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그런데 봄은 언제나 더디게 온다. 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럴 게 틀림없다. 봄이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봄이 더디게 오는 게 느껴질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봄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봄은 온다. 틀림없다. 그래도 봄은 온다. '하루 견디면 하루 견딘 만큼 우리는 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며칠이 멀다 하고 '봄 소식'을 알리는 곳도 있었다. 다름 아닌 라디오였다. 요즘 라디오는 문명이 발달해서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 인터넷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도, 출근길 차 안에서도, 사무실에서도 틈만 나면 라디오를 듣는다. 그러니 봄에 대한 소식뿐 아니라 '봄 노래'도 꽤나 자주 듣게 된다. 어디 봄 노래 뿐이겠냐마는 그래도 계절이 바뀔 땐 노래도 계절을 탄다.

봄 노래를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 봄을 상징하는 종달새 한 마리만 떠올리더라도 벌써 여러 곡이다. 하이든이나 베토벤뿐만 아니라 평생 '겨울'만 노래했을 것 같은 슈베르트의 작품 가운데서도 봄을 노래한 가곡이 여럿이다.

뭔가 좀 알아낼까 싶어 클래식을 소개한 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을 펼쳐 봤더니 약간은 엉뚱한 느낌도 든다. <1 봄, 세상의 모든 사랑을 위하여>에 선곡된 곡들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봄 노래는 별로 눈에 띄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거기에 나열된 '봄을 노래하는 곡들'은 다음과 같다.

쇼팽 :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제2번_백건우
차이코프스키 : 플로렌스의 추억_브로딘 4중주단
비발디 : 사계_파비오 비온디
스메타나 : 교향시 나의 조국_라파엘 쿠벨릭
브람스 : 교향곡 제1번, 제3번_귀도 칸텔리
베토벤 : 교향곡 제5번, 제7번_카를로스 클라이버
슈만 : 가곡집 시인의 사랑, 미르테_이안 보스트리지
테오도라키스 : 발레 모음곡 그리스인 조르바_미키스 테오도라키스
토스티 : 가곡집 이상 외_레나토 브루손

곡마다 '봄'을 느끼지 못할 특별한 이유는 없겠지만 저렇게 골라놓은 곡들이 모두 '봄 노래'가 맞느냐고 누가 질문을 한다면 대답하기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혹은 저 곡들에 일일이 번호를 메긴 다음에, <봄을 노래한 곡을 모두 고르시오>라는 문제를 낸다면 과연 몇이나 1,2,3,4,5,6,7,8,9까지 다 헤아려 낼까 궁금하기도 하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을 땐 매번 '여름 해변가'를 상상하곤 했는데, 사람마다 음악을 듣고 느끼는 감정이란게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며칠 전에도 그 음악을 들었는데, 그때도 '아, 봄이로구나'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저 목록을 두고 왜 거기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가 빠져 있냐고 시덥잖은 항의를 할 생각은 없다. 음악이야말로 취향의 문제이니까. 섭섭한 생각조차도 아예 없다. 사실《봄의 소리 왈츠》는 너무 익숙하다 못해 조금 진부한 느낌까지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그 음악을 들으면 여전히 '봄'이 샘솟듯 힘찬 발걸음으로 갑자기 우리곁에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확연히 든다.



요한 슈트라우스까지 등장시켰으니 이쯤에서 슬슬 '본론'을 꺼낼 때가 되었다. 요즘 내가 가장 '봄'을 타며 듣는 노래는 단연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다. 예전부터 그 곡을 들으며 봄을 느끼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단 한 번의 여행 경험'이 그 음악과 아주 단단히 결합하고 난 이후부터는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매번 특별한 감동으로 '봄'이 다가온다. 이제부터 그 얘길 좀 늘어놓을까 싶다.

우리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가장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때는 봄이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몇 달 앞선 신년초가 더 잦을지도 모르겠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빈 필 신년음악회'의 단골 레퍼토리가 바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라데츠키 행진곡>이기 때문이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아버지(요한 슈트라우스)의 노래가 언제나 앞뒤로 연이어 연주되는 이유도 자세히 알고 보면 '오스트리아의 국민 감정'에 절묘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작곡한 그 왈츠곡은 포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었고, 아버지가 작곡한 그 행진곡은 '군대의 사기 앙양'을 위해 라데츠키 장군의 이름을 붙여 지은 곡이었으니 말이다.

재작년 봄에 난생 처음으로 동유럽 여행을 떠나기 한 달쯤 전, 여행 준비사항 가운데 가장 어려운 미션 한 가지 때문에 잠시나마 가슴을 졸였던 일이 있었다. 음악 도시로 유명한 빈에서 2박 3일 동안 머무를 예정이니, 그때 '음악 연주회'를 듣고 싶은 여행객들은 각자 알아서 '음악 티켓'을 미리 예약해 놓으라는 당부를 여행사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물론 '연주장'까지 가는 길은 동반할 가이드가 당연히 안내해 줄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친절하게 덧붙였다. 이게 웬 횡재냐 싶어서 곧바로 '핵심'에 다가갔다. 빈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빈 무지크페라인>과 빈 국립오페라극장인 <빈 슈타츠오퍼>에 접근한 것이다. 이 또한 인터넷이 발달한 덕분에 내 방 안에서 모두 해결되었다.

그렇게 가슴 벅찬 기대를 품고 빈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빈 무지크페라인>의 황금홀을 찾았다. 감격스러웠다. 여기야말로 TV로 늘 지켜만 봤던 '세계 음악의 중심'이 아닌가 싶었다. 지휘자 프란츠 뵐저-뫼스트는 "음악가들에게 무지크페라인은 카톨릭에서 바티칸 성당과도 같다'라는 말로 그곳을 간결하게 요약했다지만, 비단 음악가뿐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황금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비숫하지 않을까 싶다.

 - 빈 무지크페라인을 정면에서 올려다본 모습이다.

    정초마다 전세계에서 5,000만 명 이상이 지켜본다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무대다.
    빈의 `음악애호가협회`는 1812년에 탄생했고, 무지크페라인은 1870년에 건축됐다고.

 

 

 - 이 공연장이 유럽 최고의 명문 음악당으로 명성을 공고하게 다진 바탕이 된 대공연장 `황금홀`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여기서 처음으로 지휘한 뒤에야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로소 깨달았다"고 했다고.

 

 

 - 로린 마젤, 카라얀, 주빈 메타, 마리스 얀손스 같은 명지휘자들이 지휘했던 빈 필하모닉의 연주를 이곳에서 직접

   듣지 못해 몹시 아쉬웠지만, 여기서 모짜르트의 음악을 직접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이었고 가슴이 벅찼다.

   여기서 들었던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는 아마도 평생 동안 잊기 힘들 듯하다.

 


이쯤에서 서양 음악을 듣기 위해 빈을 자주 찾는다는 서경식 박사의 얘기를 잠시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싶다. 그가 한겨울에 빈 외곽에 위치한 장크트 맑스 묘지에서 찾은 '모차르트의 주검을 던쳐 넣었던 구덩이'에서 밝힌 소회다.


이토록 쓰리고, 그래서 투명한 곡은 없다


나는 이럴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망자의 소리가 들려오지나 않을까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그 대신 멀리서 아련하게 부르는 것 같은 귀에 익은 어떤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였다. 다른 어떤 곡보다 그 장소에 어울리는 곳이었다.


이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1791년 10월, 즉 죽기 2개월 전에 완성한 것으로, 벗이자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안톤 슈타들러를 위해 쓴 것이다. 작곡가는 이미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요시다 히데까즈는 이렇게 썼다. "이토록 쓰리고, 그래서 투명한 곡은 없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음악을 몇 번이나 듣는 건 내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듣는 이한테서 자아내고야 만다. 특히 이것이 밝은 장조의 빛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인만큼 단조 때보다도 통절함은 더 전면적이다."


