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 있어서 시란? 시인이란?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인이 더 많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시를 쓰나보다.
내가 시를 다시 읽게 된 건 김경주 시인의 시 때문이었다.
김경주 시인을 알게 된 건 아마도 김혜리의 인터뷰 집을 통해서 였던가? 김경주의 시를 읽고 나니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은 어떤 시를 쓰는지 궁금했고, 이런 저런 시집들을 기웃거리다가 내가 꽂힌 시가 김민정 시인의 시들이었다.
시인은 뭔가 고상하고 세파에 시들지 않고 속세에 때 묻지 않은 이미지를 떠오르기 쉽상인데
김민정 시인은 ‘누가 그런 시답잖은 소릴 지껄여’하며 내 등짝을 후려치는 시를 쓴다.
김경주나 김민정의 시를 읽다 보면 ‘시를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하지만 시집을 덮을 때 즈음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볼 수 있다.
‘그럼 시를 어떻게 써야 되는데!!’
그런 그녀의 새 시집이면 더 좋았을 뻔했지만 에세이라도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인들이나 작가들은 어떤 단어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말하기도 한다. 어느 시인은 ‘발목’이란 단어를 좋아한다지. 발목, 발목, 계속 읽다보면 정말 발목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김민정 시인의 이번 에세이의 제목은 [각설하고,]다.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기상천외한 제목의 작명자 치곤 너무 평범한 제목이 아닌가? 어쩌면 ‘각설’이라는 단어에 대한 시인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 아닐까? 각설, 각설 계속 읽다보면 역시나 ‘각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각설하고, 조각보 얘기를 해보자.
시인은 조각보 전시회를 보고 왔다고 한다. 몰랐다 조각보를 전시까지 하는 줄은. 시인은 누구든지 데려가 보여주고 싶었다지.
“ 뛰어난 예술성을 평가해보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 작업의 고유성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주고 싶어서였다. 조각보를 이루는 천 조각 하나하나가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엮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할머니가 시집올 때 입은 당의와 청홍 치마저고리를 이어 붙이고 그들의 한복에 물을 들이고 조합하는 과정 속에 저마다 생겨나는 갖가지 문양들, 예상치 못한 패턴들의 조화가 감탄사를 절로 불러일으키는 까닭이다. 서로 다른 천과 천이 자석이 아니고서야 내 손과 손이 바느질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야 하나 될 수 없는, 온전히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의 귀함....”
어느 건물 옥상에서 거리 부감 샷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순간 눈에 들어온 조각보. 황급히 조각보로 씌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시는 할머니를 붙잡았다. 보조 출연을 부탁하고 흔쾌히 승낙해주셨는데
감독님 왈. “빼, 빼”.
군중 씬에서 조각보 하나가 무슨 대수겠냐마는 어찌나 서운하던지.
시인의 말마따라 그 화려한 빛깔들은 언제 다 사라졌을까?
시를 읽을 때 마다 느낀 건 나에겐 시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만한 지능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다.
세상엔 온통 불가사의한 시들 뿐인데, 김민정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 그저 단편적인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것 뿐. 그럼 안 되는 건가? 어쩔 수 없다. 능력 밖이니까.
그래서 빨기 바빴던
수많은 유방들의 속사정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가족은 탄생할 수 없다.
[밤에 뜨는 여인들] 중
11페이지에 달하는 장시고 그에 걸맞게 여인(들)의 삶을 말하는 시일텐데, 나로선 전체적인 의미를 말할 재간이 없고 그녀의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처럼 성적인 함의, 혹은 중의의 묘미에 낄낄댈 뿐.
둥근 사과처럼
지구도 둥그니까
칼로 한번 깍아보라고 했다.
[밤에 뜨는 여인들] 중
그렇다고 시인이 색녀도 아니고(...모르겠다. 나랑 무슨 상관?) 온통 성적인 것만 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러고 보니 에세이 집에 ‘시 쓴답시고’ 시는 이거 달랑 하나?
시인은 최승호 시인을 만났나 보다. 시인의 시집 제목으로 최 승호 시인이 진지하게 만년필로 쓴 제목이 ‘불닭’이었다지. 평론가의 충고에 의기소침 한 시인에게 최 승호 시인은 “시, 네 멋대로 갖고 놀아봐라 ”격려하셨다고.
이성복 시인을 ‘성복 언니’라 부르고 싶다는 시인
겨울에 쓰러진 자전거를 ‘얼까봐’ 일으켜 세워 줬다는 시인.
‘잠깐 실례 좀 해도 될까요?’ 라고 말하면 될 것을 ‘잠깐 오줌 좀 싸고 올게요’라고 말하는 시인.
그런 시인의 시를 기다리는 독자도 어딘가에 있다는 걸 생각해 주시고
좀 더 시를 갖고 놀아 보시길.
그래야 나도 갖고 놀잖아요.
참 그거 따뜻해요. 그치요? 전 졸라 빠를 수 있는 거북이를 상상하며 졸라 빠를 수 있는 달팽이를 격려하고 기대하는 마음의 여유, 시로 배우는 것 같아요. 그게 아마도 사랑이겠죠.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의 다음 시를 기다리며.
(2014년 4월 25일 작성 )
김민정 시인의 세번째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간행을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