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 팔기 대장, 지우 돌개바람 12
백승연 지음, 양경희 그림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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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는 상상력의 발동은 인간 중심의 가치체계와 일상으로 굳어진 상식의 관념들에 균열을 내면서 ‘저 너머의 푸른 세계’로 우리를 손짓한다. - <아동문학과 비평정신 p24>, 원종찬/창작과비평사 중

 '저 너머의 푸른 세계'로 향하는, 판타지는 특히 아동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이자 형식이다. 판타지는 열림의 형식을 취하고 회생의 내용을 담는다. 더구나 판타지의 묘미는 철학적 메시지에 있는데, 위에 언급한 책에서도 ‘판타지가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그 핵심은 역시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철학에 달려 있다’고 재삼 확인하고 있다. 판타지가 현실의 불안정함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통과의례로 작동하려면 그 안에 건강한 철학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황당무계하기만 한 이야기가 감동을 전하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건강한 철학이라 해도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들지 못하고 웃도는 기존의 교훈주의 동화들에 식상해진 지는 오래다. 아이들이 갖는 현실에서의 압박감은 나날이 경쟁적으로 치닫는 사회에서 더욱 복잡해지고 다양해져간다. 요즘 아이들의 일상을 보면 '놀기'는 사치품목 같이 여겨질 정도다. 이 책은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함께 놀아주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자연의 시간을 벗어나 마음의 시간이 작동하는 판타지의 세계는 꿈이고 소망이다. 그 세계에서 아이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마음껏 즐기고 모험을 하며, 위기를 넘기고 구원을 얻는다. 그러고 나서 돌아온 현실의 세계는 어느새 아이의 마음속에서 달라져있다. 세상은 같으나, 결코 이전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한 눈 팔기 대장, 지우>는 장점이 많은, 판타지 희곡이다. ‘바람의아이들’에서 나온 저학년 도서로 참신한 기획이 돋보인다. (일상에 널려있는)환상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유쾌하게 읽으면서 진지한 생각을 얻게 되는 장점도 있지만, 동화의 서술방식을 과감히 뛰어넘은 극본 형식이 우선 마음을 잡아끌기에 충분하다. 아이들은 연극을 하나의 놀이마당으로서 좋아한다. 무대가 여의치 않으면 작은 가면이라도 만들어 쓰고 일인다역을 하는 역할극에도 흥분하는데, 제대로 된 극본을 들고 무대를 꾸미고 각자의 역할을 맡아 연극을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이 책은 아이들의 그런 심리를 잘 알아서 나온 책이다.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아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살려줄 수 있는 독서활동이 될 것이다. 소리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한 판 질펀하게 논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읽기에 그치지 않고 여럿이 함께 역할극 또는 연극이라도 하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이 책은 장르의 경계를 넘은 점 이외에도 소재면에서도 과거와 현대의 것이 조화롭다. 특히 우리 것을 소재로 우리 정서를 담았다는 점이 또한 매력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어수룩하지만 뻔뻔한 도깨비가 등장하고 아이들의 정신적 스승 격으로 92세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달맞이꽃에서 달토끼로 이어지는 '달'의 은근한 정서도 그렇지만, '달'은 판타지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달의 역할을 떠올려보면. 이 책에서는 달까지 정말 모험여행을 가게 된다는 점이 다른데, 그곳까지 가는 교통수단으로 아주 현대적인 것이 등장한다. 희곡이니만큼 대사의 맛이라면, 우리의 전래동요 같은 노랫말을 대사에 담고 그 가사도 반복적인 짧은 글귀를 리듬감 있게 배치하여 부르는 맛이 흥겹다. 역할극을 할 때면 아이가 마음대로 곡을 붙여 불러보도록 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또한 인물들의 대사도 간결한 언어로 마치 노래를 부르듯 운율감이 있다. 노랫말도 대사도 정겹고 소박하며 군더더기가 없다.

 모두 7막으로 나아가는데 장은 따로 없고 대신 무대장치를 할 수 있는 해설이 비교적 자세한 편이다. 간단하면서도 재치 있게 배치한 장치가 깜찍한데 책에선 삽화로 보여 주어 연극무대를 꾸민다면 참고가 될 것이다. 지문은 의도적으로 생략했는지 어느 대사에도 없는데, 오히려 역할을 맡은 아이가 나름대로 해석하여 독창적으로 대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보인다. 마치 뮤지컬의 양식처럼 중간중간에 함께 부르는 노래들이 연극 전체를 신나게 끌어줄 것이다. 책 전체를 어른과 아이가 번갈아 가며 역할극을 하듯 소리 내어 읽으면 독자가 연극에 참여하는 기분이 들어 색다른 읽기경험이 될 것이다.

