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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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남과남 북과북에서의 전쟁을 마주하게 된다. 군이 아닌 민간인끼리의 학살을 어떻게 봐야 할까.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쟁 중 전투와 상관없이 후방에서 사망한 민간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마을에서 어떤 전쟁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남과 북, 미국과 소련이라는 눈에 보이는 요소 이외에도 친일과 항일운동이 함께 내재되어 있고, 양반제도가 무너지는 과정과 신문명과 옛것을 추구하려는 전통과의 마찰이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까지도 양반가문에 의해 마을이 좌지우지 되었다. 특히 소작문제는 한국전쟁 당시까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런 과정에서 양반가문에 억눌렸던 머슴, 소작농 들이 인민군의 진주와 더불어 그들의 목소리를 냈고, 반대로 국군의 재점령으로 반대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양반가문 사이에 잘 나가는 문파와 그렇지 않은 문파가 있다. 잘 나가는 문파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자연스레 그들의 기득권세력을 유지해나갔고 자연스럽게 우익세력에 가담한다. 그런다 그렇지 않은 문파에서는 비교적 사회주의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항일운동 및 건국운동에 앞장서고 인민군의 진주시 인민위원장 등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국군이 들어서면서의 상황은 뻔하다. 이 뿐만 아니다. 미국의 남한 신탁통치와 더불어 기독교가 자연스레 이승만 세력을 지원하는 우익의 성향을 띄게 된다. 그러나 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한 공산군의 남한 점령은 기독교에 심각한 위기이다. 특히나 기독교세력에 의해 핍박받았던 무속인들은 기독교세력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마찬가지로 국군이 점령하고 기독교는 굳건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이런 사회적 현상을 잘 보여주는 다섯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과연 남한내부에서의 전쟁이 어떠했었는지를.

 

1장 진도 동족마을 X리의 친족학살 사건

서울경기를 제외하면 꽤 많은 씨족마을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진도의 경우도 창녕 조씨나 밀양박씨에는 밀리나 임진왜란 이후 자리를 잡은 현풍 곽씨가 있다. 현풍 곽씨는 장파, 중파, 계파의 3개의 파를 이루어 X리에 자리잡았는데 일제시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준비 등이 중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에 반해 계파의 경우는 별로 세력을 갖지 못하면서 각 파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다. 갈등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보도연맹 사건 때 였는데 계파 출신의 경찰에 의해 곽씨 일가 5명이 처형당하면서였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 사건에 앙심을 품었던 좌익계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다. 경찰 가족에 대해 아이 부터 노모까지 처형하는 등 족보상 약 110명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면서 좌익계열 들이 입산을 하고 남은 가족 약 20여명에 대한 보복 학살이 이루어진다. 각 파간에도 큰집은 우익, 작은 집은 좌익 등으로 구분이 되었기에 파 간 학살도 있었지만 크게는 중파와 계파간의 갈등이 컸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파는 흩어지는 등 세력이 약해졌고 인민군의 희생자였던 계파가 세력을 찾았다고 한다. 결국 남북간의 정치 갈등이 진도 X리 친족내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고향을 등져던 부역자가 고향에 돌아오길 희망했지만 고향 측의 반대로 인근마을에 살았다고 하니 친족간의 갈등이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장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 마을의 시련

영암의 영보는 전주최씨와 거창신씨의 동성마을이었다. 영보의 경우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받아들여져 1930년대에 영암공산주의자협회가 만들어졌고 소작이전에 따른 불합리한 소작에 항의한 영보농민시위 등이 일어났다. 영보 마을 역시 해방후 우익, 경찰에 의해 곤란을 겪기는 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인민위원들을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한다. 그리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영암의 모스크바라 불리는 영보사람들은 화를 피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근처로 피란을 간다. 상황이 개선되면서 전원자수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해방후 인민군 점령시 일부 처형된 이들이 있긴 하였지만 근처 마을 구림과는 달리 학살은 없었다. 이는 일찍 부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양성씨간의 유대관계가 좋았고 또한 농민시위에서 보여준 지도층 지도력에 양반,평민간의 관계 또한 좋았기 때문이다. 반면 근처 구림마을에서는 좌익에 의한 교회방화학살사건으로 우익 쪽 주민 32명을 학살하였고, 반대로 경찰이 진입하면서 마을주민에게 사격을 가해 7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림마을의 경우는 보수적인 양반동네라 평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고 이에 대한 보복이 일어난 것인데 이에 반해 영보는 마을 전체의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했다. 그렇더라도 사회주의라는 딱지에 의해 영보의 두 가문은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3장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부여군에서는 두 동족마을이 있었다. 진주 강씨의 A마을은 민촌(평민)마을이었고 B마을은 세도정치로 유명했던 풍양조씨의 반촌(양반)마을이었다. 조선이 멸망하면서 형식적으로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양반 출신들은 평민들을 하대하였고 조선시대 마냥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두 종족마을에서도 그런 관계는 지속되어 B마을에서 A마을을 하대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성격만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A마을은 사회주의 경향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온데 반해 B마을의 경우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보수적인 색체가 강했다고 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을 폭발시킨 것 역시 보도연맹 사건인데 보도연맹 사건에 A마을 4명이 처형당하게 된다. 이후 인민군이 들어오자 A마을이 위상이 강해졌고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자 경찰과 A마을은 B마을을 포위, 연행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A마을은 B마을의 물건, 집기 등을 마음대로 가져가고 B마을 사람들이 돌아온 후에도 이런 약탈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갈등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홍수에 대한 두 마을의 필요에 의해 두마을은 화해를 하게 된다. 게다가 학교에 가기 위한 나루터가 B마을에 있어 A마을의 현실적 필요도 관계 개선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두 마을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갈등이 증폭이 가져올 폐해를 깨달았다.

