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파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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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파도'를 얘기하려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큰딸아이가 읽고 싶다고 책을 사달라고 해서였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그 책을 사달라고 했고 손에 알맞게 잡히는 하드커버에 산뜻한 표지부터 맘에 든다며 아이가 먼저 읽었다. 난 책장을 휘리릭 넘기며 그저 가볍고 말랑말랑한 연애담 같은 정도이겠거니 하고 읽지 않고 있었다. 참 좋더라는 말은 아이한테 먼저 들었다. (얘가얘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성숙한 건가.)  공식홍보대사(^^) 다락방님에게도 익히 강추받은 책이다. 그 후 낭독녹음 봉사를 하고 있는 점자도서관 책꽂이에서 그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집어들었다. 다소 무거운 책을 녹음한 후엔 조금 가벼운 책, 술술 잘 넘어가는, 편안한 대사가 있는 소설 같은 게 읽고 싶은데, 마침 내 눈에 띈 것이 이 책이었다. 역시 타이밍이 중요한가 보다. 

두 사람이 주고 받는 이메일 언어, 구어체의 글이면서 문어체의 묘한 깍듯함이 섞인 문장들을 읽으며 나는 점점 어디론가 빠져들어갔다. 어디에 빠져들었냐하면, 음,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 어디론가 달려나가고픈 해거름 잿빛 공기, 가늘게 흔들리는 잎새들의 몸부림 같은 것, 도무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휘말려오는 그 비슷한 감정이란 것으로.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점점 타들어가는 언어의 목마름, 나아가 고갈상태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표현할수록 부족하고 말할수록 어긋나고 그러다 어느 순간엔 데칼코마니처럼 마주 접으면 딱 맞아떨어지는 어떤 것, 그게 말이고 글이고 그것으로 표현되어 서로 나누는 감정이더라. 할퀴기도 하고 보듬기도 하고 갈증에 애를 태우는 언어들 뒤에서 내가 에미가 되었다가 레오가 되었다가, 그녀가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목소리톤을 번갈아 조금씩 바꿔가며 읽어나갔다. 참 좋았다. 좀 간지러운(?) 대사들도 있었고 아릿하게 가슴을 적시고 울리는 대사들도 있었다. 달콤하거나 씁쓸하거나 날카롭거나 다정한 말 아니 글이 감정을 들었다놓았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추며 상대를 탐닉하고 있었다. 조사 하나, 단어 하나, 괄호 하나, 점 하나, 말줄임표 하나, 느낌표 하나에도 그들의 다 드러내지 못하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망설임, 주저함, 다가감, 그리움, 시기, 질투, 과감함...  얼굴을 마주보며 말하는 모습을 눈으로 담고 목소리를 귀로 담는 것보다 모니터를 사이에 둔 그들의 말 아니 글은 더욱 예민하고 섬세하고 그래서 더욱 위험하고 예리했다.   

그들의 언어를 따라가며 점점 그들의 '감정'에 빠져들어갔다. 나는 그들이 되어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질투심에 불타 때로는 간절하게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에미의 12년 된 내부 세계 동반자 베른하르트가 말하듯 실체가 없는 환상, 뼈와 살이 있고 흠이 많은 실체가 아닌, 글자 뒤에 숨어있는 환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건 완벽해 보였다. 감정은, 사랑은, 미움은 과연 어디서 생겨날까. 말,말,말. 글,글,글. 허망하기 짝이 없는 - 그걸 알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 그것들로 짓는 사상누각에 그들의 감정이 실리고 눈을 뜨면 한 순간 날아가버릴 수 있는 한 줌 바람같은 그것에 감정은 점차 더 고조되고 때로는 추락하고, 막연했던 것들이 소소해지고 구체화 되었다. 처음엔 잘 알지 못했고 예견할 수도 없었던 그들의 감정은 점점 색을 입고 향을 더하고 미세한 결을 갖추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좀 더 용감한 건 에미였다. 그녀에게 불어오는 북풍은 도저히 감당해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새벽 세시'의 결말은 참 허탈했다. 두고두고 회자될 기막힌 결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이었다. 그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은 대체로 흡족하다. 현실에서 그럴 수 있다고 보기엔 설레고 두려운,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나는 이 결말을 환상이라 말해야겠다. 이 책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에 대해 궁금증이 있었고 그만큼 두근거리며 아껴 읽었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말하자면,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환상을 심어주다니, 작가가 살짝 얄밉다. 전편의 설렘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일곱번째 파도는 어차피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번째 파도 같은 걸 꿈꾼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조용한 외부세계'에 대한 '꿈'을 꾼다 . 잔잔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섯번의 파도 다음에 일어날 일곱번째 파도는 허망한 '감정'안에서만 일어나는, 비실재적이라 잔인한 파도가 아닌지. '이성'은 끊임없이 그 파도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레오가 그랬던 것처럼.

