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히말라야로 들어서다.


어제밤은 정말 누구 하나 '맥주라도 한잔' 하자는 얘기조차 없이 '고요하게' 지나갔다. 다들 오늘부터 시작될 '고된 산행'이 걱정되어 아무도 섣불리 그런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었으리라. 그 덕분에 모두들 저마다의 조용한 시간들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고, 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다시 읽고 싶어 가져온 알버트 머메리의 책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붙잡고 두세 시간쯤 읽은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해발 2,410m에 위치한 라마호텔까지만 가면 된다. 일정도 부담없고 날씨도 쾌청한 가운데 다들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히말라야'의 산 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몸과 마음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히말라야의 산길을 걷는 일이 생각보다는 그리 힘들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일말의 안도감도 조금 생겨난다.

날씨는 우리나라의 초여름에 가까울 정도로 기온이 높고 햇살이 뜨겁다. 아직은 고도가 그리 높지 않은 탓인지 계곡물도 그득 넘쳐 흐르고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진 그늘진 숲길을 자주 지나는 것도 기분이 좋다.

가끔씩 만나는 외국인 트레커들과 포터들, 그리고 짐말을 몰고 다니는 말몰이꾼들을 마주 지나칠 때마다 네팔식 인사말인 '나마스테'를 주고 받는다. 이 인사말의 뜻이 참으로 멋지고도 심오하다. '나마스테'는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경배드립니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힘겨운 산길을 오르내리며 난생 처음으로 마주치는 사람들과 그저 'Hello'라는 단순한 말로 나누는 인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인사말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트레킹에서 우리 일행들이 마주쳤던 외국인들은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정말 다양한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 먼 오지를 찾아오는구나 싶은 생각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나마스테'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은 이후에 '당신들은 어디에서 오셨나요?'라고 물어볼 때마다 나라 이름이 계속해서 새롭게 바뀌는 점도 흥미로웠다. 내가 들었던 나라 이름들은 대략 스위츨랜드, 프랑스, 잉글랜드, 네팔, 도이칠랜드, 오스트리아, 체코, 러시아, 말레이지아, 아메리카 등이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도 두세 번 만났는데 그 분들과 얘기를 나눌 때는 이상하게도 '나마스테'를 생략한 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는 말부터 꺼내게 되는 것도 재미있었다.

'나마스테'라는 인사말이 가장 인상깊게 들릴 땐 역시 깊은 산 속 마을과 롯지에 사는 어린아이들과 마주칠 때였다. 그 아이들이 두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아 '나마스테' 하고 해맑고 귀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넬 땐 작은 감동마저 살짝 일어났다. '나마스테'는 그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정말 무언가 특별한 교감을 서로 주고받는 듯한 잊지 못할 아름다운 말이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 우리가 묵었던 숙소 앞 뜰에서 나홀로 한가로이 '차'를 즐기는 이방인.




 - '대장정'을 앞두고 11명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활짝 웃고 사진을 찍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다들 얼굴이 뽀샤시하다.
     (앞줄 맨 왼쪽이 글쓴이, 뒷줄 맨 왼쪽에 계신 분이 박목사님)



 - 화창한 날씨 덕분에 저 멀리 계곡 안쪽 너머 '하얀 설산'이 뚜렷하다.
    다들 그 광경에 흥분한 탓인지 출발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기념 촬영을 했다. 맨 왼쪽이 가이드인 '텐디'



 - 다리에 늘어선 우리 일행 앞에는 마침 한국에서 온 단체팀도 있었다.
    '혜초여행사'를 통해 오신 '오은선대장과 함께 하는 히말라야 원정대'가 그 주인공들인데,
    우리 일행과 같은 항공편을 타고 왔으며 랑탕에서의 일정도 거의 똑같고 귀국 항공편까지도 같았다.



 - 다리를 건너자 말자 산골마을에 사는 아이들을 만났다. 연기 뒤로 보이는 아침 햇살처럼 아이들이 싱그럽다.
   아침 일찍부터 집집마다 대문 앞에 저렇게 연기를 피우는 건 일종의 전통의식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 목사님의 좌우에 있는 두 사람은 父子지간. 
    대학 재학중 군복무를 마치고 갓 제대한 상준이는 출국 며칠을 앞두고 맨 나중에 '트레킹'에 합류했다.



  - 잠시 휴식중에 만난 롯지에 사는 아이.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옷차림과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너무 귀엽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도 필시 저런 모습과 그다지 많이 다르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무슨 '확신'처럼 느껴졌다.



 - 어느덧 해발 2,450m의 림체. 장대장님이 잠시 '포터 스타일'로 변신했다.



 - 우리가 묵을 라마호텔(라마호텔은 '지명'이다)의 롯지.



 - 산장 안주인은 연신 '실패'를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무료함'을 달래는 듯하다.
   아마도 곧 시작될 '몬순'으로 접어들면 트레커들의 발길도 뚝 끊기고 무료한 시간들은 더욱 많아지리라.



 - 첫날 산행이 '별것 아니네....' 싶었던지 분위기 메이커인 상준이 아빠가 기어이 럼주를 3병씩이나 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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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 둘째날, 랑탕계곡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다.
    from Value Investing 2013-06-03 14:15 
    오늘은 고도를 3,330m까지 올려 랑탕 빌리지까지 가야 하는 일정이다. 우리 일행 가운데 너댓사람을 제외하고는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고지대'를 체험하는 첫날이기도 하다. 다들 고소에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으리라 믿고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때는 마침 풍광 좋은 고라타벨라(3,000m)에서 '수제비'로 점심을 먹을 예정이라는 소식에 더욱 힘을 낼 수 있었고, 멋진 설산이 환히 보이는 그곳 산장에서 모처럼 맛있는 식사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우
 
 
 
1. 드디어 네팔이다.


오늘은 드디어 '히말라야'에 오르기 위해 '카트만두에서 샤브루베시까지' 이동하는 날이다. 어제밤 타멜 시내에서 일찍 돌아온 이후 일행중 몇몇이 모여 숙소에서 밤늦게까지 술잔을 더 나눴었다. 오늘까지도 '이동'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나중에는 애주가 한 분이 한국에서 준비해온 '커티샥'까지 아낌없이 비웠다. 작년에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다녀온 이○○상무의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담이 한참이나 이어졌고, 그밖에 이런저런 다양하고 재미있는 얘기들을 제법 오래도록 나눈 뒤 밤 12시를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모님(목사님 부인)께서 숙소까지 오셔서 직접 시원한 북어국을 맛있게 끓여 놓으셨다. 그 덕분에 우리 일행 모두 제대로 속풀이를 하고 나니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오늘의 일정 조차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버스가 복잡한 카트만두 시내를 벗어나면 제법 '시원한 도로'를 쌩쌩 달릴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시외 역시 도로 사정이 그다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주위가 온통 산이다 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시원한 녹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답답했던 카트만두 시내보다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카트만두에서 랑탕계곡 입구까지 가는 길은 평지 말고도 높은 산을 한참이나 구비구비 올라갔다가 그 산을 넘어 다시 구비구비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네팔 사람들이 얼마나 험한 산간 오지에서 다락같은 논밭을 부지런히 일구며 살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하루였다. 한국에도 산간 오지에 비탈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만 네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토록 높은 고지대에서 좁디좁은 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들이며 어떤 생각들을 지니고 살고 있을까를 내내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버스밖 풍경, 숙소를 떠나 혼잡한 카트만두 시내를 통과하는 중.



