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에 대한 추억......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나는 그를 애독하는 자들의 글에, 그에게서 따온 부분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울화가 터진다. 그리고 그를 읽어 보기만 하면 내 글의 날개와 허벅다리를 거기서 따오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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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누가 뭐래도 플루타르코스였다. 그에 관한 뚜렷한 증거를 나는 여럿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몽테뉴가 쓴『수상록』을 통해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그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교감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정작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대해서는 좀처럼 가까이 다가설 기회를 잡지 못했다.(한 가지 핑계를 대자면, 그가 쓴 작품들 가운데『플루타르코스 영웅전』말고는 여태까지 국내에 제대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 몇 권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박영수 특검이 현직 대통령의 온갖 추악한 부정과 비리를 파헤치는 동안에 우연히 집어든『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그 책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거기에 담긴 '50명의 전기'가 오늘날의 정치 현실과도 너무나 자주 오버랩되는 바람에 한결 재미가 더해진 때문이었다. 그 속에 담긴 여러 인물들에 얽힌 온갖 생생하면서도 놀라운 이야기가 그토록 매혹적일 줄은 예전엔 미처 상상도 못했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는 우리가 이미 영화 등을 통해 어려서 부터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도 꽤나 등장한다. 가령 테미스토클레스(영화『300』과 『제국의 부활』등에 나왔던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알렉산드로스(영화『알렉산더』에서 훌륭하게 묘사된 것처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등등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이런 인물들을 플루타르코스의 '온전한 전기'를 통해 아주 디테일하게 만나는 반가움은 영화와는 또다른 묘미가 책 속에 숨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셰익스피어조차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고 그의 탁월한 문장력과 인간 심리 묘사 등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손길로『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올라누스』등의 작품을 남길 정도였다. 영웅들의 전기 속에 등장하는 너무나 유명한 대목들, 가령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 등을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전체'를 통해 '각색없이' 아주 디테일하고도 생생하게 마주치는 기쁨은 때로는 격한 감동마저 불러 일으킬 때도 있었다.(나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두 번씩이나 읽는 동안에 일부러 책을 읽는 감동을 더하기 위해 '찰턴 헤스톤' 주연의 러닝타임 212분짜리 1959년판『벤허』를 VOD로 다시 봤는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시 꺼내 봐야만 할 영화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도서출판 숲에서 펴낸『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영웅 10명'만 담은 발췌번역본이다. 주석도 풍부하고 번역도 훌륭하지만 '동시대에 활약한 여러 탁월한 인물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없다는 게 결정적 단점이다. 완역본을 읽으면 발췌본에서 모자이크식으로 따로따로 움직이던 인물들이 어느새 여기저기서 동시에 한꺼번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느낄 수도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만 하더라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루쿨루스, 세르토리우스, 술라, 키케로, 카토, 브루투스, 안토니우스 등과 동선이 겹치는데 『영웅전』에는 이들의 전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몽테뉴로 되돌아 오자. 몽테뉴가 쓴 수상록은 플루타르코스가 쓴『윤리론집』을 본따서 쓴 작품이지만, 그가 다루는 소재와 주제들이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하고 독특했기 때문에 플루타르코스의『윤리론집』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살던 세상이 대략 1,500년의 간극이 있을 만큼 서로 확연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루는 인물들과 작품들에는 겹치는 부분이 아주 많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물과 작품들'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낸다는 공통점이 있다.(물론 이에 대해 얼마쯤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플루타르코스는 스스로도 밝혔듯이 라틴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이상하리만치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인용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에 비해 라틴어에 아주 능통했던 몽테뉴는 온갖 로마 시인들의 작품들을 자유자재로 끝없이 인용한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아주 좋아한 인물들은 고대 그리스 시인과 철학자들이었으며,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이 대표적이었다.)


어쨌든 뒤늦게나마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두 번씩이나 거듭 읽고 나니 예전에『몽테뉴 수상록』을 읽으면서 내가 숱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이 새삼 뇌리에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몽테뉴의 책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미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했던 여러 인물들을 이제야 비로소 제법 알 만하다고 여길 정도가 되니 문득 몽테뉴의 수상록 속으로 다시금 뛰어들고픈 충동마저 느낀다. 그런데 사실『몽테뉴 수상록』만 하더라도 그 분량이 결코 호락호락 하지도 않은 데다가, 내가 예전에 그 책을 두 번째로 읽고 난 뒤에 기어코 분별없는 욕심을 앞세워 낑낑거리며 필사까지 마쳤던 그 고된 기억 때문에라도 지금 당장은 그 책 속으로 곧바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혹여 이번 기회에 그 책 속으로 다시 붙잡혀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어쩌면 거기서 또다시 한참이나 침잠하면서 지낼지도 모르겠고, 설사 그 책에서 간신히 벗어나 다시 얼굴을 내밀더라도 곧바로 또다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속으로 도로 빠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괜한 걱정마저 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아주 오래 전에 몽테뉴 수상록을 통해 맨 처음으로 만났던 숱한 고대의 낯설고도 경이적인 인물들 가운데 지금껏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작품들을 통해 더러 낯을 익혀둔 인물들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몰랐고 알쏭달쏭한 점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연거푸 읽고 나니 그저 낯선 이름으로만 어렴풋이 그려지던 여러 인물들이 비로소 '그들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지닌 생생한 표정을 띤 인물'로 되살아나 내 눈앞에서 움직이는 듯해서 기분이 여간 흡족한 게 아니다.


사실 플루타르코스는 그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전기를 남긴 일만으로 그토록 유명한 인물이 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철학자였으며 문장가였다. 그의 책 속에는 숱한 인물들의 생애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격조높은 문장들과 두고 두고 기억할 만한 유명한 일화들 말고도 아주 매혹적인 옛 시인들의 싯구들과 당시의 세태를 풍자하는 구수한(?) 속담들과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과 비판이 가미된 역사 비평들이 차고 넘친다. 몽테뉴가 쓴 수상록이 그토록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들을 가득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책의 저자가 플루타르코스를 탐독한 데서 그 한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장은 아닌 셈이다.


이들 두 사람이 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대략 이쯤에서 그치고, 이쯤에서 나는 '플루타르코스의 프로필'이라도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 싶다. 내가 읽은 동서문화사판『몽테뉴 수상록』에는 맨 뒷편에 아예 '인명 찾아보기'를 따로 싣고 있는데, 해당 쪽수는 1288∼1330쪽이다. 인명 소개만 무려 43쪽에 이른다. 거기에 수백 명의 실존 인물들이 잔뜩 소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물론『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온갖 인물들도 거의 망라되어 있을 정도다. 내가 여기서 인용하고 싶은 인물은 바로 그런 인물들의 전기를 남긴 '작가 플루타르코스'이다.


플루타르코스 Plutarcos, 45∼125 영어명 Plutarch(플루타르크), 고대 그리스 말기의 사가(史家) · 수필가. 고전 고대에 걸쳐 가장 유명한 전기 작가(傳記 作家). 중부 그리스 카이로네이아 출생. 플라톤 철학을 배웠고 자연 과학이나 변론술도 수학함. 카이로네이아 시정(市政)에 공헌해 명예 시민이 되었고, 만년에 델포이의 최고 신관(神官)으로 있으면서 아폴론 신역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카이로네이아에 사숙(私塾)을 열어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그 교양 속에 왕성한 수필 활동을 하고 방대한 전기를 씀은 그의 진목목이라 하겠다. 특히 부유한 생활에서 어려움 없이 지낸데다, 당시 로마 제국이 융성했던 시기의 배경에 있었으므로 작품에도 자신의 짙은 체험담 같은 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 학파를 주로 하여 거기에 피타고라스파 사상을 가미했으며 에피쿠로스 학파는 철저히 반대했다. 미신을 반대하나 신비주의 사상이 엿보이고 로마 제국의 지배를 긍정하며 한 사람만의 지배를 인정하였음.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있음.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인명 찾아보기> 중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말미에 메모해 둔 내용들. 두 번째로 읽으면서도 여전히 메모할 게 많았다.)



(동서문화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말미에 메모해 둔 내용들)



(동서문화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말미에 메모해 둔 내용들)



(동서문화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Ⅱ,Ⅲ』을 읽는 동안 '독서노트'에 따로 끄적거린 메모들)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있다면 그건 내가 앞에서 미리 얘기했던 '증거물'이다. 내가『몽테뉴 수상록』을 두 번째로 읽고 난 뒤에 아주 작심하고 방대한 분량으로 베껴 놓은 '필사 내용' 가운데 '플루타르코스'가 포함된 대목들만 검색해서 곧바로 뽑아낸 대목만 해도 결코 적은 분량은 아니었다. 작가 몽테뉴가 플루타르코스를 얼마나 좋아했으며, 왜 좋아했는지를 이만큼 분명하게 드러내는 증거도 별로 없을 듯하다. 우연한 기회에 이런 내용들만 따로 발췌해서 읽는 재미도 나로선 여간 쏠쏠한 게 아니어서 이런 글까지 남겨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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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161

내게는 아직도 저 너머의 나라가 보이는데, 그 시야가 혼탁하고 몽롱해서 아무것도 풀어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공상에 떠오르는 것을 아무것이나 무척대고 말하려고 하며, 여기 내 고유의 타고난 방법만 쓰기로 하고,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좋은 작품들 중에 내가 취급하려는 것과 같은 제재를 우연히 만나 볼 때에는(내가 방금 플루타르크에서 그의 상상력의 힘에 관한 설화에 부딪친 것처럼) 이런 사람들에 비하여 내가 얼마나 약하고, 허술하고, 둔하고, 잠들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못나 보이게 됩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173

나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작품 속에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한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습니다. 플루타르크는 이 작품 속에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고,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던 것 이상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순수한 문법상의 공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 우리들 천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들이 침투되어 있는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합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요즈음 사람들 252

우리의 판단력은 병들어서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정신들이 옛 사람들의 행동을 비굴하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헛된 사정과 원인들이나 꾸며 붙이며, 고대의 아름답고 후덕한 행적들의 영광을 더럽히는 약은 꾀만 쓰는 것을 본다.

위대한 재간이지! 글쎄, 가장 훌륭하고 순결한 행동을 내놓아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 그럴듯하게 50가지 나쁜 의향을 꾸며 댈 것이다. 거짓말을 펴 보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 속마음의 의도가 얼마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갈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들은 남을 모함하는 데는 심술궂기보다도 더 둔중하고 상스럽게 재간을 부린다.

사람들이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깎아 내리는 데 쓰는 수고로, 그와 똑같이 방자하게 나는 이런 이름들을 높이는 데 수고하며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 그 희귀한 모습들은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세상의 모범으로 추려낸 것이니, 나는 이 이름들에 영광을 다시 살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다하며, 유리한 사정으로 해석해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 노력은 그들의 가치를 이해할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을 묘사하는 일은 착한 사람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모범을 위해서 감격하며 열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는 수작은 악의로 하거나, 또는 지금 내가 말한 바 인물들의 신용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덕에서 하거나, 또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지만, 찬란한 도덕을 그 소박한 순결성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강력하고 명석하지 못하고 그러한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 탓이다. 마치 플루타르크가 말하는 바, 그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작은 카토의 죽음의 원인을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따위이다. 거기에 대해서 플루타르크가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이 죽음을 야심뿐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답고 후덕하고 정당한 행동을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차리리 세상의 추악함을 더럽게 생각하여 버렸을 것이다.

