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그의 시대 이덕일의 역사특강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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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V 드라마 정도전이 한참 재미를 끌고 있다. 오랜만에 정통사극을 만나는 터라 반갑다.

대중을 위한 역사와 식민사관에 대해 비판해 온 이덕일이 바로 이 드라마팀을 대상으로 한 역사특강을 다룬 책이 나왔다. 조선의 설계자라 알려진 정도전에 대한 책이다. 책 제목인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서 알 수 있듯이 정도전과 정도전이 새로운 국가를 열기 위한 시대적 설명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덕일 답게 왜 이 시대에 정도전인지를 설명하며 책을 시작한다.

지금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도전이 살았던 쉰여섯 해는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역사는 항상 내적인 문제와 외적 문제를 복합적으로 봐야 하는데, 내적으로는 극심한 빈부격차, 즉 사회양극화가 심각했습니다. 소수의 구가세족이 나라의 나라의 모든 재화를 독차지했습니다.

...

소작인들에게 소출의 8~9할을 뜯어가던 고려 사회와 한달에 20~30만원 버는 폐지 줍는 빈민층들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는 한국사회는 과연 본질적으로 다른 것일까요? 고려는 이런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했고, 그 결과 정도전 같은 인물이 나와서 판을 엎었던 것입니다. (9쪽)

 

이덕일은 토지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고려가 패망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한다. 원래 고려는 전시과제도라는 토지제도를 운영했다. (농지 田과 땔감을 구할 수 있는 땅 柴을 뜻함) 그러나 원나라 지배체제 이후 관리들에게 더 이상 땅을 줄 수 없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토지겸병이 심해져 한 토지에 6-7명의 주인이 있어 농민들은 땀흘려 농사를 지어도 자기 손에 가져갈 곡식은 거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노비가 되는 경우가 흔해지게 되었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선왕, 충숙왕 등이 개혁을 하고자 했으나, 원나라를 등에 업은 부원배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개혁을 잘 하는가 싶었지만 신돈에 대한 의심으로 결국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소수의 구가세족들이 국가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신흥사대부들과의 토지문제가 불거진다. 

토지문제가 고려의 제일 큰 문제로 인식한 신흥사대부는 토지 주인을 한명으로 줄이므로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본 온건파와 토지제도 자체를 뒤바꾸려는 역성혁명파로 나뉘게 된다.

 

고려를 패망하게 한 가장 큰 사건 중에 하나인 위화도 회군역시 토지문제로 설명이 가능하다. 직업군인들에게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주어 군대를 운영했는데 구가세족들이 군인전마자 장악해 더 이상 군대를 운영할 수 없게 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요동정벌을 꾀하던 5만명은 고려의 유일한 정규군이었고, 이들이 회군했을 때 막을 수 있던 중앙군조차 없었던 것이다.

 

위화도 회군이후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는 이성계를 등에 업고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공사전적 즉, 토지문서를 불태우고 새롭게 과전법을 도입한다. 전국의 토지를 재측량하고 토지의 소유가 아닌 토지에서 세금을 받을 권리만 주게 했다. 기존 구가세족들의 재산을 불리던 토지가 국가와 왕실의 재원과 관료들의 녹봉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세력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신흥사대부들은 녹봉이 생기면서 혁명세력의 물적기반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더해 백성들에게는 소출의 8-9할을 세금으로 내던것이 1할 이하로 떨어지는 효과가 생기면서 백성들의 지지기반도 만든다.

 

바로 이렇게 조선왕조 개창의 기반이 된 토지제도를 설계한 것이 바로 정도전이다. 정도전의 이런 토지제도 개혁은 단순히 개혁적인 의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배기간 동안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게 된 것이 컸다. 게다가 정도전은 북위에서 수-당으로 이어진 균전제를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정도전이 토지제도만 개혁한 것이 아니다.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새로운 왕조의 개창을 설계했다.

 

하지만 조선왕조 개창의 근간이었던 토지개혁은 세종때 개인이 소유한 사전을 허용하고 세조때 단종 폐위에 앞장선 공신들에게 개인소유 사전을 대폭 허용한다. 토지문제에 있어 다른 입장이었고, 조선왕조 개창에 반대했던 온건개혁파들이 세조 이후 사림파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재등한다.