 - 오늘은 토요일인데 네팔에서는 토요일이 휴일이고 일요일은 평일처럼 정상적으로 일한다고 한다.
    어딜 가나 거리마다 과일과 채소 등을 파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엄청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적지않은 시련을 각오해야 한다지만,

    우리 일행은 편리한 전용버스를 이용하여 비교적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 카트만두를 벗어나 고갯길을 다 내려오는가 싶더니 버스를 좀 수리해야 한다고 해서 우리 모두 하차했다.
    버스가 정비를 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시골풍경이 싱그럽다.



 - 버스를 수리하는 동안 길가에서 내내 '버스'를 기다리던 모녀를 우리 버스에 태워주었다.
    모녀는 버스를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내렸지만 어린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 이동중 점심은 네팔의 주식인 '달밧'으로 해결했다. 식당앞 길거리의 풍경
.



 - 우리가 탄 버스는 평지를 한참이나 더 달린 끝에 높은 산을 기어오르더니 산중턱을 넘어 끝없이 달린다.



 - 포장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되나 싶더니 점점 더 길이 아슬아슬해진다.



 - 드디어 랑탕국립공원 체크포인트까지 올라왔다. 지도를 통해 봤던 '지명'들과 '고도'가 자세히 나와있다.



 - 둔체에 도착하여 '차'를 한잔 마시며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산중턱으로 난 길이 우리가 더 가야 할 길이다.



 - 둔체(1,960m)의 길거리 풍경.



 - 구절양장이 따로 없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이 길을 다 내려가면 곧바로 샤브루베시에 도착한다.


 
 - 어느새 해가 나즈막히 걸리는 늦은 오후.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비탈을 따라 다락처럼 이어진 논밭의 경계가 뚜렸하다.



 - 샤브루베시(1,420m)에 도착했다. 여기서 10여km 더 올라가면 '티벳'과의 국경에 닿는다고 한다.



 -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말들.
    이 말들이 왜 저토록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지 이때까지는 전혀 몰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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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 트레킹 첫날, 발걸음도 가볍다.
    from Value Investing 2013-06-03 14:15 
    어제밤은 정말 누구 하나 '맥주라도 한잔' 하자는 얘기조차 없이 '고요하게' 지나갔다. 다들 오늘부터 시작될 '고된 산행'이 걱정되어 아무도 섣불리 그런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었으리라. 그 덕분에 모두들 저마다의 조용한 시간들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고, 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도 다시 읽고 싶어 가져온 알버트 머메리의 책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붙잡고 두세 시간쯤 읽은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오늘은 해발 2,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 알버트 머메리(1855∼1895),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中에서

 * * *

꽤 오래 전에 일찌감치 '히말라야'를 다녀온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IMF  이후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고 난 뒤 갑자기 '정신적 허기'를 극심하게 느꼈는지 한동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홀로 산 속 깊은 암자에서 온 겨울을 지내기도 하고, 해남 땅끝마을에서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보름씩이나 걸어가 보기도 한 끝에 결국 히말라야까지 다녀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 친구가 히말라야를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마포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돼지고기 주물럭을 안주삼아 소주잔을 호기롭게 주고받으며 여러 친구들 앞에서 껄껄 웃으며 했던 얘기가 아직도 내 귓가에 생생하다.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히말라야에 가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하하하"

그때 그 친구로부터 들었던 '히말라야'에 대한 또다른 얘기는 왜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지 모르겠다. 그 친구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그 말 한 마디는 그 후 오랫동안 내 가슴 속에 콕 박혀 있었던 듯싶다.

그로부터 몇 년이 더 흐른 후 영화
버킷 리스트 :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보면서 '히말라야를 가고 싶은 열망'이 다시금 불쑥 뜨겁게 되살아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맞아 바로 저기야. 나도 언젠가는 저길 꼭 가봐야지......"
 
그 영화 속 이야기는 다시 떠올려봐도 언제나 생생하다. 주인공인 카터(모건 프리먼)는 갑작스레 찾아온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어느 날,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철학교수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들을 적은 ‘버킷 리스트’를 만들라고 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리고 같은 병실을 쓰게 된 에드워드(잭 니콜슨)와 함께 병원을 뛰쳐나간 두 사람은 '리스트'를 행동으로 옮긴다.
 
그 두 사람이 스포츠카를 타고 프로펠러 비행기로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도 멋져 보였지만, 아프리카로 건너가 해질 무렵 노을에 물든 '장엄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바라보고 마침내 만년설에 뒤덮인 히말라야에 오르는 장면들은 내게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 영화속 주인공들을 그렇게 이끈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돌아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 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꼭 해야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나는 그 영화 덕분에 '하기 힘든 몇 가지'를 생각보다 조금 일찍 실행에 옮겼다고 여기고 있다. 기억에 오래 남을 일들은 2008년에 가족들과 함께 이집트 일주여행을 다녀온 일, 단테의『신곡』을 읽은 일, 그리고 이번에 히말라야를 다녀온 일 등이다.)


그런데 히말라야는 대체 언제쯤 생겨난 것일까?


최근까지 밝혀낸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억 4천만 년 전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인도는 곤드와나 초대륙의 일부였으나 떨어져 나가 연간 18~20㎝라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이동해 5천만 년 전 유라시아 판과 충돌했으며 이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의 숲 속에서 살다가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을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만 년 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신들이 사는 영역'으로 알고 감히 범접하기조차 두려워했던 시대를 뒤로 하고, 나같은 일반인조차 겁도 없이 수천미터의 봉우리를 오를 수 있게 된 우리 세대야말로 정말 엄청난 행운아들인지 모르겠다. 인류의 역사를 하루로 환산하면 인간은 23시간 59분 59초 동안이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드높은 히말라야에 마음껏 오를 수 있다고 해서, 혹은 수천미터의 고봉을 직접 두 발로 다녀왔다고 해서 우리의 본질이 과거에 비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히말라야의 대자연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진정한 유래'를 다시금 생각하며, 또한 히말라야의 눈부신 햇살과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내 자신의 발걸음 걸음마다 내가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봄과 동시에 앞으로 또 살아갈 나날들을 새롭게 그려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히말라야는 우리들의 삶을 조금은 덜 진부한 방향으로 이끌어 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단지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것뿐이다.