이 인물은 진실로 인간의 도덕과 지조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대자연이 골라 놓은 시범이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작은 카토에 대하여>


플루타르크와 세네카 436∼438

다른 종류의 독서는, 쾌락에 좀더 내용을 섞어 주며 거기서 내 기분과 조건들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이런 데 내게 소용되는 작품들은 플루타르크와 세네카이다. 그들은 둘 다, 내가 거기에서 찾는 지식을 조각조각 풀어서 취급해 놓았기 때문에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내 비위에 맞는 특기할 장점이었다.

플루타르크의 《소품집》과 세네카의 《서한집》등이 그렇다. 이 《서한집》은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문장이다.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하는 데는 큰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덮어 둔다. 왜냐하면 이 문장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대부분의 사상이 유익하고 진실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같은 세기에 출생하였고, 둘 다 로마의 두 황제의 사부였으며, 외국에서 들어왔고, 다 부유하였고 세력도 누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학의 진수를 온당한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플루타르크는 더 고르고 꾸준하며, 세네카는 더 파동이 있고 잡다하다. 세네카는 힘들고 굳어지며 긴장해서 허약과 공포와 못된 욕망에 대항해서 도덕을 무장시킨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성질의 영향을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보조를 서두르거나 이런 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사상은 플라톤적이고 순해서 시민 생활에 조화될 수 있는데, 세네카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받아서 일반의 습관과는 융화되지 않으나 내 의견으로는 개인 생활에 더 편리하고 견실하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키케로로 말하면, 그의 작품들 중 내 목적에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도덕 철학을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면(사실상 이미 건방진 한계를 넘은 바에 이것을 억제할 수도 없다), 그의 글 쓰는 방식이 내게는 지루하게 보이며 다른 점도 그렇다. 서문이나 정의·구분·어원 따위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긴 때문에 문장이 생기를 잃고 내용이 질식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그를 읽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거기서 진짜 정수를 뽑아서 보아도 대개는 바람밖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의 사상에 필요한 논법이나 내가 찾고 있는 요점에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웅변가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이니, 이런 논리학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절차는 못마땅하다. 나는 마지막 요점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이나 탐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해 갈 필요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지탱해 나를 가르쳐 줄 진실하고 견고한 이치를 찾고 있다. 문법상의 미묘한 점이라든지, 말과 논법의 교묘한 구조 같은 것은 필요없다. 나는 가장 심각한 의문점에 첫 공격을 가하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의 문장은 뚝배기 주위를 돌다가 기운이 빠진다. 그런 수작은 학교나 재판정이나, 설교단에 맞는 일이다. 그런 데서 우리는 실컷 졸고 있다가 한 15분쯤 뒤에 보아도 말의 줄기를 잡을 여유가 넉넉히 있다. 옳건 그르건 자기가 승소하려는 때, 재판관 앞에서,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나 보려고 모두 말해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와 속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일이다.

나는 사람이 주의를 끌려고 포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령처럼, "내 말 들으시오!" 하고 5번이나 고함지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이런 것 모두가 내게는 쓸데없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다. 내게는 미끼도 양념도 필요치 않다. 나는 날것으로도 잘 먹는다. 이런 준비와 서곡으로는 내 식욕이 당기게 하기는커녕 거기 물려서 입맛을 잃게 만들어 놓는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서적에 대하여>


브루투스의 경우 439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같은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브루투스를 플루타르크의 저서에서나 그 자신의 저서에서나 마찬가지로 읽어 보고 싶다.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서적에 대하여>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440

역사가들은 내게는 입에 맞는 떡이다. 그들은 재미나고 평이하다. 그들은 또 인간의 내적 조건들의 잡다성과 진실성의 전부와 세부적인 것, 그가 총체로 가진 여러 방법의 다양성과 그를 위협하는 사건들, 즉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인간 전체가 다른 어떤 데서보다도 여기서 더 생기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자들은 그 인물들이 겪는 사건보다도 그 목적에, 또 외부에서 닥쳐오는 것보다도 그들 내부에서 나오는 것에 더 흥미를 갖기 때문에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서적에 대하여>



심각한 연구와 자기 반성 497

그러나 플루타르크가 책임지고 말하는 까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괴상하기까지 하다. 이 까치는 로마의 어느 이발사의 이발소에서 그가 듣는 모든 것을 목소리로 흉내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팔수들이 이 이발소 앞에 멈춰서 오랫동안 나팔을 분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은 이 까치가 사뭇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우울하게 지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 그가 나팔소리에 얼이 빠져서 귀가 먹고 그의 청각과 함께 목소리도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심각한 연구이고 자기 반성이었으며, 그가 그 뒤 처음 낸 목소리는 이 나팔소리를 그 반복과 자태, 음조의 변화까지 완전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공부로 그가 전에 말할 줄 알았던 것은 모두 버리고 경멸해 버렸던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중 [인간은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다] 중에서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549∼550

데모크리토스는 식탁에서 꿀맛같이 단 무화과를 먹어 보고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감미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근원을 밝히려고 식탁에서 일어나 무화과를 따 온 자리의 나무 생김새가 어떤가를 보러 갔다. 그의 하녀는 이렇게 소란을 떠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듣고, 그걸 가지고 그렇게 수고하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무화과를 꿀그릇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탐구해 보려는 기회를 잃고 자기 호기심의 재료를 빼앗긴 것에 분개해서 "물러 가거라, 기분 나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본래 그런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끝까지 캐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잘못된 추측을 고집한 상태로 진실한 이유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이 유명하고 위대한 철학자에 관한 일화는, 우리가 어떤 사물의 원인을 탐구하여 알아내지 못하고 절망할 때에, 그 추구해 보는 연구에 대한 정열에서 느끼는 재미의 성질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플루타르크도 이것과 같은 예를 하나 들고 있다. 어떤 자는 탐구하는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그 원인을 캐고 있는 사물이 해명되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또 어떤 자는 물을 마셔서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의사가 그의 열병에서 오는 갈증을 치로해 주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기보다는 쓸모없는 사물이라도 배우는 편이 낫다." (세네카)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중 [인간은 지식을 갖지 않았다] 중에서



 

몽테뉴의 책이 금서로 지정될 만한 근거를 제공했던 대목들 559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비단이 깔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천하일색의 미인들이 가득하며, 특이한 음식과 술이 가득한 천당을 약속할 때에, 그들은 죽어 갈 자기 인생의 욕망에 맞는 관념과 희망으로 꿀을 발라서 우리를 꾀려고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아첨하는 희롱꾼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 중의 어떤 자들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도 온갖 종류의 쾌락과 행복이 수반되는 이승의 현세적 생활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거룩한 개념들로 하느님의 성질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룩하다는 별명까지 얻은 플라톤이, 이 가련한 생령(生靈)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거룩한 세상의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허약한 이해력이나 감각의 힘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영겁의 고초를 당해 낼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 가서 얻으리라고 그대가 약속하는 쾌락들이 내가 이승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과 아무 공통된 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오관(五官)의 감각들이 환희로 충만하고 이 영혼이 욕구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만족으로 잡혀져 있다 해도, 우리는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내 것이 무엇이든지 들어 있다면, 거기에 거룩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것이 현재 우리의 처지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사라질 인생들의 모든 만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친척과 자녀나 친구들의 선심이 만일 저승에 가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때에도 그런 쾌락을 중히 여겨야 한다면, 우리는 이승의 제한된 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위대성을 당연하게 상상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 비참한 경험으로의 위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준비해 놓으신 행복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고린도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누가 우리 존재를 개조하고 변경하여 준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그대의 정화를 가지고 말하듯),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이며 보편적인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학설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닐 것이다.

      격전 속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에 끌려가던 시체는
      이미 헥토르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

      변화하는 것은 모두 분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멸한다.

      심령의 부분들은 사실 위치가 바뀌어지고,
      그 질서가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는 식의 보상을 받을 것은 다른 사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에서, 즉 그가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상상하던 그 영혼의 거주지가 변함에 따라,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사자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 사자가 카이사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인가? 그 사자가 바로 카이사르라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하며, 당나귀로 변한 어미를 아들이 타고 다닌다는 식의 어리석은 수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동물들의 신체가 다른 종류의 동물의 신체로 변할 때에, 다음에 나온 동물은 그 전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페닉스의 재에서 벌레가 나오고, 다음에 다시 다른 페닉스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둘째 번 페닉스는 첫 번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명주실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 비틀어지는 것같이 보이는데, 바로 이 몸뚱이에서 나방이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를 아마도 첫번 벌레라고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한번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시간은
우리의 물질을 모아 지금 있는 질서로 부흥시키고,
생명의 빛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한 번 우리의 추억의 선이 단절된 다음에는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다른 곳에서 내세에 가서 보상을 누린다는 문제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그럴 성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눈알이 뽑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면
눈은 단독으로는 어느 물체도 식별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 점에서 고려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생명의 멈춤이 일어나고,
모든 동작은 감각을 떠나 흩어져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인간이 사용하며 살아가던 팔다리를 벌레가 파먹고 흙이 그것을 썩힐 때, 인간이 고통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가며,
그 집합체는 우리 개인을 구성하므로 그런 일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루크레티우스)

그뿐더러 인간 속에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들어가서 실현되게 한 것이 곧 신들이 한 일인 이상, 신들은 그들 정의의 어느 기반 위에서 인간이 죽은 다음 그의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의지를 조금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사람들을 그릇된 조건에 데려다 놓고, 이쩌서 인간의 악행에 분격하고 복수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밖에 상상해 볼 수 없다. 사람밖에 못 되는 자들로서 신과 반신(半神)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자가 노래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진영(陳營)에 있어 본 일이 없는 자가 무기와 전쟁에 관해서 토론하려는 식으로, 경솔한 추측으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기술의 실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오만한 수작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중 [인간은 지식을 갖지 않았다]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시인 825∼828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호메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이 인물을 감탄스럽고 거의 인간 조건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섞어서 생각한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는 무엇이 명예롭고 수치스러우며
유용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크리시포스와 크란토르보다도 더 능란하게
더 완전하게 말한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다른 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치 무궁무진한 샘처럼
피에리아(詩神들의 고향)의 물에
시인들은 입술을 축이러 온다.                                                                                    (오비디우스)

또 다른 자는 말하기를-                            

헬리콘(보이오티아 접경의 산, 중턱에 시신(詩神)들의 제전이 있었다) 시신들의 길동무들을 더하라.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호메로스만이
별무리의 높이에 오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기를-

그의 풍부한 원천에서 후세의 시인들은 그들 시가에 물을 길었고
단 한 사람의 재보로 부유해져서
감히 수많은 작은 하류로
물을 끌어대는 큰 강이다.                                                                                           (마닐리우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낙산드리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는, 호메로스는 군사 훈련에 대단히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에 라케데모니아 인들의 시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나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마호메드라는 이름을 두 번째 가진 터키 황제가 교황 피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는 트로이 사람들에게서 나왔고, 나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 인들에 대해서 헥토르의 피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어째서 이탈리아 인들이 내게 대항해서 단결하는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825∼828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중에서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 올리는 것이다 965


그들의 언어는 지조 있는 자연스러운 힘으로 충만하며 벅차다. 그들은 꼬리뿐만 아니라 머리와 배와 다리 전부가 풍자시이다. 거기에는 억지가 없고 길게 잡아 늘린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같은 태세로 진행된다. "그들의 사상은 남성적 미의 상징이다. 그들은 단지 말을 꾸며서 희롱하는 것이 아니다."(세네카)

그것은 가시 없는 무른 웅변이 아니고, 힘줄이 박히고 담담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보다는 채워서 황홀하게 하며 가장 강력한 정신들을 감복시킨다. 이러한 훌륭한 문체가 그렇게 생기있고 심각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것을 말이 잘됐다고 하지 않고 생각이 잘됐다고 말한다.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올리는 것이다. "웅변을 만드는 것은 흉금이다."(뮌틸리아누스) 우리네는 속이 찬 개념들을 판단력이니 언어니 아름다운 문장이니 하고 부른다.

