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에 대한 추억......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나는 그를 애독하는 자들의 글에, 그에게서 따온 부분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울화가 터진다. 그리고 그를 읽어 보기만 하면 내 글의 날개와 허벅다리를 거기서 따오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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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누가 뭐래도 플루타르코스였다. 그에 관한 뚜렷한 증거를 나는 여럿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몽테뉴가 쓴『수상록』을 통해 이미 꽤 오래 전부터 그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교감을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정작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대해서는 좀처럼 가까이 다가설 기회를 잡지 못했다.(한 가지 핑계를 대자면, 그가 쓴 작품들 가운데『플루타르코스 영웅전』말고는 여태까지 국내에 제대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 몇 권 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는 최근에 박영수 특검이 현직 대통령의 온갖 추악한 부정과 비리를 파헤치는 동안에 우연히 집어든『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그 책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거기에 담긴 '50명의 전기'가 오늘날의 정치 현실과도 너무나 자주 오버랩되는 바람에 한결 재미가 더해진 때문이었다. 그 속에 담긴 여러 인물들에 얽힌 온갖 생생하면서도 놀라운 이야기가 그토록 매혹적일 줄은 예전엔 미처 상상도 못했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는 우리가 이미 영화 등을 통해 어려서 부터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도 꽤나 등장한다. 가령 테미스토클레스(영화『300』과 『제국의 부활』등에 나왔던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알렉산드로스(영화『알렉산더』에서 훌륭하게 묘사된 것처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등등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이런 인물들을 플루타르코스의 '온전한 전기'를 통해 아주 디테일하게 만나는 반가움은 영화와는 또다른 묘미가 책 속에 숨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셰익스피어조차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고 그의 탁월한 문장력과 인간 심리 묘사 등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손길로『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올라누스』등의 작품을 남길 정도였다. 영웅들의 전기 속에 등장하는 너무나 유명한 대목들, 가령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 등을 '플루타르코스의 작품 전체'를 통해 '각색없이' 아주 디테일하고도 생생하게 마주치는 기쁨은 때로는 격한 감동마저 불러 일으킬 때도 있었다.(나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두 번씩이나 읽는 동안에 일부러 책을 읽는 감동을 더하기 위해 '찰턴 헤스톤' 주연의 러닝타임 212분짜리 1959년판『벤허』를 VOD로 다시 봤는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시 꺼내 봐야만 할 영화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도서출판 숲에서 펴낸『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영웅 10명'만 담은 발췌번역본이다. 주석도 풍부하고 번역도 훌륭하지만 '동시대에 활약한 여러 탁월한 인물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없다는 게 결정적 단점이다. 완역본을 읽으면 발췌본에서 모자이크식으로 따로따로 움직이던 인물들이 어느새 여기저기서 동시에 한꺼번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느낄 수도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만 하더라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루쿨루스, 세르토리우스, 술라, 키케로, 카토, 브루투스, 안토니우스 등과 동선이 겹치는데 『영웅전』에는 이들의 전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몽테뉴로 되돌아 오자. 몽테뉴가 쓴 수상록은 플루타르코스가 쓴『윤리론집』을 본따서 쓴 작품이지만, 그가 다루는 소재와 주제들이 플루타르코스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하고 독특했기 때문에 플루타르코스의『윤리론집』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살던 세상이 대략 1,500년의 간극이 있을 만큼 서로 확연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루는 인물들과 작품들에는 겹치는 부분이 아주 많다. 그들은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물과 작품들'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낸다는 공통점이 있다.(물론 이에 대해 얼마쯤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플루타르코스는 스스로도 밝혔듯이 라틴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이상하리만치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의 작품을 인용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에 비해 라틴어에 아주 능통했던 몽테뉴는 온갖 로마 시인들의 작품들을 자유자재로 끝없이 인용한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아주 좋아한 인물들은 고대 그리스 시인과 철학자들이었으며,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이 대표적이었다.)


