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이었나 보다. 체르노빌원전에서 일하는 아빠를 둔 아이는 그 날도 어제처럼 평온하게 잠들었다 번쩍이는 섬광과 폭발음을 듣고 잠을 깬다. 아이가 놀라서 창가에 서 있는 장면을 그린 만화를 읽고 몇날 며칠을 잠을 못 이루었다. 원자력발전소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땐 다 끝이라는 생각들로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 두려운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선병질적이었던 나는 제대로 건수를 잡은 셈이었다.  

   

정말 그 어린 시절의 괴로움과 막연한 추측, 그리고 강한 고통을 주었던 이상하게 원근감 없이 보이는 인생관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린이들이 느끼는 슬픔을 비웃지 말아야 한다.
-p.112 

어른이 되어가며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그 단조로운 일상성을 체득해 나갔고, 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안전할 거라는 눈먼 믿음에 자꾸 중독되어 갔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외외성'과 '돌발적 비극'에서 언제나 비켜가는 행운은 없다는 것을 머리와 가슴으로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때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라는 것을 가끔은 떠올릴 수 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단란한 가족, 유달리 친밀감 있는 남매, 영롱한 유년기.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 그리고 칭찬받지 못할 사랑, 남매의 불화, 마을을 덮친 자연재해, 죽음...  

심판은 누구의 입에서건 나올 수 있다. 모질고 잔인하고 지각없는 거리의 부랑아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움과 동정은 드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올바른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미덕인 것이다.
-p.380

커다란 재난에 처해 우리 삶의 인위적 껍질이 벗겨지고 우리 모두가 근본적인 죽음의 위기 앞에서 하나가 된 그런 순간에 어떤 싸움인들, 어떤 모진 행동인들, 그리고 어떤 상호불신인들 존속할 수 있으랴?
-p.422 

덜컹거리는 지하철 옆에서 중년의 남자는 갤럭시탭으로 재난기사를 읽고 있었다. 중독처럼 스마트폰으로 일본지진기사를 읽는 것이 갑자기 참혹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쑥 내밀어 그의 화면을 훔쳐 봤다. 시선을 깨달아 버린 듯 고개를 들어버리는 행동에 머쓱해져 150년도 더 넘어 떨어진, 하지만 마치 작가가 지금의 상황을 알고라도 있는 듯 덧붙인 얘기들을 가슴 아프게 담았다. 어떤 행동을 해도 무슨 생각을 해도 계속 불편하고 가슴 한켠이 무지근했다. 나는 그다지 올바르지도 미덕이 많은 인간도 아니지만 그냥 같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퍼졌다. 역사적 과오와 종교적 특수성이 마치 아주 객관적인 심판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 하필 이 시점에서 언급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고 얄팍해 보인다. 죽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도 어머니들도 아버지들도. 인간의 입으로 심판 운운하는 작태가 역겹다.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의 1권을 읽는 동안 행복했었다. 작가 조지 엘리엇 특유의 위트와 재기는 물방앗간집 남매의 유년을 사실적이고 사랑스럽게 채색한다. 완벽하지 않은, 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한 가족의 과거는 언제나 유쾌하다. 아버지의 파산이후로 전개되는 2권은 바깥의 일들과 맞물려 허덕거리며 읽었다.  섬뜩한 오버랩. 책을 읽는 행위가 사는 일과 겹칠 때 삶은 더 가볍게도 무겁게도 들썩인다.

여주인공 매기가 아버지를 몰락에 이르게 한 사람의 곱사등이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구성은 의외로 신파적이지 않다. 그것은 수많은 나쁘고 추한 것들에서 좋은 것들을 항상 기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그 진저리처지는 관성에 대한 통찰을 놓치지 않은 작가의 저력때문인 것 같다. 남다르게 지냈던 사촌의 연인과 위험한 사랑으로 미끄러지는 그 위험한 도발의 묘사의 결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예리하다.  그리고 마을을 덮친 홍수. 매기는 자신의 사랑 때문에 불화했던 오빠 톰과 함께 그 물에 쓸려간다. 매기는 끊임없이 자신을 심판하고 단죄하려 했던 세상을 향해 무기력한 저항과 기만적인 순응의 양단 사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자신을 그냥 놓아 버린다. 이런 허무하고 슬픈 결말.