"인간은 비록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생물계의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먼 미래에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희망이나 두려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능력이 닿는 데까지 그 증거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정해야만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고귀한 자질, 가장 비천한 대상에게 느끼는 연민,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하등동물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 자비심, 태양계의 운동과 구성을 통찰하고 있는 존엄한 지성 같은 모든 고귀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신체 구조 속에는 비천한 기원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찰스 다윈,『인간의 유래
Ⅱ』, 572쪽)



어쩌면 히말라야를 찾는 이유를 내가 너무 거창하게 내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좀 더 보편적이고 단순하게 바꿔 얘기해 볼 수도 있다. 그저 산이 좋아 국내의 여러 산들을 두루 다녀오고 난 뒤에 좀 더 웅장하고 거대한 산을 오르고 싶은 단순한 희망 때문에 히말라야까지 원정을 나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힐링'을 목적으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오게 된다고도 말한다. 실제로 그 어디에서도 온전히 위로받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 오지에까지 끌고감으로써 뜻밖에 깊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또다른 이는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히말라야에는 수많은 트레킹 코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가끔씩은 고난도의 위험한 트레킹 코스를 일부러 찾아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다고 들었다. 그들중 일부는 가끔씩 트레킹 도중 조난을 당하기도 하며 구조대에 의해 간신히 목숨을 건지거나 끝내 목숨을 잃는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난다고 들었다. 이쯤되면 그들은 히말라야의 거벽에 도전하는 전문 등반가와 별로 구분이 안될 지도 모르겠다.

100여 년 전, 아무도 감히 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히말라야의 고봉인 낭가파르밧(8,125m)에 도전했던 '희대의 반항아'이자 '머메리즘'의 창시자인 알버트 머메리의 '범접할 수 없을만큼 도전적인 문장' 속에서도 히말라야에 오를 이유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문장 가운데 가장 온순하게(?) 느껴지는 한 대목인 '한걸음 한걸음이 건강이요, 재미요, 즐거움이다'라는 대목이야말로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타당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분명 '걷는 재미와 즐거움'을 뛰어넘는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곳 만큼 대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과 동시에 우리 존재의 현위치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드러내 주는 곳이 과연 얼마나 더 있을까.

한걸음 한걸음이 건강이요, 재미요, 즐거움이다

위대한 절벽과 광막한 침묵의 설원에 의해 솟구쳐오르는 독립과 자신의 감정은 그 무엇 전적으로 기쁘기만 한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건강이요, 재미요, 즐거움이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김이 솟아 오르는 골짜기의 가장 낮은 밑바닥에 달라붙는 추악한 독기처럼-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어떤 감정도 '우리 종족의 시조들처럼 충실한 동지들'과 더불어, 어느 냉혹한 절벽을 공격하러 전진하는 감정보다 영광스러울 수는 없다. 설령 바깥쪽으로 툭 튀어나간 기울어진 바위 선반 위에서 오로지 구두징 한 개의 마찰만으로 육체가 희박한 공기 속에 떨어져 내리는 것과, 영혼이 저 위 천국으로(그렇게 희망하자) 날아 오르는 것을 막고 있을 뿐일지라도 한 손의 손가락에 아직도 한 파티의 생명을 맡길 수 있고, 아랫도리에 '무릎이 풀어지는 공포'의 기미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통쾌한 일은 없다.
 - 알버트 머메리, <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中에서


사실 히말라야의 거대한 봉우리들이 빚어내는 장관에 비하면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조차 견줄 상대가 되지 않는다. 피라미드가 제아무리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건축물이라고 한들 고작 '어느 한 인간의 돌무덤'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얘기는 분명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그냥 놓아두라.

여러 민족들은 그들이 다듬어서 남긴 석재의 양으로 자신들에 대한 추억을 영구화하려는 광적인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차라리 그만한 노력을 자신의 품행을 가다듬는 데 바쳤다면 어땠을까? 한 조각의 양식良識은 달까지 솟아오른 기념비보다 더 기릴 만한 것이 아닐까?

제발, 돌들은 제자리에 그냥 놓아두라. 테베의 장관은 천박한 장관일 뿐이다. 인생의 참다운 목적에서 멀어져버린 100개의 대문을 가진 테베의 신전보다는 어느 정직한 사람의 밭을 둘러싸고 있는 자그마한 돌담이 더 의미가 있다. 야만스럽고 이교도적인 종교와 문명은 화려한 신전들을 짓는다. 그러나 기독교, 참다운 기독교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한 민족이 다듬는 돌은 대부분 그들의 무덤으로 간다. 그야말로 그들은 스스로를 생매장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야심한만한 멍청이의 무덤을 만드느라고 자신들의 전 인생을 허비하도록 강요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차라리 그 작자를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주어 뜯어 먹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했으리라. - 83쪽


저토록 현자다운 생각을 너무나 태연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소로가 '쓸모없는 노년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 대해 충고하는 말 또한 가슴깊이 새겨둘 만하다. 노년기에 미심쩍은 체력으로 뒤늦게 히말라야에 오르겠다고 나서봐야 다리만 후들거릴 뿐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은 맛보기 힘들 것이다. 

 

  

여행 의욕

물론 오래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쓸모없는 노년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P78)



한때 3년 동안이나 (정규 학교에 다디는 대신에) 가족들과 함께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것으로 공부를 대신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 또한 '삶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가 좀 더 우울한 어조로 표현한 말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시간은 마치 교도소의 간수처럼 몽둥이를 들고 우리의 등뒤에 서 있다.'

 

가장 심각하고 흔히 저지르는 어리석음

가장 심각하고 흔히 저지르는 어리석음은 '삶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준비하든 마찬가지다. 이런 준비를 시작하며 사람들은 완벽한 삶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완벽한 삶에 이르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그 계획에 비하면 삶은 너무나 짧다. 그런 계획을 실행하는 데는 짐작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 그런 계획은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자주 좌절을 겪고 장벽에 부딪혀 목표한 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게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미처 생각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다. 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무엇인가를 하거나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전과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온 생애를 바쳐 정성을 기울여 얻은 것을 노년에 이르러 즐기지 못하게 된다. 또는 그토록 어렵게 다다른 지위인데 감당할 처지가 못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런 것들은 너무 늦게 사람을 찾아온다. 아니면 반대로 뭔가 특별한 일을 해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려 했을 때는, 사람이 그 목표에 너무 늦게 도달한다.