   
 

일곱번째 파도는 조심해야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예측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단조로운 도움닫기를 함께 하면서 앞선 파도들에 자신을 맞추지요. 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밀려오기도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거리낌 없이, 천진하게, 반란을 일으키듯,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 만들어 놓아요. 일곱번째 파도 사전에 '예전'이란 없어요. '지금'만 있을 뿐. 그리고 그뒤에는 모든 게 달라져요. 더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그건 그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그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겠지요.(256쪽)

 
   

이 두 권의 책, 모두 상당한 매력을 풍긴다. 사랑(이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이란 감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묻고 싶다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언어! 사랑은 그리고 어떠한 감정은 언어에서 오고 언어는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한다. 언어로 환상의 집을 짓고 또 허물기도 하며 언어로 우리의 감정은 고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언어란 것, 듣지 말 것을, 보지 말 것을, 읽지 말 것을. 이 두 권의 책은 언어로 유발되는 우리의 모든 감정을 지독하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결국 그 모든 감정이 마음을 흔들고 현실을 흔들고 운명을 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무렇지 않게 쓰는 언어습관에서 고개를 쳐드는 내면의 억눌린 감정과 꿈틀대는 욕망을 읽을 수 있을 정도라면, 너무한가. 아니다. 책속의 레오처럼 이메일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심리학자가 아니어도 글 이면의 글, 말 이면의 말을 살필 일이다.  

레오는 '사실은 당신이 그립다'는 말을 하기 위해 '파피용'이 기다린 일곱번째 파도, 그 탈출의 의미를 말한다. 에미는 '보고싶다, 잘 지내고 있기 바란다'는 말을 하기 위해 '당신이 잘 지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쓴다. 이들의 언어를 곱씹고 더듬어보는 재미, 언어의 묘미를 잘근잘근 씹어보는 재미, 그들의 연애 감정에 공감하며 그걸 바라보고 느끼고 다루는 과정에 집중해보는 재미를 느끼다, 문득 이 책,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편에서 에미는 '결혼은 모순형용'이라고 말한다. 평화는 잠재된 전쟁을, 안락함은 지루함을, 책임과 의무는 은밀히 욕망하는 무책임과 방종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 아닌가. 후편에서도 에미는 결혼이라는 가장 이성적이어야 하는 잔잔한 파도에 대해 설핏 냉소적으로 말한다. 일곱번째 파도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앉아있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파격을 가하는 에미, 그녀는 충분히 사랑스럽고 영리하지만 슬프게도 정말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그 결단에 일면 박수 보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쓰고 있는 거다.)  여전히 그녀에게 새벽 세시면 북풍이 불어들고 추워서 잠 못 이루며 창가에 발끝을 두고 거꾸로 눕는 에미를 상상해본다. 그런 에미가 오히려 현실적인 것 같다. 과연 에미, 조용한 외부세계의 마력을 떨칠 수 있을까.

사랑은, 연애는, 관계는 그리고 삶은 지독하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없고 가슴 아파할 일도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할 일도 없고 증오로 잠못 이룰 일도 없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더 많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관계맺기에 서툴고 늘 어눌한 사람이지만 삶과 연애하는 것 같다는 상찬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삶을 아끼고 사랑하고 가꾼다는 의미일테다. 과분한 칭찬이라 내겐 감사한 말이다. 하지만 삶이 삶이라서 상처를 주듯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상처도 제일 많이 크게 줄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지만 삶을 견디며 살아가야하듯 사랑(이란 감정)도 피할 수 없는 것, 견디며 보듬어야하는 것이다.  

작가는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일까. 희망처럼 절망적인 게 없는 건데... 그래도 희망이란 말은 희망적인가. 언어로 쌓은 헛된 집 - 그것을 감정이라 부른다면 - 이 결국 그리 헛된 것만은 아니란 걸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이 말해준다. 우리는 무엇 하나도 헛되이 쌓고 있지 않다는 걸 긍정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그 결말은 완전한 사랑은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말한다. 완전한 사랑은 정신과 육체의 하모니다. 어느 한 쪽이 기우는 건 장애다. 하지만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수많은 오해와 질투, 상처를 딛고 결국 살아남을 것이다. 이해하고 양보하고 또 (레오에게 에미가 그런 존재인 것처럼) '내 손바닥에 간직한 점'처럼 나의 일부로 동반의 길을 가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라면 혹여 일곱번째 파도를 맞는다 해도 새벽 세시면 여전히 북풍이 불어 들어올 것 같다. 에미도 여전히 그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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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20 0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를 읽고나서, 어느 순간부터 서로 사랑하게 된거지?라고 다시 차근차근 짚어본 적이 있었어요. 언어 속에 숨은 마음이 서로 통할때 사랑은 오는 것일까요? 재밌게 본 영화의 신통치 않은 속편이 아닐까 싶어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래도 궁금하긴 해요 ㅎㅎ

프레이야 2009-09-20 09:46   좋아요 0 | URL
만치님 조용한 일요일 아침이에요.
사랑은 그렇게 오고 자라지만 결국 완전하게 되기엔 언어만으론 부족한 게 있다는 것,
그 책 결론을 보면 알게 될 거에요.^^ 그런 결론 의외였지만 나쁘지 않은 것 같구요.