어쨌든 뒤늦게나마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두 번씩이나 거듭 읽고 나니 예전에『몽테뉴 수상록』을 읽으면서 내가 숱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만났던 수많은 인물들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이 새삼 뇌리에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몽테뉴의 책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미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했던 여러 인물들을 이제야 비로소 제법 알 만하다고 여길 정도가 되니 문득 몽테뉴의 수상록 속으로 다시금 뛰어들고픈 충동마저 느낀다. 그런데 사실『몽테뉴 수상록』만 하더라도 그 분량이 결코 호락호락 하지도 않은 데다가, 내가 예전에 그 책을 두 번째로 읽고 난 뒤에 기어코 분별없는 욕심을 앞세워 낑낑거리며 필사까지 마쳤던 그 고된 기억 때문에라도 지금 당장은 그 책 속으로 곧바로 뛰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혹여 이번 기회에 그 책 속으로 다시 붙잡혀 들어가게 된다면 나는 어쩌면 거기서 또다시 한참이나 침잠하면서 지낼지도 모르겠고, 설사 그 책에서 간신히 벗어나 다시 얼굴을 내밀더라도 곧바로 또다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속으로 도로 빠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괜한 걱정마저 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로서는 아주 오래 전에 몽테뉴 수상록을 통해 맨 처음으로 만났던 숱한 고대의 낯설고도 경이적인 인물들 가운데 지금껏 내 나름대로 이런저런 작품들을 통해 더러 낯을 익혀둔 인물들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몰랐고 알쏭달쏭한 점들이 참으로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연거푸 읽고 나니 그저 낯선 이름으로만 어렴풋이 그려지던 여러 인물들이 비로소 '그들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지닌 생생한 표정을 띤 인물'로 되살아나 내 눈앞에서 움직이는 듯해서 기분이 여간 흡족한 게 아니다.


사실 플루타르코스는 그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전기를 남긴 일만으로 그토록 유명한 인물이 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철학자였으며 문장가였다. 그의 책 속에는 숱한 인물들의 생애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격조높은 문장들과 두고 두고 기억할 만한 유명한 일화들 말고도 아주 매혹적인 옛 시인들의 싯구들과 당시의 세태를 풍자하는 구수한(?) 속담들과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과 비판이 가미된 역사 비평들이 차고 넘친다. 몽테뉴가 쓴 수상록이 그토록 흥미진진한 옛 이야기들을 가득 담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책의 저자가 플루타르코스를 탐독한 데서 그 한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장은 아닌 셈이다.


이들 두 사람이 쓴 책에 대한 이야기는 대략 이쯤에서 그치고, 이쯤에서 나는 '플루타르코스의 프로필'이라도 여기에 다시 소개하고 싶다. 내가 읽은 동서문화사판『몽테뉴 수상록』에는 맨 뒷편에 아예 '인명 찾아보기'를 따로 싣고 있는데, 해당 쪽수는 1288∼1330쪽이다. 인명 소개만 무려 43쪽에 이른다. 거기에 수백 명의 실존 인물들이 잔뜩 소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물론『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온갖 인물들도 거의 망라되어 있을 정도다. 내가 여기서 인용하고 싶은 인물은 바로 그런 인물들의 전기를 남긴 '작가 플루타르코스'이다.


플루타르코스 Plutarcos, 45∼125 영어명 Plutarch(플루타르크), 고대 그리스 말기의 사가(史家) · 수필가. 고전 고대에 걸쳐 가장 유명한 전기 작가(傳記 作家). 중부 그리스 카이로네이아 출생. 플라톤 철학을 배웠고 자연 과학이나 변론술도 수학함. 카이로네이아 시정(市政)에 공헌해 명예 시민이 되었고, 만년에 델포이의 최고 신관(神官)으로 있으면서 아폴론 신역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카이로네이아에 사숙(私塾)을 열어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그 교양 속에 왕성한 수필 활동을 하고 방대한 전기를 씀은 그의 진목목이라 하겠다. 특히 부유한 생활에서 어려움 없이 지낸데다, 당시 로마 제국이 융성했던 시기의 배경에 있었으므로 작품에도 자신의 짙은 체험담 같은 건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 학파를 주로 하여 거기에 피타고라스파 사상을 가미했으며 에피쿠로스 학파는 철저히 반대했다. 미신을 반대하나 신비주의 사상이 엿보이고 로마 제국의 지배를 긍정하며 한 사람만의 지배를 인정하였음.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있음.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인명 찾아보기> 중에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말미에 메모해 둔 내용들. 두 번째로 읽으면서도 여전히 메모할 게 많았다.)