 

 

어쩌면 나도 '히말라야'를 정말 갈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건 올해 2월 초순이었다. 이미 2005년과 2006년에 연달아 EBC(Everest Base Camp)와 ABC(Annapurna Base Camp) 코스로 트레킹을 다녀오신 선배 한 분이 올해 4월 하순에 히말라야 3대 트레킹 코스 가운데 하나인 Langtang을 가기로 했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나는 일고의 고민도 없이 거기에 '합류'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아직도 빈자리가 남아있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카트만두행 항공편을 예약했다. 정말 순식간에 결정이 났고 그날 이후로는 '히말라야'에 갈 날만 헤아리며 지내왔다.

우리 일행은 당초 7명이 출발하기로 했으나 중도에 사정이 생겨 2명이 빠지고 나중에 무려 5명이 더 합류하게 되면서 총 10명으로 불어났다. 비록 이번 트레킹 때문에 서로 난생 처음 만나는 분들도 있었지만 결국 알고보면 '친구의 친구'인 셈이었고, 또한 친구들 끼리는 보통 이삽십 년 이상씩 알고 지내온 터여서 '팀웍과 분위기'는 정말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우리 일행의 주축은 원정대장이신 장대장님이었다. 더군다나 그 분의 친구분('79학번 경영학과 동기생)이 마침 네팔 카트만두에서 목사님으로 활동하고 계셨고, 이번 히말라야 트레킹에 목사님께서도 네팔리(네팔 사람) 비서와 함께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 덕분에 네팔 현지에서의 모든 트레킹 준비(숙소, 가이드 및 포터 채용, TIMS 카드 작성등)는 목사님께서 도맡아 주셨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일행들은 그저 '항공편 예약'과 '개인 몸 만들기'와 '개인 준비물'만 갖추고 비행기에 탑승만 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비용'은 차마 '공개'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한 '실비'만 들었기 때문에 부담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최상의 조건'으로 트레킹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히말라야 원정에 관한 거의 모든 궁금증들은 '카톡 채팅방'을 통해 서로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좀 더 구체적인 정보들은 다음 카페『야크존』을 통해 각자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국내에서의 '예비 모임'은 세 차례 가졌는데, 우리 일행 가운데 마침 작년에 홀로 이십여 일에 걸쳐 ABC 라운딩을 다녀온 이○○ 상무를 통해 첫모임 때부터 '랑탕 지도'를 확보한 것을 비롯해서 '경험자들의 다양한 체험담'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어서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게다가 모임때마다 '술자리'를 옮겨가며 '팀웍'을 탄탄히 다진 덕분에 훗날(?) 네팔 히말라야에서 열흘 이상 함께 동고동락하는 데에도 든든한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걱정이 전혀 없었던 건 물론 아니다. 히말라야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같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제일 큰 걱정은 물론 '체력 문제'였다. 그 외에도 3,000m 넘어 5,000m에 가까운 고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고소 적응 문제'와 '식사 문제'도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에 물론 등산을 좋아하긴 했지만 최근에는 산을 찾는 횟수가 해마다 손으로 꼽을만큼 뜸했던 데다가 트레킹을 앞두고도 별달리 '몸 만들기'에 적극 나서지도 못한 터여서 과연 열흘에 가까운 기간 동안 내내 고된 산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고소 적응 문제'와 함께 현지에서 직접 맞닥뜨려 볼 작정이었다. 산길을 오래 걷다보면 혹시 저절로(?) 다리에 힘이 붙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허튼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여행 출발을 열흘 정도 남겨두고 준비물 리스트를 출력해 보니 생각보다 이것저것 새로 사야할 물건들이 엄청 많았다. 침낭과 자켓, 등산화 등 기본적인 등산용품들은 기존에 갖춘 게 있으니 새로 구입할 필요가 없었으나, 카고백을 비롯하여 기능성 셔츠와 바지 등 여벌의 등산복과 기능성 내의 및 고소내의, 헤드랜턴과 선글라스 등등을 준비하느라 당산동에 위치한 OK아웃도어닷컴을 세 번씩이나 다녀와야 했다.

출발 이틀 전에 환전을 하고 밑반찬과 초콜릿 등 먹거리를 비롯, 두통약과 감기약 등 구급약품을 갖추는 것으로 준비를 마치고 카고백에 짐을 꾸려보니 거의 20kg에 육박했다. 물론 내가 메고 갈 배낭과 그 속에 담아갈 카메라 등을 제외한 무게였다. 히말라야 트레팅이 난생 처음이라 준비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쉽사리 제외하거나 줄이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네팔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우리 일행 모두가 한꺼번에 카고백을 열고 '불필요한 짐 줄이기 작업'을 거친 덕분에 각자 어느 정도씩은 무게를 줄일 수 있었다.

우리가 다녀올 코스는 대략 샤브루베시를 출발해서 랑탕계곡을 지나 캉진 곰파까지 올라간 후, 거기서 체르코리(4,984m)와 랑시사카르카(4,160m)까지 갔다가 다시 샤브루베시로 하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지에서의 '컨디션'을 봐가면서 하산하는 길에 고사인쿤드(4,380m)까지 오를 수 있겠다 싶으면 '거기까지' 돌고 오자는 것이었다.


 - 랑탕 / 헬람부 / 고사인쿤드 지도



 - 우리가 실제로 트레킹한 코스(빨간색 점선)




위의 지도에 표시된 '경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일행은 결국 캉진 곰파를 거쳐 '체르코리'까지만 오르고, 하산하는 길에 오르기를 원했던 '고사인쿤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물론 '현지'에서의 상황이 우리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했기 때문이지만, 그 대신 우리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일정을 무려 3박 4일씩이나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의 일정표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겠지만 우린 예정보다 무려 3일이나 앞당겨 카트만두에 도착하게 되었고, 무척이나 매력적인 네팔 제2의 도시인 '포카라에서 1박 2일', 그리고 '카트만두 시내에서 하루'를 더 마음 내키는 대로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몰론 '히말라야의 품속'에서 생각보다 너무 일찍 떠나온 점에 대해서는 각자 마음속으로 적지않은 미련도 있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도 좀처럼 가기 힘든 먼 나라 네팔에 와서 '랑탕 트레킹 & 포카라 관광 & 카트만두 관광'을 한꺼번에 모두 즐겼으니 아쉬움보다는 만족감이 훨씬 더 컸던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우리가 이토록 자유롭게 일정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네팔에서 14년째 살고 계셔서 '현지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는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이고(모든 추가비용은 우리가 쓰는 만큼만 지불하면 되는 시스템이었고, 항공편과 전용차량, 숙소 및 음식점 예약 등 가이드로서의 모든 역할은 목사님이 도맡아 주셨다.), 또다른 한가지는 우리 일행들간의 '의견통일'이 비교적 아주 원할하게 이뤄졌기 때문이었다.

