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 구술로 풀어 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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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 구술로 풀어쓴 한국전쟁과 전후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펴냄/ 18,000원
 
한국전쟁은 공식적인 기억만을 강요한다. '평화롭던 한반도 적화야욕에 가득찬 북괴가 침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지만(38선 근처는 상시 전투중이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 주장과 함께 북한이 남침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강요는 전후사회를 규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의 다른 부분 후방의 삶이나 민간인에 대한 문제는 거론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는 역사속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뤄온 이임하가 한국전쟁의 미망인들에 대한 구술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한국사회를 엿보는 작업이다.

 

지은이는 전쟁미망인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해 접근하고 있다. 군경미망인, 피학살자미망인 그리고 상이군인미망인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은 미망인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되어 있다. 군경미망인의 경우 쉽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반면 피학살자미망인의 경우 처음에는 주저한다는 것이다. 피학살자란 남한 군경에 의해 학살된 이들을 말하는데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의 정책상 이들은 강요된 침묵과 일상화된 차별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알려준다.

 

미망인이 된 과정을 보면 군경미망인들은 전쟁 중 제2국민병등으로 강제징집을 당하고 남편을 잃은 경우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책들을 보면 우리가 영화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입대한 사람보다는 강제로 끌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계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는데 색출이나 회유에 의한 경우도 상당했다. 피학살자미망인은 말 그대로 보도연맹 학살 등과 연관이 깊다. 갑자기 불러내서는 한군데 모인 남편이 학살을 당한 경우다. 상이군인 미망인의 경우는 한국전쟁에서 신체적 장애를 입은 이들과 결혼한 경우인데 이후 오랜 치료과정을 겪거나 사망하는 경우이다. 특히 상이군인과의 결혼은 애국적인 행동으로 칭송받았는데 이들과 결혼한 여성들은 대부분 상이군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결혼했다고 한다. 상이군인들의 경우 신체적 장애 뿐 아니라 전쟁에 의한 정신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상이군인미망인의 삶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미망인들의 삶은 전후사회의 변화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대부분이 스스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사회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생계를 위한 억척스러움이 지금이 한국의 아줌마를 형성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미망인들은 대체로 농사, 바느질, 행상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는데 최소한의 자본으로 가능했던 행상이 이 때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사실 여성이 시장에 가는 행위자체가 흔하지 않던 시절 이들의 등장은 사회적으로 적잖은 충격이었다.

 