더 덧붙여야 할 말을 나는 모르겠다.(223쪽)


 - 서경식, 『나의 서양 음악 순례』, <모짜르트가 내던져진 구덩이>

 

 

- 빈 중심가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가운데 하나인 빈 국립 오페라 극장.
   1869년에 완성되어 모짜르트의 <돈 조반니>를 개관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다.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카라얀, 칼 뵘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총감독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 아내와 둘이서 가슴 설레며 찾은 빈 국립 오페라극장. 공연을 앞두고 저녁도 극장내 1층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줄지어 선 창구 앞에서 기다렸다가 미리 예약한 `예약번호`를 내밀자 2초도 안 걸려 미리 인쇄된 표를 바꿔준다.
   여행복 차림에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갔지만 `짐`들은 보관소에 맡겨지는 바람에 핸드폰으로만 몇장 찍었다.

 

 

 - 이곳에서 모짜르트의 작품 <피가로의 결혼>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게도 우리가 비엔나에 머물

   동안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은 롯시니의 `체네렌톨라` 뿐이었다.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예약을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그래도 예약하길 잘했다 싶었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가수들의 연주도 정말 놀랍도록 완벽했지만, 관객들의
   감상 태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하나같이 쥐죽은 듯 고요했고 미동도 없었다. 웃고 박수칠 때 빼고는.

 


가장 정선된 귀를 가진 자들에게 한마디

 

 ㅡ 가장 정선된 귀를 가진 자들에게 한마디 더 하겠다 : 내가 음악에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 나는 음악이 10월의 오후처럼 청명하고 깊이 있기를 바란다. 음악이 개성 있고 자유분방하며 부드럽기를, 비열과 기품을 모두 갖춘 달콤한 어린 여자이기를 바란다 ······ 나는 롯시니 없이 지낼 수는 없다. 음악에서의 나의 남쪽, 즉 내 베네치아의 거장인 피에트로 가스티의 음악 없이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내가 알프스 너머라고 말할 때는, 나는 진정 베네치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표현할 다른 단어를 찾아보면, 나는 언제나 베네치아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눈물과 음악을 구별할 수 없다. 나는 행복과 남쪽을 공포의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중에서

 


빈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쉔부른 궁전 관람'이었다. 웅장한 외관을 거의 두 시간에 걸쳐 실컷 구경하고 나서 '궁전 내부'로 막 들어갈 즈음에 하필 그날이 '임시 휴관'이라는 게 알려졌다. 아뿔싸 싶었지만 '위기는 늘 새로운 기회'인 법, 나는 몇몇 일행들을 붙잡고 빈 외곽에 위치한 '공동묘지'로 가자고 꼬드겼다. 비록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겠지만, 거기 가면 숱한 위대한 음악가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몇몇은 쇼핑할 게 남았다며 백화점으로 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 '최후의 6인'이 무덤을 찾아 길을 나섰다.



 - ‘음악가들’ 묘역의 중심에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가 있다. 아쉽게도 모차르트의 무덤은 실제 무덤이 아닌 기념비다.
    모차르트 기념비 뒤 양쪽으로 그를 흠모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슈베르트는 아예 “죽으면 모차르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왈츠의 제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브람스의 묘가 나란히 서 있다.

 


  - 이 사진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무덤 뒤쪽엔 <라데츠키 행진곡>을 쓴 그의 부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역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요제프 등 음악가 형제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경기병 서곡>의 프란츠 폰 주페, 지휘자인 요한 헤르베크의 묘도 발견할 수 있다고.

 


이런 여정을 거쳐 빈을 떠날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듣지도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저 잘츠부르크에 들렀을 때 그 도시를 휘감아 흐르던 '도나우 강'을 살짝 엿보았을 뿐이었다.


마침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 일정도 고작 '1박 2일'만 남기고 있을 때,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모든 여행일정의 마지막이 크루즈선을 타고 도나우강을 유람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이다.



 - `도나우 강 크루즈`를 위해 수백 명이 너끈히 탈 수 있는 커다란 유람선에 딸랑 우리 일행만 승선했다.
    가이드가 우리를 위해 특별히 미리 준비한 `토카이 와인`을 테이블 위로 내놓고 있다.

 


 - 저녁 8시에 승선해서 10여 분쯤 달리자 어느새 헝가리 국회의사당 건물이 나타난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기엔 아직 주위가 너무 밝다.

 


 

 - 토카이 와인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왕의 와인, 와인의 왕`이라고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6세기 중반에 토카이 지방에서 세계 최초의 귀부 와인(botrytised wine, ~ )이 개발되어 일약 유명해졌다.

 


 

 - `도나우 강의 진주`로 불리는 부다페스트에 저녁 노을이 차츰 물들기 시작했다.
    유람선에서는 아까부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선율이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토카이 와인과 도나우강의 물결 위로 시원하게 부딪혀오는 저녁 강바람에 취해 우리는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도나우강은 알프스에서 흘러 내려 오스트리아의 평원을 건너 북쪽 빈을 지나 멀리 동쪽 흑해로 흘러가는
    매우 긴 강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왈츠곡 가운데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곡으로, 유유히 흐르는 
    이 강의 양쪽 언덕의 아름다운 물 위에서 즐겁게 노니는 온갖 새들과 사람들과 강바람까지 연상케 한다.

 


 - 세체니 다리 아래를 지날 때쯤 부다페스트의 밤을 화려하게 수놓을 `야간 조명`이 막 켜지기 시작했다.

 


 

 - 도나우 강변에서도 유난히 아름다운 건물이 바로 이 국회의사당 건물이다.
    건설하는 데 20년(1884∼1904)이나 걸렸으며 `내부의 모든 것들이 현란함으로 매혹된다`는데,
    우리는 그저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야경만 봐도 충분히 매혹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 정면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빈의 의사당을 능가하기 위해` 더욱 현란하고 호화롭게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 크루즈가 끝날 무렵 문득 뒤돌아 보니 저 멀리 도나우 강 위로 펼쳐진 온갖 건물들이 마치 `동화속`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했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선율도 잠시나마 나의 뇌리에서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 우리 일행은 도나우 강 크루즈가 끝난 뒤에도 도나우 강변을 오르내리는 트램을 떠나기 싫어서 계속 머물렀다.
    한참 후에 트램에서 내린 우리는 천천히 산책하며 도나우 강가로 다가가 아름다운 야경을 좀 더 즐겼다.
    이 왕궁이 최초로 지어진 것은 13세기 중반이지만 몽골 군의 습격, 오스만투르크 군의 공격 등으로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마침내 큰 궁전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헝가리 국립 갤러리, 부다페스트 역사 박물관, 세체니 도서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고.

 


 

 - 세체니 다리의 야경. 다리 너머로 저 멀리 마차시 교회와 어부의 요새도 보인다.
    길이 375m, 너비 16m인 이 다리는 중앙에 있는 48m의 돌 아치와 사슬에 의해 지탱된다고.

 


 

 - 마침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다. 오랫동안 흐렸던 날씨가 그치고 드디어 햇살이 환하게 다시 비친다.
    부다페스트를 떠나기가 너무 아쉬워 다시 한번 바쁜 걸음을 서둘러 도나우 강과 세체니 다리를 찾았다.

 


 

 - 세체니 다리 위에서 바라본 왕궁과 그 앞을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 강.

   '15세기, 이탈리아에서 문인들과 예술가를 불러들여 르네상스 문화를 개화시킨 주무대 역할'을 했던,

    저 이름난 왕궁보다 내게 더욱 인상깊은 건 아무래도 '갈색빛 도나우강'이었다.

 



 - 실로 오랫만에 다시 본 푸른 하늘과 흰 뭉개구름. 
    강물만은 여전히 `오랫동안 내린 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비 온 뒤 불어난 한강`을 꼭 닮아 있었다.