결국 토지제도는 100년전 고려말로 돌아갔다는 저자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조개창에 반대했던 온건파들이 사림파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한다는 점도 반복되는 역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사실 이덕일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꽤 많은 비판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개창과 정도전을 이해하는 입문서로는 이 책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관심의 폭을 넓히는 것이 좋겠다. 또한 이 책의 장점이라면 교과서에 배우던 이기론 등과 같은 개념에 대해 쉽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역사를 보는 근육이 조금씩 느는 느낌이다. 정도전을 알기 위해 한번 읽고 그외에 설명되는 부분들을 틈틈이 반복해서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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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의 덫
미키 맥기 지음, 김상화 옮김 / 모요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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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통해 질서와 계획을 이야기했던 그가 육아문제로 고민하는 자신의 딸에게는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는 조언을 한다. 그의 행동이 180도 바뀐 모순을 지적하며 이 책은 지적한다. 저자는 이 장면에서 하나 중요한 지적을 한다.

코비의 세계관에는 어떤 향수가 남아 있다. 남성은 제한된 이익이 아니라 덕(코비가 '보편적원칙'이라 부르는)에 의해 규제되고 여성은 자신의 배우자를 지원하고 자녀들을 돌봄으로써 소중한 것을 먼저 했던 상상 속의 과거에 대한 갈망이다.(13쪽)

스티븐 코비, 저자의 말을 들어보니 남성중심사회를 꿈꾸는 옛날 사람이다. 그리고 사실 스티븐 코비는 사기꾼이다. 스티븐 코비는 이 자기계발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결국엔 파산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파산 이유를 묻자 "자신은 그 7가지 습관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어쩌면 그 7가지 습관은 불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사람들을 현혹시켜 사람들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그 7가지 습관이라는 것도 그가  발견한 것인지 의문이다. 어디에선가 본듯한 그런 내용이니까.

 

자기계발서는 바로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기존 내용이 변화없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30년간 자기계발서들을 개관해보면, 대부분 새로움보다 구태의연함이 드러난다. 사실, 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특히 여성에 특화된 것이 아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들은 기존의 책을 그대로 베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0쪽)

그래서 자기계발서들을 일종의 사기서적이다. 마치 자신들이 새롭게 발견한 듯이 이야기하지만 결국엔 누군가의 책을 베끼거나 새로운 것이 없다.

 

미국 사회에서 자기계발은 흐름이 있다. 그런 흐름은 경제적 흐름과도 일치한다. 세계경제가 성장하던 시점에는 누군가 먼저 선점하거나 경쟁에서 승리할 때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는 정글같은 경쟁사회에서 승리하는 법을 다루는 자기계발 책들이 득세했다. 이러한 생존주의적 자기계발서에 대한 반발로 80년대에는 협상과 관련된 자기계발서와 피로해진 개인들을 위로하는 책들이 나온다. 2000년대에도 협상의 기술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힐링-긍정이 대두되는 것은 이런 자기계발시장이 계속 지난 일들을 우려먹는것임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2000년대에 등장한 협상, 위로 전 바로 90년대 후반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으로 보여주는 복잡하고 변화된 세상에서 변화만이 생존비법임을 이야기한다.

 

이런 자기계발서는 사회구조적 변화와 맞물린다. 애초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사회적인 관점이 부족하다.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는 건강보험에 예에서 보이듯이 국가가 건강보험을 도입하려는 것에 빨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미국은 건국초부터 개인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야 하고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는 개척정신과 기독교정신이 이상하게 결합되어 있다. 자수성가의 롤모델이었는데 미국도 196-70년대를 거치면서 계층 변화가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자수성가라는 관념을 놓치 못하고 있다.

기본적인 형성에서 성차별적인 구조이며, 개인들의 존재양식에 대한 가정에서 가부장적이고, 자화자찬의 뉘앙스를 지닌 전통적인 자수성가의 관념을 대체하는 '시달리는 자아 belabored self'라는 개념은 자아가 혹사당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주체로서, 그리고 자기계발을 위한 노력의 대상이라는 면에서는 객체로서 이중적으로 해당되는 표현이다.