다락방 2009-09-2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프레이야님.
이 리뷰는 그동안 제가 봐왔던 리뷰중 최고가 아닐까 생각해요. 새벽 세시와 일곱번째 파도 그 안에 담겨진 그 많은 것들을 이토록 잘 풀어내시다니요!
이 책을 읽은 누군가는 이 작가가 굉장히 똑똑하다고 하더라구요. 모니터를 앞에 놓고 인간의 관계가 점점 달라져가는 과정을 이토록 잘 그려낼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정말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거라구요. 이 소설의 놀라움은 그런점들인 것 같아요. 위에 Manci 님도 말씀하신 것 처럼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거지? 되짚어 보면 여기, 이부분, 저기, 저부분이 될 수도 있은 그런 흐름들. 그러나 무엇 하나 확실한 것 같지도 않고. 새벽 세시의 결말은 완벽함, 그 자체, 그래서 현실이었지요.

일곱번째 파도는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환상으로 끝맺는 결론인 것 같아요. 저 역시 그 결말이 나쁘진 않았지만, 전 역시 현실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곱번째 파도의 결말에 마음 놓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들은 그랬어야 한다고 말이죠.

오와- 리뷰가 무척 좋아서 저도 모르게 말이 많아졌어요, 프레이야님. 추천이에요.

프레이야 2009-09-20 21:12   좋아요 0 | URL
작가, 굉장히 똑똑할 거란 생각 동의해요.
사람의 심리와 언어의 이면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어요.
다락방님 고마워요~~

stella.K 2009-09-20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저기서들 좋다고 난리인 책을 저는 일부러 외면중이었는데(읽을 책이 너무 많아)
조만간 질러버려야할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마도 리뷰는 못 쓸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님 리뷰에 눌려서...흥!3=33

프레이야 2009-09-20 21:12   좋아요 0 | URL
외면하지 말고 그냥 확~질러요, 스텔라님.ㅎㅎ

2009-09-20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9-09-2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쉽지 않은 봉사를 하고 계시네요....그리고 이들의 이메일을 낭독해보는 건 더욱 흥분되는 일일거란 생각도 듭니다. 이 유쾌한, 때로 간지러운 대사들이라니. 저도 다락방님 의견에 동의하면서...추천요

프레이야 2009-09-21 09:01   좋아요 0 | URL
그래요. 소리내어 제가 그 대사들을 말하니 꼭 제가 그들이 된 것처럼
좋았답니다. 우힛~ 감사해요^^

후애(厚愛) 2009-09-2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20개를 드리고 싶은 멋진 리뷰에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프레이야 2009-09-21 23:40   좋아요 0 | URL
후애님, 20개씩이나요 ㅎㅎ 고맙습니다^^

라로 2009-09-22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벽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 그냥 제 기억을 멈추고 싶어서 일곱번째,,,는 읽지 않고 있는데
이거이거 읽어???말어????

프레이야 2009-09-22 21:37   좋아요 0 | URL
거기서 멈추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읽어보시라고 뽐뿌질해야쥐~

꿈꾸는섬 2009-09-22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 보니 또 읽어야할 책이 생기는군요. 그것도 두권이나 말이죠.^^

같은하늘 2009-09-23 01:33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
프레이야님 미워요~~~

프레이야 2009-09-23 23:30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같은하늘님, 두 권 모두 읽어보시면 빠져들걸요.ㅎㅎ

순오기 2009-09-26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로거 베스트 특종이던데 내가 리뷰를 차분히 읽지 않아서 축하도 못했어요.^^
새벽 세시도 선물받았지만 아직 안 읽어서 코멘트를 못해요.ㅜㅜ

프레이야 2009-09-28 07:18   좋아요 0 | URL
앗, 몰랐어요. 히힛~
전에 부산서 만났을 때 새벽 세시,얘기 잠시 나왔죠?
언니의 이야기 기억나요.^^

세실 2010-03-2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이 낭독하신 목소리로 듣고 싶어요. 참으로 촉촉한 느낌일듯!
음 왠지 일곱번째 파도는 늦가을에나 읽어야 할듯 합니다.
새벽 3시의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요.

프레이야 2010-03-27 23:19   좋아요 0 | URL
일곱번째 파도,도 낭독하고 싶어요.
언젠가 할까해요.^^
새벽 세시의 여운은 늦가을까지 이어지겠군요.
그것도 괜찮을 듯해요.^^
 
<빠담 빠담, 파리>를 리뷰해주세요.
빠담 빠담, 파리
양나연 지음 / 시아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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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세이를 읽고 나면 뭔가 더 갈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저자의 과감한 선택과 모험심에 대한 부러움이 그 책을 집어들게 만들었지만 읽고 나면 대리만족을 한 만큼이나 허허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건 주관적인 것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과 독특한 정서에 기반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한번도 그 장소에 가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이질감을 부추기고 공감대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리하여 그 책에 나온 여행지들은 내게 더욱 멀고도 먼 세상이 되는 것이다.  

