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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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악양 평사리 최참판댁 가는 길



21. 목련꽃 피어나는 길상이네......



22. 봄나물 다듬는 아낙네들



23. 토지의 산출물



24. 장독대와 담장 위로 피어나는 봄



25. 악양 너른 들판과 섬진강



26. 최참판댁



27. "사고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이다"
(박경리 선생 말씀 中에서)



28. 평사리의 산수유



29. 봄 햇살에 빛나는 섬진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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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리산 종주 산행기
    from Value Investing 2011-08-26 17:54 
    한걸음 한걸음이 건강이요, 재미요, 즐거움이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 김이 솟아 오르는 골짜기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 달라붙는 추악한 독기처럼 -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어떤 감정도 '우리 종족의 시조들처럼 충실한 동지들'과 더불어, 어느 냉혹한 절벽을 공격하러 전진하는 감정보다 영광
 
 
stella.K 2011-03-28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말로만 듣던 평사리로군요. 맨 밑의 사진 정말 멋지네요.^^

oren 2011-03-28 15:48   좋아요 0 | URL
요즘은 교통이 좋아져서 씽씽 달려 가시면 서울에서 서너시간 밖에 안걸립니다.
언제 한 번 틈을 내셔서 꼭 다녀오시길 바랄께요~

세실 2011-03-30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최참판댁에서 바라 보이는 넓은 들녘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평야....
은빛으로 출렁이는 섬진강도 참 좋아요.

oren 2011-03-30 09:57   좋아요 0 | URL
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데 비하면 악양평야가 너무 드넓어서 무척 인상적이더군요.
산속에 자리잡은 안동 도산서원에서 바라봤던 일백리도 넘어 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도 닮은 듯하고, 강진 다산초당에서 바라봤던 가슴이 뻥 터지는 '드넓은 전망'도 떠오르게 하더군요.
섬진강에서는 어느 한여름날 저녁해가 다 넘어갈 때까지 하염없이 머물러 봤으면 하는 게 소망입니다.
 
지리산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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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칠선계곡, 벽송사 서암정사



2. 벽송사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3. 성삼재에서 바라본 노고단과 반야봉의 저녁 풍경
(2011-03-25 오후 6시 31분)



4. 구례 산수유



5. 구례 산수유



6. 구례 산수유



7. 봄나들이



8. 구례 산수유



9. Ebony & Ivory



10. 매화_홍쌍리 청매실 농원



11. 매화_홍쌍리 청매실 농원



12. 노년의 또다른 봄



13. 매화_홍쌍리 청매실 농원



14. 매화 피는 산골



15. 수줍게 피어난 이름모를 봄꽃



16.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와 초록빛 풀밭



17. 매화 속에 몸을 숨긴 관광버스



18. 섬진강 벚굴



19. 섬진강 홍매화
(광양 다압면)



20. 섬진강 홍매화
(광양 다압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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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리산 종주 산행기
    from Value Investing 2011-08-26 17:52 
    한걸음 한걸음이 건강이요, 재미요, 즐거움이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 김이 솟아 오르는 골짜기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 달라붙는 추악한 독기처럼 -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어떤 감정도 '우리 종족의 시조들처럼 충실한 동지들'과 더불어, 어느 냉혹한 절벽을 공격하러 전진하는 감정보다 영광
  2. 남원,지리산 칠선계곡과 뱀사골을 거쳐 순천만, 벌교까지...
    from Value Investing 2015-11-13 11:47 
    사물들이 우리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시선이 가는 경로에서 벗어나 있기보다는 우리의 정신과 눈을 그쪽으로 가져가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젤리(jelly)에도 보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 눈 그 자체에도 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좁게 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아주 많은 부분을 이런 이유로 인해 사는 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사는 단지 자신의 정원만 본
 
 
stella.K 2011-03-2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보여주셨던 그 카메라로 찍으신 모양입니다. 멋지네요.
그리고 부럽습니다.^^

oren 2011-03-29 11:3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stella님. ㅎㅎ