시달리는 자아는 실제 일어나는 현상을 묘사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악화되는 고용전망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항상 취업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으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27쪽) 

 

아쉽게도 이 시달리는 자아는 우리나라에서 더 심각하다. 어릴때부터 목표달성을 위해 시달리고 경쟁을 당연시하고, 대학에 가서는 스펙을 쌓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또 회사에 들어와서는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그냥 시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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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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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이 대세다. 긍정이 모든 일의 기본처럼 느껴진다. 요즘 긍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죄악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긍정에 대해 '긍정의 배신' 이라는 제목으로 모두가 긍정을 이야기할 때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경제위기의 근본은 바로 긍정에 있다고 진단한다. 다소 무리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긍정이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봐야 한다. 미국에 긍정의 바람이 불어닥친 것은 2000년대인데, 2000년대 미국 경제는 호황이 지속된다.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긍정이 갖는 경제적 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경제학자,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긍정적 전망을 강요받는다. 미국식 긍정화를 선도했던 교회는 하나님이 집과 자동차를 주실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조차도 집과 자동차를 갖게 되는데 점점 장애가 없어지게 되고 이것이 긍정의 힘이라고 말한다. 긍정은 점점 부정이 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어느샌가 긍정은 강요가 되었다. 경제학자,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부정적 전망을 내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미디어는 온통 긍정적인 전망이 차지하고 그 뒤에 감쳐진 위험성을 경고하는 학자, 전문가들의 말과 글은 언론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긍정적 사고와 서브프라임 위기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고 본 케빈 필립스는 '나쁜 돈'(Bad Money)에서 '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과 함께 번영 설교사 오스틴, T.D, 제이크스, 클레플로 달러를 고발했다."(254쪽)

 

최근에는 긍정산업은 과학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다. 긍정하고, 행복하고, 감사한 사람들이 오래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긍정이 가지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마틴 셀리그먼으로 저자는 그이를 실제로 두차례 정도 만난다. 저자도 지적하는 바이다. 생물하박사인 저자는 긍정이 수명과 연관되었다는 연구결과가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긍정이라는 기준도 모호하고, 다른 여러 요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혈관계 질환과 관련해서는 과학적인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연구결과과 과학적이기 때문이다. 즉, 혈관계 질환 외에서는 긍정이 어떤 건강과 어떤 연관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도 비슷하다. 긍정학자들이 주로 거론하는 수명이라는 것이 60~100세에 달한다. 거꾸로 맞춘 연구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자들이 수십년에 걸쳐 추적한 것이 아니라 긍정산업이 대두된 시점부터 거꾸러 찾은 것이다. 수명에 연관이 큰 유전이나, 질병에 대한 고려가 없다. 예들들어 수녀였으니 다른 모든 조건은 동일하다고 가정하는(결과를 내기 위해 맞춘듯한 느낌이 든다.)

 

긍정을 기반으로 하는 동기유발산업은 이제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긍정학이 동기유발산업으로 발전한데에는 미국의 경제현실과 관련되어 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부터 도입된 기업의 정리해고는 미국에서의 일상이 되었다. 여기에 긍정, 행복에서 출발한 동기유발산업은 정리해고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고 더더욱 기업의 문제도 아니고 자신의 책임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리해고는 더 좋은 기회라고 이야기한다. '누가 내 치즈~' 처럼.. 사실 동기유발산업은 개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긍정한다고 일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리해고된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뭔가 의심쩍다. 결국엔 정글같은 경쟁체제는 유지해야 겠고, 경쟁에서 뒤쳐진 이들이 사회적 불만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부, 기업, 산업 그리고 기독교의 결탁!

 

개인적으로 '긍정'을 기독교에서 몰고 왔다면 불교에서 내세운 건 바로 '힐링'이다. 결국 '긍정'이나 '힐링'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는 긍정을 통해 사회를 버블로 이끌려는 경제계, 직원들에게 고통을 잊게 해주는 긍정이라는 아편이 필요한 기업들, 정권을 계속 누리려는 정치계 그리고 새로운 모티브가 필요한 종교계가 결탁한 대국민 사기극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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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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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에 대한 반성을 담고 책을 주제로 독서중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기계발에 대한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 사회적인 문제에서 독립시켜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으로 치부하며 개인의 능력을 계발해야 함을 강조한다.