이러한 묘사는 숙련된 문장력으로써 되는 일이 아니고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더 생생하게 마음속에 받았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갈루스는 단순하게 말한다. 그것은 그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호라티우스는 피상적인 표현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가 마음먹은 것을 말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물을 더 명확하게 더 멀리 내다본다. 그의 정신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과 모양의 곳간 전체를 뒤져서 옭아내 온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것이 예사로움을 벗어나므로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언어가 필요하다. 그는 사물들을 통해서 라틴 말을 본 것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 중에서



플루타르크의 저서 967∼968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나는 그를 애독하는 자들의 글에, 그에게서 따온 부분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울화가 터진다. 그리고 그를 읽어 보기만 하면 내 글의 날개와 허벅다리를 거기서 따오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 중에서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 1019

우리가 명예에 관한 모든 장점을 그들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결함과 악덕까지도 옳은 일이라고 인정할 뿐 아니라, 모방까지 해가며 그런 일하는 권한을 그들에게 주고 옹호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종들은 모두가 그를 본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다녔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아첨꾼들은 그와 같이 근시안인 체하느라고, 그의 앞에서 잘 부딪치고 발끝에 걸리는 것을 차고 둘러엎곤 했다. 탈장(脫腸)까지도 때로는 으스대며 자랑할 거리가 되었다. 나는 귀먹은 것도 뽐낼 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플루타르크는 왕이 왕비를 미워하자, 궁신들도 덩달아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더 심한 것은 음탕한 버릇이 모든 버릇과 아울러 유행하고, 불충·모독·잔인성도 그렇고, 사교가 그렇고, 미신·무신앙·태만이 그렇다. 더 나쁜 일로, 도대체 더 나쁜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트리다테스의 아첨꾼들은 그들의 왕이 명의(名醫)라는 영광을 얻고 싶어하자 자기들 몸을 째고 지지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본보기로 다른 자들은 몸의 가장 미묘하고 고귀한 부분인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고귀한 신분의 불편함에 대하여> 중에서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 1050

옛말에 나오듯,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⑵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그대 가정의 평화로운 질서를 꾸며 보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가. 아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플루타르크의 이야기, 한 로마 인이 예쁜 아이까지 낳아 준 미모의 아내를 내쫓았다고 친구들이 책망하자 "이 구두는 새롭고 예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발이 벗겨진 것을 그대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네"라고 대답하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허영에 대하여> 중에서


치명적으로 천한 것 1247


우리의 학문에서는 가장 높이 올라간 것이 가장 비천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생애에서, 자기를 신격화하는 생각보다 더 치명적으로 천한 것을 알지 못한다.

필로타스는 이 대답으로 그를 재미나게 풍자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를 신들 축에 넣어 준 주피터 신 암몬의 신탁 편지를 가지고 그와 함께 즐기며 말했다. "그대를 위해서 내 마음은 대단히 기쁘오. 그러나 인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척도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며, 그에게 복종해야 할 자들을 가련히 생각하오." "그대는 신들에게 굴함으로써 세상에 군림하는 것이다."(호라티우스) 아테네 인들이 자기들의 도시에 폼페이우스가 왕림하는 것을 환영하는 얌전한 글귀는 내 뜻에 맞는다.

그대는 자기를 인간으로 인정하니,
그만큼 그대는 신이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아미오 역)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경험에 대하여>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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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2-08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논문 쓰셔도 되겠어요.

qualia 2017-02-08 10:08   좋아요 0 | URL
논문은 hnine 님이 더 쓰고 싶어 하셨던 것 같은데요. hnine 님 글에 간혹 드러나더군요. 지금이라도 전혀 늦지 않았다고 봅니다만~

oren 2017-02-08 10:59   좋아요 1 | URL
(플루타르코스가 말하고, 몽테뉴도 그의 말을 다시 인용했듯이)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제가 몽테뉴의 글을 필사할 때 끙끙댔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이 다시 아려오고 손가락이 욱신거리는 아픔이 남아있는 듯하답니다. 그러니 논문 같은 건 제겐 정말 언감생심이지요...

cyrus 2017-02-0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미셸 푸코의 ‘자기 수양’ 개념에 꽂혀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때처럼 한결같이 실천 의지가 유지된다면 몽테뉴의 <수상록>도 다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

oren 2017-02-08 11:55   좋아요 1 | URL
저 또한 몽테뉴 수상록을 쉰 살이 다 되어서 다시 붙잡고 읽었는데, cyrus 님께서는 아직도 한창이시니 몽테뉴를 만날 기회가 앞으로도 두고두고 자주 생겨나리라 확신합니다^^
* * *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양철나무꾼 2017-02-0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따라 읽었습니다.
귀한 페이퍼 감사합니다, 꾸벅~(__)

oren 2017-02-08 15:01   좋아요 0 | URL
(글뭉치에서 끌려나온 인용문들을 ‘생략‘ 없이 고스란히 다 옮기다 보니) 제가 다시 읽어봐도 글이 ‘너무 지나치게 길다‘ 싶은데, 양철나무꾼 님께서 열심히 따라 읽어주셨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2017-02-0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9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밑줄긋기)

정신적으로 초라하다는 증거


앞에서도 말했듯이, 디온은 디오니시우스 2세가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가장 뛰어난 철학자로 알려진 플라톤을 시킬리아에 초대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플라톤이 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전하의 성품은 덕의 원리에 따라 고양될 것이며,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가 되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위대한 행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왕권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위와 같이 하신다면 국민들은 전하의 정의와 사랑에 감동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써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결코 권력이나 위대한 해군, 또는 1만 명이 넘는 저 육군이 있다고 해서, 일찍이 부왕께서 말씀하신 왕권을 유지하는 '끊을 수 없는 쇠사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덕과 정의로 민중들 마음속에 있는 선의와 충성심과 감사함을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슬이 됩니다. 이런 것들은 언뜻 보기에는 나약한 듯하지만, 사실은 왕권을 튼튼하게 만드는 강한 기둥입니다. 만약 통치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러운 궁전에 살면서도 평민들보다 어리석고 조리 없는 말을 한다면, 이는 정신적으로 초라하다는 증거이며 국왕의 위엄이 서지 않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173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디온 편>


 * * *

나는 입을 다물겠소

내가 시작한 이야기로 끝맺자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어떤 문자의 해석을 가지고 철학자 파브리누스와 토론하던 때에, 파브리누스는 바로 승리를 황제에게 양보하였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비난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그런 말 마시오. 그래 30군단을 지휘하는 그가 나보다 박학하지 못하단 말이오?"라고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아시니우스 폴리오를 공격하는 시를 썼다. 그러자 폴리오는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겠소. 나를 추방할 수 있는 자에게 대항해서 글쓴다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오." 그의 말이 옳았다.
왜냐하면 디오니시우스는 시로는 필로크세노스를, 산문으로는 플라톤을 당해 내지 못하자, 하나는 채석광으로 중노동형을, 하나는 노예로 팔아 아이기나 섬으로 쫓아냈다.(1019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고귀한 신분의 불편함에 대하여>

 * * *

노예로 팔리더라도

플라톤디오니시우스를 만나자 그에게 인간의 미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독재자라 말했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올바른 사람의 일생은 행복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람의 일생은 비참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이 말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오해해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더구나 같이 이야기를 듣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플라톤의 말에 감동하며 그를 우러러보는 것을 보고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디오니시우스플라톤에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킬리아에 왔느냐고 물었다. 플라톤이 덕망 있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대답하자 디오니시우스가 말했다.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한 것 같군요."

디온은 디오니시우스의 노여움이 이 정도로는 풀리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스파르타 사절로 왔던 폴리스가 돌아가려고 하자, 플라톤이 함께 배를 타고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는 폴리스를 몰래 매수해, 배를 타고 가다가 플라톤을 바다 위에서 죽이거나 노예로 팔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플라톤은 정의로운 사람이니 노예로 팔리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하여 폴리스는 플라톤을 싣고 아이기나에 닿자 그를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다. 아이기나는 마침 플라톤 나라인 아테나이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테나이 사람이 발견되기만 하면 무조건 노예로 팔아버리라는 법이 공포되어 있었던 것이다.(172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디온 편>



http://blog.aladin.co.kr/oren/8977543

http://www.mediapen.com/news/view/57938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3&nNewsNumb=20170122670&nidx=22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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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6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한이 정지된 지도자가 청와대 안에서 인터넷 녹화로 인터뷰하는 모습에 부끄러웠습니다. 분명 측근이 정규재TV와의 인터뷰를 주선했을 겁니다. 자신을 편드는 사람들과 같이 하려는 성격과 책임 회피는 여전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잘 보내세요.

oren 2017-01-27 14:06   좋아요 1 | URL
옛날부터 권력자가 자신의 추악한 죄과들을 덮기 위해 온 국민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궤변만을 늘어놓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국민들을 향해 도리어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모습은 숱하게 봐왔습니다만, 막상 우리나라의 현직 대통령이 그런 폭군들과 너무나 쏙 빼닮은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보일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그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을 뿐이고, 그런 폭군을 옹호하느라 여념없는 한심스런 아첨꾼들마저 득실대는 것도 어디서 많이 봐왔던 듯하고요. 이제와 돌이켜 보니, 오래 전에 박정희를 시해했던 김재규의 그 분노를 이해못할 바도 아니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요.
* * *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된 까닭은 카시우스와는 좀 다르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익명의 편지들이 그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어떤 시민은 옛날에 왕정을 뒤엎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선조) 동상에 이런 글을 새기기도 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브루투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법무관인 브루투스가 법정에 나갈 때면, 그의 자리에는 다음 같은 글이 적힌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브루투스, 아직도 잠자고 있는가?˝

˝당신이 진정한 브루투스인가?˝

하지만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암살하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때문이었다. 이들은 민중의 이름을 빌려 카이사르에게 온갖 영광을 주려 했고, 한밤에 몰래 카이사르 동상 위에 왕관을 씌워놓아, 집정관을 넘어서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트로이아 전쟁과 헬레네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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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전들에 담긴 '여자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겐 언제나 독특한 즐거움을 안겨 준다. 그런 이야기들은 현대인들에겐 도저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불가사의한 일'로 보이는 여러 사건들이 과거엔 도리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뒤바뀌어 나타난다. 그런 일들이 주로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에 일어났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우스의 숱한 애정행각이 바로 '불가능을 모르는 신의 무한 능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저 유명한 트로이 전쟁도 바로 '단 한 명의 여자' 때문에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일으킨 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숱한 영웅들의 '전기'에서 여자 이야기가 빠질 리는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온갖 절세의 미녀들을 탐내어 벌였던 엽색행각이 여기저기 난무할 만하다. 그러나 영웅전은 모름지기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쓰여진 작품이다 보니 그런 내용들이 언제나 맛뵈기로만 다루어진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마치 중국집에서 '육해공'으로부터 날라온 온갖 재료를 써서 만든 다양한 코스 요리를 실컷 맛보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남은 '약간의 허기'를 채울 때 시키는 '맛뵈기 기스면' 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만약에 플루타르코스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정식으로 공부했던 철학자도 아니었고, 방대한 분량의『윤리론집』을 쓸 만큼 그리스인 특유의 높은 '윤리와 도덕의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가 쓴 고대인들의 전기에 담긴 '여자 이야기'가 얼마나 더 풍성하고 다채로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담긴 50명이 모두 '본받을 만한 걸출한 영웅들'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는 점은 '흥미진진한 여자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에겐 그래도 한가닥의 희망이 될 지도 모르겠다. 플루타르코스가 '파렴치한 악인이 저지른 일이라도 모른 체 지나가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은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더 열심히 배우고 깨달으며 본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쓴 전기도 있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매우 지탄받을 못된 짓을 숱하게 저지른 인물로 그려진 그리스의 장군 알키비아데스, 로마를 끔찍한 내전으로 몰아넣었던 악명높은 인물인 술라, 독재자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정벌에 도리어 앞장섰고 끝내 클레오파트라의 치맛자락에 빠져 이집트로 도망가 자살하고 말았던 안토니우스와 같은 인물이『영웅전』에 당당히 '자신의 전기'를 갖추고 있는 사실을 봐도 그렇다.