 - 우리 일행들의 '실제 일정' 요약  
 



- 네팔 카트만두에 착륙하기 몇십분 전부터 '히말라야'의 거대한 산맥이 마치 '구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 숱한 등반가들과 트레커들이 드나들었던 '카트만두'에 마침내 착륙하기 직전.



 - 카트만두 트리뷰반 국제공항, 전용차량에 카고백을 옮겨싣는 모습.



 - 카트만두 시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동네에 위치한 '전용 숙소'



 - 현지 가이드 '텐디'와 장대장님이 '트레킹 코스'에 대해 심각하게(?) 협의 중.



 - 타멜로 이동, 음식점 『빌라 에베레스트』에서 점심 겸 저녁 식사
    내일까지는 '이동'만 있을 뿐 산행이 없는 관계로 단합을 위해 '폭탄주' 한잔씩 만드는 중.



 - 식사를 마치고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인 '타멜' 시내를 구경하는 중. (네 분은 고교 동기생)



 - '정품'만 취급한다는 캐시미어 제품 매장에 들러 물건을 만져보는 중, 오늘은 '구경'이 주목적.
    히말라얄를 다녀온 뒤 목사님 사모님을 대동하고 이 가게에 다시 들러 가디건을 몇 벌 샀다.
    품질좋은 캐시미어 제품들이 국내가격의 1/3∼1/5에 불과하기 때문에 네팔 제품 가운데 특히 인기가 좋다.



 - 레코드가게 앞에서 촬영한 타멜 거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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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히말라야로 들어서다.
    from Value Investing 2013-06-03 14:15 
    오늘은 드디어 '히말라야'에 오르기 위해 '카트만두에서 샤브루베시까지' 이동하는 날이다. 어제밤 타멜 시내에서 일찍 돌아온 이후 일행중 몇몇이 모여 숙소에서 밤늦게까지 술잔을 더 나눴었다. 오늘까지도 '이동'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나중에는 애주가 한 분이 한국에서 준비해온 '커티샥'까지 아낌없이 비웠다. 작년에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다녀온 이○○상무의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담이 한참이나 이어졌고, 그밖에
  2. 다시『월든』을 만날 시간
    from Value Investing 2013-12-10 01:18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 *(『주석달린 월든』 31쪽)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책은『월든』과 『주석달린 월든』달랑 두 권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한꺼번에 무려 여덟 권을 더 샀었다. 그때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예정이었던 히말라야 트레킹 때 짐꾸러미에 챙겨 넣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소로우가 쓴 책이라면 따져볼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빈 손으로 갔지만 앞날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시없는 보물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우리 인생의 새 장이 열렸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있다."
 - 모리스 에르조그(1950년 인류 최초로 고도 8,000미터가 넘는 안나푸르나에 오른 프랑스 원정대장)

 * * *



세상은 참 넓고 가보고 싶은 데도 참 많은 것 같다. 세상의 수많은 오지와 극지 가운데 히말라야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곳도 드물지 싶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우연히 '안나푸르나 원정에 성공한 어느 등반대의 사진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마도 '히말라야에 대한 동경'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후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가 1994년에 '암벽등반'에 도전하기 위해 코오롱 등산학교를 다니면서 다시금 '히말랴야'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어느새 '히말라야 14좌'로 불리는 산들의 이름과 고도는 물론 초등자까지도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 후 히말라야는 그저 막연히 오르고 싶은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곳은 언젠가는 기필코 가봐야 할 곳으로 변했다. 


(코오롱 등산학교 교재 중 일부)

등산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마침 '에베레스트 원정'을 다녀오신 정갑수 선생님께서 직접 우리반 학생들을 위해 '에베레스트 사진'까지 사다 주셨다. 그 멋진 선물을 받은 나는 두루마리 사진을 들고 동네가게로 달려가 얼른 유리액자에 담아서 내 방 책상 위에 걸어두고서 언제까지나 '그곳'을 가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히말라야'를 드디어 내일 찾아가게 된 것이다.


(내 방 한켠에 십수년째 '변함없이' 걸려 있는 히말랴야 사진)



(책상위에 반듯하게 걸려있는 에베레스트 사진)



(제목 그대로 'Top of the World', 실로 오랜만에 액자를 벽에서 떼어 내려놓아 보았다)



(해발 5,545m에 위치한 칼라파타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 로체, 눕체)


금년 2월경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최종 결정하고 난 뒤 별다른 준비도 없이 막상 장거리 산행을 떠나자니 일말의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산행 준비를 하는 과정 자체가 걱정보다 즐거움과 설렘이 앞섰다.

침낭은 오래전 등산학교에 다닐 때 쓰던 게 상태가 너무 좋아 그대로 쓸 수 있지만, 해발 4,000m∼5,000m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고소 내의'를 비롯한 여러가지 준비물들이 적지않이 필요한 것 같다.




무엇보다 높은 고도에서의 희박한 산소 때문에 겪게 마련인 '고산병'이 걱정이다. 입맛도 떨어지고 무기력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이런저런 밑반찬까지 준비하다 보니 '짐'이 장난이 아니다.

 




저 많은 물건들을 트레커들이 직접 힘겹게 지고 올라갈 수는 없다. 다행히 20kg에 가까운 짐도 '포터'를 고용하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해서 무거운 망원렌즈는 물론 삼각대까지 챙겨넣었다. 내 짐을 지게 될 포터에게는 팁이라도 좀 더 줘야 할 지 모르겠다. 내가 메고 갈 배낭은 딸랑 40리터 짜리에 불과하다.





히말라야는 정말 오랫동안 '신들이 사는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발길을 허용한 지가 겨우 수십 년에 불과하다. 그 지난한 도전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등반객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 많은 이들은 아직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거기에 묻혀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알버트 머메리이다. 그는 '머메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인데 그의 주장은 다음의 한마디로 요약된다.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로 올라라!"

그는 '등정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지독한 독서광이기도 했다. <산업생리학>(1891)이라는 경제학 저서를 직접 출판하기도 했으며 워즈워드와 테니슨의 시를 읊조리고,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그리스 신화에서 구약과 신약을 거쳐 조로아스터교에 이르기까지의 성전(聖典)들까지 들먹이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여러 해 전에 불세출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머메리의 경제학 저서 및 그의 이론'이 수십페이지에 걸쳐서 매우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다!