더 이상 서점의 '경영 담론'은 경영 과학을 통한 생산성 증가 같은 전문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자가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적인 동기 부여를 위한 미사여구의 개발에 역량을 집중했다. 경영 담론은 예전에도 많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삶을 '관리'하고 계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경영'과 '삶', 혹은 '노동'과 '삶'은 하나가 되었다. 스펙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뻔한 내용인 줄 알면서도 자기 계발 도서를 읽으며 동기를 부여 받는다. 이런 방법은 '하면 된다'를 부르짖으며 공업화를 이룩한 한국인의 심성에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투혼'을 통해 주어진 인프라 이상의 성적을 뽑아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표어는 '하면 된다'의 연장선상에서 하나의 태도를 정당화한다. 국가와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발상은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탁월한 전략이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의주의 개혁, 한국에서는 IMF 외환 위기로 테일러주의가 붕괴한 자본주의 세계엔, 그리고 노동자의 열정을 착취하려는 '펌프질'만 남았다. '열심히'로는 부족했다. 그건 미적지근한 단어였다. 한 TV광고는 '당신이 머리가 아픈 건 열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열정을 갖지 않은 당신은 죄인이다. (102쪽)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 경영의 대세가 된 것은 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이다. 회사에 충성을 다하면 회사는 정년은 아니더라도 꽤 오랜기간 직업이라는 안전장치를 제공해오던 회사와 직원간의 관계가 송두리째 무너진 것이다. 회사는 이제 직원을 더 이상 사람이 아닌 회사 자원의 하나인 인적자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회사 경영이 자원을 적재 적소에 활용하고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적자원은 깊은 지식과 함께 다양한 능력(역량이 불리는)을 갖춰야 한다. 이 틈을 타고 2000년대 자기 계발서들이 직장인과 예비 직장인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이 흐름은 단순히 직장인에서 멈추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 처지임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결국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내가 나를 관리하지 못한 나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라는 단어는 일종의 불명예가 되었다. 이 사회의 노동자 수는 결코 줄지 않았지만, 자신이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노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새로 등장한 '자기 계발' 담론들은 그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직시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 (50쪽)

...

각종 '경영의 기법'의 최종 과녁은 다름 아닌 '나'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언제나 도약을 준비하는 자세로,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경게를 늦추지 않고, 자발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혁신과 쇄신에 힘쓰는 '1인 기업' 으로서의 나.

이런 '경영 정신'의 뒷면에는 하나의 강박적 주문이 새겨져 있다. '나는 결코 노동자가 아니다. 내가 지금 노동자처럼 일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즉, 나는 누군가의 명령이나 받으며 시키는 일을 하는 그런 수동적이고 나태한 노동자가 아니다. 능력을 계발하고, 인맥을 형성하고, 몸값을 올리고, 비전을 갖고, 성공과 행복을 향해 달려가는 능동적인 존재이다.

자기 계발 담로은 '나'를 경영하는 주체로 인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상품으로 대상화하여 시장에 내어놓은 담론이다. 다이어트, 성형과 같이 육체를 관리하는 일이 자기 계발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51쪽)

사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일반적인 직장인이 아닌 우리가 생각하기에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왜곡되어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가를 보여준다. 프로게이머, IT종사자, 문화산업 종사자들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래서 돈이 아닌 열정이 중요하다고 강요한다. (영화시장과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서 보면 세계적이지만 영화계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계가 유지되기 힘든 수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 돈을 따지고 들면 열정이 부족하다고 판단해버린다.)

 

하지만 책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사회전체와 맞닿아 있다. "사기계발"이라는 주제로 책읽기를 하다 보니 자기계발에 주제를 두고 독서를 하다보니 후기가 전체를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개인 스스로가 경영자라는 마인드를 강요하는 것은 특정산업이나 전체 노동시장이나 똑같다. 결국은 당신이 못해서 성공하지 못했고 실패한 것이라는... 사회와 국가가 감당해야 할 부분을 개인에게 전가시키고는 시치미를 뚝 떼는 참 염치없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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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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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남과남 북과북에서의 전쟁을 마주하게 된다. 군이 아닌 민간인끼리의 학살을 어떻게 봐야 할까.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쟁 중 전투와 상관없이 후방에서 사망한 민간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마을에서 어떤 전쟁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남과 북, 미국과 소련이라는 눈에 보이는 요소 이외에도 친일과 항일운동이 함께 내재되어 있고, 양반제도가 무너지는 과정과 신문명과 옛것을 추구하려는 전통과의 마찰이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까지도 양반가문에 의해 마을이 좌지우지 되었다. 특히 소작문제는 한국전쟁 당시까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런 과정에서 양반가문에 억눌렸던 머슴, 소작농 들이 인민군의 진주와 더불어 그들의 목소리를 냈고, 반대로 국군의 재점령으로 반대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양반가문 사이에 잘 나가는 문파와 그렇지 않은 문파가 있다. 잘 나가는 문파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자연스레 그들의 기득권세력을 유지해나갔고 자연스럽게 우익세력에 가담한다. 그런다 그렇지 않은 문파에서는 비교적 사회주의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항일운동 및 건국운동에 앞장서고 인민군의 진주시 인민위원장 등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국군이 들어서면서의 상황은 뻔하다. 이 뿐만 아니다. 미국의 남한 신탁통치와 더불어 기독교가 자연스레 이승만 세력을 지원하는 우익의 성향을 띄게 된다. 그러나 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한 공산군의 남한 점령은 기독교에 심각한 위기이다. 특히나 기독교세력에 의해 핍박받았던 무속인들은 기독교세력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마찬가지로 국군이 점령하고 기독교는 굳건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이런 사회적 현상을 잘 보여주는 다섯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과연 남한내부에서의 전쟁이 어떠했었는지를.