로마가 인정했던 세계적인 미남이자 바람둥이였던 안토니우스에 '대비'되는 인물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군림했던 데메트리우스였다. 그 또한 당대의 호사가들이 널리 인정할 만큼 뛰어난 용모를 갖췄던 데다가 그가 지닌 권력과 방탕한 성격 때문에 평생 동안 숱한 여자들을 빼앗고 또 거느렸다. 이쯤에서 그 두 사람의 행적을 비교한 플루타르코스의 얘기 한 대목만 들어 보자.

두 사람 모두 권력을 누리는 동안 교만한 모습을 보였으며, 사치와 쾌락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그런 와중에도 행동해야 할 때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는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에만 쾌락에 빠졌고, 그가 사랑했던 라미아도 꿈처럼 살면서 놀 때에만 가까이했을 뿐이었다. …… 저 유명한 시인 에우리피데스 시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바쿠스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금세 무섭고 용맹한 전쟁 신 마르스의 사자가 되어 달려나갔다. 데메트리우스는 게으르고 방탕한 생활 때문에 싸움에 진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옴팔레에게 곤봉을 빼앗기고 몸에 걸친 사자 가죽이 벗겨진 헤라클레스처럼 언제나 클레오파트라에게 무장해제를 당했으며, 그녀와 함께 카노푸스나 오시리스 무덤이 있는 타포시리스 해안으로 놀러 다니느라 대정복 계획을 모두 놓쳐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파리스처럼 전쟁에서 달아나 클레오파트라 치맛자락에 파묻혔다. 파리스는 그래도 전쟁에 져서 달아났지만, 안토니우스는 승부가 결정 나기도 전에 비겁하게도 클레오파트라 뒤를 쫓아 달아난 것이었다.(1723∼1724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와 안토니우스의 비교> 중에서

데메트리우스의 '전기'에서 '애정 행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인물들의 전기와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크다. 사실 '대비 열전'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도덕적으로 몹시 탁월한 면모를 보여준 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전기에서 흥미진진한 여자 이야기를 발견하기란 연목구어 격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라도 데메트리우스의 전기는 다른 인물들의 전기에 비해 일부 독자들로부터 특별한 흥미와 주목을 받았다. 그의 전기를 바탕으로 탄생한 예술품들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데메트리우스의 '전기' 자체도 다른 인물들의 전기에 비해서 내용이 제법 풍성한 편이다.(동서문화사에서 나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전3권에 총 2,015쪽에 이르지만 '작품 해설' 등을 제외하고 순수한 전기 부분만 따진다면 대략 1,870쪽 분량이다. 1인당 평균 37쪽 정도인데, 데메트리우스 편은 51쪽이나 된다. 20쪽 남짓으로 다뤄진 인물들도 꽤 여러명이다. 참고로, 전기의 분량이 특히 방대한 인물들로는 알렉산드로스 75쪽, 폼페이우스 73쪽, 안토니우스 73쪽, 카이사르 56쪽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데메트리우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중언부언 더 소개하자면 이야기가 너무나 지루해 질 게 뻔하다. 그래도 '명함 한 장' 정도에 담길 정도의 최소한의 프로필마저 아예 빼놓고 지나칠 수는 없다. 그는 마케도니아를 대제국으로 만들었던 알렉산드로스가 급작스레 죽고 난 이후의 소위 '디아도코이(후계자) 전쟁' 틈바구니에서 탄생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다. 그래서 그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들은 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이었던 안티파트로스, 안티고노스, 리시마쿠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이었고, 그들의 자식들인 카산드로스, 안티오쿠스와 같은 인물들도 데메트리우스와 활동이 겹쳤으며, 에피루스의 지배자로 유명한 피로스도 데메트리우스와 여러 번 전쟁터에서 맞닥뜨렸다.(피로스의 이야기는 아담 스미스의『도덕감정론』에서도 인상깊게 다루어지고, 심지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도 '피로스의 최후가 뭐였지요?'라는 스티븐의 질문과 함께 등장한다.)

이제 그만 데메트리우스의 여자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그의 숱한 아내들 가운데 비교적 젊은 시절의 아내들은 주로 '과부'였다. 다음의 이야기를 살펴 보면 그 당시에 패권을 노리던 인물들 사이에 '혼인 동맹'이 얼마나 성행했는지도 엿보여 흥미롭다.

데메트리우스는 아테나이에 잠시 머무는 동안 에우리디케와 결혼했다. 영웅 밀티아데스의 후손인 에우리디케는 키레네의 오펠타스 왕의 아내가 되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테나이로 돌아와 혼자 살고 있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이 결혼을 아테나이 시의 영광이라고 여기며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이미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이 결혼을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메트리우스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내는 필라였다. 그녀는 안티파트로스의 딸로서 이미 크라테루스와 결혼했었는데, 크라테루스는 그 무렵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테라크루스가 죽고 필라가 과부가 되자,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필라와 결혼시키려 했었다. 데메트리우스가 처음에 이 결혼 제의를 받고 매우 못마땅해하자,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에우리피데스의 시를 속삭였다.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결혼도 할 수 있지.

시에는 본디 '복종'으로 되어 있는데, 안티고노스가 '결혼'으로 고쳐 말했다. 데메트리우스는 필라를 비롯해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기생이나 첩들을 두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그는 같은 시대 어느 왕보다도 좋지 않은 평판을 들었다.(161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데메트리우스가 가장 오래 탐닉한 여자는 '라미아'였다. 그녀는 데메트리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와 치열하게 싸워 승리한 끝에 자연스레 딸려온 전리품 목록 속에 포함된 여자였다.

포로들 가운데 라미아라는, 이름이 꽤 알려진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플루트를 매우 잘 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음악적 재능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연애 사건으로 점차 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즈음 그녀는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었고, 나이도 데메트리우스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데메트리우스는 라미아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녀만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은 그녀를 너무나 부러워했다.(161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젊어서 부터 전쟁에서 거듭 승리한 데메트리우스는 어느새 헬라스의 '최고 사령관'이란 이름이 붙었고, 곧이어 자신의 아버지 안티고노스와 함께 '왕'으로까지 격상되어 불리게 되었다. 그가 라미아 때문에 욕을 먹은 일화들은 널리 해외에서도 곧잘 화제가 될 정도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테나이에 돌아온 데메트리우스가 시민들을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의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250탈란톤이나 되는 큰돈을 즉시 바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린 일이다. 관리들은 온갖 수단을 다 써서 시민들의 돈을 긁어모았다. 게다가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을 마치 푼돈밖에 안 된다는 듯 라미아를 비롯한 여자들 화장품 값으로 내어주게 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데메트리우스가 자신들의 귀한 돈을 이렇게 써버리자, 돈을 잃은 것 이상으로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이 일 말고도 라미아는 데메트리우스 왕 환영 연회 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시민들에게 다시 한 번 돈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이 호화로운 잔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사모스 사람 린케우스는 이 일에 대해 쓴 역사책까지 따로 남겼다. 이즈음 어느 풍자 시인은 라미아를 '도시점령자'라 불렀고, 솔리 사람 데모카레스는 데메트리우스를 '미투스'라 불렀다. 데메트리우스 곁에 라미아가 늘 붙어다니는 것에 대해, 미투스 전설에 나오는 괴물 라미아에 빗대어 한 말이다.

실제로 데메트리우스가 라미아에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되자 그의 다른 아내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신하들마저도 그녀를 미워하고 질투했다.

데메트리우스의 신하들 몇 명이 리시마쿠스 사절로 갔을 때 일이다. 리시마쿠스는 마침 한가로운 때에 자신의 허벅지와 팔에 난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 상처들은 언젠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기를 사자 우리 속에 처넣었을 때 사자와 싸우면서 생긴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 사절들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자기들 왕의 목에도 사자만큼 사나온 짐승에게 할퀸 상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나운 짐승이란 데메트리우스의 아내 라미아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놀라운 것은 데메트리우스가 시든 꽃이라며 필라를 거부하면서도, 그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라미아에게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1621∼162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데메트리우스의 엽색 행각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의 추행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남자들도 있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아테나 여신을 자신의 누님이라 불렀으나 조금도 여신을 존경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문 집안의 미소년들과 아테나이 여자들을 아크로폴리스로 불러들여 온갖 추한 행동을 했다. 차라리 크리시스, 라미아, 데모, 안티키라 같은 창부들을 상대했을 때가 이곳을 더 깨끗하게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테나이 시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제는 젊은 다모클레스가 보여준 훌륭한 미덕과 정조에 대해 말해보겠다. 다모클레스는 '아름다운 다모클레스'라 불릴 만큼 외모가 아름다운 젊은이로, 데메트리우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데메트리우스가 이 젊은이에게 빠져서 온갖 선물로, 때로는 위협까지 하며 꾀어내려 했지만 젊은이는 계속 거절하기만 했다. 마침내 다모클레스는 사람들이 모이는 경기장 같은 곳에 가지 않고 목욕도 집에서만 했다. 하지만 기회만 노리고 있던 데메트리우스는 그가 혼자 목욕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를 붙잡았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알아차린 다모클레스는 끓는 물 속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젊은이가 이렇게 삶을 마친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모클레스의 행동은 그의 나라와 그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 있게 드높여 주었다.(161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데메트리우스 편> 중에서

플루타르코스가 <데메트리우스 편>에서 들려주는 숱한 '여자 이야기'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한 이야기는 그녀의 딸 스트라토니케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은 데메트리우스의 사위의 아들이었는데, 후세 사람들로부터 '병든 왕자'라는 별명을 얻은 안티오코스였다. 그 왕자가 자신의 계모를 사랑하게 된다는 스토리는 일견 에우리피데스의 비극『힙폴뤼토스』를 연상시킨다. 테세우스의 후처 파이드라가 전처 소생의 아들 힙폴뤼토스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리고, 그녀의 애정 고백이 거절당하자 도리어 휩폴뤼토스가 자기를 유혹하려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편에게 남기고 목매달아 죽는다는 얘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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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드라와 힙폴뤼토스>,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1774∼1833), 1802년



<페드라>, 알렉상드로 카바넬 (Alexandre Cabanel / 1823~1889), 1880년


             테세우스
(얼굴을 돌린 채) 실수만 저지르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인간들이여,
무엇 때문에 그대들은 수많은 기술들을 가르치고,
별의별 것을 다 생각해내고 발명해내는가?
바보들을 가르쳐 현명하게 만드는 법,
그것 하나도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주제에!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힙폴뤼토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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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우스의 딸 스트라토니케는 이미 셀레우쿠스와 결혼하여 둘 사이에 아들까지 두었으나,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왕자 안티오코스가 계모 스트라토니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처음부터 자기 감정을 억누르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마침내 그는 자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기 위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의사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안티오코스가 점점 야위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것이 상사병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안티오코스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의사는 하루 종일 안티오코스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젊은 여인들이 문병을 올 때마다 안티오코스의 태도와 몸 상태를 빈틈없이 살폈다. 그런데 스트라토니케가 자기 의붓아들을 만나러 올 때마다, 혼자서 오든지 남편 셀레우쿠스와 함께 오든지 관계없이, 저 유명한 사포가 발견해 낸 병증이 그의 몸에서 나타났다.