 


 

 - 이 낯선 여행객은 또 어디에서 와서 이곳 세체니 다리 위에서 저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을까.
    여행이 끝나는 이 순간마저 어느새 또다른 여행을 꿈꾸는 건 왜일까. 그건 바로 여행만큼 우리의 삶에 
    본질적이면서도 항구적인 즐거움을 안겨 주는 것도 그만큼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도착하기만 바란다면, 역마차를 집어타고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걸어가야 한다." 
   장 자크 루소가 그의 저작《에밀(Emile)》에서 한 말이다. 나도 `도착하기` 만을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어디에 도착한다는 말인가?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늘 얘기했던 것처럼, `가는 것` 그 자체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여행』수채화판 실크로드 여행수첩 中에서



 

그렇게 나의 동유럽 여행은 끝났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과 함께 한 순간이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도 미처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음악과 여행'과의 결합이 상상 이상으로 강렬한 힘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발휘한다는 사실을.


2년 전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흘러나올 때마다 이 글에서 다시금 꺼내고 반복해서 보여준 여러 풍경들과 꿈같은 순간들을 매번 되살려 내곤 한다. 그때 들었던 음악과 함께. 어쩌면 여행을 통해 눈으로 봤던 여러 풍경들이 귀로 들었던 익숙한 음악과 다시 만나면서 순식간에 눈앞에서 재생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가끔씩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라는 음악이 내게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이 음악이 어느새 내게는 '봄'을 상징하는 음악으로 깊숙히 자리잡고 만 셈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가 위해서라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연주 영상을 덧붙이지 않을 순 없다. 아무래도 이 글에 어울리는 연주 영상이 낫겠다 싶어 여럿 가운데 좀 특별한 걸 골랐다. 연주 단체와 때와 장소는 빈 필하모닉의 빈 무지크페라인 신년음악회다.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인데, 이 영상은 그가 '빈 필 신년음악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영상이다. 카라얀도 오스트리아 태생이고, 도나우강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지난번 동유럽 여행때 잘츠부르크 시내에서 나는 그의 생가를 그냥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바쁘게 다른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 스치듯 지나치며 얼떨결에 '한 컷' 담은 사진을 오늘에야 비로소 되살려 낼 줄은 차마 몰랐다.





 

도나우 강의 물빛은 푸른색이 아니다. 하지만 유럽을 관통하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라본 낭만적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눈에 비친 강은 어느새 어느 시대에나 사랑 받는 아름다운 선율로 변했다. 강을 노래한 유명한 왈츠는 더 이상 강이 아닌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중략)


이 곡은 스튜디오에서 연주해도 그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사무친 감정이 곡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느끼고 싶다면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연주회를 들어 보아야 한다. 빌리 보스코프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로린 마젤, 카를로스 클라버, 리카르도 무티 등 쟁쟁한 지휘자들의 음반 중에서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의 2003년 연주회의 실황 음반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푸른 도나우 강》과 여러 행진곡, 폴카와 왈츠에서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디테일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클래식 1001>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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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7-03-12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살 고운 봄날 아침에 본 페이퍼 사진과 음악동영상~ 모두 감동입니다!♥♥

oren 2017-03-14 00:38   좋아요 0 | URL
아직도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지만, 그래도 어느새 봄이 가득 밀려온 기분이네요.
순오기 님께서도 화창한 봄날처럼 나날이 새로운 기분 만끽하시길 바랄께요^^

겨울호랑이 2017-03-1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멋진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도 Oren님과 같은 일정으로 여행하고 싶네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우리에게도 ‘한강‘이라는 멋진 소재가 있는데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드네요..^^: Oren님 상쾌한 일요일 봄볕 즐기시는 하루 되세요

oren 2017-03-14 00:48   좋아요 1 | URL
한강도 잘 가꾸기만 한다면 여느 강 못지 않게 아름다울 테지요. 몹시도 무더운 한여름 저녁에 상하이 와이탄의 야경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화려한 유람선보다 훨씬 더 부러운 건 ‘그저 강가에 나와 한가로운 저녁 한 때를 즐기는 그들의 평온한 일상‘이었답니다. 겨울호랑이 님 말씀처럼, 서울의 한강이 왜 그런 장소로 활용되지 못하는지, 그게 그때처럼 안타까운 적도 없었답니다. http://blog.aladin.co.kr/oren/5794193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1860년에 출간된 '르네상스에 관한 결정적인 책'이다. 그런데 저자가 바젤대학에서 역사학 교수로 오랫동안 몸담고 있을 때(1858년∼1893년) 만난 인물 가운데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한 인물 한 사람을 그냥 모른 체 지나치긴 어렵다. 그사람은 독일 철학자 니체였다.

바젤 대학에 '고전문헌학 교수'로 부임하기 전부터 '고전과 고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니체로서는 부르크하르트를 만나게 된 것도 크나큰 행운이었던 듯하다. 니체가 바젤 대학에 가기 전까지 주로 연구했던 인물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그리스 철학자 열전』의 저자), 호메로스, 데모크리토스, 아리스토텔레스, 헤시오도스 등이었고, 철학자들 가운데는 쇼펜하우어와 칸트가 있었다. 그리스 문헌학에 관계되는 교수자격논문과 칸트와 관련된 철학박사논문 등을 계획하던 니체는, 박사학위나 교수자격논문 없이도 바젤의 고전문헌학 교수직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그리로 옮긴다. 향후 '독일 문헌학계를 이끌어갈 선두적 인물이 될 것'이라는 리츨의 적극적인 천거 덕분이었다.

니체의 연보를 보면, 1869년에 바젤 대학으로 부임한 첫 해부터 부르크하르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니체는 '부르크하르트를 존경하여 그와 교분을 맺는다'고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니체의 나이는 스물 다섯이었고 부르크하르트는 그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많았다. 그 두 사람은 동료 교수라기보다는 사제지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형편이었다. 니체 또한 바젤 대학에서 10년간 교수로 일했으나 '철학'에 전념하기 위해서 결국 교수직을 그만두게 된다. 부임하던 첫해부터 부르크하르트와 교분을 쌓았던 니체가 그의 예술사 강의를 외면했을 리는 없었다. 니체는 부르크하르트의 강의를 직접 들었고,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라며 존숭해 마지 않았다.

니체의 저작을 통해서 니체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관계를 짐작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니체는 말년의 저작인『안티 크리스트』에서 <르네상스가 무엇인지 드디어 이해하였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이 대목이야말로 자신뿐만 아니라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목소리를 직접 대변하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그렇다고 니체가 그 대목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책세상에서 나온 니체전집에서는 극히 한정된 '주석'이 딸려 있는데, 거기에서 겨우 부르크하르트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폐지되고 말았으니!˝라는 대목 뒤에 다음과 같은 간략한 주석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J. 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Leipzig, 1869), 91∼95)

니체가 부르크하르트의 이름을 일부러 꽁꽁 숨겼던 건 아니다. 그는『안티 크리스트』에 뒤이어 출판한『우상의 황혼』에서는 아예 드러내 놓고 야콥 부르크하르트를 칭찬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예외 중의 예외를 제외하고 보면, 교육의 첫 번째 선결 조건인 교육자들이 결여되어 있다 : 그래서 독일 문화가 하강하는 것이다. ㅡ 정말 진귀한 그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 바젤 대학이 인문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중에서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니체와의 인연을 다소 장황하게 소개한 건 '고대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그 두 사람이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그토록 르네상스의 의미를 강조한 것도,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라는 거작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것도 '고대의 부활을 통한 인간 본연의 가치 재발견'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대 세계가 깡그리 부정되었다'고 외친 니체의 울부짖음은 다시 들어봐도 가슴 저릿한 울림이 있다. ☞ 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많이 늦었지만, 이제 다시 이 글을 쓰게 된 '맨처음 동기'로 되돌아 오자. 우리가 자주 듣는 <카르미나 부라나>는 어쨌든 우리가 대충(?) 알기로는 칼 오르프가 1936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작품이라는 정도다. 그런데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에 담긴 <카르미나 부라나>에 관한 내용은 칼 오르프의 작품보다 무려 76년이나 앞선 것이다. 칼 오르프가 <카르미나 부라나>를 작곡하기 전에도 일부 사람들은 그 음악을 제법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사정이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카르미나 부라나>에 관한 상세한 언급을 1860년에 발간된 책에서 발견하는 건 아무래도 좀 놀랍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이 놀라운 음악을 야콥 부르크하르트도 생생하게 미리 상상해서 우리처럼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쨌든 '고대의 부활'은 '어떤 경로'를 통하든 놀랍도록 매혹적이다. 그것이 책이든 음악이든 말이다. 앞으로 <카르미나 부라나>를 들을 때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다음 설명을 늘 함께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거기에서 노래하는 사람은 이탈리아인, 그것도 롬바르디아 사람'이라는 부르크하르트의 예감을 쉽게 거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 * *


거기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이탈리아인, 그것도 롬바르디아 사람이라는 예감


이탈리아에서는 고대가 북유럽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하였다. 야만의 시대가 끝나자마자 아직 절반쯤 고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이 민족의 마음속에 과거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거를 찬양했고 그것을 재생하고자 했다. 다른 나라는 학문과 성찰의 목적으로 몇 가지 고대의 요소를 이용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학자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까지 고대 문화 전반에 실제적인 흥미를 보였다. 고대는 그들의 위대함을 상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아직 남아 있는 수많은 과거의 기억과 기념물들이 이 같은 흐름을 강하게 밀고 갔다.