미망인들은 개인적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는 단순히 남편을 잃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상식적인 삶 외에 가족(시댁)간의 관계가 더 큰 고통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국가적 침묵은 곧 시댁에 의한 감시와 통제로 나타난다. 생계마저 책임져야 할 이들에게 시집살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감시와 통제는 삶 자체를 옭아맨다. 문제는 이런 시댁에서의 삶 또한 차별의 연속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시댁에서는 이들에 대한 외모등에 대한 통제가 심각했는데 일제시대 때 부터 이어오던 몸빼라 불리는 옷을 강요해 이들에게서 여성성을 빼앗고자 했다. 이런 억압속에서 헤쳐나오는 길은 분가였는데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부터 자식의 교육을 내세워 분가에 성공하곤 했는데 분가후에야 이들은 비로소 가족이라는 억압에서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도 사망남편에게 나온 보상금등은 모두 시댁차지였다. 물론 군경미망인의 경우와 다르게 피학살자미망인의 경우는 조금 다른 행태를 보인경우도 있다. 피학살이라는 고통을 시부모와 미망인 당사자가 공유하며 이겨 나간 경우인데 이는 피학살이라는 사실이 사회가 가족전체에 던지는 차별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전쟁미망인의 분가는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상경후 여성이라는 약점때문에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이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성 혼자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에 대해 색안경을 끼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전쟁미망인들에게는 억척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였다. 그러나 사회적 조건 역시 전쟁미망인들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지속되었던 호주제 덕에 구조적으로 재혼이 쉽지 않았고(호주, 대표적으로는 시아버지가 호적을 떼어주지 않는) 재산에 대한 권리도 호주가 가지고 있어 사별전 남편이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부동산 계약 등에서 제약을 받아 구조적인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피학살자 미망인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해 연좌제라는 틀안에 갖혀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본인의 취업 뿐만 아니라 자식의 취업에 까지 제한을 받아 평생을 그 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보이지 않게 이들을 옭아맨 것은 국가에 의한 침묵 강요이다. 1956년 현충일을 만들어 전쟁미망인들에게 추도식에 참석케 했지만 정작 현충일은 손님들, 정부당국자들을 위한 행사였다. 화환, 군례, 추도사는 그들을 위한 행사였을 뿐 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는 호국신령 등으로 전사자들을 치켜 세우고 전사자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강한 국방과 산업화를 이야기했다. 게다가 유가족이라는 광범위한 용어를 사용해 더 이상 전쟁미망인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원호보훈법 등의 제정으로 전쟁미망인들에 대한 보조가 시작되었다. 금전적인 도움과 취업알선이었다. 국가보훈대상에 대한 취업을 법률로 정한 것도 이때 부터이다. 그러나 한달에 몇 만원도 되지 않는 보조와 보훈대상자 취업자들에 대한 차별로 이런 국가 정책은 정책으로만 필요했을 뿐 실제 전쟁미망인과 그의 가족들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또한 분가한 전쟁미망인들이 상경하고 이들이 집단 거주지들이 형성되면서 이는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 가진것 없고 생존을 위해 남은 것이라고는 악다구니만 있던 이들에 대한 언론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추었다. 이들은 1970년대 재개발등의 문제와도 결부되는 등 한국사회 현대사의 문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 책은 구술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전쟁미망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리, 구성한 것이다. 구술사라는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쟁미망인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 및 보충설명이 이루어지는데 전쟁미망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항상 현실은 현실같지가 않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한장 한장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보다 전쟁을 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터에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는 전쟁의승패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전쟁미망인, 전쟁고아, 상이군인, 참천군인, 피할살자 유가족의 이야기는 전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전쟁 이야기와 전후 사회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들 가운데 전쟁미망인은 전쟁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전쟁 경험, 국가 폭력, 트라우마, 젠더, 가족, 침묵 따위의 문제를 제기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쟁미망인의 구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들의 구술이 가치가 있는 것은 지금까지 그녀들이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위의 문제들(범주)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범주들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으며 우리사회를 구성해왔다."(378~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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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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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해 출간되었다가 개정된 책이다. 김동춘의 전쟁과사회는 그 동안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연구되어온 한국전쟁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연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연대기적 구성보다는 피난, 점령, 학살이라는 주제로 권력을 가졌던 세력과 일반 대중들과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런면에서 일반 대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저자는 한국전쟁을 국가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구성원의 차별, 고통과 희생의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하고 있다. 현대의 고전이나 명저 등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보면 전쟁과사회가 기존 연구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투과정외의 것을 따져본다면 피난이 먼저 떠오른다. 북한의 압제를 피해 피난을 떠나야 했던 무리들, 그 과정에서 수 많이 이산가족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기존의 피난이 1.4후퇴때의 피난에만 초점이 맞춰졌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의 서울 점령과정에서의 피난이 있었다. 이를 1차 피난, 1.4후퇴때의 피난을 2차 피난이라 할 수 있다. 1차 피난 때는 정부의 거짓말(서울을 떠나지 말라는)도 있었지만 일반 대중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이미 지식인들은 이승만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1950년 총선에서 이승만세력의 참패는 일반 대중 마저도 이승만정권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일반 대중에게 북한이나 남한이나 별 차이를 못 느꼈던 것이다.그래서 1차 피난은 국가공직자, 친일파, 월남한 이북출신, 미군가족이 주류였다. 불과 며칠사이에 일어난.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1차 피난을 떠나는 이들이 많지 않았는데 농번기라는 특성에 농민들이 쉽사리 땅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2차 피난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일어난 피난이었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미국의 공습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미군의 공습이 군대 이외 마을지역에도 무차별적인 공습을 감행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 공습을 피해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부의 말을 믿고 1차 피난을 가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남한과 보수우익(친일파로 이루어진)에 의해 잠재적인 부역자 혹은 북한친양적으로 찍히는 상황은 피난을 갈 수 밖에 없는 배경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1차 피난을 정치피난, 2차 피난을 생존피난이라고 규정짓는다.