작년 봄에 갔을 땐 꽃도 제대로 피지 않았던 데다 '황사' 때문에 고생했는데,
올해는 마침 지난 목요일(3/24)에 눈이 내린 덕분에 날씨가 쾌청해서 좋았습니다.
stella님도 언제 시간 나실 때 한 번 꼭 가보세요~

순오기 2011-03-3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호강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중간에 나온 이름모를 꽃은 '봄까치꽃'이랍니다. 다른 이름으론 '개불알꽃'이라고도 부르죠.^^

oren 2011-03-30 21:52   좋아요 0 | URL
'봄까치꽃' 맞아요..
땅바닥에 옆드려 저 꽃을 찍고 있는데, 어떤 분이 지나가시면서 '봄까치꽃이네.....'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정작 사진을 정리해서 올릴 때는 도대체 저 꽃 이름을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통에 사진의 설명글을 제대로 달지 못하고 얼버무렸는데, 순오기님께서 제대로 알려주시는군요.

댓글 만으로도 감사를 드리고 싶은데 꽃 이름까지 알려주시다니요. 정말 고맙습니다.
 
















워렌 버핏은 케인즈를 '실천 투자자로서의 영리함과 사상의 영리함이 조화를 이룬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 영국 경제학자에게 지적으로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 저스틴 월쉬,『버핏도 따라한 케인스의 주식투자비법』中에서

 * * *




총공급함수와 총수요함수
30




유효수요 31




한계소비성향과 투자승수 135




직업적 투자자는 100매의 사진 가운데서 가장 얼굴이 아름다운 6인을 선택하여······ 183




일국의 자본의 발전이 도박장의 활동의 부산물이 된다면 186∼187

투기자가 기업의 착실한 흐름 위의 포말(泡沫)에 불과하다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이 투기의 소용돌이 속의 포말이 된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일국의 자본의 발전이 도박장의 활동의 부산물이 된다면, 일이 제대로 되기는 힘들다. 월가 - 그것은 장래의 수익이란 면에서 보아 가장 유리한 경로로 신 투자를 유도하는 것을 그 본래의 사회적 사명으로 하는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 가 달성한 성공을 자유방임(自由放任) 자본주의의 탁월한 승리 중의 하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월가의 최우수 두뇌들은 그것과는 다른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 내 생각이 옳다면, 이 말은 놀랄만한 말이 아니다.




그래서 교훈은 이렇다: 431∼433

『꿀벌들의 우화』의 본문은 풍자적인 시 -「웅웅거리는 벌집, 일명 정직하게 된 악한들」인데, 거기에는 저축을 하기 위해 모든 주민들이 갑자기 사치스런 생활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정부는 군비를 축소할 생각을 하게 된 어떤 번영하는 사회의 놀랄만한 궁상(窮狀)이 묘사되고 있다:

            이제는 어떤 고위고관(高位高官)도
            쓰기 위해 빚지고 살기는 싫어
            하인들 제복은 전당포에 걸리게 되고
            마차도 헐값으로 팔아버리고
            멋진 말(馬)도 무더기로 팔아버리고
            별장도 다 팔아서 빚을 갚았다.
            소비(消費)는 사기(詐欺)처럼 멀리하고
            외국에 파견한 군대도 철수했다.
            외국인의 어떤 존경도
            전승(戰勝)의 헛된 영광도 일소(一笑)에 부치며,
            오직 국가만을 위해
            정의와 자유가 위태로울 때 싸운다.

오만하던 클로(Choloe)는 

            진수성찬(珍羞盛饌)도 줄여버리고
            튼튼한 옷을 사철 두고 입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 - 

            자아, 영광스러웠던 벌집을 상기(想起)하고,
            정직(正直)과 상업(商業)이 어떻게 화합했는지를 보라.
            외화(外華)는 가버리고, 나날이 여위게 되어
            옛 모습 찾을 길 없다.
            무릇, 떠나가 버린 것은 다만
            해마다 큰 돈을 쓰던 자들만이 아니다.
            그들에 기생(寄生)하던 무리들마저
            날마다 [큰 돈을 쓰던 자들처럼] 떠나야 했다.
            그들이 다른 업(業)을 찾아도 소용없어,
            어디로 가나 재고(在庫)가 넘쳐흐르고,
            토지와 집값은 떨어지고,
            테베(Thebes)의 성벽과 같이
            연극을 위해 세워진 성벽을 가진
            황홀한 궁전에는 셋집 광고가 붙어 있다. ······
            건축업은 송두리째 몰락하고,
            장인(匠人)들은 일자리를 잃고 있다.
            예술(藝術)로 이름난 화공(畵工)도 없고,
            석공(石工)도 조각가도 이름이 없다.

