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

 



영어에서 'Lucullan'이란 단어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뛰어난 군대 사령관이었던 '루쿨루스(LUCULLUS)'라는 인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사치스러웠으면 후세 사람들이 그런 단어까지 만들어냈을까 궁금하다.


루쿨루스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헬라스어와 라틴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는데, 일찍부터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훌륭한 웅변가가 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그의 연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고 한다.


다른 웅변가들은 광장에서는 마치 '상처 입은 참다랑어가 바다에서 날뛰듯이' 열변을 토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지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는 말만을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정치적 목적만을 위해 유창하고 경쾌하게 연설하는 그들과는 달랐다. 그의 연설은 언제 어디서나 듣는 사람을 크게 감동시켜 탄식하게 만들었다. (90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쯤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내 머리를 스치는 불쾌한 기억을 여기에 슬며시 꺼내 놓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오로지 자신의 측근들만의 사익을 위해 온갖 부끄러운 비리를 숱하게 저지르고 나서도 물불을 가리지 앟고 그런 궁지에서 벗어나 보려고 '상처 입은 다랑어처럼' 몸부림을 치는 어느 대통령의 언설과 몸짓이 순간적으로 내 눈앞에 다시 떠올라서 하는 얘기다. 노트북마저 지참하지 못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억지로 끌려간 듯한 애꿎은 기자들 앞에서, 도무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인 '종을 잡을 수 없는' 말들만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이' 계속 내뱉기 일쑤인 그녀의 말을 우리 국민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더 분노하고 탄식하며 들어야 좋단 말인가.


잠시 기분이 잡쳤다. 얼른 다시 고대로 되돌아 가자. 어쨌든 루쿨루스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를 갈고 닦기 위해 교양을 익히는 데 마음을 쏟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온갖 전쟁터를 누비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뒤에도 마침내 늘그막에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철학에 깊이 빠져들어 안식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장군으로서 쌓은 업적 때문에 획득한 부를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쾌락과 사치에 쏟아부은 건 분명 지나친 면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가 루쿨루스를 키몬과 비교하여 설명한 다음 대목은 루쿨루스에게는 분명 아픈 데를 적잖이 후벼파는 대목이 아닐 수 없을 듯하다.


둘은 모두 부자였지만, 그 부를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달랐다. 그들은 모두 야만인들로부터 빼앗은 재물로 부를 얻었는데, 키몬은 그 돈으로 아테나이 아크로폴리스 남쪽 성벽을 쌓았고, 루쿨루스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호화로운 별장을 지었다. 이 둘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키몬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베풀었던 일과, 루쿨루스가 몇몇 손님들을 위해 호화찬란한 식탁을 마련했던 일 또한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한 사람은 적은 돈으로 많은 사람들을 대접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엄청난 돈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사치와 향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만일 키몬이 전쟁을 하지 않고 본국에 돌아와 한가롭게 지냈다면, 그도 난잡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르리라. 그는 술과 친구를 가까이하며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 많은 사람은 전쟁이나 정치에서 성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커다란 즐거움을 맛보면 작은 쾌락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법이다. 만일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장군으로 있다가 그대로 싸움터에서 죽었다면, 아무도 그에게서 흠을 잡아내지 못했으리라.(95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어떤 여성 지도자가 21세기에 와서도 온 백성들의 눈과 귀를 교묘하게 가리면서까지 자신의 엄청난 권력으로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위해' 전방위로 힘을 쓴 얘기는 더 이상 꺼내고 싶지 않다. 어쨌든 루쿨루스는 당대의 여러 탁월한 장군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루쿨루스가 군대를 지휘하는 동안에 호시탐탐 로마를 위협하던 가장 강력한 외부의 적은 아시아의 드넓은 지역을 파죽지세로 복속시켜 나가던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이래로 오랫동안 로마를 곤란하게 만든 몹시 야만스럽고도 완강한 적이었다. 로마는 그에 대항해서 무려 20여 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이른바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렀는데, 여러 차례 미트리다테스 왕에게 패해 수많은 로마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 미트리다테스 6세(B.C. 135년∼63년)의 조상, 루브르 박물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8∼84) 중에는 로마에서 '내전'을 일으켰던 술라가 이 전쟁에 참가하여 '카이로네이아 전투'와 '오르코메노스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둠으로써 간신히 적을 제압했다. 그 무렵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정권을 장악하고 술라를 반역자로 내몰던 상태였다. 술라는 결국 수세에 내몰렸던 미트리다테스를 끝까지 추궁하지 못하고 그가 제의한 '평화협정'을 서둘러 받아들이고 사정이 더 급한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 주역으로 참가했던 술라(B.C. 138 ∼78)