 

한국전쟁에서 남,북한 서로 상대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한다. 먼저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했던 북한은 대중참여 인민주의를 펼치지만 형식만 있었을 뿐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었다. 점령지에서 인민위원들을 선출하는 등 나름 대중이 참여하지만 일본제국주의, 미국제국주의, 자본가 등에 대한 재판은 증오와 매국노 처벌이라는 도덕주의와 결합해 반대편에 대한 숙청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전쟁초기 북한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던 자영농, 소규모 자본가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시 남한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면서 상황은 반대가 된다. 먼저 피난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분류작업이 시작된다. 일단 부역자로 몰리게 되면 총살에서 부터 구타 등 인간 이하의 처우를 감내해야만 했다. 이는 일반 대중뿐 아니라 피난하지 않은 국회의원들까지 해당된다. 1950년 5월 선거에서 참패했던 이승만 정권은 피난하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제거와 부산 국회파동 등으로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할 기회를 갖게 된다. 게다가 부역자 처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익청년들의 행동은 남한 정부의 눈가림속에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된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알고 있는 이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단하며 권력을 되찾는다. 이 역시 이를 방조한 정부의 역할도 한 몫 했다.

군 점령지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작업은 바로 징집이다. 젊은이들은 북이건 남이건 징집을 당하지 않기 위해 숨거나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전쟁초기 징집이 되는 운이 나쁜 경우에 해당했다. 북한 점령시 초기에는 의용군 징집이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CIA의정보에서는 서울 학생의 절반이 의용군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이는 1950년대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감정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북한은 점령지에서 강제징집 및 물자 동원정책을 실시하는데 이는 북한이 애초에 의도했던 토지개혁을 통한 민중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결국 지지층이 되어야 할 노동자, 농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한다. 남한 역시 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징집을 하는데 자위대라는 이름의 우익청년들은 지역내에서 부역자 처단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 때 부터도 남한 군대내 부정부패가 심각했는데 방위군에 대한 보급품을 착복하여 수많은 방위군이 부상과 아사로 사망하였다. 이런 징집은 우리가 근래 상영되는 영화 혹은 드라마와는 상충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참전을 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참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학살이다.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낯설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 부터 최근의 동티모르학살까지 학살은 외국에서나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에서 밝혀진바와 같이 한국전쟁당시 남한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학살이 많았다. 저자는 학살을 3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작전으로서의 학살이다. 제주 4.3사건,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살을 말한다. 여기에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수뇌부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학살 또한 작전으로서의 학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을 도왔다고 의심되는 지역을 학살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특히 미공군에 의한 전북 익산 및 경남 창녕 등에 대한 폭격은 인민군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마을에 폭격을 가한 경우다. 둘째는 처형으로서의 학살이다. 인민군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인민군에 동조했던 이들에 대한 처형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는 전쟁초기부터 발생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각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좌익 인사들에 대한 처형을 단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민군도 후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익 포로들을 처형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우익청년들에 의한 자의적인 처형이 많았다. 무심결에 동무라고 말했다가는 처형되었던 시절이었는데 국가권력이 생명의 위기에 빠진 민중을 노리갯감으로 여겨 보복한 반윤리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셋째는 사적인 보복으로서의 학살이다. 국가의 명령이나 국가로부터 받은 권리를 바탕이 아닌 개인, 가족간의 원한관계에 의한 학살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서로의 영토를 거의 점령한 특이한 경우이다 보니 한 마을에서 어떤 가족은 북에 어떤 가족은 남에 협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처단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은 전쟁이 지난 50년 동안 묻혀졌었다. 