안티오코스는 스트라토니케 앞에서 늘 말을 더듬고 얼굴이 심하게 붉어지면서, 그녀의 눈길을 애써 피하려 했다. 게다가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빨라지고 식은땀까지 흘리다가, 마침내 감정이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면서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이제 의사 에라시스트라투스는 왕자가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조용히 굶어 죽기로 결심하게 된 원인이 바로 왕비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가는 왕자가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차마 왕에게 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셀레우쿠스가 자기 아들을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어 셀레우쿠스에게 아들의 병에 대해 말했다. 의사는 젊은 왕자를 혼돈에 빠뜨리는 병이 다름 아닌 상사병이며, 이 사랑이 희망도 없고 치료도 불가능한 상태임을 덧붙여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셀레우쿠스는 의사에게 물었다.

"어째서 치료할 수 없다는 건가?"

의사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왕자님은 제 아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셀레우쿠스가 말했다.

"그래? 에라시스트라투스! 그렇다면 그대가 아내를 포기하고 나의 아들에게 보내주면 안 되겠는가? 왕자는 그대의 친구이며, 왕자를 살릴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안 됩니다. 전하꼐서는 만일 왕자님이 스트라토니케 왕비님을 사랑한다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하시겠습니까?"

에라시스트루투스의 말을 듣고 셀레우쿠스가 대답했다.

"이보게. 하늘과 땅에 맹세하지, 나는 사람에게나 신에게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왕자가 스트라토니케를 사랑하게 만들겠네. 안티오코스를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왕관마저 내려놓을 수 있네."

셀레우쿠스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으며, 그의 두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러자 에라시스트라투스가 셀레우쿠스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하기를, 자신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며 셀레우쿠스야말로 가정에서 일어난 아픔을 고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의사라고 말했다.

셀레우쿠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신하들을 모두 모이게 한 다음, 안티오코스를 아시아 지역에 왕으로 보내고 스트라토니케를 그의 왕비가 되도록 허락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신하들에게 왕자는 이제까지 자신에게 순종해 왔으므로 이 결혼 또한 반대하지 않으리라 믿지만 스트라토니케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자기 말을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니, 왕이 내리는 명령은 모두 옳고 명예로운 일이라고 그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안티오코스는 계모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게 되었다.(1632∼1633쪽)

이토록 놀라운 이야기를 읽고 난 뒤에 내가 찾아낸 그림은 아래의 석 점이다. 세 번째 그림을 그린 앵그르는 알고보니 마침 두 번째 그림을 그린 다비드를 사사한 화가였다.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호메로스 예찬> 등은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Antiochus and Stratonice
Author : ANTONIO BELLUCCI
Date :c. 1700
Technique :Oil on canvas, 253 x 301 cm
Location :Staatliche Museen, Kassel



Antiochus and Stratonica
Author : JACQUES-LOUIS DAVID
Date :1774
Technique :Oil on canvas, 120 x 155 cm
Location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Beaux-Arts, Paris



안티오쿠스와 스트라토니케(Antiochus et Stratonice)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 1866년, 유화, 파브르 미술관


이 이야기와 관련된 그림을 찾다가 우연히 덩달아 발견한 짧은 텍스트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엔 조금 아쉽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카셀의 회화박물관에 들러 벨루치의 그림을 직접 봤으며, 이 '병든 왕자'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도 풍성하게 담아냈다는 사실을 아주 상세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민음사)에서 앞으로도 여러 번 나오는 이 <병든 왕자 der kranke Koenigssohn>의 모티프는 원래 『플루타르크Plutarch 영웅전』의 데메트리우스편 제38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조인 셀레우코스 1세Seleukos I(B.C. 312-280)의 아들 안티오쿠스Antiochus는 젊고 아름다운 계모 스트라토니케Stratonike를 사모하여 시름시름 앓는다. 계모가 방에 들어올 때 왕자의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을 발견하고 병인(病因)을 알게 된 의사는 왕에게 우선 거짓으로 말하기를, 왕자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지 묻는다. 이에 왕은 왕국을 위해 부디 그의 결혼생활을 희생하고 왕자가 동경하고 있는 사랑을 성취시켜 주기를 간청한다. 이때 의사가 왕자의 진짜 병인을 밝히니, 왕은 스트라토니케를 단념하고 안티오쿠스를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도록 한다. 왕과 의사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에 스트라토니케가 왕자의 병석으로 다가서는 결정적 순간의 장면이 에로부터 많은 회화의 소재가 되었다. 일찍이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도 <병든 왕자>의 그림을 논의한 바 있다. 또한 카셀Kassel의 회화박물관에는 벨루치Antonio Belucci의 그림 「병든 왕자」가 괴테 시대에 이미 전시되어 있었는데, 1779년 9월에 괴테가 그곳을 방문한 것이 입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스바덴Wiesbaden의 박물관에도 치크Januarius Zick의 「병든 왕자」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괴테는 1774년경에 이 화가와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p. 106,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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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루스의 왕 피로스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장식하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워낙 전쟁을 좋아하는 바람에 잠시도 편안하게 쉴 줄 몰랐는데, 바로 그점 때문에 후세 작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되었던 듯하다. 따지고 보면,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스』<제2장 달키의 초등학교>에서 '피로스의 최후가 뭐였지요?'라고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은 꽤나 심오한 '철학적 함의'가 있었던 셈이다. 피로스는 숱한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결국 나중에 적군에게 쫒겨 어느 마을에서 포위된 끝에 어느 노파가 지붕에서 떨어뜨린 기왓장 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피로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손을 떼고 에피루스로 돌아왔다. 이는 구태여 일을 꾸밀 필요 없이 자기 국민들을 다스리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나라를 공격하거나 해를 입히지 않으면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처럼, 그도 좀처럼 가만히 쉬고 있지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집에서 하릴없이 쉬지 못한 채

전쟁의 기쁨과 싸움을 그리워하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피로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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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는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매듭지은 자마 전투 이후,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그에게 승리를 거둔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났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소."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입니까?"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는 자마에서 나에게 패하지 않았습니까?"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세 번째인 것이오, 내가 그 전투에서 이겼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 거요."


 * * *

 

한니발과 스키피오에 관련된 일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고대 세계의 최고 명장은 누구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일 것이다.

플루타르크는『피로스 전기』에서 말하기를, "한니발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명장 중에서 전술과 무술에 있어서 제일 뛰어난 사람은 피로스이고, 그 다음이 스키피오이며 그 다음이 한니발 자신이라고 하였다." 피로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한니발의 순서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는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 이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니발의 병법과 전술을 창조적으로 모방한 자마 전투에서의 대승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이 된 스키피오가, 그 전투가 있고 몇 년 후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한니발을 만나게 되었다. 지중해 세계의 최고 명장이고 한때 로마를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한니발도 자신에게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받고 싶었던지, 스키피오는 다소 도발적으로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군은 누구냐?"고 한니발에게 물었던 모양이다. 스키피오의 뱃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았을 한니발이 스키피오의 입맛대로 대답을 해주었을리 만무하다.

한니발은 대답하기를, 가장 뛰어난 장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했다.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스키피오는 마치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 왕이 솔론에게 질문한 것처럼,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다. 아마도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한니발은 그리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라고 했다. 그가 병법의 대가요,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스키피오는 계속해서 "그렇다면 세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자기의 이름이 나올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아닌 바로 자신의 이름을 댔다. 알렉산드로스, 피로스 다음은 한니발이라는 얘기였다. 스키피오는 이쯤 되면 한편으로 화가 나고 다른 한편으로 어이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세 번째라는 말에 미소를 머금고,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에게 이겼다면?" 이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자마에서 나에게 진 당신이 어떻게 세 번째인가 하는 뼈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한니발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자신의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앞질러 첫 번째가 되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쨌든 스키피오의 질문에 대해 한니발은, 고대 세계 최고의 명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 피로스 → 한니발의 순서라고 대답한 셈이다.

플루타르크가 전하는 순위가 맞는 것인지, 시오노 나나미가 전해주는 이야기 속의 순위가 맞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 * *

 

 

피로스 왕이 이탈리아로 원정하러 가려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의 현명한 고문관 키네아스는 그의 야심이 얼마나 허영된 것인지 느끼게 하기 위해서, "글쎄, 전하" 하고 물어 보았다. "전하는 무슨 목적으로 그런 큰 계획을 세우십니까?" "이탈리아의 영주가 되련다"고 그는 갑자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 다음에는요" 하며 키네아스는 말을 이었다. "골과 스페인으로 가겠다"하고 왕은 말했다. "그 다음엔요?" "나는 아프리카를 정복하러 가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을 정복하여 내 영토로 만든 다음에는, 나는 만족하고 편안하게 살겠다." 키네아스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런 소원이시면 어째서 전하께서는 지금 그렇게 편히 살지 않으시려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런 생활을 지금 이 시간에 하고, 이 두 나라 사이에 그만한 수고와 위험을 면제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 * *



무엇이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에피루스(Epirus) 국왕의 총애하는 신하가 국왕에게 말한 것은 인생의 일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그 신하에게 자신이 예정하고 있는 모든 정복 계획들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최후의 정복계획에 이르렀을 때 그 신하가 말했다. "그런 다음에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러자 국왕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나는 나의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거야.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사귀도록 노력할 거야 ······ ." 그 신하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폐하께서 지금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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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만일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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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이 유독『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심취했던 게 영국의 철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을 만난 영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칼라일은『영웅숭배론』까지 쓴 인물이고, 인터넷을 뒤져 보니 <칼라일과 에머슨의 영웅관 비교> 같은 텍스트도 금방 눈에 띄는 형편이니 둘 다 '영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건 분명하다. 작가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은 워낙 폭넓고도 내밀한 일이니 둘 사이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이야기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에머슨이 특별히 '불타는 도서관'에 뛰어들어가서라도 꺼내고 싶다고 언급한 저 세 사람의 작품 가운데 그나마 읽기 쉬운 작품이 아마도『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아닐까 싶다. 무려 50명의 전기를 담고 있어서 그 양이 방대하긴 하지만, 각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가 워낙 생생하고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하고 때론 박진감마저 넘쳐서 어떨 땐 만화책을 보는 듯한 몰입감까지 느끼며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책이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작품'이 지니는 독특한 한계는 그리 간단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 문제로 치부할 일은 아닐 듯싶다.


