자 땀띠 났을라 ㅋㅋ
사진은 김해평야에요^^

icaru 2007-09-1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엇보다 사진..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아요..

프레이야 2007-09-19 17:30   좋아요 0 | URL
엉! icaru님 가을 잘 보내고 계시죠? 그곳은 비가 오는지요?
여긴 오늘낮에 좀 후텁지근했어요.^^
사진..고마워요^^

비로그인 2007-09-19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벗는 여인과 더불어 강렬한 시어네요.
오늘은 날이 이래선지 마음에 착 감깁니다.

프레이야 2007-09-19 18:16   좋아요 0 | URL
허거덩, 님 왜 또 변신하시는거에용?
신비주의 벗어달라고 강력히 부탁드려욧!! ㅋㅋ(저한테만이라도)

민서 2007-09-19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비주의 아니랍니다.
잠깐 로그인 해봤을 뿐..

프레이야 2007-09-19 18:58   좋아요 0 | URL
그 서재 그대로 있네요. 기억속으로/이은미, 다시 보고 왔어요.
님이랑 저랑 좋아하는 노래도 비슷해요^^

비로그인 2007-09-19 23:10   좋아요 0 | URL
기억속으로,제가 끔찍하게 좋아했던 노래지요.
저 한 열 곡 정도는 노래방에서 불러제낄 수 있는데 언제 한번 가서 같이 흔들며 불러요.

프레이야 2007-09-19 23:15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좋아라해요. 듣는 사람은 별로겠지만..ㅋㅋ
진짜로 한 번 가요, 우리^^
님, 왠지 노래 무지 잘 할 것 같아요..

2007-09-19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9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