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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구비 사투리 옛이야기 - 사투리로 들려주는 팔도 옛이야기
노제운 글, 이승현 그림 / 해와나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옛이야기의 마력은 뭐니뭐니해도 구수한 입담에 있다. 내가 처음 마음에 들었던 옛이야기는 서정오님이 쓴 옛이야기 시리즈 열 권인데 모두 간결하고 걸죽한 입말로 쓰여있어 읽는 재미가 더했던 기억이 난다. 옛이야기는 구전되어 온 이야기이니만큼 들려주는 재미와 듣는 재미를 배가하면 이야기 전달 방식에 호감이 더 생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많고 많은 옛이야기책들 중에서도 흥미를 더 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저자는 각 지방의 사투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자는 생각을 했다. 우리 사투리는 각 지방의 특색과 사람들의 성격을 어느 정도 담고 있어 듣고 있자면 그들의 정서가 푸근하게 느껴진다. 표준말이라면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해져있지만 표준말이 아닌 사투리가 표준말이 될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보면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사투리, 하면 우스운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 4학년 방학 때, 큰이모가 살고계셨던 서울에 간 적이 있는데 며칠동안 그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서울촌놈들에게 경상도 사투리를 가르쳐주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내게 물어왔고 나는 답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고양이를 거기선 뭐라 그래? - 응, 괭이... 이런 식이다. 난 서울태생이다. 다섯 살 때 부산으로 이사오지 않았더라면 서울말을 쓰고 살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올씨다. 아이들은 어울려 놀다보면 그곳의 말을 금세 배운다. 서울 아이가 부산 아이와 놀면서 금세 이곳 사투리를 배우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부산에 이사 온 후 엄마가 놀랐던 일을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느 날, 밖에서 놀다 뛰어들어오며 어린 내가 완전히 부산말을 쓰더라는 거다. 아침까지만 해도 깜찍하게 서울말을 쓰던 애가 그랬으니 얼마나 우스웠겠나. 사투리에는 그만큼 낯설면서도 동화하기 쉬운 정감과 유대감이 있나 보다.
이 책에는 제주도를 비롯해 아홉 개 도의 대표적인 옛이야기를 꼽아, 모두 9개의 옛이야기를 추려 실었다. 모두 ‘한국구비문학대계’와 북한 지역의 설화가 가장 많이 실려 있다는 ‘한국구전설화-임석재 전집’에 실려 있는 이야기에서 뽑았고 각 도별 이야기 뒤에는 참고한 지역의 출처를 밝혀두었다. 아이들이 이것까지 읽지는 않겠지만, 전해오는 옛이야기들을 두루 꼼꼼히 뒤져서 선별한 공이 느껴졌다.
저자는 각 지역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도움으로(예를 들어 충청도는 강정규 선생) 사투리를 구사하여 썼지만, 모두를 사투리로 옮기는 건 무리이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사투리를 골라 썼다. 그리고 특징적인 사투리의 표준어를 괄호 속에 바로 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각 이야기마다 해학과 기지가 넘치고 힘없는 백성의 통쾌한 승리감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우리 옛이야기의 장점이 사투리로 인해 반감되는 일은 없다. 눈으로 읽지 말고 소리내어 읽어보면 훨씬 재미있다.
3학년 아이들과 읽었는데 아이들 모두 무척 흥미로워했고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단지 북한 사투리와 제주도 사투리 같은 경우는 아주 생소한 단어들이 많아 낯설어했지만 사투리를 알 필요가 있겠다는 데에 모두 동의했다. 사투리 옛이야기 경연대회도 열어 보았는데 각자 가장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골라 사투리로 읽어보았다. 경상도 이야기는 비교적 쉽게 읽었고 제주도를 고른 아이는 좀 힘들게 읽었지만 재미있어 했다. 강원도 이야기를 읽은 아이는 마치 자기가 강원도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고 익살을 부렸다. 모두 사투리 옛이야기에 좋은 점수를 주었다.
이 책은 삽화도 내용 못지않게 장난기 가득하다. 한지 느낌이 나는 누런 색을 입힌 종이에 거칠고 굵은 검정 윤곽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슥삭슥삭 그린 것 같은 붓의 느낌이 생동감을 준다. 하나같이 인물의 생김새를 단순하면서도 과장되게 그려 웃음이 절로 난다.
내가 제일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경상도 것인데 제목은 ‘똥 싼 바지 잃고 눈물 흘린 사돈’이다. 시집간 딸의 눈물겨운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도 그렇거니와 주접을 떠는 난장판 사돈의 행색이 우스꽝스러워 배꼽을 잡았다. 아래 대사와 함께 그려진 삽화가 제일 생동감 난다.
“이노무 똥개 셰끼, 내 바지 도(줘)! 내 바지 도!” (p60)
이 책에 조금 더 바란다면, 아직 우리나라 지도에 익숙하지 않고 행정구역에도 낯선 아이들을 위해 우리나라 지도를 넣고 각 도별로 색으로 표시하던지 하여 각 도의 이야기와 연결해 주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지형적인 특징과 함께 사투리의 특색에 대해서도 공감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
한 가지, 생각하게 된 점은 옛이야기의 무차별 패러디에 대해서다. 우리 옛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옛이야기도 패러디가 나오고 있는데 그것이 옛이야기가 갖는 원래의 미덕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저자의 머리말이다. - “옛이야기는 마음 속 깊은 곳의 슬픔과 분노, 기쁨과 희망을 비추는 마법의 수정구슬입니다. 그 곳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미래의 내 모습이 펼쳐져 있지요. 또한 그곳에는 나약한 어린이를 멋진 어른으로 키워 주는 신비한 보물이 숨겨져 있답니다. 그런데 만약, 옛이야기의 내용을 함부로 고치거나 지워 버린다면, 마법의 수정 구슬은 금이 가고 깨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비출 수 없게 되지요. 이 모든 것은 옛이야기 본래의 모습으로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적 해석이 가미된 패러디가 주는 효과도 분명 있겠지만, 옛이야기 고유의 미덕을 그대로 안는 순수한 즐거움이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닳고닳아 반질반질해진 수정구슬이 아니라 먼지가 묻어있는 채로, 손때도 묻어있는 채로, 별로 반짝이지 않아도 은은한 빛을 발하는 그런 수정구슬이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본래의 모습을 갖춘 옛이야기를 소개해 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가 사투리로 인해 더 잘 전달된 것 같다.
책의 뒤에는 9개 이야기를 수록한 CD 두 장이 첨부되어 있다. 성우가 들려주는 사투리 옛이야기인데 조금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그런대로 흥미롭게 들을 수 있다. 각 지역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원색적인 목소리면 더 좋았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