이 흐름과 더불어 그 사이 변화한 게르만족과 롬바르드족 국가의 민족정신, 보편적인 유럽의 기사도, 북유럽 문화의 영향 그리고 종교와 교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구의 본보기가 될 운명을 안고 태어난 근대 이탈리아 정신이었다.


야만 상태가 끝난 뒤 고대가 얼마나 조형미술에서 활기를 띠었는지는 12세기의 토스카나 건축과 13세기의 조각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시문학에도 같은 사례가 없지 않은데, 그 근거로 우리는 12세기 최고의 라틴 시인이자 그 무렵 라틴 시의 모든 장르를 주도했던 사람이 이탈리아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이른바 『카르미나 부라나』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들을 지은 인물이다. 현세와 현세적인 향락에서 얻어지는 끝없는 기쁨이 압운(押韻)된 시구를 통해 화려하게 흐르고 현세의 수호자로 고대 이교의 신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을 단숨에 읽어보면, 거기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이탈리아인, 그것도 롬바르디아 사람이라는 예감을 그 누구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또다른 확실한 근거들이 있다. 12세기의 방랑성직자들이 읊은 이 라틴 시들은 그 두드러진 외설까지 포함하여 어느 만큼은 유럽 공동의 산물이다. 하지만 「필리스와 꽃」이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며」를 지은 사람은 추측하건대 북유럽인이 아니고, 「투명한 달빛이 늦게 올라오는 동안」을 지은 섬세하고 향락적인 관찰자도 북유럽 사람은 아니다. 이 시들에 나타나 있는 것은 고대 세계관의 부활이며, 그것도 중세풍의 운율에 실려 표현됨으로써 그만큼 더 우리의 눈길을 끈다. 12세기부터 몇 세기에 걸쳐 6운각과 5운각을 세심하게 모방하고 내용에서도 갖가지 고대의 소재들, 특히 신화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이 많이 나왔지만 고전 시대의 느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귈리엘무스 아풀루스가 쓴 6운각의 연대기를 비롯해 그후의 작품들에서는 가끔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루카누스, 스타티우스, 클라우디아누스를 열심히 연구한 흔적도 보인다. 그러나 고전 형식들은 단순히 학문적인 차원에서만 사용되었을 뿐이고, 보베의 뱅상 같은 편찬자나 인술리스의 알라누스 같은 신화학자 겸 우의작가가 원용한 고대의 소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단편적인 모방이나 수집이 아니라 부활이었다. 또한 그 부활은 12세기의 무명 성직자들이 지은 저 시편 속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248∼249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3부 <고대의 부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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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3-0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까르미나블라나를 대학시절 첨 접하고 좋아하는데, 카르미나 블라나를 저급한 음악 취급했던 사람이 있었더랬죠. 뭐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도 제가 이쪽으로 지식이 소박하여 그리하지 못했는데 님의 페이퍼를 보니 위안이 됩니다. 고밉습니다.

oren 2017-03-05 23:41   좋아요 0 | URL
중세 시대에 숨막히는 수도원 생활을 견디다 못해 그곳을 박차고 떠난 방랑성직자들이 부른 노래들이고, 아무래도 ‘현세의 향락‘을 담은 외설적인 노래가 많다 보니 ‘저급하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더러 있게 마련이겠지요.
 
간통 같은 독서

 



탄핵을 코앞에 둔 까닭일까? 책 속 구절들도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한 줄의 문장을 읽고, 그 문장에 연관된 다른 책을 떠올리고, 거기서 다시 또다른 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게 다 '대통령 탄핵'을 코앞에 둔 '썩어빠진 나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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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나 나폴리가 공화국이 되기에는

 

마키아벨리처럼 사려 깊은 사람들은 밀라노나 나폴리가 공화국이 되기에는 너무 '부패'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5. 전제정치의 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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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속들이 썩어버렸기 때문


로마의 실례만큼 이 점에 꼭 맞는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타르키니우스 가를 멸망시킨 뒤 로마는 곧바로 자유를 획득하여 이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나 가이우스 칼리굴라, 그리고 네로가 죽고 카이사르의 혈통이 완전히 절멸한 뒤에 로마는 자유를 유지하기는 커녕 그에 한 발도 접근할 수 없었다. 같은 도시를 무대로 해서 같은 조건 아래 생긴 일인데도 결과가 아주 정반대로 되어 버린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즉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인이 아직 그다지 타락해 있지 않았던 데 비해, 카이사르 시대에는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타르키니우스 시대에는 로마의 민중으로 하여금 국왕의 압제 정치를 물리치고자 굳게 결의시키는 대신, '로마에서는 앞으로 어떤 왕도 통치할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민중에게 맹세시키는 일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시대가 되자 전 오리엔트의 지지를 배경으로 가진 브루투스의 권력이나 가혹함을 가지고도 로마 민중을 분기시켜서 자유를 지키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브루투스는 초대 브루투스를 본받아서 로마 민중에게 자유를 되돌려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이처럼 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때까지 가이우스 마리우스 일파가 민중에게 심어 놓은 타락한 풍조 때문이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평민당 수령이 된 카이사르는 교묘하게 민중의 눈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목에 칼을 쓰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상과 같은 로마의 실례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예를 꺼낸다 해도 맞설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이 점을 둘러싸고 현대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생생한 실례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즉 천지가 뒤집힐 대소동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밀라노나 나폴리가 두 번 다시 자유를 손아귀에 넣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국민은 속속들이 썩어 버렸기 때문이다.

 

 


밀라노의 참주였던 필립포 비스콘티가 죽자 밀라노는 자유를 회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유를 유지해 나갈 역량도 없거니와 방법도 알지 못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그간의 사정에 대해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에서는 왕 제도가 금방 타락해서 추방되는 바람에 국왕의 부패한 양상이 로마의 골수에까지 밸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었다. 이런 부패와 타락은 로마에 대해 혼란을 초래했으나,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단단했기 때문에 공화국은 전화위복이 될 수 있었다.

 

 


이제 결론을 내릴 단계가 되었다. 민중들만 건전하면 어떤 소동이나 내분이 일어난다 해도 국가 자체가 손상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민중이 부패했을 경우에는 법률이 잘 정비되어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최고 권력을 가진 한 인물이 나서서 민중이 건전한 사회의 부활을 위해 법률을 성실하게 지키게끔 만들지 않는 한 전혀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다지 길지 않은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서는 장기간을 통해 심어져 온 도시의 부패한 풍조를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에는 도저히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즉 장수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정무를 보살필 수 있는가, 아니면 우연히 2대를 계속해서 명군이 나타나 뛰어난 통치를 하게 되지 않는 한, 지금 말한 것처럼 지배자가 죽으면 곧바로 파멸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다. 비록 말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한 숱한 유혈의 희생을 치러서 성립된 국가라 할지라도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즉 부패라든가 자유로운 정치 형태를 유지해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원인을 밝히면 그 국가 속에 배어 있는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평등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비상 수단을 취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과감한 개조법을 몇몇 사람이 알고 사용하면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상세히 말하기로 하겠다.