(동서문화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말미에 메모해 둔 내용들)



(동서문화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말미에 메모해 둔 내용들)



(동서문화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Ⅰ,Ⅱ,Ⅲ』을 읽는 동안 '독서노트'에 따로 끄적거린 메모들)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있다면 그건 내가 앞에서 미리 얘기했던 '증거물'이다. 내가『몽테뉴 수상록』을 두 번째로 읽고 난 뒤에 아주 작심하고 방대한 분량으로 베껴 놓은 '필사 내용' 가운데 '플루타르코스'가 포함된 대목들만 검색해서 곧바로 뽑아낸 대목만 해도 결코 적은 분량은 아니었다. 작가 몽테뉴가 플루타르코스를 얼마나 좋아했으며, 왜 좋아했는지를 이만큼 분명하게 드러내는 증거도 별로 없을 듯하다. 우연한 기회에 이런 내용들만 따로 발췌해서 읽는 재미도 나로선 여간 쏠쏠한 게 아니어서 이런 글까지 남겨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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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161

내게는 아직도 저 너머의 나라가 보이는데, 그 시야가 혼탁하고 몽롱해서 아무것도 풀어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공상에 떠오르는 것을 아무것이나 무척대고 말하려고 하며, 여기 내 고유의 타고난 방법만 쓰기로 하고,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좋은 작품들 중에 내가 취급하려는 것과 같은 제재를 우연히 만나 볼 때에는(내가 방금 플루타르크에서 그의 상상력의 힘에 관한 설화에 부딪친 것처럼) 이런 사람들에 비하여 내가 얼마나 약하고, 허술하고, 둔하고, 잠들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못나 보이게 됩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173

나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작품 속에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한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습니다. 플루타르크는 이 작품 속에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고,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던 것 이상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순수한 문법상의 공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 우리들 천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들이 침투되어 있는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합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요즈음 사람들 252

우리의 판단력은 병들어서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정신들이 옛 사람들의 행동을 비굴하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헛된 사정과 원인들이나 꾸며 붙이며, 고대의 아름답고 후덕한 행적들의 영광을 더럽히는 약은 꾀만 쓰는 것을 본다.

위대한 재간이지! 글쎄, 가장 훌륭하고 순결한 행동을 내놓아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 그럴듯하게 50가지 나쁜 의향을 꾸며 댈 것이다. 거짓말을 펴 보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 속마음의 의도가 얼마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갈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들은 남을 모함하는 데는 심술궂기보다도 더 둔중하고 상스럽게 재간을 부린다.

사람들이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깎아 내리는 데 쓰는 수고로, 그와 똑같이 방자하게 나는 이런 이름들을 높이는 데 수고하며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 그 희귀한 모습들은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세상의 모범으로 추려낸 것이니, 나는 이 이름들에 영광을 다시 살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다하며, 유리한 사정으로 해석해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 노력은 그들의 가치를 이해할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을 묘사하는 일은 착한 사람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모범을 위해서 감격하며 열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는 수작은 악의로 하거나, 또는 지금 내가 말한 바 인물들의 신용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덕에서 하거나, 또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지만, 찬란한 도덕을 그 소박한 순결성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강력하고 명석하지 못하고 그러한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 탓이다. 마치 플루타르크가 말하는 바, 그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작은 카토의 죽음의 원인을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따위이다. 거기에 대해서 플루타르크가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이 죽음을 야심뿐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답고 후덕하고 정당한 행동을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차리리 세상의 추악함을 더럽게 생각하여 버렸을 것이다.