특히 전쟁 당사자인 국내에서는 이런 학살에 대해 공식 언급은 불가능하였다. 그나마 AP 통신을 통해 노근리사건이 밝혀지면서 잊혀졌던 학살들이 하나 둘 거론되고 있지만 정부의 의지가 없는 한 제대로 된 조사와 그로 인한 역사적 화해는 멀어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간 인민군의 학살에 대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인민군의 학살을 조사하다가 국군, 미군 및 우익에 의한 학살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었지만 한국전쟁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국내에서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전쟁의 발발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난 점 그리고 사회적으로 접근한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을 통해 발생한 국가억압체제가 오늘날의 한국사회 가정, 학교,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억압으로 폭력이 구조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는 인민군 편, 국군이 올라왔을 때는 국군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구조가 자유당 시절엔 자유당을 민정당 시절엔 민정당을 찍는 순응주의적 태도로 나타났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학살의 경우도 현재화되고 있는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일어난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한국전쟁이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 분향소를 폭력적으로 철거했던 서정갑 등 보수주의자들의 행태는 점령 당시 남한에서 있었던 모습과 유사해보이고 북한에 대한 압력을 위해 집회를 하는 그들의 뒤에 일본 극우파 인사와 자본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왜곡된 사회구조가 지금까지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반도로만 국한되어 보더라도 남과 북 그리고 남한,북한내에서의 좌익과 우익의 전쟁이었고 한 마을에서 가족과 가족의 전쟁이었다. 그만큼 복잡했는데 이는 결국 남과 북 서로의 국가주의라는 틀안에서 소중한 목숨이 하찮게 여겨졌다. 이런 국가주의를 넘어서야 제대로 한국전쟁을 바라볼 수 있고 되짚어 볼 수 있고 나아가 국가주의가 갖는 폐단을 공감해 현재와 같이 준전시상태가 지속되는 소모적 환경을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왜곡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하고 심도있는 한국전쟁 연구와 한국전쟁을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절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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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 - 한국, 동서독,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역사문제연구소.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 공동기획 / 역사비평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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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생각에서도 많은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전후 약 2세대가 지나면서 한국전쟁에 객관적인 시선을 담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의 모습에 대한 말할 수 없었던 기억마저 사라지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이렇게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책이고 기억해야 할 점을 짚고 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한반도내에서의 전투라는 내전의 성격보다 훨씬 크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소련과 미국이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고 중국과 서구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했던 국제전의 성격마저 갖고 있다. 전쟁의 발발과 과정 그리고 전후에 있어 남북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사건이다. 2차대전 종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으로 나뉘어 체제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공산화정책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군사적 대결도 가능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소련은 1946년 이란사태와 1948년 베를린봉쇄건을 통해 계속 미국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일어난 애치슨 선언 등에서 나타난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남북한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중심부 즉, 미국과 소련의 대결을 주변부 한반도에서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무력대결을 통해 공산세력에 대한 저지의지를 강하게 보여준 셈이고 소련은 공산화전략에는 차질을 입었지만 중국의 확실한 등장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할 수 있는 세력임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구소련의 해체 전까지 있었던 냉전체제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엄청난 군비를 통한 군사적 대립에 해당국가에 대한 통제가 심화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남북한이라는 대리전을 통해 서로의 힘을 확인하고 이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발전을 막았던 계기도 된다.
 