 


 - 마키아벨리, 『로마사론』,

   제1권 제7장 <퇴폐한 민중은 해방된다 하더라도 자유를 유지해 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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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는 없다! 그는 공적(公敵)이다.


군주권이 절대적이었고 일체의 법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웠듯이 그 대적자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보카치오는 다음처럼 노골적으로 얘기한다. "폭군을 왕이라고, 군주라고 부르면서 나의 왕으로 모시듯 충성을 바쳐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는 공적(公敵)이다. 나는 그에게 대적하여 무기, 모반 간첩, 복병, 술수, 그 어느 것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신성하고 불가피한 일이다. 폭군의 피보다 더 유쾌한 희생은 없다."


이와 관련한 사건들의 전모를 여기에서 다 얘기할 필요는 없겠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론』의 저 유명한 장에서, 고대 그리스의 참주 시대에서 시작하여 고금의 모반사건을 다루면서 그것들을 다양한 특성과 결과에 따라 냉철하게 평가해놓았다.(120∼121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5. 전제정치의 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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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안녕의 본보기로 시민들이 세우다


메디치 일가를 몰아내려 했고 실제로 여러 차례 몰아낸 피렌체 시민들은 폭군 살해를 일반인이 인정하는 이상으로 생각했다. 1494년 메디치 일가가 도주하자 사람들은 그 궁에서 도나텔로의 청동 군상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든 유딧」상을 들고 나와 지금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서 있는 시노리아 궁 앞에 갖다 놓고 '국가 안녕의 본보기로 시민들이 세우다. 1495년'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피렌체 시민들은 특히 로마제국을 배신한 죄로 단테의 작품에서 카시우스와 유다스 이스카리오(예수의 제자 유다를 가리킨다-옮긴이)와 함께 지옥의 나락에 빠진 것으로 묘사된 브루투스를 이상으로 삼았다.(124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 <5. 전제정치의 대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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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좋은 일들은 모두 브루투스 공으로 돌리고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조상은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고 왕정을 몰락시킴으로, 로마인들은 그가 칼을 빼들고 선 동상을 카피톨리움에 있는 왕들 동상 사이에 세웠다.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한 그는 남들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학문으로도 그런 성격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독재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독재자와 공모한 자기 아들들까지 모두 사형시켰다.

 


그러나 이제부터 쓰려는 브루투스는 성격이 유순한 데다가 철학과 학문을 갈고닦아 더할 나위 없이 조화롭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이러한 성품으로 나랏일에 헌신했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에 좋은 일들은 모두 브루투스 공으로 돌리고, 나쁘거나 잔인한 일들은 브루투스의 친척이자 친구인 카시우스 잘못으로 돌렸다. 그만큼 카시우스는 정직함이나 동기의 순수함에서 브루투스를 따라가지 못했다.(1772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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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 때문


카시우스는 어릴 때부터 독재자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술라의 아들 파우스투스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어느 날 파우스투스가 아이들 앞에서 자기 아버지 권력을 내세워 한 껏 자랑을 늘어놓자 카시우스는 갑자기 그에게 달려가 뺨을 갈겼다. 이 일로 파우스투스 친척들은 카시우스의 잘못을 철저히 조사해 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으나 폼페이우스는 이들을 가로막으며 두 아이를 함께 불러서 이 문제를 조사하려 했다. 그때 카시우스는 파우스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파우스투스! 다시 한 번 지껼여 봐. 똑같이 때려줄 테니까."

 

 


이 이야기만으로도 카시우스가 얼마나 날카로운 성미를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된 까닭은 카시우스와는 좀 다르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그를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익명의 편지들이 그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어떤 시민은 옛날에 왕정을 뒤엎었던 유니우스 브루투스 동상에 이런 글을 새기기도 했다.

 

 


"브루투스, 지금도 살아 계셨더라면!"

 

 


"브루투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법무관인 브루투스가 법정에 나갈 때면, 그의 자리에는 다음 같은 글이 적힌 쪽지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브루투스, 아직도 잠자고 있는가?"

 

 


"당신이 진정한 브루투스인가?"

 


하지만 브루투스가 카이사를 암살하기로 마음먹게 된 결정적 까닭은 카이사르에게 아첨하는 이들의 경솔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민중의 이름을 빌려 카이사르에게 온갖 영광을 주려 했고, 한밤에 몰래 카이사르 동상 위에 왕관을 씌워놓아, 집정관을 넘어서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카이사르 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1778∼177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마르쿠스 브루투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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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4 1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국도 우리나라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부패가 심각한 사실을 아는데도,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박사모 회원들이 부끄럽습니다. 박사모가 최순실이 인권 침해를 받는다면서 유엔에게 호소한답니다. 이제는 그들을 비웃고, 욕할 힘도 없어요.

oren 2017-03-04 17:36   좋아요 0 | URL
나라를 부끄럽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도리어 나라를 구한다고 태극기까지 흔들고 외치고 있으니 이런 희비극도 없다 싶습니다...
 
5. 랑탕빌리지에서 체르코리까지
동유럽 여행 후기 ①


"여기에서는 전망은 트이고, 정신은 고양된다." ㅡ 그러나 높은 곳에 있고 전망이 트여 있는데도 아래를 내려다보는 반대 부류의 인간이 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 * *


높은 곳에 오르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높은 곳을 오르기엔 다리도 몹시 아프고 숨도 벅찰 테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높은 곳에 오르기가 아주 쉬워졌다. 바로 푸니쿨라(등산전차)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푸니쿨라를 몇 번씩이나 타봤으면서도 그걸 나폴리 민요인 '푸니쿨리 푸니쿨라'와 연결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저 그 노래를 '귀에 익숙한 멜로디'로만 여기고, 그 노래에 얽힌 사연은 조금도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푸니쿨리 푸니쿨라

 

주세페 투르코 작사, 루이지 덴차 작곡. 1880년 6월 6일 나폴리에 등산전차가 개통된 날 밤에 작곡되었으며 그해 페디그로타의 가곡제에서 발표되어 청중을 열광시켰다. 나폴리 민요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며 널리 불려지는 노래이다. 제명은 푸니콜라레(funicolare:등산전차)를 의미하며 가사의 구절마다에 넣어 가락을 맞추는 말이다.  - 출처 : 네어버 지식백과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푸니쿨라'를 떠올렸고,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검색해 보고서야 알았다. 그 노래가 등산전차를 타고 높은 곳에 오를 때 흥분되고 신나는 기분을 표현한 노래라는 것을. 그리고 얌머 얌머라고 노래하는 이태리 말은 가자! 가자! 산꼭대기로! 라는 뜻이라는 것을!

 

내가 그 둘을 연결지을 수 있게 도와준 책 속 문장들은 좀 엉뚱하긴 하다. 도대체 푸니쿨라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 문장들이 내겐 좀 인상깊게 다가왔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왜 이윽고 책을 덮고 침묵하는지


그러나 위대한 자연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깊은 감동을 가장 확실하게 전해준 사람은 단테가 처음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물결치는 바다 멀리 햇빛을 반사하며 불어오는 아침 바람과 숲속의 폭풍 같은 것을 몇 줄의 시로 훌륭히 노래했고, 먼 곳의 경치를 즐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높은 산에도 올랐다. 이 같은 일을 한 사람은 어쩌면 고대 이래 그가 처음일 것이다.

 

보카치오는 자신이 얼마나 자연에 감동받았는지를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추측하게 만들지만, 그의 전원소설을 읽어보면 최소한 그의 상상 속에 있었을 거대한 자연의 풍광을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다. 최초의 완전한 근대인 가운데 한 사람인 페트라르카도 자연이 감수성 예민한 영혼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완벽하고 힘차게 그려냈다.