 

1장 진도 동족마을 X리의 친족학살 사건

서울경기를 제외하면 꽤 많은 씨족마을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진도의 경우도 창녕 조씨나 밀양박씨에는 밀리나 임진왜란 이후 자리를 잡은 현풍 곽씨가 있다. 현풍 곽씨는 장파, 중파, 계파의 3개의 파를 이루어 X리에 자리잡았는데 일제시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준비 등이 중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에 반해 계파의 경우는 별로 세력을 갖지 못하면서 각 파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다. 갈등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보도연맹 사건 때 였는데 계파 출신의 경찰에 의해 곽씨 일가 5명이 처형당하면서였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 사건에 앙심을 품었던 좌익계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다. 경찰 가족에 대해 아이 부터 노모까지 처형하는 등 족보상 약 110명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면서 좌익계열 들이 입산을 하고 남은 가족 약 20여명에 대한 보복 학살이 이루어진다. 각 파간에도 큰집은 우익, 작은 집은 좌익 등으로 구분이 되었기에 파 간 학살도 있었지만 크게는 중파와 계파간의 갈등이 컸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파는 흩어지는 등 세력이 약해졌고 인민군의 희생자였던 계파가 세력을 찾았다고 한다. 결국 남북간의 정치 갈등이 진도 X리 친족내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고향을 등져던 부역자가 고향에 돌아오길 희망했지만 고향 측의 반대로 인근마을에 살았다고 하니 친족간의 갈등이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장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 마을의 시련

영암의 영보는 전주최씨와 거창신씨의 동성마을이었다. 영보의 경우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받아들여져 1930년대에 영암공산주의자협회가 만들어졌고 소작이전에 따른 불합리한 소작에 항의한 영보농민시위 등이 일어났다. 영보 마을 역시 해방후 우익, 경찰에 의해 곤란을 겪기는 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인민위원들을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한다. 그리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영암의 모스크바라 불리는 영보사람들은 화를 피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근처로 피란을 간다. 상황이 개선되면서 전원자수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해방후 인민군 점령시 일부 처형된 이들이 있긴 하였지만 근처 마을 구림과는 달리 학살은 없었다. 이는 일찍 부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양성씨간의 유대관계가 좋았고 또한 농민시위에서 보여준 지도층 지도력에 양반,평민간의 관계 또한 좋았기 때문이다. 반면 근처 구림마을에서는 좌익에 의한 교회방화학살사건으로 우익 쪽 주민 32명을 학살하였고, 반대로 경찰이 진입하면서 마을주민에게 사격을 가해 7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림마을의 경우는 보수적인 양반동네라 평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고 이에 대한 보복이 일어난 것인데 이에 반해 영보는 마을 전체의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했다. 그렇더라도 사회주의라는 딱지에 의해 영보의 두 가문은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3장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부여군에서는 두 동족마을이 있었다. 진주 강씨의 A마을은 민촌(평민)마을이었고 B마을은 세도정치로 유명했던 풍양조씨의 반촌(양반)마을이었다. 조선이 멸망하면서 형식적으로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양반 출신들은 평민들을 하대하였고 조선시대 마냥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두 종족마을에서도 그런 관계는 지속되어 B마을에서 A마을을 하대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성격만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A마을은 사회주의 경향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온데 반해 B마을의 경우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보수적인 색체가 강했다고 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을 폭발시킨 것 역시 보도연맹 사건인데 보도연맹 사건에 A마을 4명이 처형당하게 된다. 이후 인민군이 들어오자 A마을이 위상이 강해졌고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자 경찰과 A마을은 B마을을 포위, 연행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A마을은 B마을의 물건, 집기 등을 마음대로 가져가고 B마을 사람들이 돌아온 후에도 이런 약탈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갈등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홍수에 대한 두 마을의 필요에 의해 두마을은 화해를 하게 된다. 게다가 학교에 가기 위한 나루터가 B마을에 있어 A마을의 현실적 필요도 관계 개선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두 마을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갈등이 증폭이 가져올 폐해를 깨달았다.