이 인물은 진실로 인간의 도덕과 지조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대자연이 골라 놓은 시범이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작은 카토에 대하여>


플루타르크와 세네카 436∼438

다른 종류의 독서는, 쾌락에 좀더 내용을 섞어 주며 거기서 내 기분과 조건들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이런 데 내게 소용되는 작품들은 플루타르크와 세네카이다. 그들은 둘 다, 내가 거기에서 찾는 지식을 조각조각 풀어서 취급해 놓았기 때문에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내 비위에 맞는 특기할 장점이었다.

플루타르크의 《소품집》과 세네카의 《서한집》등이 그렇다. 이 《서한집》은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문장이다.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하는 데는 큰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덮어 둔다. 왜냐하면 이 문장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대부분의 사상이 유익하고 진실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같은 세기에 출생하였고, 둘 다 로마의 두 황제의 사부였으며, 외국에서 들어왔고, 다 부유하였고 세력도 누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학의 진수를 온당한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플루타르크는 더 고르고 꾸준하며, 세네카는 더 파동이 있고 잡다하다. 세네카는 힘들고 굳어지며 긴장해서 허약과 공포와 못된 욕망에 대항해서 도덕을 무장시킨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성질의 영향을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보조를 서두르거나 이런 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사상은 플라톤적이고 순해서 시민 생활에 조화될 수 있는데, 세네카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받아서 일반의 습관과는 융화되지 않으나 내 의견으로는 개인 생활에 더 편리하고 견실하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키케로로 말하면, 그의 작품들 중 내 목적에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도덕 철학을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면(사실상 이미 건방진 한계를 넘은 바에 이것을 억제할 수도 없다), 그의 글 쓰는 방식이 내게는 지루하게 보이며 다른 점도 그렇다. 서문이나 정의·구분·어원 따위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긴 때문에 문장이 생기를 잃고 내용이 질식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그를 읽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거기서 진짜 정수를 뽑아서 보아도 대개는 바람밖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의 사상에 필요한 논법이나 내가 찾고 있는 요점에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웅변가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이니, 이런 논리학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절차는 못마땅하다. 나는 마지막 요점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이나 탐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해 갈 필요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지탱해 나를 가르쳐 줄 진실하고 견고한 이치를 찾고 있다. 문법상의 미묘한 점이라든지, 말과 논법의 교묘한 구조 같은 것은 필요없다. 나는 가장 심각한 의문점에 첫 공격을 가하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의 문장은 뚝배기 주위를 돌다가 기운이 빠진다. 그런 수작은 학교나 재판정이나, 설교단에 맞는 일이다. 그런 데서 우리는 실컷 졸고 있다가 한 15분쯤 뒤에 보아도 말의 줄기를 잡을 여유가 넉넉히 있다. 옳건 그르건 자기가 승소하려는 때, 재판관 앞에서,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나 보려고 모두 말해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와 속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일이다.

나는 사람이 주의를 끌려고 포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령처럼, "내 말 들으시오!" 하고 5번이나 고함지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이런 것 모두가 내게는 쓸데없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다. 내게는 미끼도 양념도 필요치 않다. 나는 날것으로도 잘 먹는다. 이런 준비와 서곡으로는 내 식욕이 당기게 하기는커녕 거기 물려서 입맛을 잃게 만들어 놓는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서적에 대하여>


브루투스의 경우 439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같은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브루투스를 플루타르크의 저서에서나 그 자신의 저서에서나 마찬가지로 읽어 보고 싶다.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서적에 대하여>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440

역사가들은 내게는 입에 맞는 떡이다. 그들은 재미나고 평이하다. 그들은 또 인간의 내적 조건들의 잡다성과 진실성의 전부와 세부적인 것, 그가 총체로 가진 여러 방법의 다양성과 그를 위협하는 사건들, 즉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인간 전체가 다른 어떤 데서보다도 여기서 더 생기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자들은 그 인물들이 겪는 사건보다도 그 목적에, 또 외부에서 닥쳐오는 것보다도 그들 내부에서 나오는 것에 더 흥미를 갖기 때문에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서적에 대하여>