 

모든 문학작품을 조사하여 거기에 드러난 회화적인 자연 감성의 기원과 발달을 처음으로 수집하고 『자연의 풍경』이라는 글로 자연 묘사의 최고봉을 이룩한 명민한 학자 알렉산데르 폰 훔볼트는 페트라르카와 관련해 말하자면 전적으로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위대한 수확자를 뒤따르는 우리로서는 얼마간의 낙수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페트라르카는 단순히 유명 지리학자나 지도 제작자에 그친 인물이 아니었다. 또 그는 고대인들이 말했던 것을 그저 반복해서 얘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연을 바라보고 거기에서 직접 감동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볼 때 자연의 음미는 모든 정신활동에 뒤따라야 하는 가장 바람직한 동반자였다. 그가 보클뤼즈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학자로서 은둔생활을 하고 시대와 세상을 벗어나 주기적으로 도피의 삶을 산 것도 이 둘의 결합 위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의 빈약하고 미숙한 자연 묘사 능력에서 그의 빈곤한 감정을 추리한다면 그를 잘못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그가 『아프리카』의 제6곡 말미에, 그때까지 고대인도 근대인도 노래한 적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삽입한 아름다운 스페치아 만과 베네레 항의 묘사는 단순한 나열에 그치고 있다. 그래도 그는 암석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풍경의 회화적인 가치와 그것의 실용성을 충분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레조의 숲에 머무르면서 순간적으로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았을 때 받은 깊은 감동은 그로 하여금 오래 전에 내려놓았던 시필(詩筆)을 다시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실로 가슴 벅찬 감격은 아비뇽에서 멀지 않은 방투 산에 올랐을 때 왔다. 광활한 경치를 보고 싶다는 막연한 욕구가 마음속에서 최고조에 달했을 때, 페트라르카는 우연히 리비우스의 글에서 로마의 적인 필리포스 5세가 하이무스 산(지금의 발칸 산맥-옮긴이)에 오르는 대목을 접하고 결심을 했다. 늙은 왕에게 탓할 수 없는 것은 평범한 젊은이에게도 용서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작정 하는 등산은 그의 주변에서는 유례가 없었고 친구나 아는 사람의 동행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휴게소에서 데리고 온 동향인 두 명과 남동생만 이끌고 산에 올랐다. 산중턱에서 만난 한 늙은 목자는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타일렀다. 그 역시 50년 전 같은 일을 시도했으나 돌아올 때 남은 것이라고는 후회와 피곤한 육신과 다 찢어진 옷뿐이었으며, 그전에도 그후에도 이 산을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계속 위로 올라갔고 마침내 발 밑에서 구름이 넘실대는 정상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곳의 풍경 묘사를 기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것은 페트라르카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서 받은 감동이 너무 강렬해서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리석음으로 가득했던 지난날의 모든 삶이 떠올랐다. 젊은 나이에 볼로냐를 떠난 지가 이날로 10년째 된다는 생각에 그는 이탈리아가 있는 쪽을 향해 그리움 가득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나 휴대하고 다니는 작은 책, 곧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상록』을 펼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은 10장의 한 대목에서 멈췄다. "그리고 인간은 길을 떠나 높은 산과 넓은 바다와 힘차게 출렁이는 파도와 대양과 천체의 흐름에 감탄하며 자기 자신을 잊는다." 페트라르카가 읽는 이 구절을 듣고 있던 남동생은 형이 왜 이윽고 책을 덮고 침묵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몇십 년 후인 1360년, 파치오 델리 우베르티는 운문으로 된 그의 지리서에서 알베르니아 산맥의 광활한 전경을 묘사했다. 비록 지리학자와 고고학자의 관점에서만 묘사했어도 그것은 그가 실제로 목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보다 더 높은 산에도 분명히 올랐던 것 같다. 해발 30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만 나타나는 충혈, 안구 압박, 심계향진 같은 현상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신비한 여행 동반자인 솔리누스는 액체에 적신 해면으로 그를 치료해주었다. (375∼378쪽)

 

 -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4부 세계와 인간의 발견>


 

 

 

 

 

 

 

 

 

 

 

 


내가 등산전차를 타고 가장 높이 오른 건 스위스 융프라우였다. 그 높은 산까지 전차를 건설해 놓은 인간의 기술력이 놀라웠다. 그 전차가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융프라우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아름다운 설경으로 잘 알려진 알프스 산맥의 고봉 융프라우(4,158m)는 산악인뿐 아니라 여행자에게도 매력적인 장소다. 융프라우의 하이라이트는 융프라우와 묀히 두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융프라우요흐 전망대로, 명물 톱니바퀴 열차로 오를 수 있어 근성이 없는 여행자라도 고산 지대의 짜릿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열차가 운행하는 융프라우요흐 전망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철도역이기도 하다. 높이가 자그마치 3,454m에 달하는 이곳까지 열차가 운행한 지도 100년이 넘었다고 하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 네이버 지식백과


가장 최근에 푸니쿨라를 타본 건 2년 전 늦봄에 동유럽에 갔을 때였다.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 갔을 때는 험준한 고성에 오르기 위해서였고, 할슈타트에 갔을 때는 소금광산을 보기 위해서였다. 푸니쿨라가 아니었더라면 높은 곳에 올랐을 때의 멋진 풍경들을 도저히 감상할 수 없었으리라. 앞으로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들으면 예전보다 훨씬 더 즐거운 마음으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탔던 '푸니쿨라의 추억'과 그 노래가 틀림없이 겹쳐 떠오를 테니 말이다...


 * * *


 - 잘츠부르크에 도착해서 맨 처음 찾아간 곳은 '호엔 잘츠부르크 성'이었다.

   푸니쿨라를 타고 순식간에 높은 데를 날듯이 올라갔다.



 - 잘츠부르크 성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폰 트랩 대령의 집`도 보인다.



 - 잘츠부르크 성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미라벨 정원 너머로 자주 보이던 높은 성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 유유히 돌아 흐르는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 호엔 잘츠부르크 성에서 내려와 도나우 강을 건넌 뒤에 성 쪽으로 올려다본 풍경.

 


 - 잘츠부르크를 떠나 그 다음 행선지로 찾은 곳은 할슈타트였다. '여행자들의 로망'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마침 우리 일행은 여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 이튿날 오전 자유시간에 아내와 나는 '소금광산'을 오르는 등산로로 '등산'을 시작했다. 운동도 겸해서.

    아무렴, 높은 곳에 올라야 더 멋진 풍광도 불 수 있는 법이니까.



 - 그런데 마을 뒷편으로 난 '좁은 등산로'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가팔랐다. 절반도 오르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 '도보 등산'으로는 도저히 꼭대기까지 오를 자신이 없어서 결국 '푸니쿨라'를 타기로 했다.

    등산열차로도 한참이나 올라갔다. 걸어서는 반나절이 꼬박 걸릴 형편이었다.


 

 - 푸니쿨라로 전망대에 오르니 경치가 과연 환상적이었다.

 

 

 - 소금광산으로 이어지는 전망대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니 호숫가의 집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자그마하다.

 

 

 - 전망대에 오르면 저 멀리 '만년설이 뒤덮인 알프스'를 볼 수도 있다.

    할슈타트에 가시는 분들은 꼭 푸니쿨라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 보시길 추천드린다.

 


 * * *




어느 날 밤, 나는 산으로 올라갔다네,

그곳이 어딘지 아는가? (어딘지 아는가?)

거기서는 너의 무정한 마음도 이제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성가신 계략으로부터! (성가신 계략으로부터!)

산은 불을 뿜고 타오르고 있지만, 당신이 도망간다면

불이 붙는 건 당신이겠지! (당신이겠지!)

하지만 내가 당신 곁으로 가면, 타오르지 않겠지

바라보기만 한다면, (보기만 한다면,)

가자, 가자, 꼭대기로,

가자, 가자, 꼭대기로,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꼭대기로 올라가자, 푸니쿨리, 푸니쿨라!

가자, 가자, 꼭대기로,

가자, 가자, 꼭대기로,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꼭대기로 올라가자, 푸니쿨리, 푸니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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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03-02 1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저는 여기서 푸니쿨리 푸니쿨라 노래나 불러야겠어요. 중학교때 교내 합창대회 단골로 불리던 곡 ㅠㅠ

oren 2017-03-02 14:21   좋아요 0 | URL
hnine 님께서는 이 곡을 중학교때부터 자주 들으셨군요. 놀랍습니다. 저는 중학교때 무슨 곡을 들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요.