그래서 「교훈」은 이렇다:

            도덕(道德)만 가지고는 국가를 훌륭하게 하지 못해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재현하는 국민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직(正直)에 대해서나 도토리에 대해서나.




맨더빌의 결론 434

한 나라를 행복하게 만들고 우리가 번영이라고 부르는 상태를 가져오는 중요한 방책(方策)은, 모든 사람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는 데 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배려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인간의 지혜로 발명할 수 있는 한 많은 종류의 제조공업 및 수공업을 장려하는 일이고, 둘째로는 농업 및 어업을, 인류 및 지표(地表) 전체가 미칠 수 있는 모든 부문에 발달시키는 일이다. 국민의 위대성과 행복이 필연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이 정책에 연유하는 것이고 사치와 절약에 관한 사소한 법규에 연유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금은(金銀) 가치의 등락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열락(悅樂)은 항상 지표의 과실과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양자는 서로 합하여, 브라질의 금이나 포토시(Potosi)의 은보다 더 확실하고 더 무진장의, 그리고 더 실질적인 재보(財寶)가 된다.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
461∼462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思想)은, 그것이 옳을 때에나 틀릴 때에나,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밖에 별로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떤 지적(知的)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實務家)들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이 보통이다.

허공(虛空)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權座)에 앉아 있는 미치광이들도 그들의 미친 생각을 수년 전의 어떤 학구적인 잡문(雜文)으로부터 빼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득권익(旣得權益)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인 침투에 비하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물론 사상의 침투는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경제 및 정치철학 분야에 있어서는 25세 내지 30세를 지나서는 새로운 이론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따라서 공무원이나 정치가, 그리고 심지어 선동가(煽動家)들까지도 일상사태에 적용하는 관념(觀念)에는 최신의 것은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르든 늦든, 선(善)에 대해서는 악(惡)에 대해서든,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익(旣得權益)은 아니다. 




 - 존 메이나드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中에서


 * * * * *


'워렌 버핏'과 관련된 책들_ '방한'에 맞춰 잠시 외출



'워렌 버핏'과 관련된 책들_2줄 쌓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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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2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렌 버핏은 저도 알아요.^^
워렌버핏의 투자격언, 이런 제목의 책 가지고 있어요.
나는 사람에게 투자한다, 이 책도요.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근데 말이죠, 독서를 하시는게 아니라 공부를 하시는 거 같아요.
밑줄 쫙, 별표~

oren 2011-03-21 10:01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도 워렌 버핏의 책을 가지고 계시다니 저도 무척 반갑네요.ㅎㅎ

요즘은 도무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은 손에 잡히지를 않고, '제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에 자꾸만 흥미가 생기더군요. 그러다 보니 어쩔 수없이 자꾸만 '공부'를 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군요. ㅎㅎ

* * *

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 Franz kafka

어떤 책이 좋은지 판단하는 기준은, 그 책이 얼마나 강한 펀치를 당신에게 날리는가 하는 점이다.
- Gustave Flaubert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훌륭한 독서는 불가능하다.
- A. 베네트

비로그인 2011-09-0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네의 열정이 부럽네. 버핏의 책 두 권도 겨우 읽은 나로서는...

oren 2011-09-02 11:18   좋아요 0 | URL
'노력은 항상 그 필요성에 비례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말대로, 나는 저런 책들이 자네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했을 수도... ㅎㅎ

제네시스 2020-04-17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무거운 책을 읽으려면 대단한 독서력입니다.
내용도 어려울 것으로 생각이 되며, 저 같은 하수는 바로 책을 덮을 것 같습니다.