파리에 대한 여행담을 담은 책은 이미 여럿 있지만, 이 책, 양나연 개그작가의 여행기는 조금 다르다. 그냥 여행객으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행가이드로서 보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이야기다. 불어는 전혀 못하고 영어도 능통한 수준이 아닌 그녀, 여행을 그리 많이 해본 것도 아니고 가이드라는 일도 해본 적 없고 유럽사나 미술과는 전혀 무관했던 사람, 웃찾사 인기작가로 제법 유명한 그녀가 어느 날 국경을 넘어설 기회를 선택한 건 분명 자기혁명이다. 그녀는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한 후 우선 남미를 택했다. 그중에서도 페루를 선택했다. 모든 건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었고 그녀의 선택으로 시작되었다. 운명을 만들어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롭고 확고하게 선택을 했다는 점이 가장 높이 보였다. 서른을 얼마 앞둔 나이의 활달하고 유머러스한 우리나라 전문직 미혼여성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서른은 조금 넘겼다.

그녀의 길은 모두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우연을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놀라울 정도로 명쾌한 선택을 해나간 그녀가 참 매력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대개 우연인듯 찾아온 기회들은 모두 놓치고 세월이 지나, 그때의 다소 안이했던 사고보다는 운명이 자신을 그냥 지나쳤다는 변명으로 외부요인을 탓하기 일쑤다. 모든 문제는 자신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걸 이 책을 읽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양나연 작가는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부딪혀보겠다는 자신감과 적극성으로 자신을 버리고 온몸으로 도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무한히 긍정할 수 있는 힘이 가장 부러운 미덕이었다. 

우선 표지부터 참 산뜻한 이 책은 미려한 문장이나 과장된 감상, 자기연민이나 자의식과잉 따위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경쾌하고 수월하게 읽히는 문장은 마치 옆에서 들려오는 수다처럼 재미나다. 개그작가다운 좋은 점이다. 몸으로 부대끼며 터득한 체험담이 아주 진솔하게 읽힌다. 군데군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천연덕스레 상황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 자신의 강점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힘도 잃지 않고 있다. 파리여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팁이 되는 내용도 많고 파리와 관련한 갖가지 소소한 이야기들도 곁들어있다. 파리를 찾게되면 꼭 가보라고 권하는 덜 알려진 장소와 저자 자신이 주관적으로 마음을 홀리게 된 장소와 특별한 화가에 대한 소개도 흥미있다. 사진도 적절히 소박하게 보기좋다.

'양가이드'가 배운 것은 "무엇보다 먼저 내가 할 일은 손님과 소통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모시고, 즐겁게 대하는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86쪽)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해설을 하는 건 하면 할수록 늘게 되어 있지만, 많은 일행을 리드하며 손님을 안전하게 모시는 마음은 할수록 느는 게 아니라 늘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된다. 여기서도 역시 일보다 지식보다 우선하는 건 '사람'이었다. 사람냄새 물씬 나는 여행가이드!

파리에 있으면서 가이드 연수차 또는 특별보너스로 다녀온 유럽의 몇몇 다른 나라에서의 에피소드도 양념으로 맛있다. 그 중 스페인의 어느 길에서 우연히 보겐 된 장애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 선입견과 편견을 한 방 때리는 것이다.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눈에 보이는 칭찬 하나로 의기양양해진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 데서도 진정 최선을 다하는 가이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꾸미지 않은 글에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결론은? 그녀는 지금 파리의 가이드로 돈도 잘 벌고 잘 살고 있을까? 그녀가 그길을 선택하여 온몸을 던져 최선을 다했듯, 그녀는 지금 또다른 선택을 하여 아주 행복해보인다. 이 리뷰를 보는 분은 그게 무얼지 궁금할 것이다.^^ 그녀더러 친구들이 묻는단다. 

"왜 이렇게 행복해 보여?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한 번 떠나 봐. 다 잊고 말야! 어쩌면 그곳에서 네가 원하는 무언가를 찾을 수도 있을 거야. 그게 일이든, 사랑이든, 또 다른 행복이든? (283쪽)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때 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막연히 꿈꾸고 있는 파리가 내 마음 속에서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그걸 찾기 위해서라도 다 잊고 떠나보라고 스스로 권하기엔 뭐 이리 걸리는 게 많은지.. 소소한 떠남부터 조금씩 연습이 필요할까. 아니면 그런 것 필요없이 과감하게 떠나보는 게 맞을까. 어느 쪽이든 쉽지 않으니 이런 책의 저자가 부럽단 말밖에.. 빠담, 빠담~ (Padam, Padam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뜻하는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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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9-09-1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요즘 아가씨들은 어찌나 이쁜지요. 저렇게 당차고 씩씩하다니.....(아..이런 얘기는 정말 않고 싶어요. 젊은 것들은...하는 나이타령도 지겨워요. 하지만 어쩝니까..그저 부러운데요..)