그 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83∼82)을 치르고 난 뒤 한동안 로마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으나 소강 국면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B.C. 75∼65)이 다시 재개되었다. B.C. 77년에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미트리다테스도 거기에 호응하여 아시아에서 다시 로마에 대항한 것이었다. 이때 로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를 히스파니아로 보내고 아시아 속주에 대해서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를 파견하였다.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루쿨루스가 보여준 교묘한 전략과 엄청난 용맹은 결국 연전연승으로 계속 이어졌다. 플루타르코스의 설명만 들어봐도 그가 3차 전쟁 중에 얼마나 빛나는 승리를 거듭했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전쟁 공적은 루쿨루스가 키몬보다 뛰어났다. 그는 로마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넘고, 티헬라스 강을 건너, 티그라노케르타와 카베이라, 시노페, 니시비스 왕궁을 그 왕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그는 북쪽으로는 파시스 강까지, 동쪽으로는 메디아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왕국을 거쳐 홍해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또 여러 왕들 세력을 꺾어 쫓기는 짐승처럼 사막이나 밀림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루쿨루스가 얼마나 철저하게 적을 무찔렀는지는 다음 같은 사실로 알 수 있다. 키몬이 죽은 뒤에 페르시아 군대는 언제 그에게 당했느냐는 듯이 무기를 쥐고 다시 나타나, 아이귑토스에서 헬라스 대군을 쳐부수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 왕은 루쿨루스가 본국으로 돌아가 버린 다음에도 꼼짝하지 못했다. 미트리다테스는 루쿨루스에게 몇 차례 패한 뒤에는 맥이 풀려서 폼페이우스와는 감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보수포루스로 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티그라네스는 망토도 걸치지 않은 채로 무기를 버리고 폼페이우스 앞에 엎드려 자기 왕관을 바쳤다. 하지만 그 왕관은 폼페이우스의 승리를 돋보이게 한 것이 아니라 루쿨루스 승리를 빛나게 할 개선식에 전리품이 되었다.(956∼95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렇듯 모든 전투에서 거듭 빛나는 명성을 쌓았던 루쿨루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부하들과의 친화력 부족'이었다.