 

4장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당진의 합덕면은 특이한 갈등 양상을 띠고 있다. 종교-사상의 갈등, 성씨간의 갈등, 지주-마름간의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주중에는 지방에 거주하는 재지주와 거주하지 않는 부재지주로 나뉘는데 부재지주의 경우 마름(소작농중에서 세우기도 함)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소작을 운영한다. 재지주의 경우 유연하게 소작 정책을 펼치거나 덕을 배풀기도 하는데 마름의 경우 소작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마름과의 갈등이 굉장히 컸다. 합덕면의 경우는 종교 갈등의 양상도 보이고 있다. 천주교에서 H마을의 상당한 토지를 사들였는데 이를 소작을 하였다. H마을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편한 조건에서 소작을 할 수 있었고 우익청년회가 조직되는 등 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보수화되었다. 반면 주변 Y마을의 경우는 종교-사상적으로 틀렸고 농수문제로 H마을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H마을을 습격해 신부 등을 압송하고(후에 처형됨) 주민 8명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자 Y마을 청년 모두가 H마을 청년단에 끌려가 취조를 당해야 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합덕면에서는 이와 더불어 성씨간 갈등도 나타났다. z마을에서는 해주 오씨, 의령 남씨, 선산 김씨 등 세 성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 중 오씨가 영향력이 가장 약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남씨 일가의 남정갑은 면서기를 하며 징병,징용을 담당했고, 남정갑의 아버지는 일본인 부재지주의 마름노릇을 했는데 해방과 동시에 남정갑의 아버지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조리돌리기를 당했다. 서울로 피신한 남정갑 부자는 미군정과 함께 돌아와 조리돌리기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오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난다. 인민군이 진주하자 세상이 바뀌어 남정갑 등 남씨 일가를 처형하게 되는데 이에 오씨 일가 및 남씨일가의 머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이 진주하면서 상황이 바뀌어 선별된 부역자가족은 모두 쫓겨 나게 된다.

 

5장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금산군 부리면은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 두 양반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1931년 부터 1960년까지 단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길씨와 양씨 중에서 면장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두 성씨는 혼인으로 돈독한 관계를 이루어왔다. 일제시대 길씨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반면 양씨는 대체로 우익편에 있었다. 특히 길씨 중에서 주류는 우익에 길씨 비주류와 양씨는 우익에 대체로 섰었다. 보도연맹과 인민군 점령시 길씨, 양씨 일가 중에서 처형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다른 마을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고, 대규모 학살도 없었다. 이는 두 가문이 사돈으로 돈독하게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 금이 간 사건이 발생한다. 길씨를 중심으로 한 좌익들은 인민군 후퇴 후 근처에서 빨치산이 되는데 1950년 11월 2일 우익을 중심으로 한 결의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빨치산이 결의대회장을 습격해 78명을 학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우익을 대변했던 양씨집안과 비주류 길씨 집안의 많은 이들이 학살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길씨와 양씨간의 관계는 깨어졌고, 이후 길씨는 마을에서 세력이 급격히 축소된다.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에서 나오는 질문은 바로 '국가는 무엇했냐'이다. 실제 해방이후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형식적으로 남과북 각각에서 각 세력(이승만과 김일성)이 장악했지만 실제 마을 공동체까지 장악했느냐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따른다.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마을 내부의 권력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치루면서 국가는 마을내부의 갈등을 이용 혹은 방치하여 마을 내부까지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남과 북 각각 인민위원회와 우익청년단을 이용해 마을을 단속하고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마을의 문제 역시 제대로 된 국가의 부재에 의해 나타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 용납되기 힘들다. '평온하던 남한에 적화야욕의 북괴가 침략했다'라는 한국전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은 논의의 토대를 갖기가 힘들다.

이제 한국전쟁 60년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세대의 거의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기억이 사라지기 전 이런 작업이 보다 활발히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겁 없이 전쟁을 이용하려는 세력들(현 정권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행태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될 것이다. 전쟁을 이용해 정치적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 생각에 국민이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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