프레이야 2009-09-15 00:5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말에요. 흐흑.. 저 나이 때 뭘하고 있었나 몰라요.
지금은 어찌나 걸리적거리는 게 많은지.. 싱글일 때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것들인데,
라고 말하면 그것도 핑계가 되려나요.. 저 책 속에 임산부가 6살 아들 데리고 그러니까
모두 셋이서 파리여행 온 사람도 있더군요.^^ 그나마 애 하나 더 낳으면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아 처음으로 나선 해외여행이라더군요. 부라보!

라로 2009-09-1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떠나서 정말 다 잊고 한번 떠나봤으면 좋겠어요~. 빠담빠담 파리든,,아님 제주도라도,,,혼자,,,아~ 기회가 한번 있었는데,,,뭐하냐고 시간을 다 보냈는지,,,,에구 아까비..

프레이야 2009-09-15 01:57   좋아요 0 | URL
맞아맞아..혼자 떠나보는 거, 그걸 원하는 거에요.
이제 어디 풀어놔도 못 가는 바보멍충이 ㅋㅋ
제주도라도,라고 하니까 진짜 가고싶어라~

같은하늘 2009-09-18 17:03   좋아요 0 | URL
아~~ 슬프다...
이제 어디 풀어놔도 못 가는 바보멍충이 ㅋㅋ

전 얼마전 너무 화가나서 아빠가 애들 보든 말든 두고 가출을 한 적이 있는데...
허걱~~~ 나갔더니 갈데가 없더라는...
서점가서 책만 열심히 보고 왔다는 슬픈야그...
혼자서 뭘 하라해도 이제 못하는 바보멍충이...ㅜㅜ

프레이야 2009-09-18 19:47   좋아요 0 | URL
우린 동지네요.ㅎ 바보멍충이..ㅎ

순오기 2009-09-1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보고 있어요. 아이 셋을 두고 한 달간 취재여행 갔던 그녀가 부러울 뿐.
떠나는 연습이 필요한데 우린 생활 속에서 떠나면 큰일나는 줄 알고 살잖아요.ㅜㅜ
양나연~ 개그작가였군요, 이제는 이런 젊음이 부러울 뿐! 쿵~~~

프레이야 2009-09-17 08:04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공지영의 수도원기행, 좋아요?
전 안 읽어봤어요. 예전에 그 책 나왔을 때 공지영작가에 대한 호감이 별로
없었던 터라..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어요.
떠나는 연습, 전 너무 안 하고 못 하고 살아온 것 같아요. 애가 원래 그래요ㅋ
젊음이 부러울 뿐 2! 철푸덕~

순오기 2009-09-18 00:42   좋아요 0 | URL
수도원 기행에 수도원 이야기는 별로 많지 않아요~ 간단히 소개하고 오히려 공작가의 심경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듯... 난 유럽의 수도원이 궁금했는데 말이죠.ㅜㅜ

꿈꾸는섬 2009-09-1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크면 아무 생각없이 한번 떠나보려구요. 근데 그때가 언제일까요? ㅎㅎ

프레이야 2009-09-17 21:36   좋아요 0 | URL
꿈섬님, 정말 이러다 언제 떠날지 모르겠어요.ㅎ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이 영 광 

 

 

번개에 의해 나타난, 

젖은 채로 타고 있는 나무처럼 

그는 어제의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작년의 그 자리에  

나타나 있다 

영원히 그 벤치에 나타나 있다 

 

그는 가장 멀리 다가온  

가장 가까운 사람 

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혼자 영원히 중얼거리는 사람 

 

나는, 지나가는 사람 

영원히 혼자 듣는 사람 

들리는 사람 

 

그와 나 사이에 나뭇잎 하나가 툭 떨어진 오후에 

나는 그를 지나갔다 

나는 어제까지 그를 지나갔다 

나는 작년까지 그를 지나갔다 

 

그러므로 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다가갈 수도 지워 없앨 수도 없는 사람을 

나는 영원히 지나갔다 

한순간도 지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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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9-11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하고 계세요? 저는 아이 숙제 조금 더 시키고 재워야 하는데 소파에 동그마니 앉아 책에 폭 파묻혀 있는게 귀여워서 잠깐 몇분 더 놔두는 중이에요. 숲속이라도 한없이 걷고 싶은 서늘한 날씨지요? 주말 잘 보내시구요..

