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이웃님이신 찔레꽃님이 쓰신 책이다. 길에서 주운 한자로 이 정도의 분량의 책을 쓰시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자의 한자 사랑에 경외심을 느낀다. 저자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리라.
책을 읽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걸 왜 읽고 있지?’ 나는 한자가 아니라 독자와 저자에 대해 고민했다. ‘읽는 사람’이 있고 ‘쓰는 사람’이 있다. ‘읽는 사람’의 목적이 있다면 ‘쓰는 사람’의 목적이 있다. 저자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책은 분명 쓰여 질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독자 입장에서는 어떨까?
만일 저자가 저자 자신을 위해 이 책을 썼다면 독자인 나로선 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만일 저자가 독자를 위해 쓰고 싶고, 책이 좀 더 많은 독자와 만나길 바란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몇 가지 제안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저자는 두 번째 책을 준비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한자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분들이 아니라면 나 같은 한자 문외한으로선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할 아무런 목적을 찾을 수 없었다. 텍스트는 있으나, 컨텍스트가 없다. 즉 끝까지 읽어야 할 아무런 맥락이 없다. (리뷰를 쓰는 모든 책은 읽고 쓰지만, 이 책만은 읽는 와중에 쓴다. 한자 문외한으로 언제쯤 완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1. 스토리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 받을 용기>가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 예상한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미움 받을 용기>가 대화 형식이 아니라 단지 강연 형식이었어도 그렇게 많이 팔렸을까?
김정선님의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는 얇은 분량이지만 쉽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책은 끝까지 읽도록 독자를 추동한다. 나는 ‘문법 소설’이란 별명을 붙였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 가요?>는 문법과 저자의 이야기가 챕터마다 번갈아 교차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법의 피로함을 이야기가 해소해준다. 이야기는 문법으로 숨이 막힐 즈음, 숨을 쉬게 해준다. 만일 소설이 삽입되지 않고 오로지 문법만 있었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2. 이미지
최근엔 표지 디자인에 공을 들인 책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독자로선 반길만한 일이다. 박솔뫼의 <머리부터 천천히> 같은 경우, 그냥 사고 싶다.
저자도 ‘포장’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은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아무런 포장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책에 게재된 모든 사진들을 명함보다 작은 크기의 흑백 사진으로 채워 넣다니! 아무래도 제작비 때문일까?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을 읽고, 어찌나 사고 싶던지.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이라 그런지 사진 한 장 한 장 허투루 찍은 사진이 없다. 이 정도만큼의 공을 들일 순 없을지라도 사진을 크게, 컬러로 실을 순 있지 않을까.
3. 염궁, 생각의 화살을 쏘다.
내용을 대폭 삭감하더라도 이미지에도 관심을 두신다면? 최근 발간된 숱한 한자 책들을 보더라도 한자 자체를 이미지화 시켜 좀 더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추세다. 책에 들어가는 사진 역시 칼라로 큼지막하게 넣어주면 좋겠다.
‘길’은 너무 방대해 보인다. 내용들이 너무 파편화되어 있어 책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인다.
파편화되어 있는 내용들을 어떤 식으로든 엮어야 하지 않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저자의 관점이지 독자의 관점이 아니다. 독자의 관점에서 엮어야 한다.)
스토리를 가미하는 여러 방식을 고민해 보시면 어떨까. 예를 들면 아이와 엄마, 아빠, 한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 혹은 여행 기간 동안 만나는 한자를 소개한다면?
여행기와 결합하는 방식은 어떨까? 궁궐이면 궁궐, 절이면 절, 혹은 어느 지역만으로 한정한다면? 혹은 전국 맛 집을 대상으로 삼고, 음식점들마다 대표 메뉴 사진도 큼지막하게 넣는다면? 또는 서울 지하철 역 이름 만으로 한정해도 책 한권은 나올 것 같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 따라 여행하며 거기에 나오는 한자들만 추려도? 한국화나 추사 김정희의 서예 작품만을 다룬다면? 혹은 한자 급수에 나오는 한자를 전부 다룬다면?
책을 읽어야 할 목적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주례사 비평’으로 써야 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과연 그게 독자에게, 또한 저자에게 도움이 될까? 첫 책은 저자를 위해 썼다면 두 번째 책부터는 독자를 위해 쓰시는 건 어떨지. 어찌되었건 저자는 이제 자신의 책을 가지게 되었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책장을 펄럭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스토너>를 읽고 독자인 나는, 저자들이 부러웠다.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 동반자가 있다니!
자신의 책을 펼치며 느끼는 짜릿함을 나는 느낄 수 없다니.
저자는 자신의 책에 대해 자부심과 짜릿함을 누리시고
부디 건필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