심각한 연구와 자기 반성 497

그러나 플루타르크가 책임지고 말하는 까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괴상하기까지 하다. 이 까치는 로마의 어느 이발사의 이발소에서 그가 듣는 모든 것을 목소리로 흉내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팔수들이 이 이발소 앞에 멈춰서 오랫동안 나팔을 분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은 이 까치가 사뭇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우울하게 지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 그가 나팔소리에 얼이 빠져서 귀가 먹고 그의 청각과 함께 목소리도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심각한 연구이고 자기 반성이었으며, 그가 그 뒤 처음 낸 목소리는 이 나팔소리를 그 반복과 자태, 음조의 변화까지 완전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공부로 그가 전에 말할 줄 알았던 것은 모두 버리고 경멸해 버렸던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중 [인간은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다] 중에서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549∼550

데모크리토스는 식탁에서 꿀맛같이 단 무화과를 먹어 보고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감미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근원을 밝히려고 식탁에서 일어나 무화과를 따 온 자리의 나무 생김새가 어떤가를 보러 갔다. 그의 하녀는 이렇게 소란을 떠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듣고, 그걸 가지고 그렇게 수고하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무화과를 꿀그릇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탐구해 보려는 기회를 잃고 자기 호기심의 재료를 빼앗긴 것에 분개해서 "물러 가거라, 기분 나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본래 그런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끝까지 캐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잘못된 추측을 고집한 상태로 진실한 이유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이 유명하고 위대한 철학자에 관한 일화는, 우리가 어떤 사물의 원인을 탐구하여 알아내지 못하고 절망할 때에, 그 추구해 보는 연구에 대한 정열에서 느끼는 재미의 성질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플루타르크도 이것과 같은 예를 하나 들고 있다. 어떤 자는 탐구하는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그 원인을 캐고 있는 사물이 해명되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또 어떤 자는 물을 마셔서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의사가 그의 열병에서 오는 갈증을 치로해 주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기보다는 쓸모없는 사물이라도 배우는 편이 낫다." (세네카)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중 [인간은 지식을 갖지 않았다] 중에서



 

몽테뉴의 책이 금서로 지정될 만한 근거를 제공했던 대목들 559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비단이 깔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천하일색의 미인들이 가득하며, 특이한 음식과 술이 가득한 천당을 약속할 때에, 그들은 죽어 갈 자기 인생의 욕망에 맞는 관념과 희망으로 꿀을 발라서 우리를 꾀려고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아첨하는 희롱꾼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 중의 어떤 자들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도 온갖 종류의 쾌락과 행복이 수반되는 이승의 현세적 생활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거룩한 개념들로 하느님의 성질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룩하다는 별명까지 얻은 플라톤이, 이 가련한 생령(生靈)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거룩한 세상의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허약한 이해력이나 감각의 힘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영겁의 고초를 당해 낼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 가서 얻으리라고 그대가 약속하는 쾌락들이 내가 이승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과 아무 공통된 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오관(五官)의 감각들이 환희로 충만하고 이 영혼이 욕구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만족으로 잡혀져 있다 해도, 우리는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내 것이 무엇이든지 들어 있다면, 거기에 거룩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것이 현재 우리의 처지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사라질 인생들의 모든 만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친척과 자녀나 친구들의 선심이 만일 저승에 가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때에도 그런 쾌락을 중히 여겨야 한다면, 우리는 이승의 제한된 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위대성을 당연하게 상상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 비참한 경험으로의 위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준비해 놓으신 행복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고린도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누가 우리 존재를 개조하고 변경하여 준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그대의 정화를 가지고 말하듯),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이며 보편적인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학설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닐 것이다.

      격전 속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에 끌려가던 시체는
      이미 헥토르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

      변화하는 것은 모두 분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멸한다.