남북한 내부적으로도 한국전쟁은 체제안정화(?)에 큰 역할을 한다. 남한이나 북한모두 불안정하게 정권을 잡았던 이승만, 김일성에게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반공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고 김일성 역시 당내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국전쟁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체제 안정화에도 큰 기여를 한다. 서로 상대방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산업기반을 모두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범적 대립장소가 되면서 남북한 모두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게 된다. 국가재정(수입)이 남한의 경우 1959년 52%, 북한의 경우 1955년 28%가 해외 원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농업중심의 남한의 경우 전근대적 유산을 청산하고 자본주의체제를 급속하게 발전시킬 토대를 형성했고, 상업자본이 발달했던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 체제의 반대하는 자본세력들이 제거되었기에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한사회를 규정하던 헌법의 변화는 남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났는데 균등경제의 정신을 담고 있던 1948년 건국헌법이 1954년에 이르러 시장경제 중심으로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즉, 남한은 1948년 건국보다는 1954년의 체제가 이후의 체제를 형성했다. 사실 균등경제는 남한 내부의 지주, 소작의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중심의 재건을 원했던 이승만 정부의 생각이었지만, 미국은 미국의 자유로운 투자를 위해 시장경제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이승만정부는 균등경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현재의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는 기틀이 되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 현대가 모두 이 때 시작된 기업이라는 점에서도 현재의 남한 자본주의는 전부자본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끼친 영향 중에 재미있는 사실중에 하나는 분단국가였던 독일과의 관계이다.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연대에 따라 비자발적인 지원을 북한에 하게 되는데 동독 기술자의 파견과 북한대학생 유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동독기술자의 파견은 동독기술자들의 식민주의적 행태와 그런 행태에 대해 좋은 인식을 하지 않았던 북한과 북한내부사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북한의 대학생파견의 경우도 귀환한 유학생들이 전문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몇 몇 유학생들은 자본주의세계로의 탈출과 유학생을 따라온 동독여성들의 북한에서의 부적응 등으로 성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자극받은 남한은 서독에 견습생 파견 등 강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것이 바로 파독간호사와 광부이다. 그러나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이 실제 광부가 아니었다는 점과 서독 역시 당시 열악한 광산업을 대체하는 효과를 얻었기 때문에 남한은 외화획득, 서독은 노동시장 안정이라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켰던 관계였을 뿐이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도 파독간호사와 광부들이 서독에 이민을 신청하는 등 예상외의 결과에 직면하게 되며 모순에 빠진다.
한국전쟁 과정 역시 동서독에 영향을 끼쳤다. 동서독 양측이 한국전쟁을 자신들의 체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동독의 경우는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경고로 서독은 스탈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내부적으로는 이런 경고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동독의 경우 전쟁위험이 개인주의적인 방어형태로 나타났고 서독 역시 전비증가에 대한 우려로 나타났다. 약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한국전쟁을 체제경쟁과 무력통일이 갖는 위험성에 대한 교훈을 갖게 되었고 느슨한 대화의 끈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전후 남한사회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공의식에 의한 자기통제 매커니즘이 발동하는 반공규율사회가 되었는다. 이런 반공규율사회를 지속시키위해서는 지속적인 전쟁의 기억이 필요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가의 공식기억만이 필요했다. '잊지말자 6.25','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표어아래 한국전쟁에 대한 어떤 논의도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직후 이를 위한 전쟁기념물 충혼탑 등 건립이 줄을 이었고 박정희 정권 후반, 전두환 정권 초반인 1977년 부터 1981년까지 한국전쟁 전적비 등이 수없이 세워진다. 전쟁에 대한 공포의 기억을 강화해 안보체제 정당성을 확보해 강도 높은 사회통제를 위해서였다. 이런 공식적인 강제 기억의 정점은 1994년 문을 연 전쟁기념관이다. 1988년 계획된 전쟁기념관은 전후세대들의 6.25에 대한 인식이 약하고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6.25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반공안보관 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가에 의한 강압된 공식기억은 90년대 후반 들어 노근리사건 등 비공식기억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2MB 정부 이후 반공의 목소리가 다시금 커지고 있다. 특히 보수세력에 의해 진행되는 이런 과거로의 회귀로의 뒤에는 일본 극우세력과의 관계가 의심받을 정도여서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후퇴시키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의 전후 과정 및 현재까지의 영속성을 잘 살피고 있다. 당사자의 경험에 의해 제한된 논의의 경계를 풀어헤침으로 앞으로 더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을 희망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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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용, 이땅의 영어에 딴지걸다
정찬용 지음 / 문학수첩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지은이 정찬용은 '영절하'(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의 저자로 유명하고, '영절하' 역시 영어계의 스테디 베스트셀러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영절하'가 삼백만부나 팔렸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일조했었으니 말이다. 당시 영절하는 혁명과도 같았다. 물론 몇 몇 사람들이 영어공부법으로 듣기만 해보라는 것을 강조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영어학습법에서 주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별반 무소득이었으나 정찬용의 영절하는 영어공부의 새로운 붐을 일으켰다. 