경제의 책을 읽는 좋은 노하우 좀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20-04-17 14:38   좋아요 0 | URL
아이고... 경제 관련책을 읽는 데 좋은 노하우가 뭐가 있을까요? 너무 어려운 책보다는 쉬운 책부터 차근차근 읽는 게 그나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일 듯합니다. 별로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네시스 2020-04-17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쉬운 책부터 시작 들어 갑니다.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

















중국이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251

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 * *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251∼252

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저 불행한 사람들의 액운(厄運)에 대한 그의 비애를 매우 강하게 표명할 것이고,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많은 침통한 성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투기업자라면, 그는 이 재난이 유럽의 상업에, 그리고 전 세계의 무역과 상업에 미칠지도 모를 효과들에 대한 많은 추측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 정리가 끝났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인도적 감정들이 충분히 표명된 후에는, 그는 그런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기의 사업 또는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휴식과 기분전환을 취할 것이다.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소소한 재난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욱 실질적인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기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오늘밤 그는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들의 파멸이 있더라도, 만약 그가 직접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며 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도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에 대한 이 사소한 비운을 방지하기 위하여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의 생명을, 만약 그가 그것을 결코 보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희생시킬 것인가?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생각에 공포를 느끼며, 그리고 세상은,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결코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소극적인 감정들은 거의 언제나 이처럼 야비하고 이처럼 이기적일 때, 어떻게 우리의 적극적인 천성들은 흔히 그처럼 관대하고 그처럼 고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보다도 우리 자신에 관련된 일에 의해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면, 무엇이 관대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도록 촉구하는가? 자애(自愛: self-love)의 가장 강한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인간애(humaity), 즉 인도주의의 온화한 힘이 아니며, 조물주가 인간의 마음에 밝혀준 자애(benevolence)의 약한 불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작용하는 것은 보다 강렬한 힘이고 보다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


 * * *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253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 * *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272∼273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가장 현명하고 단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에는, 상당한 정도의,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불행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감정, 그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시각이 그를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에, 그가 엄청나게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의력을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두 가지 종류의 시각, 즉 자신의 견해와 공정한 방관자의 견해가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의 명예감각, 그 자신의 존엄에 대한 고려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주의력을 방관자의 그것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자연적인, 교육받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감정들은 계속 그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킬 수 없고, 스스로 자기 행위의 공정한 방관자가 될 수도 없다. 양자의 서로 다른 성격의 시각이 그의 마음속에 서로 분리되고 구분되어 존재하고, 각각은 그에게 서로 다른 행위를 하도록 지시한다. 그가 명예심과 자존심이 그에게 지시하는 시각에 따를 때, 사실 조물주는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는 상태로 남겨두지는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완전한 자기시인(自己是認)과 동시에 정직하고 공정한 모든 방관자들의 갈채를 누리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물주의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서, 그는 여전히 고통을 당한다. 조물주가 수여하는 보상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이러한 법칙이 그가 당한 고통을 완전히 보상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조물주의 보상과 그의 고통의 크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조물주의 보상이 그가 받는 고통을 완전히 보상해 준다면, 자신의 이기적인 고려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효용을 필연적으로 감소시킬 우발적 사고를 회피하려는 동기를 전혀 갖지 않을 것이다(완전히 보상받는다면 사고를 피하는 것과 피하지 않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물주는 양자에 대한 부모다운 배려에서 그가 가능한 한 모든 우발적 사고들을 피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 중에서도, 자신의 사내다운 모습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최대의 가장 고된 노력을 해야만 한다.