      심령의 부분들은 사실 위치가 바뀌어지고,
      그 질서가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는 식의 보상을 받을 것은 다른 사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에서, 즉 그가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상상하던 그 영혼의 거주지가 변함에 따라,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사자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 사자가 카이사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인가? 그 사자가 바로 카이사르라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하며, 당나귀로 변한 어미를 아들이 타고 다닌다는 식의 어리석은 수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동물들의 신체가 다른 종류의 동물의 신체로 변할 때에, 다음에 나온 동물은 그 전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페닉스의 재에서 벌레가 나오고, 다음에 다시 다른 페닉스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둘째 번 페닉스는 첫 번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명주실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 비틀어지는 것같이 보이는데, 바로 이 몸뚱이에서 나방이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를 아마도 첫번 벌레라고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한번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시간은
우리의 물질을 모아 지금 있는 질서로 부흥시키고,
생명의 빛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한 번 우리의 추억의 선이 단절된 다음에는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다른 곳에서 내세에 가서 보상을 누린다는 문제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그럴 성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눈알이 뽑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면
눈은 단독으로는 어느 물체도 식별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 점에서 고려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생명의 멈춤이 일어나고,
모든 동작은 감각을 떠나 흩어져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인간이 사용하며 살아가던 팔다리를 벌레가 파먹고 흙이 그것을 썩힐 때, 인간이 고통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가며,
그 집합체는 우리 개인을 구성하므로 그런 일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루크레티우스)

그뿐더러 인간 속에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들어가서 실현되게 한 것이 곧 신들이 한 일인 이상, 신들은 그들 정의의 어느 기반 위에서 인간이 죽은 다음 그의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의지를 조금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사람들을 그릇된 조건에 데려다 놓고, 이쩌서 인간의 악행에 분격하고 복수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밖에 상상해 볼 수 없다. 사람밖에 못 되는 자들로서 신과 반신(半神)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자가 노래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진영(陳營)에 있어 본 일이 없는 자가 무기와 전쟁에 관해서 토론하려는 식으로, 경솔한 추측으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기술의 실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오만한 수작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레이몽 스봉의 변호> 중 [인간은 지식을 갖지 않았다]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시인 825∼828

누구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특출한 인물을 골라 보라고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탁월한 인물 셋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호메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바로가 그만큼 박식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고, 예술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그에게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이 판단은 그들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둔다. 한편밖에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단지 내가 아는 한도로 시신(詩神)들까지도 이 로마 시인보다 뛰어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판단에서도 베르길리우스가 그 재질을 주로 호메로스에게서 배워 온 것이었으며, 이 시인이 그의 안내자이며 스승이었고, 《일리아드》의 단 한 줄이 저 위대하고 거룩한 《아에네이스》에 본체와 재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고찰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여기에 이 인물을 감탄스럽고 거의 인간 조건 이상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을 섞어서 생각한다.

사실 나는 자기 권위로 많은 신들을 세상에 내놓고 사람들을 믿게 한 그가, 자신이 신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자주 이상하게 여겨 왔다. 앞을 보지 못하며 궁핍한 몸으로 학문이 아직 규칙과 확실한 관찰로 사물들을 기록해 놓기도 전에, 그는 이런 일을 모두 알고 있어서, 다음에 정치를 세우고 전쟁을 지휘하고, 어느 학파에 속하건 종교나 철학에 관한 것을 쓰고, 기술을 다루는 일에 간섭하는 자들을 누구나 다 그를 모든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지극히 완벽한 스승과 같이 보며, 그의 작품을 모든 종류의 능력을 기르는 기초 터전 같이 이용했다.

그는 무엇이 명예롭고 수치스러우며
유용하고 그렇지 않은가를
크리시포스와 크란토르보다도 더 능란하게
더 완전하게 말한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다른 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치 무궁무진한 샘처럼
피에리아(詩神들의 고향)의 물에
시인들은 입술을 축이러 온다.                                                                                    (오비디우스)

또 다른 자는 말하기를-                            

헬리콘(보이오티아 접경의 산, 중턱에 시신(詩神)들의 제전이 있었다) 시신들의 길동무들을 더하라.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호메로스만이
별무리의 높이에 오른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또 하나는 말하기를-

그의 풍부한 원천에서 후세의 시인들은 그들 시가에 물을 길었고
단 한 사람의 재보로 부유해져서
감히 수많은 작은 하류로
물을 끌어대는 큰 강이다.                                                                                           (마닐리우스)