에필로그에서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는 구절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믿고 싶지만 큰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이백 년 가까운 세월을 질러 돌아온 재해는 인간이 무언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고 휘둘렀던 남용된 힘과 만나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이 상흔도 치유될 수 있을까? 아이가 되고 싶다. 걱정하는 것들이 다 기우라고 나만 믿으라고 어깨를 다독거려 줄 보호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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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_1759년에 쓴 어느 철학자의 상상
    from Value Investing 2011-03-16 09:51 
    중국이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251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251∼252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꿈꾸는섬 2011-03-1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라는 구절의 말을 믿어야할 것 같아요.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그저 놀라울뿐이에요.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눈물만 나더라구요.ㅜㅜ


blanca 2011-03-16 22:52   좋아요 0 | URL
상황이 수습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악화일로를 치닫는 것 같아 참 절망적이에요. 산다는 게 참 어려워요. 제발 더한 비극이 없기를 일본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기원합니다.

양철나무꾼 2011-03-1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을 심판하고 단죄하느라 얼마나 자기 자신을 후벼팠을까요?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는 어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모든 있어야 할 게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랑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blanca 2011-03-16 22:53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 제자리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지 정말 여실히 깨달아요. 그냥 지루하고 평온한 일상, 이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왜 사람은 항상 까먹고 말까요?

비로그인 2011-03-16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런저런 망언들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치유될 것 같은데요^^

blanca 2011-03-16 22:54   좋아요 0 | URL
후와님, 댓글이 참 따뜻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그러기를 바라요.

책가방 2011-03-1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향력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특히 더 말조심을 해야할 터인데... 안타깝더군요.


blanca 2011-03-16 22:56   좋아요 0 | URL
환멸이 드는 모습이지요. 오히려 더 모범 선례를 보여주어야 할 자리가 얼룩지는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oren 2011-03-1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글은 거의 언제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같은 것들을 어루만지고 다독거리고 보듬어주는 따스한 손길 같은 것이 늘 느껴집니다.

저도 '일본 대지진'을 접하면서 떠올랐던 몇몇 생각들과 blanca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생각들 때문에 최근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었었는데, 그 책의 '일부 내용들'을 한 데 모아 '먼댓글'로 정리해 봤습니다. 아무튼 저한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1-03-16 22:57   좋아요 0 | URL
oren님 과찬을 진짜라고 착각해도 될까요?^^ 예, 먼 댓글 찬찬히 잘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정말 아이가 되고 싶으세요? ^^
안전하다고 믿던 세상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던,
진정으로 첫 충격이 오는 시기가 이르면 초등학생, 늦으면 중학생부터잖아요.
참 힘들었어요.........

저는 걸프전 발발 뉴스를 기억해요. 우리의 우방이라던, 선하다던 미국이 진짜 전쟁을 일으킬까 하면서
그럴 일 없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날 속보로 뉴스에 나오더군요.
전쟁이란게 실존하는구나, 하고 굉장히 당황하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나요. ㅠ

blanca 2011-03-16 22:58   좋아요 0 | URL
가끔은 엄마 뱃속으로도 들어가고 싶어져요^^;; 걸프전! 아, 저도 어렴풋하게 기억나요. 마고님, 오늘도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뉴스들이 계속 속보로 뜨네요. 현실이 더 악몽 같아요.

2011-03-16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6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1-03-1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조지 엘리엇보다 <소년중앙>이 더 반가울까요? ^^

blanca 2011-03-16 22:5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저 <소년중앙> 사달라고 어찌나 아부지를 많이 졸랐던지 몰라요. 매달 매달 사고 싶어 아주 가슴을 태웠던 기억이 나네요. 가끔 <보물섬>과 <어깨동무>도. 아, 다 그리워지네요.

반딧불이 2011-03-1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언을 일삼는 사람보다 블랑카님처럼 마음아파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에 위안은 가져봅니다.

blanca 2011-03-16 23:02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그냥 지금은 다 같이 마음 아파하고 함께 이겨나갔으면 좋겠는데 또 분란이 생기나 봐요. 방사능 문제, 과거사 문제들과 겹쳐져. 어떤 게 정답인지 자꾸 다투지 말고 지금은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다 기다려 주고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줬으면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3-1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엘리엇이 영국의 전원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은 참...잔잔하고 좋죠...

blanca 2011-03-16 23:03   좋아요 0 | URL
아! 노자님, 그래요. 저도 정말 그게 너무 좋더라구요. 노자님 혹시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읽으셨어요? 완역본이 없다면서요. 왜이리 관심 가는 작가들은 번역본이 없는 건지. 참 아쉬워요.

노이에자이트 2011-03-16 23:07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소설이죠.시중엔 없고 광주엔 도서관에 금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있어서 빌려봤습니다.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어요.금성 것이 완역본입니다.

blanca 2011-03-16 23:10   좋아요 0 | URL
아, 완역본이 있군요. 최근에 나온 것이 축약본이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도서관에 찾아 볼게요.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