 * * *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274

그러나 인성(人性)의 구조적 특성상,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그는 곧 크게 어렵지 않게 일상의 평정을 즐기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서, 틀림없이 자신의 남은 전 생애 동안 매우 큰 불편을 계속 겪어야만 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의족을 한 자신의 모습을 모든 공정한 방관자가 그것을 보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보게 된다. 즉, 그는 이 불편함을, 그런 중에서도 혼자서 혹은 여럿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든 통상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는 곧 자신을 자기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키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정한 방관자로 된다. 약한 사람들은 처음에 때때로 그렇게 하듯이, 그는 울거나 탄식하거나 그것에 대해 비관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는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어떤 몸부림도 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다른 어떤 시각에서 관찰하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 * *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275∼276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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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
278∼279

다음의 관찰은 특별한 상황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라고 믿는다. 즉, 다소라도 구제(救濟)의 여지가 있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제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그렇게 쉽게 자신들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평정을 회복하지 못한다.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구제의 여지가 없는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경우, 총명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와 연약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 사이에 어떤 눈에 띄는 차이점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의 경우 또는 불행이 최초에 엄습한 때이다. 그러나 최후에 가서는 시간(時間)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慰安者)가 점차 저 연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한 사람이 최초에 자존심과 사내다운 기개의 교도(敎導)에 의해 도달하였던 그런 수준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의 경우가 이런 사정에 대한 분명한 예이다. 자식의 죽음, 친구나 친척의 죽음 등처럼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경우에는 총명한 사람이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다정다감하고 연약한 여성은 그런 경우 흔히 거의 완전히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이런 가장 연약한 여성까지도 가장 강인한 남성과 같이 어느 정도의 평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회복 불가능한 재난 가운데서도, 총명한 사람은 몇 달 또는 몇 년 후에는 결국 회복될 것이 틀림없는 마음의 평정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그것을 미리 즐기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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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284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고독의 어둠 속에서 탄식하지 말고, 당신의 친한 친구들의 관대한 동감에 맞추어 당신의 슬픔을 조정하지 말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세상과 사회의 일광(日光) 속으로 돌아가라. 그리고는 낯선 사람들, 당신의 불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적들과 사귀는 것조차 회피하지 말고, 당신의 적들로 하여금 당신이 당신의 재난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적게 받았는지, 얼마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지를 느끼도록 하고, 당신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그들의 악의(惡意)에 굴욕감을 안겨줌으로써 당신 스스로 기뻐하라.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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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16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번을 곱씹어 읽었는데, 딱 지금 제 상황이네요.
어려운 말로 쓰여졌지만, 결론은 '처연하라~' 한 단어 정도면 해결될 듯 하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1-03-16 10:21   좋아요 0 | URL
저는 일본 대지진을 보면서 이 책에서 '읽었던 부분들'이 생각나서 다시 들춰내서 정리해 봤는데, 양철댁님의 상황에도 딱 맞다니 정말 놀랍군요.

'갑작기 맞닥뜨린 엄청난 불행'에 대한 '어느 철학자의 성찰'이 수많은 역경에 처한 사람들의 여러 상황들에 두루 들어맞으리라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철학과 교수 경력' 12년 만에 이 책을 완성했는데, 그의 나이가 36살이었을 때였답니다.(1723년생, 1759년 출판). 그렇지만 그는 10년 동안 오로지 저술에만 몰두하여 완성한《국부론》 출간 이후에도 '평생 동안'《도덕감정론》을 고치고 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묘비명을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글이 영철댁님께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면 저로서는 큰 보람입니다. ㅎㅎ

마녀고양이 2011-03-16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렌님께서 추천해주신 책들을 읽는다면
한권 내내 밑줄 긋다가 끝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구절마다 왜 이리 와닿는건지요.

시간이 해결해준다 현재는 지나간다 라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방향성은 점검해봐야 한다는 생각 역시 합니다.
가끔 매번 비슷한 상황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방향성과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서요.

oren 2011-03-16 23:37   좋아요 0 | URL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고님께서 '밑줄 긋다가 끝날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딱 제가 그 꼴입니다.
요즘은 읽을수록 내용이 와닿는 오래된 고전들은 밑줄 긋느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습니다. ㅎㅎ

blanca 2011-03-1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위대한 위안자라는 말, 고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말, 다 심금을 울리네요. 마치 아담 스미스가 작금의 상황을 지켜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런데 오렌님, 아담스미스와 데이비드흄의 저서의 인용이 섞여 있는 건가요? 찾아 읽어 보고 싶어져서요.

oren 2011-03-16 23:20   좋아요 0 | URL
윗 글은 아담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서 전부 인용한 내용입니다.