그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것을 생산해 냈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출생할 때에 대개 불완전하며 성장하면서 불어 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옛 사람들이 그를 두고, 자기 앞에 아무도 모방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 뒤에 그를 모방할 자가 없었다고 말한 이 아름다운 증언에 따라, 우리는 그를 시인들 중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아낙산드리다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는, 호메로스는 군사 훈련에 대단히 훌륭한 스승이기 때문에 라케데모니아 인들의 시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그뿐더러 어떤 영광을 그의 영광에 비겨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이름과 작품보다 더 사람들의 입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트로이의 헬레나와 그녀로 인한 전쟁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고 인정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은 3천 년이 넘는 옛날에 그가 꾸며 댄 이름을 아직도 쓰고 있다.

누가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를 모르는가? 어느 사사의 가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꾸민 이야기 속에 자기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 마호메드라는 이름을 두 번째 가진 터키 황제가 교황 피우스 2세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우리는 트로이 사람들에게서 나왔고, 나도 그들과 같이 그리스 인들에 대해서 헥토르의 피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데 관심을 가졌는데, 어째서 이탈리아 인들이 내게 대항해서 단결하는지 나는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국왕들과 국가들과 황제들이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그 속에 자기의 역할을 연기해 오고, 이 큰 우주 전체가 그것의 무대로 쓰이는 한 고상한 연극이 아닌가?(825∼828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중에서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 올리는 것이다 965


그들의 언어는 지조 있는 자연스러운 힘으로 충만하며 벅차다. 그들은 꼬리뿐만 아니라 머리와 배와 다리 전부가 풍자시이다. 거기에는 억지가 없고 길게 잡아 늘린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같은 태세로 진행된다. "그들의 사상은 남성적 미의 상징이다. 그들은 단지 말을 꾸며서 희롱하는 것이 아니다."(세네카)

그것은 가시 없는 무른 웅변이 아니고, 힘줄이 박히고 담담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보다는 채워서 황홀하게 하며 가장 강력한 정신들을 감복시킨다. 이러한 훌륭한 문체가 그렇게 생기있고 심각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나는 그것을 말이 잘됐다고 하지 않고 생각이 잘됐다고 말한다. 그 생각하는 바의 발랄함이 말을 쳐들어 부풀어올리는 것이다. "웅변을 만드는 것은 흉금이다."(뮌틸리아누스) 우리네는 속이 찬 개념들을 판단력이니 언어니 아름다운 문장이니 하고 부른다.

이러한 묘사는 숙련된 문장력으로써 되는 일이 아니고 묘사하는 대상에 대한 인상을 더 생생하게 마음속에 받았기 때문에 되는 것이다. 갈루스는 단순하게 말한다. 그것은 그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호라티우스는 피상적인 표현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가 마음먹은 것을 말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물을 더 명확하게 더 멀리 내다본다. 그의 정신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말과 모양의 곳간 전체를 뒤져서 옭아내 온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것이 예사로움을 벗어나므로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언어가 필요하다. 그는 사물들을 통해서 라틴 말을 본 것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 중에서



플루타르크의 저서 967∼968

나는 플루타르크의 저서는 여간해서 놓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보편적이며 충실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하찮은 일을 처리할 때도 그는 우리 일에 참견해 오며, 풍부와 미화의 무궁무진하고 관후한 손을 내밀며 거들어 준다. 나는 그를 애독하는 자들의 글에, 그에게서 따온 부분이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울화가 터진다. 그리고 그를 읽어 보기만 하면 내 글의 날개와 허벅다리를 거기서 따오지 않을 수 없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 중에서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 1019