프레이야 2009-09-11 23:20   좋아요 0 | URL
만치님 전 맥주 한 캔 하고 '일곱번째 파도' 읽고 있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초롱초롱한 딸, 귀엽지요.^^
아까 여긴 빗방울이 좀 떨어지던데 지금은 그친 것 같아요.
주말 편안히 보내세요.^^

다락방 2009-09-1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맥주에 일곱번째 파도라니! 멋진 궁합이에요! 저는 이미 술을 마시고 들어온 뒤에 빗소리 들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프레이야님 서재에 들어와 있어요. 훗 :)

프레이야 2009-09-12 04:10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락방님 :)
아, 정말 결말이 어찌 되려나 두근두근..
취기에 잠시 졸다가 퍼뜩 일어나 다시 봐요~

꿈꾸는섬 2009-09-1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주...전 요새 다이어트로 금주중이에요.^^
가끔 마시고 싶을때가 있긴 한데 아직 잘 참고 있어요.^^

프레이야 2009-09-12 04: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맥주만 끊어도 뱃살 들어간다던데요..
전 요새 넉넉하게 나오고 있는 중이에요.
섬님은 잘 참고 성공하세요.ㅎㅎ

라로 2009-09-12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하고 맥주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페이퍼를 썼는데,,,이미 마시고 계시군요,,,일곱번째 파도와 함께,,,ㅎㅎㅎ

프레이야 2009-09-12 04:11   좋아요 0 | URL
우힛~ 두캔 했다우^^

세실 2009-09-1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성적인 시 읽으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저 아직 젊은거죠? ㅎㅎ
비오는 날 휴일, 오후 출근도 운치 있어요!
벌써 플라타나스 낙엽이 거리에 날립니다.

프레이야 2009-09-12 18:57   좋아요 0 | URL
미모로운 세실님 그럼요 젊지요^^
오늘 거긴 비오나봐요. 오후 넉넉하게 보내세요.
아, 이젠 저녁이네요. 편안한 저녁 보내시길..
전 어제부터 하루종일 진이 다 빠졌어요.ㅜㅜ

2009-09-14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령이 치과 예약되어 있는 날이다. 컴퓨터 방과후 수업까지 하고 온 아이를 간단히 뭘 먹여 치과에 데려갔다. 예약시간보다 20분정도 늦었다. 그래도 앞에 사람 진료가 밀려서 오히려 가서 더 기다렸다. 지난 주에는 썩은 어금니, 그것도 영구치가 밀고 올라오는데 그냥 두어 뿌리도 남은 것 없이 옆으로 완전히 누운 것 하나를 뽑고 왔었다. 오늘은 윗니 중 구멍이 뻥 뚫린 이를 치료하러 간 거다. 그리고 다른 어금니 하나도 뽑았다. 이미 영구치가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고 있어서 뿌리가 남아있지 않다고, 뽑아야한다고 했다. 그러마고 동의했다. 

제법 의젓하던 아이가 진료대에 눕자 조금 겁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썩은 이 치료를 시작하는데 조금 있으니 아이가 소리를 조금씩 내기 시작했다. 그냥 얕은 신음소리 비슷한 것. 대기실에 그냥 앉아 있으라는 간호사 말을 옆으로 살짝 물리고 아이가 보이지 않을 만한 위치에 서서 치료하는 걸 지켜봤다. 옆에 가서 바들바들거리고 있는 통통한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가 옆에 있으면 더 엄살 부린다고 오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의사 선생님은 아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프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렇게 엄살부리고 소리내어봐야 나을 거 하나 없는데 뭐하러 네 힘 빼고 그러느냐고, 엄살 부리지 말고 참고 있으라고, 그러는 거다.  엄살이라니, 그 정도 신음소리가 엄살인가.. 나라면 병원 떠나가라 소리질렀을 건데..

처음 몇 마디는 넘겼는데 갈수록 의사의 말이 좀 야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잘 참아보라고 토닥거려주면 좋을텐데 뭐하러 저렇게 쌀쌀하게 구는지 속이 무지하게 상했다. 치료는 생각보다 길었고 아이는 급기야 눈물을 줄줄 흘렸다. 결국 아이가 너무 아파하는 것 같으니까 그제야 마취주사를 놓았다. 그냥 참고 하면 될 정도로 아픈 건데 네가 그리 못 참으니 주사 안 맞아도 될 걸 놓는다, 이러는 거다. 내가 보기엔 아이가 너무 잘 참는 편이었다. 나라면 아, 나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난 겁이 나서 15년 전 치과 치료 받고 어금니 하나 씌운 이후로 한번도 치과에 가지 않고 있다. 아휴, 치과치료는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하기야 치과 뿐일까마는.

주사를 맞은 후로 아이의 신음소리는 없었고 한참 시간이 더 걸렸다. 치료를 마치고 일어서 나온 아이를 꽉 안아주고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시울이 촉촉해있었다. 그리곤 바로 수업시간 다 됐다며 그 상가 5층의 어학당으로 올라갔다. 아이를 보내고, 겉보기보다 훨씬 깊이 썩어있어서 치료시간이 길어졌다는 말을 듣고 의사에게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하고, 보험적용 안 된다고(썩은 이 치료가 보험적용 안 되나? 몰라) '얼마'라고 하는 대로 지불하고,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교시 마치고 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좀 아파." 