 지우는 한 눈 팔기 대장이다. ‘정신없고 말 많고 놀기 좋아하는’ 아이가 진짜 지우다. ‘똑똑하고 착하고 얌전한’ 지우는 어른들의 환상일 뿐. ‘한 눈 팔기’는 거침없는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동심을 믿을까, 변덕을 믿을까. 우리 아동문학이 동심주의의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아이들은 끝없이 한 눈 팔고, 돌아서면 방금 들은 말은 잊어버리고, 이랬다저랬다 변덕도 죽 끓듯 한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잔인한 일면도 있다. 열 살이면 다 컸지, 라고 생각한 나도 근래 연이어 아이 때문에 낭패를 당했다. 내 잣대로 기대치를 만들고 아이를 너무 믿었던 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지 뭔가. 하지만 그런 성향은 따지고 보면 어른들도 매한 가지로 갖고 있으면서 잘 눌러서 포장하여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이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어떨 땐 인형 엄마가 되기도 하고 피아노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땐 어엿한 형이나 누나가 되기도 한다. 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아이들은 변신의 귀재다. 어제와 오늘, 가만히 보면 아이는 또 달라져있다. 지우는 어느 날 빗자루 도깨비가 된다. 빗자루 도깨비는 지우가 되고. 지우는 남몰래 자기가 도깨비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거나, 빗자루를 보며 도깨비를 상상했던 건지도 모른다. 지우의 모험은 예상을 불허하며 이리 튀고 저리 날고 하는데, 그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들이 갖는 아련한 이야기의 추억 한 자락, 물질의 가치에 묻혀 잊혀져가는 것들에 그리움을 보내는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감상적으로 적어놓진 않았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공감될 정도로 군소리 없이 적혀있다.

- 달토끼 : 아, 정말 너희 그 절굿공이 도깨비를 아는구나. 옛날엔 내가 절구질 할 때마다 잘도 나타나더니 로켓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부터는 통 만날 수가 없어. 사람들이  도깨비 생각을 잘 안 해 주나 봐. 사람들 기억이 있어야 여기도 자주 오고 그럴  텐데. 하긴 후유-사람들이 생각 안 해 주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p108)

지우는 갖가지 모험을 겪고 한 가지 중요한 생각을 얻었다.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지우는 또다시 한 눈을 팔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누군지 잘 생각하기만 하면 어려움이 풀린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네가 나인 줄 알고, 내가 너인 줄 알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달토끼와 할아버지가 지우에게 말한 아래 대사도 새겨볼 만하다.

- 달토끼 : 그런 사람 많지. 뭐가 뭔지 잘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누군지 몰라 헤매는  사람, 로켓이 뭘까 잘 따져 보지 않고 고생만 하는 사람. (p110)

할아버지 : 그렇단다. 내가 말이다. 한 백 년쯤 살아 보니 그런 일이 있더라. 내가 나인 줄도 모르고 남인 줄 알고 사는 일, 남이 남인 줄 모르고 난 줄 알고 사는 일,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그런 일 말이다.(p123)

 지우는 학교 가는 길에 한 눈을 팔았지만 이제는 돌아와 '학교로' 간다. 그런데 어제까지 가던 학교가 아니다. 여전히 받아쓰기를 하고 셈공부를 하고 이상한 노래를 배우겠지만 더이상 어제까지 배우던 시시한 것들이 아닐 테다. 더구나 학교 가는 길에 만나는 꽃 한송이, 가로등, 빗자루 몽댕이 하나도 다르게 보일 것이다. 문득, 등교할 때마다 지각을 자주 한다는 친구 딸이 생각난다. 하루는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벌레도 보고 그러며 오느라 늦었다고 선생님께 말했더란다. 친구는 그런 딸에게 '그래도 꽃을 꺾지는 마라'고 말해주었다는데...  한 눈 팔기 대장을 남자아이만으로 내세운 것이 좀 걸린다. 한 눈 팔기 대장에 버금가는 여자친구와 동반하여 똑같이 모험을 즐겼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아이가 주인공이어도 나쁘지 않았겠다.

 아래 내용을 보면, <한 눈 팔기 대장, 지우>는 ‘마당극’으로 연출하면 더욱 좋겠다.

빗자루 도깨비, 관객석에 내려가 어린이 관객에게 묻는다.

빗자루 도깨비 : 얘, 너도 도깨비 맞지? 괜찮아. 나만 알고 있을게. 도깨비 맞지? 아니라고? 이상한데......

빗자루 도깨비가 자리를 옮겨 가며 다른 관객들에게도 계속 묻는다. (p37)

 

이렇게 독자를 이야기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읽기 경험과 역할바꿈의 신명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뜻깊은 시도이고, 거기에 가볍지 않은 생각거리를 무겁지 않게 안겨주어 마음에 드는 책이다. 초등 1-3학년이면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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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9-2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읽으려고 챙겨 놨는데! 원종찬 선생님 글 인용하신 것까지만 읽고 얼렁 스크롤 내렸어요. 혜경님은 위험인물이야!!

프레이야 2007-09-28 16:45   좋아요 0 | URL
ㅋㅋ 위험인물이라우~ 님 혹시 어린이책 관련일 하시는 거에요?

하늘바람 2007-09-2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인가봐요 궁금하네요

가시장미 2007-09-28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가 있으면 사주고 싶은 책이네요. 저도 읽고싶은데.. 으흐 서점가서 읽어야겠어효! :)

프레이야 2007-09-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네, 아주 재미있어요.^^

가시장미님, 서점 가서 슬쩍 서서 보셔도 될 거에요. 좋더군요^^

뽀송이 2007-09-28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바람의 아이들' 책이군요.^^
언제나 개성있는 책을 내는 '바람의 아이들' 신간이니 관심이 갑니다.^^

프레이야 2007-09-29 00:00   좋아요 0 | URL
뽀송이님, 추석 연휴 후유증은 끝났어요? ^^
이 책 무지 신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