루쿨루스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말재주가 있고, 광장에서나 전장에서나 똑같이 신중했다. 그런데 역사가 살루스티우스 기록을 보면, 병사들은 전쟁 시작부터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그의 병사들은 키지쿠스와 아미수스 전투 때에도 한겨울에 야영을 해야 했으며, 그 뒤에도 계속 적의 영토에서 겨울을 지내야만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평이 컸던 것이다. 그런 로마군에 협조하려는 도시들도 있엇지만, 루쿨루스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면서 굳이 병사들을 벌판에서 재웠다. 병사들 불만과 불평은 로마 민중 지도자들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루쿨루스를 시기하고 있던 그들은 루쿨루스가 오로지 권력과 재물 욕심 때문에 전쟁을 질질 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루쿨루스는 킬리키아 · 아시아 · 비티니아 · 파플라고니아 · 갈라티아 · 폰투스 · 아르메니아 · 파시스 강까지 차지하고, 또 얼마 전에는 티그라네스 성까지 빼았았는데, 이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산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삼는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헐뜯었다.(943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끝내 병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고, 이 틈에 민중의 환심을 얻은 폼페이우스가 새로운 장군으로 아시아에 건너오면서 루쿨루스는 군대 지휘권을 그에게 넘기고 로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쿨루스가 이렇게 된 것이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운이 나빠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장군으로서 가장 중요한 조건인 친화력이 부족했다. 만약 그가 지닌 많고 훌륭한 장점들인 용기와 행동력 그리고 판단력과 정의감에 병사들 마음을 살 능력까지 갖추었다면, 로마의 경계는 에우프라테스 강이 아니라 더 멀리 아시아 끝과 히르카니아 해에까지 이르렀으리라. 다른 나라들은 티그라네스에게 몇 차례나 정복당해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고, 파르티아 세력 또한 크라수스 때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쿨루스는 자기 손으로 로마에 세운 공보다는, 남의 손을 거쳐서 로마에 끼친 손해가 더 많았다. 파르티아 국경 근처 아르메니아와 티그라노케르타와 니시비스 등에 세운 전승 기념비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많은 보물과 개선식 때 전리품으로 나온 티그라네스 왕관등을 본 뒤로 크라수스가 아시아 정벌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으며, 그곳 야만인 왕국을 오로지 전리품으로만 생각하고 만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수스는 곧 파르티아군 화살을 맛보았으며, 루쿨루스가 이루었던 승리는 적군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의 용기와 전략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94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로마로 돌아온 루쿨루스는 여러 성가신 일들로 큰 시련을 맞았으나 뒤늦게나마 간신히 개선식만은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개선식은 다른 장군들처럼 성대하지도 않았고, 행렬이 길거나 전리품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야만인 왕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들과 전쟁기계들로 커다란 플라미니우스 원형극장을 꾸민 것은 사람들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개선식 행렬에 나온 것은 중무장한 몇몇 기병들, 큰 낫이 달린 대형 전차 10대, 루쿨루스의 보좌관과 장군들 60명, 구리로 뱃머리를 감싼 군함 110척, 높이가 6척인 미트리다테스 황금 동상, 보석들이 박힌 방패 하나, 은그룻을 담은 들것 20개, 금술잔과 갑옷, 화폐를 담은 들것 32개 등이었다. 이 밖에도 노새 8마리가 황금으로 만든 긴 의자를 끌었고, 56마리의 노새는 은괴를 끌었으며, 107마리의 노새는 270만 개의 은화를 지고 있었다. 또 폼페이우스가 해적을 쳐부술 때 제공해 준 군자금과 국고에 낸 금액, 그리고 병사들에게 950드라크메씩 나누어 줬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판도 따라 나왔다.(9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개선식을 치르고 나서 얼마 뒤 루쿨루스는 제멋대로이고 행실이 나쁜 클로디아와 이혼하고 카토의 누이 세르빌리아와 결혼했다.(루쿨루스 집안에서 맞아들인 여자들은 하나같이 방종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 또한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다. 세르빌리아도 모든 면에서 클로디아에게 뒤지지 않는 끔찍하고 막돼먹은 여자였던 것이다. 루쿨루스는 카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얼마 동안은 참고 지냈지만, 마침내는 그녀도 내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정치에서도 은퇴했다. 그가 정치에서 은퇴한 것이 귀족들이 부패해서였는지, 아니면 이제까지 영예에 만족해 남은 삶을 평화롭게 보낼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루쿨루스의 이런 변화를 두고서, 그가 마리우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내린 올바른 결정이라며 칭찬했다. 얼마 전에 마리우스는 킴브리족을 정복해 찬란한 공을 세운 뒤에도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는 공명심과 권세욕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사람들과 섞여 정치를 했는데, 그로 인해 무서운 죄를 저질렀고, 엄청난 고생을 했던 것이다.