그가 쓴 '산악문학의 걸작'이 바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라는 작품이다.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희대의 반항아는 결국 1895년 6월에 그 당시로서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낭가파르밧을 오르기 위해 인도의 봄베이로 떠났지만, 두차례의 등정 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해 친구들과 헤어진 뒤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능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마지막 장은 마치 그의 유언처럼 들린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머메리가 쓴 책의 서문에는 그가 낭가파르밧에서 부인에게 부친 편지내용도 실려있다. 그는 희대의 반항아다운 고별사를 남겼다.

"우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설령 낭가파르밧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조금도 없소."



(낭가파르밧은 머메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머메리는 '길이면 가지 말아라'라고 말한다. 그가 남긴 이 한 마디야말로 알피니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며, 몇년 전 안나푸르나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의 위대한 산악인 박영석 대장 역시 머메리와 똑같이 아직도 히말라야에 묻혀 있다.

세상엔 그 어떤 스토리보다 더욱 감동적인 '위대한 실패'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끝끝내 살아 돌아온 위대한 성공도 빼놓을 순 없다. '아직도 살아있는' 라인홀트 메쓰너 역시 히말라야 등정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나는 수많은 산악인들이 끊임없이 도전했던 8,000m급 고봉을 오를 능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이번에 히말라야를 가더라도 고작(?) 5,000m 정도까지만 오를 작정이지만 그래도 열흘 정도는 매일 고된 산길을 걸어야 하고 계곡을 건너야 한다. 때로는 가파른 설산을 걸어 올라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염려해 주시는 만큼 나 스스로도 무사히 다녀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시 또 일상으로 무사히 복귀해서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또다시 더 멋진 곳을 계속 찾아나설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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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드디어 네팔이다.
    from Value Investing 2013-06-03 14:11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2. 다시『월든』을 만날 시간
    from Value Investing 2013-12-10 01:18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 *(『주석달린 월든』 31쪽)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책은『월든』과 『주석달린 월든』달랑 두 권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한꺼번에 무려 여덟 권을 더 샀었다. 그때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예정이었던 히말라야 트레킹 때 짐꾸러미에 챙겨 넣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소로우가 쓴 책이라면 따져볼
  3. 영화 <히말라야>와 '히말라야의 눈물'
    from Value Investing 2015-12-23 17:41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 알버트 머메리(1855∼1895) * * * 영화 <히말라야>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왜 산을 오르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많은 걸 보면 산을 찾는 마음을 이해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삶의 전부를 걸고 히말라야의 험준한 고봉을 오르기 위해 애쓰는 산악인들의 심정을 보통 사람들이 가슴 깊이
  4. 아... 히말라야...
    from Value Investing 2018-10-17 01:31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 알버트 머메리(1855∼1895) * * * 저 멀리 히말라야에서 또다시 비보가 날아들었다.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원정 대원들과 현지 가이드를 포함해서 9명이 모두 시신으로 발견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그나마 시신 수습은 신속하게 이뤄져 벌써 내일 새벽이면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 최초로 무산소 히말라야 8000m급
 
 
blanca 2013-04-2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oren님 그저 감탄사가... 정말 가시는군요! 아무쪼록 건강히 잘 다녀오시고 근사한 등반기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고되지만 그에 못지않은 oren님 만의 환희도 느끼실 거라 생각돼서 부럽네요.

프레이야 2013-04-26 0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오렌님 건강히 잘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등정후기 기대하고 있어야겠어요.^^

oren 2013-04-26 0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반갑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지금 인천공항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잘 다녀오겠습니다.

oren 2013-04-26 0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오랜만이네요..다녀와서 사진이 정리되는대로 후기를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hnine 2013-04-26 0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오랫동안 하나의 꿈을 위해 준비해오셨군요. 잘 다녀오세요. 참 멋지게 사십니다!

oren 2013-05-15 12:38   좋아요 1 | URL
hnine님 반갑습니다.
맞아요. 히말라야에 오르는 건 제가 정말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하나의 꿈'이었답니다. ㅎㅎ

숲노래 2013-04-26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겁게 마실하시고 아름다운 사진과 글로 이야기 남겨 주시겠지요?

네팔 히말라야 오르신 뒤,
이웃나라 부탄 팀부에 들러
예쁜 사람들 만나면
좋은 마음 더 맑게 북돋우시리라 믿어요.

저희 식구는 다른 어느 곳보다 '부탄'을 가고 싶은 꿈이 있어요 ^^

oren 2013-05-15 12:43   좋아요 1 | URL
함께살기님처럼 자연과 사람을 따뜻하게 사랑하시는 분과 함께 히말라야에 갔더라면 더욱 좋았겠다 싶은 생각도 해봤답니다. 부탄 사람들이 삶의 만족도가 세계 최고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네팔 사람들도 다들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박한 삶을 긍정하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언젠가는 함께살기님 가족분들도 '부탄'에 꼭 갈 수 있으리라 믿고 성원할께요~

페크pek0501 2013-05-03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oren 2013-05-15 12:45   좋아요 1 | URL
페크님 오랜만이네요. 사진을 수백컷 담아 왔는데 버릴 건 버리고 고를 건 고르느라 요즘 애를 먹고 있습니다.
이달 중으로는 정리해서 글과 함께 올려보고 싶네요.
 

 

일본만큼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웃나라도 드물지 싶다.

한때는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오르는 게 거의 확실해 보일 때도 있었던 나라였고, 2차 세계대전때는 최강국 미국을 상대로 겁도 없이 '건곤일척'을 겨뤘던 나라이고, 지금도 여전히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수준에 다다른 선진국이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배뿐만 아니라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보상 문제까지도 해결하지 못해 서로 불편한 관계에 머물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한일간 축구경기는 여전히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자국의 축구선수가 해외에서 어떻게 활약하느냐에 따라 묘한 민족감정에 곧바로 휩싸이는 경우도 적지않을 만큼 우리에겐 '일본한테는 결코 질 수 없다'거나 서로 '상대가 잘 되는 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뿌리깊은 앙숙관계의 감정도 남아 있다. 일본인들이 꽤 오래 전부터 노벨상 수상자를 꾸준히 배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경쟁상대와는 비교하기 힘든 '현실적 격차'를 묵묵히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떡하든 그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미래를 열망하며 우리를 달래기 바쁘다.