우리가 명예에 관한 모든 장점을 그들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결함과 악덕까지도 옳은 일이라고 인정할 뿐 아니라, 모방까지 해가며 그런 일하는 권한을 그들에게 주고 옹호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종들은 모두가 그를 본떠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다녔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의 아첨꾼들은 그와 같이 근시안인 체하느라고, 그의 앞에서 잘 부딪치고 발끝에 걸리는 것을 차고 둘러엎곤 했다. 탈장(脫腸)까지도 때로는 으스대며 자랑할 거리가 되었다. 나는 귀먹은 것도 뽐낼 거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플루타르크는 왕이 왕비를 미워하자, 궁신들도 덩달아 사랑하는 아내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더 심한 것은 음탕한 버릇이 모든 버릇과 아울러 유행하고, 불충·모독·잔인성도 그렇고, 사교가 그렇고, 미신·무신앙·태만이 그렇다. 더 나쁜 일로, 도대체 더 나쁜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미트리다테스의 아첨꾼들은 그들의 왕이 명의(名醫)라는 영광을 얻고 싶어하자 자기들 몸을 째고 지지고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본보기로 다른 자들은 몸의 가장 미묘하고 고귀한 부분인 심령을 지지도록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고귀한 신분의 불편함에 대하여> 중에서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 1050

옛말에 나오듯,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⑵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그대 가정의 평화로운 질서를 꾸며 보이느라고 얼마나 힘이 드는가. 아마도 그 살림을 유지하기에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플루타르크의 이야기, 한 로마 인이 예쁜 아이까지 낳아 준 미모의 아내를 내쫓았다고 친구들이 책망하자 "이 구두는 새롭고 예쁘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문에 내 발이 벗겨진 것을 그대들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네"라고 대답하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허영에 대하여> 중에서


치명적으로 천한 것 1247


우리의 학문에서는 가장 높이 올라간 것이 가장 비천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알렉산드로스의 생애에서, 자기를 신격화하는 생각보다 더 치명적으로 천한 것을 알지 못한다.

필로타스는 이 대답으로 그를 재미나게 풍자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를 신들 축에 넣어 준 주피터 신 암몬의 신탁 편지를 가지고 그와 함께 즐기며 말했다. "그대를 위해서 내 마음은 대단히 기쁘오. 그러나 인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척도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며, 그에게 복종해야 할 자들을 가련히 생각하오." "그대는 신들에게 굴함으로써 세상에 군림하는 것이다."(호라티우스) 아테네 인들이 자기들의 도시에 폼페이우스가 왕림하는 것을 환영하는 얌전한 글귀는 내 뜻에 맞는다.

그대는 자기를 인간으로 인정하니,
그만큼 그대는 신이로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아미오 역)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경험에 대하여>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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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2-08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논문 쓰셔도 되겠어요.

qualia 2017-02-08 10:08   좋아요 0 | URL
논문은 hnine 님이 더 쓰고 싶어 하셨던 것 같은데요. hnine 님 글에 간혹 드러나더군요. 지금이라도 전혀 늦지 않았다고 봅니다만~

oren 2017-02-08 10:59   좋아요 1 | URL
(플루타르코스가 말하고, 몽테뉴도 그의 말을 다시 인용했듯이) 예쁜 구두에 발 벗겨진 것은 남이 보지 못한다는 식으로, 제가 몽테뉴의 글을 필사할 때 끙끙댔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이 다시 아려오고 손가락이 욱신거리는 아픔이 남아있는 듯하답니다. 그러니 논문 같은 건 제겐 정말 언감생심이지요...

cyrus 2017-02-0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미셸 푸코의 ‘자기 수양’ 개념에 꽂혀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때처럼 한결같이 실천 의지가 유지된다면 몽테뉴의 <수상록>도 다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

oren 2017-02-08 11:55   좋아요 1 | URL
저 또한 몽테뉴 수상록을 쉰 살이 다 되어서 다시 붙잡고 읽었는데, cyrus 님께서는 아직도 한창이시니 몽테뉴를 만날 기회가 앞으로도 두고두고 자주 생겨나리라 확신합니다^^
* * *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양철나무꾼 2017-02-0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따라 읽었습니다.
귀한 페이퍼 감사합니다, 꾸벅~(__)

oren 2017-02-08 15:01   좋아요 0 | URL
(글뭉치에서 끌려나온 인용문들을 ‘생략‘ 없이 고스란히 다 옮기다 보니) 제가 다시 읽어봐도 글이 ‘너무 지나치게 길다‘ 싶은데, 양철나무꾼 님께서 열심히 따라 읽어주셨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2017-02-0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9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