사람들 말처럼 키케로가 카틸리나 사건 뒤에 정치에서 물러나 조용히 남은 생애를 보냈더라면, 또 스키피오가 누만티아와 카르타고군을 정복한 뒤에 은퇴 생활을 했더라면 훨씬 더 복 받은 인생이 되었으리라. 정치도 다른 모든 일들처럼, 해야 할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들도 운동선수처럼, 체력과 젊음이 다하면 새로운 상대에게 꺾이고 마는 것이다.(948∼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로마 공화정 말기 <카틸리나 탄핵>을 주도했던 키케로(B.C. 106∼43)


노욕에 찌들어 부질없는 권력만 탐하는 늙은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신세를 도리어 망가뜨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쾌락과 사치에 젖어 있는 루쿨루스를 비웃었다. 그런 생활을 즐기는 것은, 정치를 하거나 전쟁을 치르는 일 못지않게 그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 루쿨루스의 정원_상상도


루쿨루스 일생은 마치 옛 희극과도 같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정치와 전쟁에서 웅장하고 큰 활약들을 보여주고, 나중에는 먹고 마시고 잔치를 열며 흥청거리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가장 뒤에 나오는 장면에는 호화로운 저택, 사치스러운 목욕탕, 그림이나 조각들이 나온다. 그는 싸움터에서 벌어들인 어마어마한 재산을 저택에 꾸밀 골동품들을 사 모으는 데 써버렸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루쿨루스 정원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로마 황제의 정원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네아폴리스 해안에 큰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은 산에 굴을 파서 마치 공중에 걸린 것처럼 보이게 했으며, 집 주위에는 바다에서 둥근 바위들을 가져다 놓았고, 연못에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물고기를 길렀다. 그리고 바다 위에도 집 여러 채를 지었다. 스토아 철학자 투베로는 이 집들을 구경하고 놀란 나머지, 루쿨루스는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 왕이라고 말했다.


루쿨루스는 또 투스쿨룸 근처에도 별장 여러 채를 지녔는데, 이 집들은 모두 경치 좋은 전망대와 많은 사람이 잘 수 있는 시원하고 넓은 방, 그리고 아름다운 산책길을 갖추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이곳에 놀러왔다가 루쿨루스에게, 여름에는 시원하겠지만 겨울에는 살기 힘들겠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니, 나를 황새나 학보다도 둔한 사람으로 여기시오? 철따라 옮겨 사는 법도 모르는 줄 아느냔 말이오?"

(9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저토록 화려한 저택에 살았으니 전속 요리사가 만들어 내는 '진수성찬'이 어땠을지는 가히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에 딸린 일화를 조금 인용해 보자.


루쿨루스가 날마다 먹는 식사도 잔치에 못지않게 푸짐했다. 식사때면 언제나 염색된 천을 씌운 긴 의자와 보석이 박힌 술잔들, 그리고 합창과 연극이 따랐다. 음식들 또한 온갖 진기한 요리들과 향기로운 음료들을 모두 갖춘 산해진미였다. 그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음식을 먹었다.


폼페이우스가 병이 들었을 때, 의사가 그에게 지빠귀를 잡아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여름철이라 이 새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하인이 나서서, 루쿨루스 저택에서 그 새를 기르고 있으니 거기서 얻어오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럴 허락하지 않고 대신 쉽게 구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알아보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그토록 사치스럽게 사는 루쿨루스 도움이 없으면, 이 폼페이우스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냐?"