 

4장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당진의 합덕면은 특이한 갈등 양상을 띠고 있다. 종교-사상의 갈등, 성씨간의 갈등, 지주-마름간의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주중에는 지방에 거주하는 재지주와 거주하지 않는 부재지주로 나뉘는데 부재지주의 경우 마름(소작농중에서 세우기도 함)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소작을 운영한다. 재지주의 경우 유연하게 소작 정책을 펼치거나 덕을 배풀기도 하는데 마름의 경우 소작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마름과의 갈등이 굉장히 컸다. 합덕면의 경우는 종교 갈등의 양상도 보이고 있다. 천주교에서 H마을의 상당한 토지를 사들였는데 이를 소작을 하였다. H마을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편한 조건에서 소작을 할 수 있었고 우익청년회가 조직되는 등 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보수화되었다. 반면 주변 Y마을의 경우는 종교-사상적으로 틀렸고 농수문제로 H마을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H마을을 습격해 신부 등을 압송하고(후에 처형됨) 주민 8명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자 Y마을 청년 모두가 H마을 청년단에 끌려가 취조를 당해야 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합덕면에서는 이와 더불어 성씨간 갈등도 나타났다. z마을에서는 해주 오씨, 의령 남씨, 선산 김씨 등 세 성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 중 오씨가 영향력이 가장 약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남씨 일가의 남정갑은 면서기를 하며 징병,징용을 담당했고, 남정갑의 아버지는 일본인 부재지주의 마름노릇을 했는데 해방과 동시에 남정갑의 아버지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조리돌리기를 당했다. 서울로 피신한 남정갑 부자는 미군정과 함께 돌아와 조리돌리기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오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난다. 인민군이 진주하자 세상이 바뀌어 남정갑 등 남씨 일가를 처형하게 되는데 이에 오씨 일가 및 남씨일가의 머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이 진주하면서 상황이 바뀌어 선별된 부역자가족은 모두 쫓겨 나게 된다.

 

5장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금산군 부리면은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 두 양반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1931년 부터 1960년까지 단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길씨와 양씨 중에서 면장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두 성씨는 혼인으로 돈독한 관계를 이루어왔다. 일제시대 길씨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반면 양씨는 대체로 우익편에 있었다. 특히 길씨 중에서 주류는 우익에 길씨 비주류와 양씨는 우익에 대체로 섰었다. 보도연맹과 인민군 점령시 길씨, 양씨 일가 중에서 처형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다른 마을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고, 대규모 학살도 없었다. 이는 두 가문이 사돈으로 돈독하게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 금이 간 사건이 발생한다. 길씨를 중심으로 한 좌익들은 인민군 후퇴 후 근처에서 빨치산이 되는데 1950년 11월 2일 우익을 중심으로 한 결의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빨치산이 결의대회장을 습격해 78명을 학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우익을 대변했던 양씨집안과 비주류 길씨 집안의 많은 이들이 학살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길씨와 양씨간의 관계는 깨어졌고, 이후 길씨는 마을에서 세력이 급격히 축소된다.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에서 나오는 질문은 바로 '국가는 무엇했냐'이다. 실제 해방이후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형식적으로 남과북 각각에서 각 세력(이승만과 김일성)이 장악했지만 실제 마을 공동체까지 장악했느냐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따른다.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마을 내부의 권력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치루면서 국가는 마을내부의 갈등을 이용 혹은 방치하여 마을 내부까지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남과 북 각각 인민위원회와 우익청년단을 이용해 마을을 단속하고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마을의 문제 역시 제대로 된 국가의 부재에 의해 나타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 용납되기 힘들다. '평온하던 남한에 적화야욕의 북괴가 침략했다'라는 한국전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은 논의의 토대를 갖기가 힘들다.

이제 한국전쟁 60년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세대의 거의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기억이 사라지기 전 이런 작업이 보다 활발히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겁 없이 전쟁을 이용하려는 세력들(현 정권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행태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될 것이다. 전쟁을 이용해 정치적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 생각에 국민이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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