 '영절하'는 '신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에 이어 듣기방법에 대한 책까지 다양하게 책의 권수를 넓히고 있다. 이 책 '정찬용, 이땅의 영어에 딴지걸다'는 '그러니까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에서도 느낌이 전해지듯이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고 신신당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습된 영어공부에 빠져있는 영어생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낀 듯 하다. 지은이도 언급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영절하를 평가절하하고 있으니 말이다. 

 '영절하'가 갖는 의미는 인정하지만 일단 이번책은 그닥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단 책의 내용이 단순히 인터넷 기사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한권의 책으로 엮여져 나오기엔 부족한 감이 많다. 결국은 여전히 예전의 영어공부를 반복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백팔십페이지를 낭비한 느낌이다. '히어롤두고?'(here or to go),'수퍼샐러드'(soup of salad)와 같은 우스꽝스런 이야기들은 이제는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이 책에 대한 별로 긍정적이지 못한 것은 이 책이 결국은 '영절하'에 대한 중언부언이고, 언급하는 내용들이 많이 식상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공부라는 것이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영절하'라는 새로운 공부법을 강조하려다 보니 중언부언의 글이 된 것일 뿐, '영절하'는 영어병에 빠져 있는 한국영어에 의미있는 학습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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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 제대로 하자 (개정판) - 어느 반미주의자가 쓴 7년간의 영어 체험 보고서
이정훈 지음 / 명상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영어공부 제대로 하자'는 우리나라 영어교육 방법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의 영어공부법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일종의 실망감을 안겨주고, 영어를 단기간에 정복할 수 있다는 류의 책들은 어느 정도 영어실력에 도달하더라도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신뢰하기 힘들다. 그런면에서 저자는 실질적이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영어공부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지은이는 영어공부에 있어서 '소리'에 주목한다. 물론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영어공부하면 일단 책 부터 잡고 보는 것이 현실이다. 지은이는 어학연수, 유학 등의 기간동안 유럽학생들의 공부방법을 살펴보고 그 해답을 찾아낸다. 그는 '소리'의 중요성을 찾아낸다. 즉, 언어는 소리와 글을 매체로 사상, 감정,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로, 소리와 문자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언어를 눈으로만 배우면 귀와 입과 눈으로 훈련할 때보다 절반의 효율성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학생들이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살펴보게 된 결과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효과적인 영어공부방법을 제시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취약한 스피킹과 리스닝에 중점을 둔 것 처럼 보이는데 일단 영어를 상시 사용할 수 없는 우리나라 형편에 알맞은 말하기 방법을 제시한다. 일단 말하기의 준비운동 즉, 어떤 상황에서도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미리 상황등을 만들어보고 쉴새없이 연습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어떤 자료를 읽거나 듣고 나만의 영어로 재현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특정 주제에 대한 자료들을 살핀 후 프리젠테이션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언어창고를 활용하는 순서와 일치한다. 즉, 남의 말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수용창고를 개발한 후 나를 남에게 표현하는 생산적 언어창고를 개발하는 것이다. 

 듣기에 있어서도 단순히 AFKN만 듣는다고 귀가 뚫리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단순한 시간 낭비보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면서 첫째, 소리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듣기에 반복적으로 집중하고 스크립트를 확인한 후 잘 안들리는 부분은 외울 정도로 연습을 한다. 하나 하나의 소리가 식별되는 과정을 거치면 소리를 통해 바로 의미를 파악하고 새로운 어휘도 늘려야 한다. 이때는 관심 분야 혹은 필요로 하는 분야를 중심으로 내용과 듣기가 연관된 듣기 훈련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듣는 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지식, 정서 등을 이해하는 단계이다. 곧 많은 배경지식도 필요하다. 따라서 뉴스 등을 반복적으로 요약 노트하며 청취하너나 영화나 가정용 드라마들 반복적으로 들으며 반복적으로 소화해내야 한다. 

 쓰기를 어느 정도 할 줄 안다는 사람들조차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5분 정도의 시간을 통해 빨리 많이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훈련이 반복될 수록 쓰는 속도가 빨라지고 어휘의 활용 또한 늘어난다. 이 단계를 거치면 같은 주제의 좋은 글들을 찾아 비교, 모방하는 과정이다. 영어의 읽는 맛과 글을 써 봐야 읽기 능력도 향상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번째는 짧은 에세이를 써보는 것이다. 독해에 관해서는 한국사람들이 독해를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무리 독해를 잘하는 한국사람들이러다도 유럽학생들이 10권의 책을 읽는동안 힘에 부쳐하며 2권을 읽는 모습을 본 지은이는 독해 아닌 내용 중심, 정보 중심의 영어교육과 읽기와 듣기를 결합시키는 방법이다. 들으면서 읽기는 속독력을 배가시킨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회는 가히 영어광풍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잘한다. 그러나 투입된 만큼의 효과를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영어를 대하는 방법 자체가 달라서 일 것이다. 영어가 한 문화를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보다 사람을 평가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영어를 공부하도록 강요당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그리 좋지 않다. 이런 환경속에서 '영어 공부 제대로 하자'는 한국적 현실에 맞는 영어 공부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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