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의 책장수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지음, 권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5년 11월
절판


수많은 신발들이 먼지 속을 걸어간다. 사방에 갈색 샌들, 더러운 신발, 까만 신발, 낡은 신발들이다. 한 번은 꽤 말쑥한 신발 한 켤레와 리본 달린 분홍색 플라스틱 신발이 보인다. 심지어 흰색 신발도 있다. 탈레반은 그들의 깃발이 흰색이라는 이유로 흰색 사용을 금지시켰다. 또 딱딱한 굽이 달린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이 걸을 때 소리를 내면 남자들 정신이 산만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116쪽

마지막 의식이 남아 있다. 와킬의 누이 한 명이 샤킬라에게 대못과 망치를 건넨다. 샤킬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침실 문으로 다가가서 문에다 못을 박는다. 못이 제대로 박히자 모두들 박수를 친다. 비비굴이 훌쩍거린다. 이것은 샤킬라가 자신의 운명을 이 집에 못박았다는 뜻이다.-136쪽

멀찍이 떨어진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미크로라욘은 구소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시가지와 흡사하다. 사실 이곳 건물들은 러시아인들의 선물이었다. 소련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기술자들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하여 이른바 '흐루시초프 블록'을 건설했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을 가득 메우게 된 이 블록은, 카불이든 칼리닌그라드든 키예프든 어디나 방 두서너 개가 딸린 5층짜리 아파트 건물들로 이루어진 획일적인 형태의 구획이었다.-144쪽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이곳이 이토록 초라해 보이는 까닭이 흔히 생각하기 쉬운 소련의 쇠락 때문이 아니라 총알과 전쟁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현관 옆 콘크리트 의자마저도 박살 나 난파선 잔해처럼 나뒹굴고, 한때 아스팔트였던 도로는 곰보처럼 움푹움푹 패여 있다.......

미크로라욘의 아파트는 소비에트식의 평등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지만, 분명 아파크 내부에서는 어떤 평등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아파트를 건설한 배경에는 계급 없는 사회에서 계급 없는 주거지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미크로라욘의 아파트들은 중산층을 위한 주거공간으로 여겨졌다.......-145쪽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잃고 모든 것이 과거로 역행하는 이 나라에서 중산층이라는 단어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한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수돗물도 지난 10년 동안 우스갯소리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1층에서는 매일 아침 몇 시간 정도 냉수가 나온다. 그게 다다.-146쪽

전통적으로 무슬림은 새해에 마자르-이-샤리프에 있는 알리Ali의 영묘로 순례 여행을 떠나지만, 탈레반은 이도 금지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순례자들은 알리의 영묘로 몰려가, 죄를 씻고, 용서를 구하고, 병을 치료하고, 새해를 맞았다. 아프가니스탄 달력으로는, 새해가 3월 21일이에 시작한다. 이 날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이기도 하다.-166쪽

순례자들은 금색으로 칠한 벽 옆에 서서 소원을 빌 수 있다. 앞서 들었던 애국적인 연설에 이어서, 만수르는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한다. 언젠가는 아프가니스탄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주십사고. 언젠가는 나 자신과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주십사고. 그리고 언젠가는 아프가니스탄이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국가가 되게 해주십사고. 하미드 카르자이도 이보다 더 감동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으리라.

온갖 광경과 소리에 취한 나머지, 만수르는 정화와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잊어버린다. 마자르까지 온 진짜 이유를. 거지소녀와, 소녀의 작고 마른 몸과, 커다랗고 옅은 갈색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까맣게 잊고 있다.-191쪽

먼지 대부분은 공중으로 날려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집에서는 먼지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먼지를 없애기는 불가능하다. 먼지는 레일라의 움직임과 몸과 생각을 뒤덮는다..... 지금 레일라가 몸에서 벗겨내려고 애쓰는 것이 이런 먼지때다. 도톰하게 말린 때가 목욕탕 바닥에 떨어진다. 그녀의 삶에 달라붙은 먼지들.-206쪽

그녀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사회라는 진흙과 전통이라는 먼지가 만든 교착 상태에. 수백 년 된 전통에 뿌리 내린 체계 속에서, 그리고 인구의 절반을 불구로 만드는 체계 속에서 그녀는 옴짝달싹 못한다. 교육부는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30분. 레일라는 무언가를 위해 투쟁하는 일에 익숙치 않다. 오히려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틀림없이 어딘가에 탈출구가 있다. 그녀는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237쪽

아이말은 차마 자기가 거리으 ㅣ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말은 부유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말의 아버지는 부유한 책장수였다. 문학과 역사에 그토록 열성적인 아버지, 책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꿈과 계획을 품은 아버지. 하지만 의심이 많아 가게도 아들들에게만 맡기고, 춘부에 새해맞이 축제 이후로 다시 문을 연 카불의 학교에 아들들을 보낼 생각도 하지 않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이말은 애원하고 매달려보았지만 술탄은 단호했다.

-256쪽

"나중에.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모두 힘을 합쳐야 해. 지금은 책의 제국을 건설할 기초를 닦을 때야."
-257쪽

"난 구식 아내는 필요 없어, 당신은 진보주의자의 아내지, 근본주의자의 아내가 아니라고."
술탄은 여러 면에서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이란에 갔을 때 소냐에게 서양식 옷도 사주고, 부르카를 억압적인 감옥에 비유하곤 했으며, 새 정부에 여성 장관이 포함된 사실에 흡족해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이 현대 국가로 거듭나기를 마음으로부터 소망했고, 여성 해방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었다.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서 술탄이 본보기로 삼은 이는 단 한 사람, 자기 아버지뿐이었다.-334쪽

레일라는 삶이, 젊음이, 희망이 어떻게 그녀를 버리고 떠나는지, 그녀를 살리지 못하고 떠나는지 느낀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외롭다. 영원히 짓밟히도록 저주받은 돌덩이처럼. 레일라는 몸을 돌리고, 문까지 세 발짝 걸어,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짓밟힌 마음도 두고 나온다. 곧 창문을 통해 날아든 먼지가, 카펫 위에 살고 있는 먼지가 그녀의 짓밟힌 마음과 뒤섞인다. 그날 저녁, 레일라는 이것을 쓸어 뒷마당에 갖다버릴 것이다.-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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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09-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미디어책이 좋은 것같아요

프레이야 2007-09-21 12:39   좋아요 0 | URL
아름드리미디어 전 이번에 처음인데요..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