다만, 두 사람이 워낙 절친하게 지낸 친구 사이여서 아담 스미스의 책 본문과 주석 등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부분이나 흄의 책을 인용한 부분이 꽤나 많이 나와서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배치한 것 뿐입니다. ㅎㅎ

(아담 스미스의『도덕감정론』주석의 일부)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예는 흄을 연상시킨다. 흄은 그의『인성론』제2부 3편 3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손가락에 상처를 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이 전부 파멸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성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맨더빌 박사의 철학 체계 590

악덕과 미덕의 구분을 완전히 없애버린 듯이 보이는 또 다른 철학체계가 있는데, 그 때문에 이 철학체계의 경향은 전체적으로 유해하다. 맨더빌(Mandeville) 박사의 철학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학자의 견해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틀렸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떤 특정한 태도로 인성(人性)의 일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들을 관찰하면, 처음에는 그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거칠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생동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멘더빌 박사의 말솜씨로 묘사되고 과장되어 있는 이 표면적 현상들은 그의 학설에 일종의 진실성과 가능성의 분위기를 제공해주고 있는데,
숙맥(菽麥)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속아 넘어가기 쉬운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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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591

그가 관찰한 바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행복보다는 자신의 행복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며, 진심으로 자신의 번영보다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언제나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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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이자 속임수에 불과 591∼592

인간의 다른 모든 이기적인 격정들 가운데 허영심이 가장 강렬한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의해 쉽사리 우쭐해지고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에 대해 매우 유쾌하게 느껴지고, 따라서 그들은 반드시 자신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들의 만족감을 표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부터 기대하는 쾌락은, 그의 생각에도, 이것을 얻기 위해 그가 포기하는 이익을 능가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행동은 사실상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것이고, 또한 천박한 동기에서 나온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동은 전혀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우쭐대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무사(無私)의 동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의 행동은 그 자신의 눈에나 또는 다른 사람의 눈에나 어떤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欺瞞)이자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처럼 자랑을 많이 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그리고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서로 많이 갖추려고 노력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사실은 단지 자존심에서 생겨난 아첨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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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덕행은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 598

맨더빌 박사는 경박한 허영의 동기를 통상 유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덕행이 기타 많은 점에서도 불완전함을 지적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덕행은 그것이 자칭하는 바의 완전한 자아극복(自我克服:self-denail)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 격정의 정복이 아니라 통상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하다고 한다. 쾌락에 대한 우리의 자제(自制: reserve)가 최고의 금욕적 절제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그는 그것을 순수한 사치(奢侈)와 육욕(肉慾)으로 취급한다. 그에 의하면 인성(人性)의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초과하는 모든 것은 사치이며, 따라서 깨끗한 셔츠나 편리한 주택의 사용도 일종의 악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가장 합법적으로 결합되는 경우의 성욕(性慾)의 충족까지 그러한 격정을 가장 유해(有害)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경우의 육욕(肉慾)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이처럼 아주 저렴하게 실행될 수 있는 절제나 정결(貞潔)을 비웃는다.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의 설명 속에 들어있는 교묘한 궤변은 언어의 애매모호함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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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 599∼600

맨더빌 박사의 저서(『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큰 오류는, 모든 감정들은, 그것의 정도 및 그것이 향하는 대상 여하를 불문하고, 전부 악덕(惡德)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제의 감정, 혹은 다른 사람들의 당위적 감정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 허영심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결론, 즉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을 확립한 것은 바로 이러한 궤변에 의해서이다. 장엄(壯嚴)한 것에 대한 애호, 우아한 예술품과 생활수준을 제고하는 것들에 대한 취향, 복장과 가구와 마차 등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취향, 건축·조각·미술과 음악에 대한 취향이, 어떤 불편도 없이 이러한 격정에 빠져들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사치·육욕(肉慾)·겉치레로 간주된다면, 분명히 사치와 육욕과 겉치레는 공공의 이익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상스러운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그가 생각한 이러한 특성들이 없으면 우아한 예술은 결코 장려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그것은 쓸모가 없어서 틀림없이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맨더빌 시대 이전에 유행했던,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격정들을 완전히 근절시키고 없애버리는 데 미덕이 있다고 본 일부 금욕주의 학설들은 이 방종적(放縱的) 체계의 진정한 기초였다. 맨더빌 박사가 다름과 같은 명제(命題)를 증명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첫째, 인간은 결코 실제로 이러한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일이 없었다. 둘째, 만약 인간이 그 자신의 격정을 보편적으로 정복하게 되면, 그것은 모든 산업과 상업을 종지(終止)시키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인류생활의 모든 업무를 종지시킴으로써, 그것은 사회에 대하여 유해(有害)하다.