보슬비 2017-03-03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슈타트는 자주 갔었는데, oren님의 글을 읽으니 푸니쿨라를 타지 않은것이 가장 후회가 되네요. 이런 풍경이 있는줄 알았더라면 꼭 타보았을텐데 진짜 아쉬워요.

oren 2017-03-03 23:21   좋아요 2 | URL
보슬비 님 반갑습니다^^ 보슬비 님께서 할슈타트를 자주 가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저로서는 정말 깜놀입니다. 그 먼 데를 단 한 번 가기도 힘든데 말이지요.(님의 블로그에서 짧은 페이퍼 찾아서 읽어봤답니다. 독일 퓌센에서 그리고 넘어가셨더군요. 저도 맨처음 갈때 자동차를 몰고 퓌센 거쳐서 그리로 갔답니다. ㅎㅎ) 저는 뜻하지 않게 두 번 가봤습니다만, 맨 처음 갔을 땐 일정에 쫒겨 할슈타트에서 고작 한 시간 밖에 머물지 못해서 너무나 아쉬웠더랬습니다. 거기서 매우 가까운 장크트 길겐(St.Gilgen) 마을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그리 되었지요. 거기도 우연히 두 번 가봤는데 맨 처음 갔을 땐 그 동네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외가가 있는 줄도 몰랐답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7546217

보슬비 2017-03-03 23:56   좋아요 1 | URL
예전에 프라하에 살때 가까운곳이라서 가족들이 오면 감머구트 구간에 자구 가게 되었던것 같아요. 구른들제 근처 ‘몬디 할러데이‘ 호텔이 좋아 그곳에 가면 계속 이용했던 숙소예요. oren님 글을 읽으니 그때 기억이 나서 댓글 달았었는데, 구른들제에 있는 호수들이 너무 이뻐서 아직도 좋은 기억이 남은 곳이지요. 푸니쿨라 알았지만, 주변에 이용했다는 분들이 없어서 그저 지나쳤는데, 올려주신 전망 사진을 보니 무척 후회가 되네요.

링크 걸어주신 페이퍼보니 감회가 새로워요.^^ 예전에도 느꼈지만, 진짜 사진 너무 멋지게 찍으세요.

oren 2017-03-04 00:59   좋아요 0 | URL
보슬비 님께서는 무려 프라하에서도 사셨군요! 보슬비 님께서 거기 사셨다는 말씀만 들어도 금세 또다시 그 도시에 막 달려가 보고 싶어지네요. 거기 사셨으면 혹시 우플레쿠(U Fleku)라는 술집에도 가보셨는지 모르겠군요. 거기서 생맥주 마시며 스메타나의 블타바를 아코디언 연주로 들었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아서 말이지요. 저는 프라하에 다녀온 후로는 여행후기 말고도 따로 책에 대한 페이퍼를 쓰면서도 프라하 풍경들을 잔뜩 집어넣은 적도 있었답니다. 프라하 여행 경험 때문에 카프카와 쿤데라에 홈빡 빠져든 적이 있었거든요^^ ☞ http://blog.aladin.co.kr/oren/8564725
 

 

 


"문학사 전체를 통하여 '책의 운명은 독자의 이해력에 달려 있다'는 격언의 진리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운명만큼 여실히 입증하는 것은 없다. …… 이 책이 여러 각도에서 채택되고 철학자, 역사가, 정치가, 또는 사회학자들에 의해 논의된 뒤인 오늘날에조차도 이 비밀은 아직 완전하게는 밝혀져 있지 않다. 한 세기마다, 아니 거의 한 세대마다 『군주론』에 관한 평가는 달라질 뿐만 아니라 정반대의 방향으로 뒤집히고 있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이다."

 - 캇시러


 * * *


『군주론』때문에 숱한 오해와 비난을 받아왔지만, 마키아벨리는 좀 더 깊이 살펴 보면 '민중의 자유'를 그 누구보다 맹렬히 외친 가슴 뜨거운 '공화주의자'였다. 『군주론』을 읽고 나서 그보다 훨씬 더 방대한 책인『정략론』(일명『로마사론』)을 읽어 보고 나서야 그걸 알겠다. 그 책에선『군주론』에서 보여줬던 냉혹하고도 교묘한 책략들은 어느새 모두 자취를 감춘다. 그 대신 '공화정'에 대한 불같은 열정이 도처에서 넘실댄다. 이 사람이 과연 그토록 잔혹한 책을 쓴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서릿발 같은 비판과 브루투스에 대한 뜨거운 숭모는 어느 대목에서든 한결같고 붓끝이 매섭다. 그토록 성실한 인간이었고, 명민(明敏)한 관찰가였으니『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 그를 두고 '당대 최초의 역사가'로 칭송했다는 말도 금세 수긍할 수 있겠다 싶다.


마키아벨리는 언제나 '역사는 인생의 스승'임을 강조했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비록 도시나 국가가 다를망정 사람들의 욕망과 성분은 시대를 막론하고 같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사정을 꼼꼼하게 검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국가든 그 각각에 앞으로 일어날 만한 일을 예견하고 고대인이 썼던 타개책을 적용하는 것은 손쉬운 일일 것이다."


과연 그랬다. 그의 책 속을 누비다 보면, 여기저기 골목길을 돌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마주치게 되는 낯선 인물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기분을 자주 맛보게 된다. 묘하게도 그때 마주치는 인물들은 매번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 인물들이 언제나 익숙하다. 그 사람들은 대개 'TV 뉴스 시간'에 이미 너무나 자주 봐왔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은 '헌재 탄핵 심판 최후 변론일'이다. 어쩌면 아직도 안국동 헌재 대심판정의 환한 조명 아래 어느 늙은 변호사는 목에 핏대를 잔뜩 세우며 '억지'와 '궤변'으로 점철된 막말을 계속 쏟아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진작에 탄핵되었어야 마땅할 역대 최악의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그들은 돈을 벌 좋은 기회를 잡았다. 더구나 그들의 의뢰인은 시간을 오래 끄는 걸 아주 좋아하니 이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나도 더이상 긴말 않겠다. 그러나, 500년 전에 마키아벨리가 남긴 목소리 가운데 내가 신중하게 골라 놓은 '녹취록'이라도 좀 들어 보라. 괜히 엉뚱한 녹취록이나 틀자는 허튼 소리 좀 집어치우고!

 

 * * *

 

 

시간이 그 가면을 벗기게 된다


즉 사람이란 모두가 사악해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면, 본래의 사악한 성격을 마음껏 발휘해 보려고 틈을 노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이 잠시 모습을 감추고 있다면 그것은 뭔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의한 것이므로 얼마 안 있어 모든 진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시간이 그 가면을 벗기게 된다.(163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1권 제3장

 

(나의 생각)

 

그녀가 오랫동안 쓰고 있었던 '온갖 가면들'이 다 벗겨지는 중이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가면은 아마도 '조국과 결혼했다는 여자'의 가면이 아닐까?


 * * *

 

탄핵하는 권능만큼 유효하고 필요한 것은 달리 또 없다

 

자유를 지키는 임무가 국가로부터 부여된 인물에게, 국가의 자유를 침해하고자 하는 계획에 관하여 시민을 민회나 행정관들의 위원회 또는 법정에 고발하여 탄핵하는 권능만큼 유효하고 필요한 것은 달리 또 없다.

 

이 정치 제도는 국가에 아주 유익한 두 가지 영향을 준다. 첫째는, 시민들은 고발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을 꾀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일 꾀한다 하더라도 사정없이 제압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둘째는, 도시에서 어떤 형식으로 특정 시민에 대해 일어나고 있는 노여움에 배출구를 만들어 준다. 이런 노여움에 적당한 배출구를 주지 않을 경우, 그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쏠리게 되므로 국가 전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이 초조한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게 조정하기 위해서는 법률의 힘으로 배출구를 부여해 주는 일보다 국가를 안태(安泰)하게 하고 강고하게 하는 일은 없다.(174∼175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1권 제7장 <국가에서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탄핵권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나의 생각)

 

광화문 광장과 박영수 특검은 사실 분노한 시민들의 숨통을 겨우 틔워주는 '배출구'나 마찬가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조차 꽉 막혔더라면 어디선가는 기어코 다른 양식의 폭발이 일어났을 테니까.