비록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국가간 힘'의 대결에서는 일본에 절대적인 열세를 보여온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겐 묘하게도 '일본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결코 열등감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민족적 자긍심만큼은 우리가 오히려 일본사람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정들은 근래의 욘사마와 지우히메로부터 시작된 엄청난 한류열풍이 큰 몫을 보탰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 버블경제의 붕괴에 뒤이은 '잃어버린 십년'과 더불어 꾸준히 경쟁 상대인 이웃나라 한국에게 여러 '추월'을 허용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이젠 어엿이 일본의 막강한 제조없체들마저 뛰어넘기 시작했고 또 얼마쯤은 상대를 내려다보는 경향마저 내보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이토록 다양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내가 처음 가본 건 1995년이었다. 그 때 받은 첫 인상 역시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토록 가까운 이웃이 이토록 놀라운 선진국이라니......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또 뭔가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아 보이고 또 그들을 한시바삐 따라잡았으면 싶기도 하고... 1996년에는 선진국 일본의 보안경비업체인 SECOM과 TOYOTA 자동차 등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 뛰어난 회사였고 그때까진 정말 너무 완벽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일본의 저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리고 나는 그후 오랫동안 일본을 더이상 가보지 못했다. 여러번의 기회가 매번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속칭 일본말로 '나가리'가 되고 말았다.(이런 일본어를 말하고 듣는 게 좀 불편하지만 이럴 땐 한 번쯤 글로 써보고 '묘한 반감'도 느껴보고 싶다.)

어쨌든 그런 일본을 이번에 세 번째로 다녀왔다.(가족들과 함께 일본에 가는 것은 처음인 셈인데, 일본어에 능숙한 옆지기는 처녀때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한 적도 있었고, 예전에 장모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다녀온 것까지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쯤 가는 셈이라고 한다.) 이번 여행은 실로 몇 년만에 가족들과 함께 한 '힐링' 목적의 여행이었으므로 사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복잡한 감정들은 멀찌감치 한켠으로 밀어내고 그저 '푹 쉬다' 오고 싶은 마음만 앞섰다. 특히나 일본 오키나와는 본토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 일본 열도의 남단인 규슈에서도 685km나 남쪽으로 떨어진 섬이고, 1879년에 일본에 복속되기 전까지 450년 동안 '류큐왕국'으로 있었던 나라인 만큼 '언어'조차 서로 다른 게 많다고 한다. 평화롭기만 할 것 같은 이 섬조차 알고 보면 격렬한 전쟁도 많이 치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1973년까지 미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일본에 환수되는 등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섬이기도 하다.

이번에 오키나와에 처음으로 가보니 과연 그곳은 본토와는 너무나 달랐고 외관상으로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남태평양의 환상적인 섬'일 뿐이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낮기온은 벌써 24도까지 올라갔고 반팔을 입고 다녀도 무방할 정도로 온화한 기후 때문에 여행 내내 기분이 정말 좋았다. 1월 하순임에도 벌써 벚꽃은 활짝 피었고 가는 곳마다 야자수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는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았다. 어딜가나 깨끗한 거리와 친절한 사람들과 깔끔한 음식은 기후만 닮은 여타의 '동남아'와는 차별되는 또다른 매력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찾는 해외 관광객이 한 해 1,000만 명쯤 되는데 제주도보다 면적이 좁은 '오키나와'에만 한 해에 500만명 이상이 찾는다고 한다. 그 단순한 수치 하나만으로도 많은 걸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쨌든
이번 여행을 다녀오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내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마침 어제 졸업식을 마친 아들 녀석이 '2013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더라면 여행이고 뭐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테고 집안 분위기는 한겨울 추위보다 더 썰렁했을지 모른다. 그동안 공부를 안한다고 우리 식구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구박도 참 많이 받았던 녀석이 그런 수모(?)를 용케 잘 견뎌내고 어엿이 대입의 관문을 씩씩하게 통과했으니 그런 다행이 없고 아빠로서 그저 고맙기만 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재수'는 '벌금 3,000만원에 집행유예 1년'이라던데, 거기에 비하면 '3박4일의 가족여행'은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지출인 셈이었다.

우리 가족은 셋째날 '자유일정'을 하루 온종일 도카시키 섬으로 건너 가서 '에메랄드빛 바다'만 바라보며 '힐링'을 제대로 느껴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비수기'인 요즘에 그토록 조용한 섬을 찾는 관광객이 우리 가족 넷 말고도 딱 한 분 더 있었다. 그 분은 '동경'에서 '저가 항공편'을 이용해서 오키나와의 이곳 저곳을 여행중이었는데 마침 우리 식구들과 이용하는 배편이 똑같았다. 아침 첫 배편(09:00)으로 들어가서 그 섬에서 마지막 배편(17:00)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분은 나중에 도카시키섬의 아하렌 비치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쳤고 우리에게 '특별히 유용한 정보'를 알려 주기도 했다.

인천에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꿈의 산호섬' 오키나와를 사진으로 보여드리기 위한 서설이 너무 길었다. 여러모로 힘들고 추운 겨울이지만 오키나와는 너무 따뜻했다. 우리 아이들도 이번 여행이 정말 좋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언젠가 꼭 다시 오키나와를 가보고 싶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 * *


1. 오키나와에서 꼭 가봐야 할 곳, 만자모(万座毛)의 코끼리바위



2. 오쿠마 비치에 있는 오쿠마 리조트




3. 오키나와 해양박람회(EXPO) 기념공원내 츄라우미 수족관




4. 츄라우미 수족관을 대표하는 길이 8m짜리 고래상어




5. 오키나와월드에 있는 길이 5㎞인 석회동굴 옥천동의 '황금의 잔'




6. 오키나와의 특산물 '고구마 과자' 상점




7. 나하시내 대형서점




8. `기적의 1마일`이라 불리는 길이 1.6㎞ 왕복 2차 도로, `국제거리`


9. 나하 국제거리에 있는 대빵야끼 전문점




10. 호텔 창문으로 바라본 오키나와의 3일째 아침 풍경




11. 고속훼리를 타고 도카시키 섬으로 이동하는 중




12. 토카시키항에서 아하렌 비치로 이동하는 '시골버스 운전사' 할아버지, 요금은 편도 1인당 ¥400




13. 바다빛깔이 환상적인 아하렌 비치




14. 드넓은 해안에 딸랑 우리가족 넷이 전부




15. 한참만에 나타난 일본인 모녀




16. 더 멋진 '프라이빗 비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일본인 관광객




17. '프라이빗 비치'의 바위에 올라선 딸




18. 예쁜 조개껍질을 줍는 중




19. 아하렌 비치에서 딱 한 곳뿐인 레스토랑, 소바와 돈까스가 둘 다 맛이 꽤 좋았던 곳.




20. 석양을 뒤로 하고 다시 오키나와 항구로 들어오는 중.