"마취 풀려서 좀 아플 거야. 잘 참고 마치고 와. 알았지." 

"응, 그런데 그 의사 선생님은 내 고통을 조금도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대. 되게 까칠했어." 

"그래 성격이 그런가 봐. 좀 까칠하더라. 그지? 그래도 우리 희령이 잘 참고 치료 잘 받던대."   

난 아이의 저 말이 왜 그렇게 마음 아픈지.. 아이가 상처입은 마음이 더 아프다. 작은 구멍 아래로 썩어있는 부위가 깊고 넓었다니.. 양치질 잘 하고 앞으로 예방하는 게 더 낫겠지?, 라고 말해줬지만 속으론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기다 더 힘들었다. 큰 아이 어릴 적 안과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나고 또 다른 일도 생각나 잠시 망연했다. 고통은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아프지? 그래그래.. 조금만 견뎌보자, 이렇게 곁에서 그 고통을 지지해주는 것도 고통을 덜어주는 법이지 않을까.   

뜬금없이 시 하나..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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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9-09-10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속한 의사선생님때문에 더해진 아픔이, 엄마덕분에 많이 누그러졌을 것 같아요.
어쨌든 환자를 '나무라는' 의사선생님은 너무해요.

프레이야 2009-09-11 00:52   좋아요 0 | URL
좀 속상했던가 봐요. '나무'라는 의사 '너무'해요.ㅎㅎ
오늘 이 글감으로 일기 쓰는 것 같더군요..

카스피 2009-09-10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박하게 들리겠지만 그 치과 선생님 입장에선 어찌보면 매일 매일 아프다고 난리치는 환자들을 봐야되니 그 고통의 비명소리에 둔감해 질수 밖에 업지요.
하지만 그래도 그분은 좀 양심적이네요.요즘 의료 수가가 낮다보니 환자가 아프다고 난리치면 얼씨구나 고통을 없애준다고 전신 마취를 권하는 의사도 있지요(특히 소아 치과는 더하답니다).이건 보험도 안되과 돈도 무진장 들고 몸에도 안좋고 차라리 뭐가 아프냐고 타박하시는 의사 선생님이 더 양심적이지요^^

프레이야 2009-09-11 00:54   좋아요 0 | URL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성격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날마다 듣는 소리니 얼마나 지겨울까요..
그런데 치과에서 전신마취까지 권한다니.. 좀..

행복희망꿈 2009-09-1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과치료~~~ 정말 고통이지요.
요즘 아이들이 저희때보다 치아가 더 약한것 같아요.
저희집도 한 명씩 돌아가면서 치과에 간답니다.
희령이도 많이 아프고 힘들었을것 같네요.
병원에 가보면 조금만 배려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되더라구요.
저희 큰 아이는 사마귀때문에 피부과에 갔는데, 아프다고 소리를 조금 질렀더니 야단아닌 야단을~~~
아이가 조금만 다독여주면 편안하게 치료받을 수 있을텐데 아쉽더라구요.
어쨋든 치료 잘 마치고 앞으로는 치아관리 잘 하길 바랄께요.
뜬금없이 시 하나~~~ 좋네요. ^^

프레이야 2009-09-11 00:55   좋아요 0 | URL
아이가 안 그래도 아픈데 야단까지 맞고 마음 무척 상했겠어요.ㅜㅜ
양치질 이제 잘 해야할텐데요..

2009-09-11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09-09-1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보니 그냥 제 어린 시절이 조금 생각이 나네요.
저는 어릴 때 아파서 치료받고 있는데 어머니가 옆에 계시면, 어디 가서 계시지 왜 옆에 그렇게 서 계실까..
하고 생각하면서 아파도 안 아픈 척 하고 그랬거든요.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때는, 어머니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파하는 게 왠지 부끄러웠거든요.
(물론 치과치료는 많이 아프니까 좀 다르겠지만요.)
그래서 그런가요. 저는 그 야박한 의사를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네요.^^;

프레이야 2009-09-11 20:19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어릴 적 그 마음 뭔지 좀 짐작되어요.
저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근데 아들과 딸이 좀 다르긴 할거에요^^

순오기 2009-09-11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아프다는 걸 인정해주고 토닥거리면 되는 건데...
우리동네 이비인후과 의사 하나가 오는 아이마다 야단치고 울리고 십수년 지켜봐도 난리가 아니었어요.
엄마들 입소문이 얼마나 무서운데~ 10년을 다니다 내가 한마디 했어요. 말이야 점잖게 했지만...
"환자들이 귀찮으십니까? 10년을 봐도 참 어지간하십니다. 환자들이 선생님 고객인데 어떻게 그리 함부로 하십니까?" 간호사한테도 함부로 해서 자주 바뀌고...결국 의사의 인격이 안된다는 얘기죠. 요즘 파리 날리고 있어요.^^

프레이야 2009-09-11 20:19   좋아요 0 | URL
역쉬 우리 오기언니답게 한마디, 잘 하셨어요.ㅎ
넉넉한 인품이 아닌 거죠.