 

 

 * * *


믿을 수 없고, 옹고집쟁이이고, 바보이고, 무능하고,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란 종교의 창시자로서 숭앙받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 가는 것이 왕국이나 공화국을 건설한 사람이다. 이 사람들 다음으로 경모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군대의 우두머리로서 자기 영토나 국토를 확장한 인물을 들 수 있다. 또, 그 다음에는 붓으로써 일어선 사람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일에는 여러 가지 전문 분야가 있는데 저마다의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존경을 받게 된다. 또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 기능이나 직업에 따라서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를 파괴하거나, 왕국이나 공화국을 파멸로 몰아넣거나, 인류에게 있어 유익하고도 자랑인 미덕이나 학문이나 그 밖의 기능을 적대시하는 자는 파렴치하므로 저주받아야 할 존재이다. 그들이야말로 믿을 수 없고, 옹고집쟁이이고, 바보이고, 무능하고, 게으르고 비열하다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다.(184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1권 제10장 <왕국이나 공화국의 창설자는 찬양되어야 하고 참주정치의 시조는 저주받아야 한다>

 

(나의 생각)

 

이미 500년 전에 마키아벨리가 이번 사건 장본인의 '핵심'을 이토록 명료하게 밝혀 놓았을 줄이야..

 

 * * *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권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스파르타와 베네치아에는 지배자들이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감독관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권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민중 전체가 조금도 부패되어 있지 않더라도 국가의 안태는 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권력이라면 당장에 민중을 타락시키고,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는 여당을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권력을 휘두르는 인물이 가령 돈이 없거나, 친족 관계에 의거하는 배경이 없다고 해서 안심할 것은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재부도 그 밖의 이권이 있으면 그것에 따라 굴러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246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1권 제35장 <로마의 10인회는 인민의 자유로운 선거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의 자유에 해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생각)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권력'이 강남아줌마, 그것도 사기로 돈을 번 사이비 교주의 딸일 줄이야!

 

 

 * * *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

 

리비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굴한 노예든가 아니면 오만한 주인이든가, 이것이 민중의 본질이다."

 

이상에서 내가 말한 것 같은, 또 모든 필자가 한결같이 비난하고 있는 민중의 이런 결점을 변호해 주어야 할 것인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변호한다 해도 기껏해야 엉뚱한 어려움에 빠져들 것이 뻔하고, 아니면 창피를 당하고 그 짓을 포기하든가, 또는 변호의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만 당할 처지에 놓이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어떻든 간에, 완력을 쓰거나 권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나의 기존 사고방식에 대해 조리 있는 이론으로 이에 대결한다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나는 믿어 왔고, 앞으로도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저작가가 민중에게 가해 온 그 비난을 실은 특정 인물, 특히 군주를 향해 던져야 하는 거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법률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누구건 무질서한 민중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군주, 또는 지금까지 있었던 군주를 헤아릴 때 그 수효는 굉장히 많은데 정말로 성실하고 현명했던 군주란 극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백성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공연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론이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여 앞날을 내다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뭔가 숨겨진 신통력 같은 것이어서 미래의 길흉을 알아맞히는 것이다. 또한 인민이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들 인민은 역량이 비슷비슷하면서도 의견이 완전히 대립되는 두 논객의 주장을 들을 경우, 여론은 그 중 우수한 의견 쪽을 따르는 법이다. 이 사실은 바로 그들 인민이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297∼300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1권 제58장 <인민은 군주보다 현명하고 또 안정되어 있다>

 

(나의 생각) 

 

민중은 결코 개돼지가 아니란 말씀.

 

 * * *

옷깃을 여미고 생각해야 할 일

 

이런 말도 안 되는 파렴치 행위를 당한 일에 대해 파우사니아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필립포스에게 고충을 호소했다. 필립포스는 복수해주겠다고 약속은 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처벌을 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아타루스를 그리스의 한 지방 총독으로 임명했다. 원한에 사무친 자기 상대가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발탁되어 출세한 것을 본 파우사니아스는, 자기에게 무도한 짓을 한 그 가해자에 대한 원한을, 이번에는 원수를 갚아 주지 않는 필립포스에게로 돌렸다. 그래서 필립포스의 딸과 에페이로스의 알렉산드로스와의 결혼식이 거행되는 장중한 분위기에 감싸인 어느 날 아침, 필립포스가 아들인 알렉산드로스와 사위 알렉산드로스 두 사람을 데리고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원으로 막 들어서려는 때에 필립포스를 암살했다.


이 예는 이미 이 장 앞부분에서 든 로마 사절 파비우스의 사건과도 매우 비슷한 것으로서, 통치를 맡아 보는 자로서는 옷깃을 여미고 생각해야 할 일이다. 즉 이미 지독한 변을 당했는데 거기다가 고배를 마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불행을 당한 사람을 가볍게 취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한 수치를 당한 사람은, 어떤 위험이나 위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걸 각오하고 원수를 갚으려 하기 때문이다.(413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2권 제28장

 

(나의 생각)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을 손톱만큼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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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벌보다도 더 뼈에 사무칠 것

따라서 옛날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람들이 익혀 온 법률이나 제도나 습관을 군주 스스로 깨뜨렸을 때 국가는 그의 수중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군주는 명심해야 한다.

 

군주의 권위를 박탈당한 뒤에야, 그때 순순히 충언을 들었더라면 왕국을 유지해 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하고 아무리 후회해 봤자, 국가를 잃었다는 슬픔만 점점 더 더해갈 것이다. 이런 자책감은 어떤 벌보다도 더 뼈에 사무칠 것이다.(439쪽)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3권 제5장

 

(나의 생각)

 

그래서 '피눈물이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고 실토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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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잊지 않는 법

이 사실로부터 군주가 민중에게서 미움을 사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은 민중으로부터 어떤 소중한 것을 몰수해 버리는 일일 것이다. 사람이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기면 두고두고 잊지 않는 법이다. 걸핏하면 그 물건의 필요성이 뼈저리게 느껴져서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더구나 필요성은 매일같이 절실히 느껴지므로 나날이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다. 또 한 가지 원인은, 군주가 거만하게 보이거나 방자해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민중, 특히 자유로운 시민의 미움을 사는 것은 없다.

 

 - 마키아벨리, 『정략론』, 제3권 제23장

 

(나의 생각)

 

국정농단의 주범들 때문에 잃어버린 것들은 일일이 셀 수도 없다. 희망, 자존감, 법과 정의... 그 무엇보다 우린 '주권'을 빼앗겼다. 그래놓고도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단다. 지금까지도... 그래, 조금만 더 두고 보자. 누가 이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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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2-28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가 이런 말씀을 하신 분이었군요. 참된 역사가가 맞네요. 청와대에 <정략론>을 보내드려야하는데 워낙 책을 안 읽으시는 분이라...

oren 2017-02-28 12:12   좋아요 1 | URL
˝썩어빠진˝ 청와대에 무얼 더 기대할까 싶습니다^^(마키아벨리의 표현을 살짝 빌렸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2-28 13:03   좋아요 0 | URL
기대를 말아야죠ㅎ 탄핵이든 하야든 어서 결정났으면 좋겠습니다ㅋ

oren 2017-02-28 13:40   좋아요 0 | URL
곧 그런 시간이 오겠지요.. 문득 아득한 옛날에 신문을 보다가 메모했던 글귀가 생각나 덧붙여 봅니다. 누가 한 말인지, 출처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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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봄은 온다. 이 말이 절대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아득한 약속일지라도 분명히 봄은 온다. 하루 견디면 하루 견딘 만큼 우리는 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