21. 3일째 저녁, 나하시내 선술집(이자카야) 풍경




22. 후쿠슈엔(福州園), 류큐왕국이 번성할 때 중국 후쿠슈시(福州市)와의 교역과 우호를 기념해서 조성한 공원




23. 나하 공항 근처 아시비나 아울렛




24. 오키나와를 떠나며......




25. 아하렌 비치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들




26. 오키나와에서 행운의 상징인 ‘별 모래’ 열쇠고리, 아주 작은 모래가 진짜 별모양을 닮았다.




※ 알라딘 독자들을 위해 직접 담아온 동영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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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2-08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본에 가면, 훗카이도와 오키나와 두 곳에 가고 싶은데,
이렇게 사진으로 보아도 참 즐겁네요.
오키나와에서는 어디를 가도 다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사탕수수도 드셨나요?
오키나와 다녀온 분들로서는 오키나와 사탕수수로 졸인 천연설탕(흑당)이 참 좋은 선물 아닐까 싶어요.

식구들 얼굴이 모두 부드럽고 아늑하네요.

oren 2013-02-09 17:04   좋아요 0 | URL
오키나와는 어딜 가나 사탕수수밭을 볼 수 있더군요. 한때는 전세계 흙설탕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고도 하구요.. 사탕수수로 흑당을 추출하는 곳도 들렀는데 미처 맛도 보지 못했네요.. 우리 딸도 '사탕수수즙'을 먹어 봤어야 했다고 하더군요... ㅎㅎ
함께살기님께서도 나중에 가족분들과 함께 오키나와에 꼭 가보시기를 바랄께요.. 그리고 사탕수수즙도 실컷 드시고 오시고요...

라로 2013-02-0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동영상까지!!!! 정말 멋져요!!! 저희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꼭 오키나와에 가야겠어요!!^^
그런데 사모님이 일어를 잘 구사하시는군요!!!일본에서 직장생활까지 하셨다니 정말 잘 하시겠어요!!!
아드님 졸업겸 입학 기념 여행이셨나요???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아드님 그동안 고생 많았군요!! 이제 따님 차례인가요???ㅎㅎ
저도 이렇게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게 딸아이도 고딩이에요,,^^;;;
오렌님의 페이퍼를 보고 오키나와 여행에 참고해야겠어요!! 그런데 미국에선 테판야끼라고 하는데 일본에선 대빵야끼라고 하나봐요???ㅎㅎㅎ
대형서점은 정말 부럽네요!!! 더구나 어쩜 그렇게 정갈하게 정리가 잘 되어있을까요!!!@@
요즘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주완수 교수의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 일본인들의 좋은 점을 많이 써서 그런지 일본이란 나라의 저런 모습을 보면 좀 감동스러워요. 선진국의 저력이 느껴진달까요???아무튼 훌륭한 페이퍼 감사드려요.^^

oren 2013-02-09 17:35   좋아요 0 | URL
나비님 친구분이 마침 오키나와에 계시니 언제라도 꼭 가보세요.. 오키나와를 찾는 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분들의 친척•친지•친구분들이라고도 하더라구요. 미군부대가 많은 도시엔 우리나라 이태원처럼 아메리칸 빌리지도 있더라구요.

나비님 따님도 어느새 고딩이군요..제 딸도 올해 고3 수험생이 된답니다. 고딩때는 '인생에서 한번쯤' 죽어라 공부할 만한 가장 좋은(?) 때인만큼 누구라도 후회없이 열심히 공부해야 겠지요..

일본은 서점수가 지금도 15,000여 개쯤 된다고 하던데 우리나라는 고작 1,700여 개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 무척 놀랬어요.. 제주도보다 작은 오키나와에도 저렇게 큰 서점이 있는 걸 보고 엄청 놀래기도 했구요.

일본인들의 저력은 철두철미함과 꼼꼼한 일태도에서도 찾을 수 있을 듯싶어요 지금도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데, 그건 일본이 대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와 수많은 전쟁 등을 치르면서 '기술'만 있으면 어떤 일이 닥쳐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했기 때문이래요..일본인들은 가업을 물려줄 때조차 혈통보다 기술이 뛰어난 인물을 더 우선시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한대요.

노이에자이트 2013-02-09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키나와는 조개껍질을 가져가는 것에 별다른 제재를 안 하는 것 같군요.지역에 따라서는 외부반출을 엄금하는 곳도 있던데요.

oren 2013-02-12 23:55   좋아요 0 | URL
네..ㅎㅎ

LAYLA 2013-02-1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훈가족이네요..늘 가보고 싶어하면서도 비싸서 망설였던 곳인데 엔화가 약해지고 있으니 1-2년 쯤 뒤에 가볼까 싶었어요. 음식도 맛있나요??ㅎㅎㅎ

oren 2013-02-12 23:58   좋아요 0 | URL
엔화가 최근에 부쩍 약해졌지요. 동남아 여타 지역보다 그리 비싸지는 않은 듯해요.
음식은 동남아 여느 지역보다 훨씬 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다고 봐요.
단 한 가지, 이번에 특히 일본 사람들이 음식을 생각보다 짜게 먹는다는 사실에 쬐끔 놀랬어요.

BRINY 2013-02-10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2월말에 부모님과 함께 오키나와여행 가려고 하는데, 배를 타는 것도 좋아보이네요. 다리로 연결된 섬에만 가볼까 했는데, 부모님이 한시간 배 타도 괜찮다고 하시면 아하렌 비치도 고려해봐야 겠습니다.

oren 2013-02-13 00:01   좋아요 0 | URL
도카시키섬으로 가는 배편은 유람선은 편도 1시간 40분쯤 걸리구요. 제가 탔던 고속훼리는 편도 40분이면 도착한답니다. 우리가 도카시키섬에 갔을 땐 갈 땐 40분 만에 도착했으나, 되돌아오는 길엔 파도가 제법 거칠어져서 '안전한 길'로 우회하다 보니 50분쯤 걸렸어요.

다크아이즈 2013-02-1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무척 보기 좋습니다.
울 남푠도 아들 입시 끝나는 올 겨울 일본 가자 해놓고 안 데려가네요.
하기야 제가 일을 저지르면 되지만 그조차 귀찮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네요.ㅠ
울 아들은 집구석 왕자로 변신해 스맛폰으로 게임만 열중하옵니다. 이제 입학 보름 남았다고 아쉬워하네요.
오렌님 아드님은 오렌님 닮아서 책도 열심히 읽지요?
동영상까지 즐감하고 갑니다. 부러운 눈을 하고서^^*

모르세 2013-02-2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보고 갑니다.즐거운 시간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