가령, 셀 수도 없을 만큼 끊임없이 등장하는 낯선 지명들과 인명들과 족속들과 국가들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고역이다. 게다가 고대의 여러 신화와 인물들과 사건들에 얽힌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 등등에 대해서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 서술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를 꾹꾹 참고 견디는 일도 힘겹다. 물론 그리스·로마 시대에 쓰여진 몇몇 이름난 고전들이나 그 시대를 특별하게 다룬 후세의 여러 작품들까지도 더러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난관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까마득한 옛날 책들을 읽는 일에서 옛사람들보다 영영 불리한 점만 타고난 것은 아니다. 고대 고전 작품과 현대와의 거대한 간극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가교들이 적잖이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예술작품들'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 덕분에 그런 예술작품들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재빠르게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면서 자주 놀랐던 게 바로 그점이었다. 웅웅전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나 지명 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그들을 검색하기만 하면 으레 예상치도 못한 '훌륭한 그림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는 데 몹시도 유익했다.


어젯밤에 내가 검색한 인물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넘어와서야 가까스로 만난 '포키온'이었는데, 마침 그를 알맞게 묘사한 그림들은 '추운 날씨에'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면이 적지 않았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쯤인데, 포키온이 아테나이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기엔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전세계를 호령할 때였다. 선왕인 필리포스가 죽고 얼마 뒤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나이를 넘볼 때 이야기부터 들여다보자.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사절단이 전달한 결의문을 읽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그들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키온이 직접 찾아가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늘 신하들로부터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이 포키온을 칭찬하고 존중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포키온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만일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멈추어야 하고,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전쟁을 하되 헬라스가 아닌 야만족들과 하라며 충고했다. 이처럼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 성격과 야망에 맞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헬라스를 이끌어 갈 나라는 아테나이일 것이라며, 아테나이인들에게 정치를 잘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포키온을 친구이자 귀한 손님으로서 정중하게 대우했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헬라스에서 눈을 돌려 '동방 원정'에 나섰다. 그는 곧 아시아로 넘어가 다리우스 대왕을 패주시켜 '위대한 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자 그때부터 편지를 쓸 때면 그 누구에게도 첫머리에 인사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키온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에게 무척 너그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한번은 알렉산드로스가 포키온에게 100탈란톤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포키온은 돈을 가져온 이들에게 아테나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 돈을 가져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사신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께서는 오로지 장군만이 명예롭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도 내가 계속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치고 이 돈을 도로 가져가시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바로 아래의 그림이다. 포키온의 단호하면서도 당당한 표정도 몹시 인상적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신들이 놀라는 표정도 무척이나 생생하다. 그런데, 포키온의 발 옆에 놓인 세숫대야엔 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알렉산드로스의 선물을 거절한 포키온>, 지오아치노 아세레토(1600∼1649), 17세기경, 낭트 미술관



사신들은 포키온을 따라 그의 집에 갔다가 너무나 검소한 살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에서는 부인이 직접 빵을 만들었고, 포키온은 제 손으로 우물을 길어 손님들이 발 씻을 물을 떠다주었다. 그러자 사신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구가 이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 돈을 꼭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누더기를 입은 초라한 노인이 지나갔다. 포키온은 그 노인을 가리키며 자신이 저 노인보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사절단은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간청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저 노인은 나보다 더 가난하지만 그다지 부족한 것을 모르고 살고 있소. 내가 만일 이 돈을 쓰지 않으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리고 내가 이 돈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오."(1348∼13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렇게 해서 포키온은 끝내 그 돈을 돌려보냄으로써, 그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돈을 보낸 사람보다 더 부자라는 사실을 헬라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의 이러한 행동을 불쾌하게 여겨 자신의 자신의 친절을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자 포키온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돈 대신에 감옥에 갇혀 있던 헬라스 사람들 몇몇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이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부하를 마케도니아로 보낼 때, 포키온을 만나면 아시아에 있는 네 도시 가운데 하나를 가지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만약 이번에도 자신의 마음을 저버린다면 정말로 화를 내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대왕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젠 포키온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그녀를 그린 그림도 '명화'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포키온의 첫 번째 아내는 조각가 케피소도투스의 누이였다는 사실 말고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두 번째 아내는 포키온의 가난한 생활을 잘 견뎌낸 훌륭한 인품으로 아테나이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언젠가 아테나이 시민들이 새로운 연극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여왕 역을 맡은 배우가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들을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배우는 무대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출을 맡은 멜란티우스가 여배우를 매우 꾸짖었다.


"저기에 포키온 부인이 앉아 계신 것도 보이지 않느냐? 저런 분도 시녀 하나만 데리고 다니신다. 너는 여성 관객들에게 허영심만 잔뜩 채워줄 작정이냐?"


연출자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극장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말소리를 듣고 관객이 동의하는 듯 크게 소리내어 박수를 쳤다.


또 언젠가는 이오니아에서 온 여인이 포키온 부인을 찾아와 자신의 보석 목걸이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키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보석은 지금까지 20년 동안 아테나이의 장군으로 계신 포키온뿐입니다."(1349∼13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후 마케도니아가 점차 강성하게 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이후 휘하 장군들끼리 권력다툼이 심화되는 와중에 아테나이도 결국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아테나이의 수비대장으로 파견된 마케도니아군의 사령관은 메닐루스였다.


마케도니아군 수배대장인 메닐루스가 포키온에게 많은 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포키온은 이 돈을 거절하면서 자신은 메닐루스가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지난날 알렉산드로스의 돈을 거절했던 자신이 이제 와서 메닐루스의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메닐루스는 그 돈을 포키온의 아들 포쿠스가 받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이에 포키온이 말했다.


"포쿠스가 만일 나쁜 버릇을 고쳐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이 아비의 재산으로도 넉넉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버릇을 못 고치고 계속 낭비만 일삼는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할 거요."


한번은 안티파트로스가 포키온에게 어떤 그릇된 일을 시키려고 하자 포키온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건 정말 못하겠소. 나는 당신의 친구이면서 앞잡이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오."


안티파트로스는 늘 아테나이에 두 친구, 포키온과 데마데스가 있다고 말했다. 포키온은 어떤 방법을 써도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이고, 데마데스는 뇌물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언제나 부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1358∼135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한편 마케도니아 왕의 섭정을 맡은 폴리스페르콘은 아테나이를 손에 넣기 위해서 포키온을 무너뜨릴 궁리를 했는데, 그 방법은 지난날 아테나이 시민권을 빼앗기고 해외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선동가들과 고발자들로 하여금 포키온을 공격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혼란한 틈을 다서 협잡꾼인 아그노니데스가 포키온과 그 일파를 반역죄로 고발했고, 포키온과 그의 지지자들은 폴리스페르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서 포키온과 그 일행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수레에 실려 곧장 아테나이 법정으로 끌려간 뒤 사형을 받게 되었다. 어리석은 아테나이 군중들이 협잡꾼에게 속은 탓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헬라스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한다. 둘의 죽음은 모두 아테나이의 잘못으로 빚어진 비극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내막을 조금 더 소개하면 이렇다.


감옥에 도착한 토디푸스는, 자신은 포키온과 함께 죽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한탄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물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죽는 게 그렇게도 못마땅하오?"


포키온의 친구 하나가 아들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포키온은 이렇게 대답핬대.


"아테나이 시민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포키온과 가장 친했던 니코클레스가 자신이 먼저 독약을 마시게 해달라고 하자, 포키온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괴로운 부탁이로군. 그러나 내가 평생 동안 자네 소원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들어주겠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독약을 모두 마시고 나자 포키온이 먹을 독약이 남지 않았다. 감옥을 지키는 관리들은 12드라크메를 내야 독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친구를 불러 옥리에게 돈을 좀 주라고 부탁하며, 아테나이에서는 죽는 데도 돈이 든다고 한탄했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포키온의 적들은 그를 죽인 일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그의 시신을 아테나이 땅에 묻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포키온을 화장시킬 장작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선포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마치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을 떠올리게 한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골육상쟁 끝에 일대일 결투에서 서로 죽이고 죽자,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오이디푸스 왕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오라버니)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법령으로 포고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어기고 오라비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다가 잡혀 크레온 앞으로 끌려가고 사형을 선고받고 석굴에 갇힌다. 크레온의 아들로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 와서 아버지를 말려보지만 크레온의 생각은 확고하고, 안티고네는 끝내 목을 매달아 죽는다.


              하이몬   테바이 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아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 《안티고네》733∼739행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뇌물'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한 작금의 현실이 이내 선명하게 겹쳐 떠오르는 걸 참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점에 대해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건 내 몫이 아니다. 다시 포키온의 이야기로 되돌아 오자. 어느새 장면은 뒤바뀌어 '포키온의 장례 모습'에 이르렀다.


결국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하는 코노피온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메고 엘레우시스를 지나 이웃 나라인 메가라에 가서 화장을 해주었다. 시녀들을 데리고 메가라까지 따라갔던 포키온 부인은 그곳에 빈 무덤을 만들고, 유골을 품속에 몰래 숨긴 뒤 밤을 틈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포키온의 유골을 벽날로 옆에 묻고는 이렇게 말했다.


"축복받은 벽난로야! 착하고 용감했던 분의 재를 너에게 맡기니 부디 잘 지켜다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때 조상들의 무덤으로 고이 옮겨갈 수 있게 해다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아테나이 시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질고 위대한 보호자를 잃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늦게나마 포키온의 동상을 세우고 그 명예에 걸맞게 다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포키온을 고발했던 아그노니데스를 잡아들여 사형시켰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17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였던 푸생은 포키온에 대한 그림을 딱 두 점 남겼다고 하는데 그 그림들은 모두 포키온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평생 동안 조국을 위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멸사봉공했던 자신들의 진정한 지도자가 저토록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마치 물건을 내다버리듯이 조국으로부터 버려지는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그 배경을 이루는 풍경들은 놀랍도록 질서정연하고 균형잡히고 아름답고 평화롭다. 화가 푸생은 바로 상상 속의 풍경을 저렇게 이상화시켜서 죽은 영웅의 위대성을 고결함과 숙연함으로 형상화시켰다고 한다.



<포키온의 장례식 풍경>, 니콜라 푸생, 1648년(1594 ~ 1665), 영국 카디프 웨일스국립박물관


푸생이 그린 두 번째 그림은 제목 그대로 아테네를 벗어난 한적한 교외에서 '포키온의 유해를 모으고 있는 포키온의 미망인과 하녀'를 묘사하고 있다. 하녀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불안한 모습으로 주위를 경계하지만 포키온의 아내는 몹시도 꿋꿋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죽은 남편의 유골을 수습하는데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그녀의 머리와 팔과 손 위로 눈부신 빛이 비치고 있는 모습도 몹시 인상적이다.


