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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소녀 ㅣ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유카탄 반도 남쪽의 면적 약 11만Km2, 인구 1천 4백만의 국가. '영원한 봄의 나라'로 불리는, 찬란했던 마야문명의 중심지. 6월 24일자 모 신문에서 과테말라 명예 영사관, 이종균 재해병원 원장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과테말라와 한국은 지난 1962년 10월 24일 수교했다. 과테말라는 6.25 한국전쟁 때 7천704달러를 원조하며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바 있다. 과테말라는 국민의 인종 구성에서 마야 인디언이 전 인구의 55%를 차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 마야문명의 중심으로 유명하다. 마야문명은 체계적인 신성문자, 정밀한 태양력, 영(0)을 포함한 20진법, 세련된 조각, 회화 등 16세기 초 스페인에게 점령 당하기 전까지 고대사회에서 가장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소녀>를 손에 들고 있었던 나는 지면을 많이 차지하고 있던 이 기사가 너무나 크게 눈에 들어왔다. 과테말라와 우리나라는 역사적인 시련이나 국민성 같은 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이 원장은 1997년에 과테말라를 다시 찾았을 때, 오욕의 역사와 잔인한 36년간의 내전(1960-1996)에 마침표를 찍고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과테말라의 진면목을 재발견했다고 밝혔다. 비록 그동안 숱한 내.외환에 시달렸고 영토는 작을지라도 풍부한 자연자원과 낙천적인 국민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찬란했던 문명을 이루었던 마야인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후손들이 이제 막 어둠에서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나무소녀, 가브리엘라는 그런 후손들 중의 한 사람이다. 누구보다 강하고 자존심이 세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뭇가지를 꼭 잡듯 꿈을 놓지 않고 사람이 존엄하다는 진실을 체현하려는 열여섯 소녀였다.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탈출하여 멕시코 국경의 난민촌에서 살고 있는 실재인물의 육성으로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하는 작가의 변이 더욱 뜨겁다. 그래서인지 솔직대담하게 그려내는 장면들 앞에서 전율하였다. 마야인들이 대지와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 앞에서는 숙연해지기도 했다. 인디언들이 자연을 바라보고 자식들을 가르치는 대목에서는 아름다운 공명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형제를 사랑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매설하지 않는 인디언들의 태도에서 잔잔하지만 여리지만은 않은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가브리엘라는 본능처럼, 자궁을 찾아 기어들어가듯, 나무를 오른다. 높이 더 높이... 오를수록 하늘이 가까이 있다. 그곳에 올라 있으면 꿈을 잡기도 더 쉬워질 것만 같다. 하지만 나무(여기선 마치치나무가 자주 등장한다)는 가브리엘라의 영원한 고향이, 엄마가, 되지 못할 것 같아 보인다. 그녀는 나무 위에 앉아 죽음을 피할 수 있었고 그 모든 잔인한 장면들을 보고도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그녀로 하여금 죄책감에 빠지게 하고 꿈에 대한 실날같은 희망을 향한 힘도 무력하게 한다. 나무는 이제 정신을 고양시키기는커녕 자신을 비참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고, 유일한 혈육인 막내 알리시아도 팽개치게 한 꼴이 되었다.
그러나 나무는 역시 살아있었다. 가브리엘라는 쓰레기더미 같은 난민수용소를 빠져나오다가 문득 저주스러운 나무를 피하려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히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상처를 잊기 위해 다른 것에 몰두하며 그것을 회피하려고만 하였다. 이제 그녀는 나무를 피하기보다는 그것을 타고 더 높이 올라가기로 결심한다. 달라진 것은,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동생 알리시아와 함께 가는 길이라는 점이다.
가브리엘라가 나무와의 일체감을 되찾게 된 건 여섯살의 알리시아 덕분이다. 충격과 분노와 상처로 말을 잃어버린 동생, 어려서부터도 자신 마음속의 이야기와 스스로 대화할 줄 알았던, 자신의 분신 같은 동생으로 하여금 가브리엘라의 삶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그것은 죽은 것 같아 보이는 나무둥치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같다. 땅속을 깊이 파고 내려가 온갖 굴욕을 견디고 있는 나무의 뿌리. 가브리엘라에게 닥친, 상상도 못 했던 비참한 현실은 과테말라가 '영원한 봄의 땅'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그녀에게 있어 '봄의 땅'이란 역설적인 의미를 준다.
가브리엘라는 지금 어딘가에서 행복한 삶을 가꾸고 있을 테다. 나무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나무의 끈질긴 생명처럼, 그렇게 살아있다.
ps : 이 책의 종이는 재생용지로 보인다. 코를 대면 짙고 씁쓸한 나무냄새가 난다. 6월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달이라 전쟁과 평화를 소재로 한 책을 아이들과 읽고 이야기 나누기에 좋다. 지금도 세계 84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나무소녀>는 전쟁의 상처와 아픔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리고 전쟁이 사람을 어떻게 미쳐가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고학년이상의 학생들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미화하지 않고 담담하고 써내려간 글에서 작가의 절제된 감정이 전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