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엔 공포 이야기가 제격이다. 요즘은 밤에도 그렇게 시원하지 않아서 선풍기 틀어놓고 누워서 책 보다가 불 끄러 가기 싫어서 괜히 더 보다가 늦게 자곤 했다. 무서운 이야기를 읽었는데 꿈이라곤 하나도 안 꿨다. 세상에, 너무 피곤했나봐....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어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하필 그 문어는 며느리가 있는 방에 들어갔고, 장지문에 비친 문어 그림자는 외간 남자처럼 보였다. 너무나도 쉽게 며느리는 부정한 여자라는 누명을 쓰고 시댁에서 쫓겨났다. 아무도 그 외간 남자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며느리의 이야기도 듣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귀신이라고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 아니었던가. 일제강점기가 끝났을 무렵, 바닷가 마을에 있는 신씨네 가문은 그 지역의 유지였다. 하지만 십여 년 전에 며느리와 손자를 제외한 집안 식구들이 모두 행방불명된 이후 방계 친척 일호가 그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신씨네 저택에 들어왔다. 그 집에는 며느리와 아들, 며느리를 모시던 하녀의 딸만이 살아남아 일호와 함께 살았다.
신씨네 종손인 영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가문의 명맥을 잇기는 어려울 듯 했기에 신식 병원에서 진료를 위해 간호사인 에스더를 데려왔다. 일호는 입원을 권하는 에스더에게 영휘가 혼인한 뒤 아이가 생기면 그 때 병원에 가겠다고 한다. 한 개인의 건강이나 생명보다 집안의 대를 잇는 것이, 집안의 평판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정에 영휘의 엄마인 서천댁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건 방계일지라도 남자인 일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계에 구멍을 낸 건 새로 온 며느리와 영휘 행세를 하게 된 지겸이었고, 아예 허물어 버린 건 외부의 존재였다. 마지막까지 대를 잇겠다는 대의(?)를 위한답시고 추잡한 속내를 숨긴 일호와 노동자를 위하는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며느리의 희생에 눈을 감고 동지를 모른 채 한 지겸의 말로는 아쉽지 않았다. 다만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의 공존은 요원한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인간은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를 갈라 배척하고, 인간 아닌 존재도 배척한다.
에도 시대 괴담들 중 일본괴담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을 선별해서 모아 둔 책이다. 각 이야기 끝에 출처를 적어두었고, 삽화도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유명한 이야기들도 있고, 아는 이야기들도 있었는데 에도 시대 역시 조선 시대와 비슷하게 속박당하는 여자들이 원혼귀가 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까웠다. 게다가 지배층들이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옥죄는 경우가 많아 그들의 원한 역시 사무쳤다.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도 있었고, 전쟁 때 죽은 원혼들이 비파를 타는 승려를 홀려 버린 이야기도 있었다.
심지어 너무 사랑해서 여자가 자신의 머리(머리카락이 아닌 머리)를 잘라 들고 다녀 달라는 이야기는 너무 끔찍했다. 스님에게 집착한 여자 요괴 이야기 역시 끔찍했다. 인과응보에 관한 이야기들은 권선징악 혹은 개과천선과 연결되어 통쾌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에도 시대 때 방귀를 대신 뀌어주던 직업인 '헤오이비쿠니' 이야기도 있었으면 했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대신 방귀를 뀌었다 하고 멸시 받은 사람도 있을텐데 말이다.
어쨌든 바람 피우지 말고, 다른 사람 억울하게 만들지 말고, 정신 차려서 귀신에게 홀리지 말아야 괴담을 계속 읽을 수 있겠지.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들을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코스믹 호러 계열이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의 존재가 어떻게 우리의 세계에 침투하여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가.
<우주에서 온...>에서 외계 존재는 인간을 아주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계속 한숨을 쉬며 너네가 모자라서 그렇다느니 다 알면서 와 놓고선 왜 폐를 끼치냐며 쏘아대는데, 마치 진상 민원인을 보는 것 같아서 소름끼쳤다. 외계 존재인데 왜 인간 같지?
<나와 세그웨이 트윈테일과 동생>은 너무 짠하고 웃겼다. 웃픈 괴담 같은 이야기라고나 할까. AI가 작가 지망생인 '나'의 글들을 아무리 솎아내고 엮어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다니... 반성문이라도 잘 썼다는 게 어디인가. 창작의 고통이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자살강자>는 시간에 갇혀 같은 날을 사는 '나'가 고통 없이 죽기 위해 실험하는 내용이 안타깝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죽고 싶도록 만드는 걸까. 그 시간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수많은 '나'의 죽음은 해답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죽고 싶은 걸까,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걸까.
<점례아기본풀이>는 우리네 무가(巫歌)와 크툴루 신화를 결합한 이야기다. 처음엔 진짜 있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유교를 숭상하는 시대에 무당이란 한없이 비천한 존재이니 그들이 어떤 희생을 치르든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생을 떠넘겨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다. 하나의 종교로 자리잡지 못하고 미신으로 치부되는 민속신앙이 좀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하긴, 크툴루 신화에서 인간이 뭐 그리 중요한 존재겠는가.
<경성지옥>은 제국주의에 희생된 식민지의 참상을 지옥에 빗댄 이야기이다. 조선의 신묘한 기물들을 수집하여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고자 하는 키하라.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끔찍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을 열고 본 곳은 지옥이었다. 지옥이란 인간군상들이 만들어 낸 '형상(形象)'이라지만 우리는 언제쯤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역시 사람이 제일 무섭다. 사람이 불러 온 온갖 욕망들이 불행을 몰고 오고, 엄한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 뒤 결국 그 욕망에 잡아먹힌다.
누군가와 사주를 바꿔 목숨을 이어간다든지, 절대 풀려나서는 안 될 귀신을 봉인한 산에서 지킴이로 사는 사람들 이야기 같은 것들은 괴담 읽는 재미를 쏠쏠하게 느끼게 해줬다. 명품을 싸게 살 수 있다기에 간 중고샵에서 사람이 사라진다든지, 아들을 낳게 하기 위해 손녀를 무당에게 몰래 보낸다든지, 이기적인 이유로 불법 입양해서 아이를 학대하는 이야기들은 괴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현실 같아서 끔찍했다.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는 인간이 아닌 존재와 조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