<포키온의 유골을 모으는 그의 아내>, 니콜라 푸생(1594 ~ 1665), 1648년, 영국 리버풀 워커 미술관


<포키온 편>을 읽으며 내가 살펴본 그림들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포키온의 얘기가 앞에서 내가 밑자락을 깔았던 '추운 날씨'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금방 이해하리라 믿는다.


역사가 두리스의 말에 따르면, 포키온은 공중목욕탕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거리를 걸을 때는 아무리 추워도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어쩌다가 포키온이 외투를 입으면, 병사들은 오늘 날씨가 엄청 춥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1336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정말 매섭고 차다. 그런데도 어젯밤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무려 십만 명 이상이나 '뇌물을 주고 받은 재벌 총수와 대톨령을 구속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광화문에 모였다고 한다. 정작 '뇌물 장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대통령은 이 추운 날씨와 국민들의 분노에도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지내며 도리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뻐기고 있는데 말이다.


이 사태가 불거진 초기에만 하더라도 매일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나라냐' 싶더니만, 이젠 그 정도를 훨씬 더 넘어서 어느새 '저 사람이 도대체 과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이었던 포키온은 '뇌물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만 유명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하니 말이다. 포키온을 둘러싼 이야기를 읽다 보니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진 '대통령을 둘러싼 온갖 추악한 뇌물 이야기' 때문에 온나라 백성들이 이 혹독한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광화문에 모여든 모습과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 이야기를 길게 옮겨 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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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영어에서 'Lucullan'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뛰어난 군대 사령관이었던 '루쿨루스(LUCULLUS)'라는 인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사치스러웠으면 후세 사람들이 그런 단어까지 만들어냈을까 궁금하다.


루쿨루스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헬라스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는데, 일찍부터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훌륭한 웅변가가 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그의 연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다른 웅변가들은 광장에서는 마치 '상처 입은 참다랑어가 바다에서 날뛰듯이' 열변을 토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지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는 말만을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정치적 목적만을 위해 유창하고 경쾌하게 연설하는 그들과는 달랐다. 그의 연설은 언제 어디서나 듣는 사람을 크게 감동시켜 탄식하게 만들었다. (90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쯤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내 머리를 스치는 불쾌한 기억을 여기에 슬며시 꺼내 놓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오로지 자신의 측근들만의 사익을 위해 온갖 부끄러운 비리를 숱하게 저지르고 나서도 물불을 가리지 앟고 그런 궁지에서 벗어나 보려고 '상처 입은 다랑어처럼' 몸부림을 치는 어느 대통령의 언설과 몸짓이 순간적으로 내 눈앞에 다시 떠올라서 하는 얘기다. 노트북마저 지참하지 못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억지로 끌려간 듯한 애꿎은 기자들 앞에서, 도무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인 '종을 잡을 수 없는' 말들만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이' 계속 내뱉기 일쑤인 그녀의 말을 우리 국민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더 분노하고 탄식하며 들어야 좋단 말인가.


잠시 기분이 잡쳤다. 얼른 다시 고대로 되돌아 가자. 어쨌든 루쿨루스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갈고 닦기 위해 교양을 익히는 데 마음을 쏟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온갖 전쟁터를 누비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뒤에도 마침내 늘그막에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철학에 깊이 빠져들어 안식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장군으로서 쌓은 업적 때문에 획득한 부를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쾌락과 사치에 쏟아부은 건 분명 지나친 면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가 루쿨루스를 키몬과 비교하여 설명한 다음 대목은 루쿨루스에게는 분명 아픈 데를 적잖이 후벼파는 대목이 아닐 수 없을 듯하다.


둘은 모두 부자였지만, 그 부를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달랐다. 그들은 모두 야만인들로부터 빼앗은 재물로 부를 얻었는데, 키몬은 그 돈으로 아테나이 아크로폴리스 남쪽 성벽을 쌓았고, 루쿨루스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다. 이 둘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키몬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베풀었던 일과, 루쿨루스가 몇몇 손님들을 위해 호화찬란한 식탁을 마련했던 일 또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 사람은 적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접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엄청난 돈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사치와 향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만일 키몬이 전쟁을 하지 않고 본국에 돌아와 한가롭게 지냈다면, 그도 난잡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르리라. 그는 술과 친구를 가까이하며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 많은 사람은 전쟁이나 정치에서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면 작은 쾌락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법이다. 만일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장군으로 있다가 그대로 싸움터에서 죽었다면, 아무도 그에게서 흠을 잡아내지 못했으리라.(95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어떤 여성 지도자가 21세기에 와서도 온 백성들의 눈과 귀를 교묘하게 가리면서까지 자신의 엄청난 권력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전방위로 힘을 쓴 얘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다. 어쨌든 루쿨루스는 당대의 여러 탁월한 장군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루쿨루스가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에 호시탐탐 로마를 위협하던 가장 강력한 외부의 적은 아시아의 드넓은 지역을 파죽지세로 복속시켜 나가던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이래로 오랫동안 로마를 곤란하게 만든 몹시 야만스럽고도 완강한 적이었다. 로마는 그에 대항해서 무려 20여 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이른바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렀는데, 여러 차례 미트리다테스 왕에게 패해 수많은 로마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 미트리다테스 6세(B.C. 135년∼63년)의 조상, 루브르 박물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8∼84) 중에는 로마에서 '내전'을 일으켰던 술라가 이 전쟁에 참가하여 '카이로네이아 전투'와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둠으로써 간신히 적을 제압했다. 그 무렵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술라를 반역자로 내몰던 상태였다. 술라는 결국 수세에 내몰렸던 미트리다테스를 끝까지 추궁하지 못하고 그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서둘러 받아들이고 사정이 더 급한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주역으로 참가했던 술라(B.C. 138 ∼78)


그 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3∼82)을 치르고 난 뒤 한동안 로마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소강 국면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75∼65)이 다시 재개되었다. B.C. 77년에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도 거기에 호응하여 아시아에서 다시 로마에 대항한 것이었다. 이때 로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히스파니아로 보내고 아시아 속주에 대해서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파견하였다.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루쿨루스가 보여준 교묘한 전략과 엄청난 용맹은 결국 연전연승으로 계속 이어졌다. 플루타르코스의 설명만 들어봐도 그가 3차 전쟁 중에 얼마나 빛나는 승리를 거듭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전쟁 공적은 루쿨루스가 키몬보다 뛰어났다. 그는 로마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넘고, 티헬라스 강을 건너, 티그라노케르타와 카베이라, 시노페, 니시비스 왕궁을 그 왕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는 북쪽으로는 파시스 강까지, 동쪽으로는 메디아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왕국을 거쳐 홍해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또 여러 왕들 세력을 꺾어 쫓기는 짐승처럼 사막이나 밀림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루쿨루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적을 무찔렀는지는 다음 같은 사실로 알 수 있다. 키몬이 죽은 뒤에 페르시아 군대는 언제 그에게 당했느냐는 듯이 무기를 쥐고 다시 나타나, 아이귑토스에서 헬라스 대군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 왕은 루쿨루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린 다음에도 꼼짝하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루쿨루스에게 몇 차례 패한 뒤에는 맥이 풀려서 폼페이우스와는 감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보수포루스로 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티그라네스는 망토도 걸치지 않은 채로 무기를 버리고 폼페이우스 앞에 엎드려 자기 왕관을 바쳤다. 하지만 그 왕관은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돋보이게 한 것이 아니라 루쿨루스 승리를 빛나게 할 개선식에 전리품이 되었다.(956∼95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렇듯 모든 전투에서 거듭 빛나는 명성을 쌓았던 루쿨루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부하들과의 친화력 부족'이었다.


루쿨루스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말재주가 있고, 광장에서나 전장에서나 똑같이 신중했다. 그런데 역사가 살루스티우스 기록을 보면, 병사들은 전쟁 시작부터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그의 병사들은 키지쿠스와 아미수스 전투 때에도 한겨울에 야영을 해야 했으며, 그 뒤에도 계속 적의 영토에서 겨울을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평이 컸던 것이다. 그런 로마군에 협조하려는 도시들도 있엇지만, 루쿨루스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면서 굳이 병사들을 벌판에서 재웠다. 병사들 불만과 불평은 로마 민중 지도자들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루쿨루스를 시기하고 있던 그들은 루쿨루스가 오로지 권력과 재물 욕심 때문에 전쟁을 질질 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루쿨루스는 킬리키아 · 아시아 · 비티니아 · 파플라고니아 · 갈라티아 · 폰투스 · 아르메니아 · 파시스 강까지 차지하고, 또 얼마 전에는 티그라네스 성까지 빼았았는데, 이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헐뜯었다.(94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끝내 병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고, 이 틈에 민중의 환심을 얻은 폼페이우스가 새로운 장군으로 아시아에 건너오면서 루쿨루스는 군대 지휘권을 그에게 넘기고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쿨루스가 이렇게 된 것이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운이 나빠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장군으로서 가장 중요한 조건인 친화력이 부족했다. 만약 그가 지닌 많고 훌륭한 장점들인 용기와 행동력 그리고 판단력과 정의감에 병사들 마음을 살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로마의 경계는 에우프라테스 강이 아니라 더 멀리 아시아 끝과 히르카니아 해에까지 이르렀으리라. 다른 나라들은 티그라네스에게 몇 차례나 정복당해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고, 파르티아 세력 또한 크라수스 때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쿨루스는 자기 손으로 로마에 세운 공보다는, 남의 손을 거쳐서 로마에 끼친 손해가 더 많았다. 파르티아 국경 근처 아르메니아와 티그라노케르타와 니시비스 등에 세운 전승 기념비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많은 보물과 개선식 때 전리품으로 나온 티그라네스 왕관등을 본 뒤로 크라수스가 아시아 정벌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으며, 그곳 야만인 왕국을 오로지 전리품으로만 생각하고 만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곧 파르티아군 화살을 맛보았으며, 루쿨루스가 이루었던 승리는 적군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용기와 전략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94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로마로 돌아온 루쿨루스는 여러 성가신 일들로 큰 시련을 맞았으나 뒤늦게나마 간신히 개선식만은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개선식은 다른 장군들처럼 성대하지도 않았고, 행렬이 길거나 전리품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야만인 왕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과 전쟁기계들로 커다란 플라미니우스 원형극장을 꾸민 것은 사람들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개선식 행렬에 나온 것은 중무장한 몇몇 기병들, 큰 낫이 달린 대형 전차 10대, 루쿨루스의 보좌관과 장군들 60명, 구리로 뱃머리를 감싼 군함 110척, 높이가 6척인 미트리다테스 황금 동상, 보석들이 박힌 방패 하나, 은그룻을 담은 들것 20개, 금술잔과 갑옷, 화폐를 담은 들것 32개 등이었다. 이 밖에도 노새 8마리가 황금으로 만든 긴 의자를 끌었고, 56마리의 노새는 은괴를 끌었으며, 107마리의 노새는 270만 개의 은화를 지고 있었다. 또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쳐부술 때 제공해 준 군자금과 국고에 낸 금액, 그리고 병사들에게 950드라크메씩 나누어 줬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판도 따라 나왔다.(9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개선식을 치르고 나서 얼마 뒤 루쿨루스는 제멋대로이고 행실이 나쁜 클로디아와 이혼하고 카토의 누이 세르빌리아와 결혼했다.(루쿨루스 집안에서 맞아들인 여자들은 하나같이 방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 또한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다. 세르빌리아도 모든 면에서 클로디아에게 뒤지지 않는 끔찍하고 막돼먹은 여자였던 것이다. 루쿨루스는 카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얼마 동안은 참고 지냈지만, 마침내는 그녀도 내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정치에서도 은퇴했다. 그가 정치에서 은퇴한 것이 귀족들이 부패해서였는지, 아니면 이제까지 영예에 만족해 남은 삶을 평화롭게 보낼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루쿨루스의 이런 변화를 두고서, 그가 마리우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내린 올바른 결정이라며 칭찬했다. 얼마 전에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을 정복해 찬란한 공을 세운 뒤에도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는 공명심과 권세욕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과 섞여 정치를 했는데, 그로 인해 무서운 죄를 저질렀고, 엄청난 고생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 말처럼 키케로가 카틸리나 사건 뒤에 정치에서 물러나 조용히 남은 생애를 보냈더라면, 또 스키피오가 누만티아와 카르타고군을 정복한 뒤에 은퇴 생활을 했더라면 훨씬 더 복 받은 인생이 되었으리라. 정치도 다른 모든 일들처럼, 해야 할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들도 운동선수처럼, 체력과 젊음이 다하면 새로운 상대에게 꺾이고 마는 것이다.(948∼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로마 공화정 말기 <카틸리나 탄핵>을 주도했던 키케로(B.C. 106∼43)