(9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동방에 사는 어느 여자 대톨령은 '혼밥'을 그토록 고집했다고 하나 루쿨루스의 '혼밥 이야기'도 제법 유명해서 로마에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그런 생활을 즐겼는지 능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는 언젠가 로마에 찾아온 몇몇 헬라스 사람들을 여러 날 동안 푸짐하게 대접한 적이 있었다. 손님들은 헬라스 사람들답게 자기들 때문에 많은 돈을 쓰는 것이 미안해서 다음부터는 초대를 사양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루쿨루스가 그들에게 웃으며 말헀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대접이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또 어느 날에는 그가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음식이 꼭 한 사람 먹을 양만 나왔다. 그러자 그는 요리하는 하인을 불러 몹시 화를 냈다. 하인은 손님이 없어서 큰 잔칫상을 차릴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이에 루쿨루스가 말했다.


"아니, 너는 오늘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손님으로 초대한 사실을 몰랐단 말이냐?"


이 말은 온 로마에 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950∼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이왕 '혼밥'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에 얽힌 일화를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이 일화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인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도 등장한다.


 -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마무리지은 폼페이우스(B.C. 106 ∼ 48)


어느 날 루쿨루스는 홀로 공회당을 걷다가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를 만났다. 키케로와는 본디 가까운 사이였고, 폼페이우스와는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지휘권 문제로 다투기는 했지만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루쿨루스에게 인사를 건넨 키케로가 자신들을 식사에 초대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루쿨루스는 더없는 영광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키케로가 덧붙였다.


"우리는 오늘 당신과 식사를 하고 싶은데, 당신이 혼자 있을 때 먹는 그대로만 대접해 주시오."


루쿨루스는 거북스런 표정을 짓더니 그러면 하루만 미루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꼭 오늘이라야 하고, 하인에게 미리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키케로와 폼페이우스는 그가 하인을 시켜, 그가 홀로 식사할 때와는 달리 푸짐한 음식을 준비할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다만 루쿨루스의 요청에 못 이겨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 하인 하나를 불러서, 루쿨루스가 오늘은 아폴로에서 저녁을 먹을 테니 준비해 두라는 지시를 내리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손님들은 루쿨루스 꾀에 넘어가고 말았다. 루쿨루스는 집에 있는 여러 방마다 이름을 붙이고, 그곳을 사용할 떄의 음식 비용과 여흥 종류들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방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하면, 곧 얼마의 비용으로 어떤 형식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지 정해졌던 것이다.


아폴로라는 방에서 식사할 때의 비용은 5만 드라크메였다. 때무네 그날도 그많나 돈을 들인 식사가 나왔다. 폼페이우스와 키케로는 식사 규모의 엄청남에 놀랐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루쿨루스가 돈을 포로나 야만인처럼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해 함부로 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95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온갖 전쟁을 치른 루쿨루스가 군대에서 물러나고 정계를 은퇴했다고 해서 오로지 호화로운 저택에 머물며 산해진미에 둘러싸여 먹고 마시는 데 시간을 모두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몽테뉴와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가까이 했다. 그는 도서관을 짓고 시민들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도서관을 갖추어 놓은 것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그는 좋은 책들을 많이 모았다. 그런데 이처럼 책을 모아놓은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그 책을 널리 이용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의 도서관은 늘 열려 있었고, 도서관에 딸려 있는 산책길과 열람실은 로마 시민들뿐 아니라 모든 헬라스 사람들까지 드나들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마치 무사이 신전처럼 즐겁게 드나들며, 자유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루쿨루스도 자주 이곳에 나와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정치를 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그의 저택은 로마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집이었으며, 때로는 시민들의 공회당이 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도서관을 갖춘 것은 철학을 사랑하고 여러 학파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 학설과 필론의 지도로 발달한 신 아카데미이아 학파가 아닌, 그 무렵 석학이며 웅변가였던 아스킬론의 안티오코스를 대표로 한 구아카데메이아 학파를 지지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코스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가 키케로를 비롯한 필론파 철학자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951∼95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나도 한번 저렇게 살아봤으면...' 싶은 소망을 품게 만들 정도로 '부럽게' 살았던 루쿨루스였지만, 그런 삶이 도리어 '수많은 민초들의 온갖 희생' 위에 터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승에서라도 그를 다시 불러내어 심판대에 올려보면 좋겠다' 싶어서 쓴 작품이 바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쓴 <루쿨루스 심문>이었고, 작곡가 데사우는 오페라 작품으로도 만들어 놓았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70769&cid=51211&categoryId=51211