그는 이 두 가지 명제 중에서 첫 번째 것을 통해서, 진정한 미덕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소위 미덕이라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기(詐欺)이자 기만(欺瞞)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을 통해서는, 개인적인 악행이 없으면 어떤 사회도 번영할 수 없으므로, 개인적인 악행은 공중의 이익(利益)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맨더빌 박사의 체계이다. 비록 이 체계 때문에 이것이 없었을 경우에 비해 더 많은 악행이 야기되었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적어도 다른 원인에서 생겨난 악행들로 하여금 더욱 뻔뻔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그리고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함으로 그 부패한 동기(動機)를 공개적으로 선언(宣言)하도록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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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 602∼603

자연철학을 연구하는 저자가(이하는 맨더빌 박사를 지칭한 말이다. 맨더빌은 본래 의사로서 자연과학자이다-역자) 우주의 위대한 현상들의 원인을 규명한다고 자처하거나,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한다고 자처하는 경우,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그는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그럴 듯한 범위 내에 있는 한, 그는 우리가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갈망(渴望)과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이나 우리의 시인(是認)과 부인의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마치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교구의 여러가지 사정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겠다고 자처하는 것과 같다.

비록 이런 경우에조차, 게으른 주인이 자신을 속이는 집사(執事)를 믿는 것처럼, 우리 역시 속아 넘어가기 쉽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의 설명을 그대로 다 믿고 넘어갈 수가 없다. 적어도 그 중의 일부 내용들은 정당해야 할 것이고, 매우 과장된 내용들마저 약간의 근거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에 늘 그래 왔듯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슬쩍 한번 살펴보는 정도의 관찰에 의해서도 그의 사기행각(詐欺行脚)은 들통 나고 말 것이다. 천연적인 감정의 원인으로서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성(天性)이나 또는 그것과는 어떤 유사성도 전혀 없는 원리(原理)를 제시하고 있는 저자는, 가장 분별력도 없고 가장 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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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애덤 스미스를 경제학으로 이끈 사람!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애덤 스미스가 쓴 중요한 저서《도덕감정론》이 버나드 맨더빌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도덕감정론》은“사람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생각되더라도”라는 말로 시작되어, 이기심에 따른 사람들의 행위가 정당한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애덤 스미스는 방탕과 사치 같은 인간의 악덕을 옹호한 맨더빌의 사상이 사회에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애덤 스미스가《국부론》에서 자유경쟁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은 당시 대기업이 독점하고 있는 무역 등 산업의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자유경쟁을 보장함으로써 대기업뿐 아니라 소규모 기업과 상인들도 경제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를 더욱 안정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덕을 옹호하는 주장으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인간 악마(Man-Devil)라 불렸던 맨더빌(Mandeville)은 1670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레이던 대학에서 철학박사와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영국으로 건너가 정착, 이후 173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다. 맨더빌이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그가 1723년《꿀벌의 우화》라는 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책에는 <투덜대는 벌집: 또는, 정직해진 악당들>이라는 풍자시와 함께 맨더빌이 직접 단 주석과 <사회의 본질을 찾아서>, <자선과 자선학교>, <미덕은 어디에서 왔는가> 등의 글을 함께 수록해놓았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미들섹스 지역의 대배심으로부터 “종교와 미덕을 깍아내린다”는 혐의로 고발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책을 불사르기도 했다. 도대체 이 책의 무엇이 당시 사람들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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