노욕에 찌들어 부질없는 권력만 탐하는 늙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신세를 도리어 망가뜨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쾌락과 사치에 젖어 있는 루쿨루스를 비웃었다. 그런 생활을 즐기는 것은, 정치를 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일 못지않게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 루쿨루스의 정원_상상도


루쿨루스 일생은 마치 옛 희극과도 같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정치와 전쟁에서 웅장하고 큰 활약들을 보여주고, 나중에는 먹고 마시고 잔치를 열며 흥청거리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가장 뒤에 나오는 장면에는 호화로운 저택, 사치스러운 목욕탕, 그림이나 조각들이 나온다. 그는 싸움터에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재산을 저택에 꾸밀 골동품들을 사 모으는 데 써버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루쿨루스 정원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마 황제의 정원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큰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은 산에 굴을 파서 마치 공중에 걸린 것처럼 보이게 했으며, 집 주위에는 바다에서 둥근 바위들을 가져다 놓았고, 연못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물고기를 길렀다. 그리고 바다 위에도 집 여러 채를 지었다. 스토아 철학자 투베로는 이 집들을 구경하고 놀란 나머지, 루쿨루스는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 왕이라고 말했다.


루쿨루스는 또 투스쿨룸 근처에도 별장 여러 채를 지녔는데, 이 집들은 모두 경치 좋은 전망대와 많은 사람이 잘 수 있는 시원하고 넓은 방, 그리고 아름다운 산책길을 갖추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 놀러왔다가 루쿨루스에게, 여름에는 시원하겠지만 겨울에는 살기 힘들겠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니, 나를 황새나 학보다도 둔한 사람으로 여기시오? 철따라 옮겨 사는 법도 모르는 줄 아느냔 말이오?"

(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저토록 화려한 저택에 살았으니 전속 요리사가 만들어 내는 '진수성찬'이 어땠을지는 가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에 딸린 일화를 조금 인용해 보자.


루쿨루스가 날마다 먹는 식사도 잔치에 못지않게 푸짐했다. 식사때면 언제나 염색된 천을 씌운 긴 의자와 보석이 박힌 술잔들, 그리고 합창과 연극이 따랐다. 음식들 또한 온갖 진기한 요리들과 향기로운 음료들을 모두 갖춘 산해진미였다. 그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음식을 먹었다.


폼페이우스가 병이 들었을 때, 의사가 그에게 지빠귀를 잡아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여름철이라 이 새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하인이 나서서, 루쿨루스 저택에서 그 새를 기르고 있으니 거기서 얻어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럴 허락하지 않고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알아보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그토록 사치스럽게 사는 루쿨루스 도움이 없으면, 이 폼페이우스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9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동방에 사는 어느 여자 대톨령은 '혼밥'을 그토록 고집했다고 하나 루쿨루스의 '혼밥 이야기'도 제법 유명해서 로마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그런 생활을 즐겼는지 능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는 언젠가 로마에 찾아온 몇몇 헬라스 사람들을 여러 날 동안 푸짐하게 대접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은 헬라스 사람들답게 자기들 때문에 많은 돈을 쓰는 것이 미안해서 다음부터는 초대를 사양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그들에게 웃으며 말헀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대접이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또 어느 날에는 그가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음식이 꼭 한 사람 먹을 양만 나왔다. 그러자 그는 요리하는 하인을 불러 몹시 화를 냈다. 하인은 손님이 없어서 큰 잔칫상을 차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루쿨루스가 말했다.


"아니, 너는 오늘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손님으로 초대한 사실을 몰랐단 말이냐?"


이 말은 온 로마에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950∼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왕 '혼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얽힌 일화를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이 일화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인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도 등장한다.


 -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지은 폼페이우스(B.C. 106 ∼ 48)


어느 날 루쿨루스는 홀로 공회당을 걷다가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를 만났다. 키케로와는 본디 가까운 사이였고, 폼페이우스와는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지휘권 문제로 다투기는 했지만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루쿨루스에게 인사를 건넨 키케로가 자신들을 식사에 초대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루쿨루스는 더없는 영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키케로가 덧붙였다.


"우리는 오늘 당신과 식사를 하고 싶은데, 당신이 혼자 있을 때 먹는 그대로만 대접해 주시오."


루쿨루스는 거북스런 표정을 짓더니 그러면 하루만 미루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꼭 오늘이라야 하고, 하인에게 미리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그가 하인을 시켜, 그가 홀로 식사할 때와는 달리 푸짐한 음식을 준비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다만 루쿨루스의 요청에 못 이겨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 하인 하나를 불러서, 루쿨루스가 오늘은 아폴로에서 저녁을 먹을 테니 준비해 두라는 지시를 내리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손님들은 루쿨루스 꾀에 넘어가고 말았다. 루쿨루스는 집에 있는 여러 방마다 이름을 붙이고, 그곳을 사용할 떄의 음식 비용과 여흥 종류들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방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하면, 곧 얼마의 비용으로 어떤 형식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 정해졌던 것이다.


아폴로라는 방에서 식사할 때의 비용은 5만 드라크메였다. 때무네 그날도 그많나 돈을 들인 식사가 나왔다.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는 식사 규모의 엄청남에 놀랐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루쿨루스가 돈을 포로나 야만인처럼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해 함부로 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온갖 전쟁을 치른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물러나고 정계를 은퇴했다고 해서 오로지 호화로운 저택에 머물며 산해진미에 둘러싸여 먹고 마시는 데 시간을 모두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몽테뉴와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가까이 했다. 그는 도서관을 짓고 시민들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도서관을 갖추어 놓은 것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그는 좋은 책들을 많이 모았다. 그런데 이처럼 책을 모아놓은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그 책을 널리 이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의 도서관은 늘 열려 있었고, 도서관에 딸려 있는 산책길과 열람실은 로마 시민들뿐 아니라 모든 헬라스 사람들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마치 무사이 신전처럼 즐겁게 드나들며,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루쿨루스도 자주 이곳에 나와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정치를 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그의 저택은 로마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집이었으며, 때로는 시민들의 공회당이 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도서관을 갖춘 것은 철학을 사랑하고 여러 학파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학설과 필론의 지도로 발달한 신 아카데미이아 학파가 아닌, 그 무렵 석학이며 웅변가였던 아스킬론의 안티오코스를 대표로 한 구아카데메이아 학파를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코스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가 키케로를 비롯한 필론파 철학자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951∼95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나도 한번 저렇게 살아봤으면...' 싶은 소망을 품게 만들 정도로 '부럽게' 살았던 루쿨루스였지만, 그런 삶이 도리어 '수많은 민초들의 온갖 희생' 위에 터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승에서라도 그를 다시 불러내어 심판대에 올려보면 좋겠다' 싶어서 쓴 작품이 바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쓴 <루쿨루스 심문>이었고, 작곡가 데사우는 오페라 작품으로도 만들어 놓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70769&cid=51211&categoryId=51211


한편, 로마의 이름난 영웅들과 여러 차례 건곤일척을 다퉜던 미트리다테스 왕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도 결코 적지 않다. 이 유명한 야만족 왕은 (마치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비록 자신의 '열전'을 따로 갖지 못했다. 그렇지만 플루타르코스가 쓴 '50인의 열전' 가운데 <카이우스 마리우스 편>, <술라 편>, <루쿨루스 편>, < 폼페이우스 편>, <세르토리우스 편> 등에서 거듭 등장할 정도로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고대의 이야기'에 특별히 심취했던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Jean Racine, 1639∼1699)은 이 인물에 매료되어 결국 희곡 『미트리다트』를 썼고, 그로부터 얼마 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불과 14세의 나이에 오페라 <미트리다테>를 만들어 그를 부활시켰다.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7&contents_id=106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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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 판본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추억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7-01-08 20:32 
    oren 님의 플루타코스 영웅전 얘기,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먼댓글로 연결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도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었네요. 제가 어렸을 때, 교과서를 제외하고 거의 최초로 읽은 책이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거든요(돈키호테, 아라비안 나이트와 더불어). 그런데 그때 읽었던 판본 제목이 ‘플루타크 영웅전’이었는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는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너무 어릴 때라 내용도 거의 기억
 
 
qualia 2017-01-0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 흥미로운 「루쿨루스와 미트리다테스에 얽힌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숨어 있던 인연이 드러나고, 그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위에 제가 남긴 먼댓글에 중에 “플루타코스”는 “플루타르코스”의 오타인데, 제 블로그에선 올바로 수정했습니다(위 먼댓글 맛보기에 나타난 부분은 수정을 해도 반영이 안 되는군요. 처음 잘못 써올린 것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 번역판본들은 그리스어 현지 발음과 표기가 아닌 영어식 발음과 표기를 채택해서 “플루타크”나 “플루타르크”로 음역했더군요. 해서 플루타르코스/플루타크/플루타르크 모두 맞는 표기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oren 님의 또 다른 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는 아주 요긴하고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더군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oren 님 글 덕분에 저는 오늘 여러모로 얻은 게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oren 2017-01-09 00:22   좋아요 1 | URL
저 또한 적잖은(?) 나이에 뒤늦게 (어릴 때나 ‘아동용‘으로 접하게 되기 쉬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흠뻑 빠져 지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답니다. 이 책이 워낙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언감생심‘ 완독할 엄두를 내기는 좀처럼 어려웠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까마득한 옛날에(1980년 겨울에) 딱 한 번 읽었던 ‘몽테뉴 수상록‘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게 되면서, 몽테뉴가 평생 동안 가장 좋아했던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금 이 책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고교시절 ‘세계사 수업 시간‘에 역사 선생님께서 자주 들려주셨던 여러 고대의 인물들(가령 한니발, 스키피오, 카이사르, 브루투스 등등)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끔씩 떠올라, 언젠가는 이 책을 꼭 한 번 완독해 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더군요.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러 차례 귓등으로만 스쳐 들었던 ‘미트리다테스‘라는 인물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너무나 자주 마주쳤기 때문인데, 알고 보니 그 인물에 얽힌 이야기가 이미 숱하게 다른 작가나 예술가들에게도 놀라운 예술적 자극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더욱 놀랐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