한편, 로마의 이름난 영웅들과 여러 차례 건곤일척을 다퉜던 미트리다테스 왕에 얽힌 흥미로운 얘기도 결코 적지 않다. 이 유명한 야만족 왕은 (마치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비록 자신의 '열전'을 따로 갖지 못했다. 그렇지만 플루타르코스가 쓴 '50인의 열전' 가운데 <카이우스 마리우스 편>, <술라 편>, <루쿨루스 편>, < 폼페이우스 편>, <세르토리우스 편> 등에서 거듭 등장할 정도로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고대의 이야기'에 특별히 심취했던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Jean Racine, 1639∼1699)은 이 인물에 매료되어 결국 희곡 『미트리다트』를 썼고, 그로부터 얼마 후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불과 14세의 나이에 오페라 <미트리다테>를 만들어 그를 부활시켰다.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67&contents_id=106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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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 판본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추억
    from 마음―몸―시공간 Mind―Body―Spacetime 2017-01-08 20:32 
    oren 님의 플루타코스 영웅전 얘기,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먼댓글로 연결된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도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었네요. 제가 어렸을 때, 교과서를 제외하고 거의 최초로 읽은 책이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거든요(돈키호테, 아라비안 나이트와 더불어). 그런데 그때 읽었던 판본 제목이 ‘플루타크 영웅전’이었는지 ‘플루타르크 영웅전’이었는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너무 어릴 때라 내용도 거의 기억
 
 
qualia 2017-01-08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 흥미로운 「루쿨루스와 미트리다테스에 얽힌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유익한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숨어 있던 인연이 드러나고, 그 인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위에 제가 남긴 먼댓글에 중에 “플루타코스”는 “플루타르코스”의 오타인데, 제 블로그에선 올바로 수정했습니다(위 먼댓글 맛보기에 나타난 부분은 수정을 해도 반영이 안 되는군요. 처음 잘못 써올린 것 그대로 계속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 번역판본들은 그리스어 현지 발음과 표기가 아닌 영어식 발음과 표기를 채택해서 “플루타크”나 “플루타르크”로 음역했더군요. 해서 플루타르코스/플루타크/플루타르크 모두 맞는 표기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oren 님의 또 다른 글 「플루타르코스의 작품들에 대하여...」는 아주 요긴하고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더군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oren 님 글 덕분에 저는 오늘 여러모로 얻은 게 많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oren 2017-01-09 00:22   좋아요 1 | URL
저 또한 적잖은(?) 나이에 뒤늦게 (어릴 때나 ‘아동용‘으로 접하게 되기 쉬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흠뻑 빠져 지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답니다. 이 책이 워낙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언감생심‘ 완독할 엄두를 내기는 좀처럼 어려웠으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저는 까마득한 옛날에(1980년 겨울에) 딱 한 번 읽었던 ‘몽테뉴 수상록‘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게 되면서, 몽테뉴가 평생 동안 가장 좋아했던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금 이 책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고교시절 ‘세계사 수업 시간‘에 역사 선생님께서 자주 들려주셨던 여러 고대의 인물들(가령 한니발, 스키피오, 카이사르, 브루투스 등등)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끔씩 떠올라, 언젠가는 이 책을 꼭 한 번 완독해 보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더군요.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여러 차례 귓등으로만 스쳐 들었던 ‘미트리다테스‘라는 인물을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너무나 자주 마주쳤기 때문인데, 알고 보니 그 인물에 얽힌 이야기가 이미 숱하게 다른 작가나 예술가들에게도 놀라운 예술적 자극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더욱 놀랐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