하양물감 2009-09-11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태까지 치과를 하넌도 안가봤어요. 그래서 그 고통을 잘 모르르는 편이지요. 대신 남편이 이가 엉망이라 한솔이 치아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양치질을 아주 즐거워하는 한솔이랍니다... (^^)

의사선생님이 조금 더 아이의 입장이 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의사입장에서도 여러 고충이 있겠지요. 서로가 다 힘든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이야 2009-09-11 20:20   좋아요 0 | URL
저도 15년 전 받고 여태 한 번도 안 갔어요.
아, 언젠가 플라그제거 하러 간 적 있는데, 영 기분이 ..ㅎ

조선인 2009-09-1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음에 드는 곳을 찾느라 지난 5년 동안 치과를 열 번도 넘게 바꿨어요. 이제 겨우 안착한 곳은 버스로 4정거장쯤 되는 곳인데, 그래도 드디어 친절한 선생님을 만나 기뻐하고 있답니다. 좋은 선생님 만나기 참 힘들어요. 에휴.

프레이야 2009-09-11 20:21   좋아요 0 | URL
친절하고 따뜻한 선생님, 분명 있어요.
아이 치과도 늘 가던 곳이 있었는데 이번에 오랜만에 갔더니 다른 곳으로 이전준비 한다고
없어진거에요.ㅠ 좋은선생님 만나면 복이에요.

하늘바람 2009-09-11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치과 바꿔야겠어요. 아픈데 아파도 참아요 많이 아플거예요. 잘참았어요 하면 위로받는듯해서 그나마 참을 수 있는데 넘하네요. 희령이 참 기특해요

프레이야 2009-09-11 20:23   좋아요 0 | URL
아이들은 정말 달래가며 하면 훨씬 나을 건데 말에요.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특히요.. 그래서 소아과 의사도 좀 따뜻한 의사가 좋더라구요.

다락방 2009-09-1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사들의 매너리즘일까요.
저도 얼마전 이비인후과에 가서 제 증상을 설명하려는데 제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자기 설명을 먼저 들으라는거에요. 그리고 나서 다시 제 증상과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를 얘기하려고 하니까, 필요없는 말은 하지 말고 증상만 얘기해요, 증상만. 이러더라구요.
정말 잘 되는 병원이고, 환자가 줄 서 있는건 알지만 아 진짜 야속하더라구요.

희령인 정말 잘 참았네요. 어른인 저도 치과는 겁나던데 말예요. 아, 정말 야속한 닥터 같으니라고.

프레이야 2009-09-11 20:24   좋아요 0 | URL
실력만이 다는 아닐텐데 말에요.
우리 다락방님도 속상했겠어요.ㅠ
저, 일곱번째 파도 읽기 시작했어요. 설레요, 결말이..ㅎ

같은하늘 2009-09-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과치료는 정말로 겁나는 일이예요.
저도 얼마전 스켈링하러 갔다가 엄청 고생하고 왔지요.
그나저나 의사샌님 의사이기전에 따뜻한 인간이었으면 좋았을걸 그랬네요.

프레이야 2009-09-18 19:49   좋아요 0 | URL
저도 치과가 제일 싫어욧.
의사이기 이전에 사람.. 맞아요, 맞아^^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그놈의 미운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나이 마흔 고개를 제대로 건사하기란, 가을바람처럼 솔솔 불어드는 흔들림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내 감정에 휘둘려 취하기를 제대로 건사하기란, 집착과 헛된 욕심들을 제대로 내려놓기란,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인 얼굴로 내 얼굴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과연 그래야 잘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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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9-0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고정희님 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 2009-09-04 23:29   좋아요 0 | URL
꿈섬님 고마워요.^^

바람결 2009-09-05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하나라도 제대로 건사할 줄 알면 참 좋겠습니다.
고정희 님의 시 한 편이 제겐 '작은 비수'가 됩니다.
모쪼록 내내 잘 건사하시기를, 내내 평안하시기를요!

프레이야 2009-09-05 09:1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댓글이 제겐 오늘따라 더, 낮은 기도의 말 같습니다.
차분히,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힘이 되어 고맙습니다.

2009-09-05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5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09-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것들을 건사하려면 인간의 도를 넘어서야하는건 아닌지...
그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건사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프레이야 2009-09-06 05:56   좋아요 0 | URL
그러지 못하니 천생 사람이죠 뭐.
인간의 도는 넘어서지 못하겠지요. 죽을때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