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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천국 가는 날
전혜진 지음 / 래빗홀 / 2025년 4월
평점 :
내가 어릴 때, 아직 김밥천국이 없던 시절에 내가 좋아하던 곳은 유가네 닭갈비와 장우동이었다. 장우동을 기억하시는 분 있으려나. 거기 우동을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유가네 닭갈비의 닭야채볶음밥. 밥과 감자사리(쫄면사리)를 함께 볶아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는 음료수도 하나씩 그냥 줬는데 탄산음료랑 물김치랑 밥이랑 같이 먹으면 배가 빵빵해졌다. 물론 돈이 없어서 닭갈비볶음밥을 먹지는 못했고 늘 닭야채볶음밥만 먹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장우동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엔 김밥천국 등 김밥이 들어간 분식집들이 늘어났고 소풍 때나 먹던 김밥을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김밥천국의 장점은 메뉴가 많다는 거였고, 단점은(남편 말로는) 메뉴가 많기에 특별히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에 크게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차피 내 입이 맛을 평가하기엔 너무나 짧아 그래그래 하며 넘어갔다.
대학 다닐 때에도 돈이 없는 우리는 분식집을 자주 갔는데, 떡볶이며 순대볶음이며 이것저것 시켜 배부르게 먹고 나도 4명이 2천원 정도만 부담하면 충분했다. 김밥천국이란 그런 곳이었던 것 같다. 배 고프고 힘들 때 한 끼라도 먹을 수 있는 곳, 다양한 메뉴가 있어 고민하며 즐겁게 상상할 수 있는 곳.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오르는 물가에 밖에서 먹는 한 끼가 부담스러운 학습지 교사 은심이나 시청 공무원으로 상사들의 헛발질에 시달리고 민원인들의 욕을 먹는 은희나 암 말기에 효과 없는 항암치료를 받는 진수나 성범죄의 희생자이나 좁은 동네에서 가해자의 평판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 수연은 김밥천국을 찾는다. 그들은 각자의 추억을 곱씹고 힘들었던 일을 털어내고 부숴버리겠다는 복수의 감정을 딛고 웃어버리는 마음을 음식에 투영했다. 그래서 치즈떡볶이나 김밥, 김치만두나 육개장이 더 푸근하고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늘 피곤하고 지친 날을 맞이하지만 작가는 김밥천국 가는 날이 꼭 힘들고 지친 날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남이 해 준 밥이 먹고 싶어 찾은 김밥천국에서 딸이라 계란도 못 먹었던 한을 담아 오므라이스를 시켜 먹는 영주는 선택적 가부장제를 택했던 할아버지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뻐한다. 집밥이 맛있다지만 사실 남이 해 준 밥이 제일 맛있다는 건 진리일테다. 경찰서장의 운전병을 하던 성우는 한참 뒤 은퇴한 경찰서장을 다시 만나게 되고 오징어덮밥을 먹으며 어른의 지혜를 배운다. 야구를 하던 삼촌이 다쳐서 야구를 포기하고 일반 직장인이 되었지만 야구 심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 아람은 어릴 때 삼촌과 함께 봤던 야구 만화를 떠올린다. 깃토 가쓰 - 반드시 이긴다는 뜻인데 돈가쓰랑 발음이 같아서인지 일본 사람들이 시험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돈가스를 먹는다고. 아람은 세상 사는 게 다 그렇다고 절망하다가 묵묵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이뤄가는 삼촌을 보며 좋아하는 영상일을 계속하기 위해 김밥천국에서 돈가스덮밥을 먹는다. 베트남에서 온 리엔 역시 한국인들의 편견 속에서 힘들어하다 김밥천국의 비빔국수에서 위안을 얻는다. 여러 나라의 언어를 할 줄 알고 대학을 졸업했으며 한국의 호텔에서도 일하는 인재였지만 주변 사람들 눈엔 그저 베트남 신부일 뿐이었다. 그런 시선 속에서도 리엔은 다시금 희망을 가진다. 비빔국수에 땅콩 분태가 올라있는 것을 보고 맛있는 것에 또 맛있는 것을 더하는 것처럼 자신도 느억맘 소스에 먹고 싶었던 고향의 음식을 만들어 보기로 한다. 어쩌면 아예 다른 것들도 섞으면 더 맛있어질 수 있듯이 사람 사는 사회도 다양한 사람들의 장점을 더하면 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희우와 유현은 서로 닮았다. 그들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희우는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했다고 집에서 논다는 표현을 쓰며 육아에는 전혀 동참을 하지 않는 남편에게 그럼 당신이 육아휴직을 하고 민서를 돌보라는 말에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하냐며 길길이 날뛰어 이혼했다. 남편은 양육비도 주지 않고 아이도 보지 않았다. 유현은 입덧이 심해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일을 하지만 주변의 배려에도 눈치가 보였고 자신이 출산을 하면 일을 더해야 할 동료들이 걱정이었다. 태아는 딸꾹질도 자주 하고 산달이 다가올 때까지 먹는 것을 심하게 가려 주변의 눈치를 보게 했다. 희우는 아빠 없는 딸에게 미안해서 더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고, 그들은 콩국수를 먹으며 위안을 얻었다. 유현 역시 힘든 임신 기간 중에 친정 엄마랑 먹던 음식 중 생각나는 것 없냐는 동료의 말에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쫄면을 떠올린다.
이렇게 음식은 사람을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가 주는 것 같다. 장소도 건너뛰고 시간도 건너뛰어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가고 싶은 시간대로 말이다. 그렇게 크게 거창하고 요란한 음식이 아니더라도 김밥 한 줄, 김치만두 한 알이 한 사람을 눈물 흘리게 할 수도, 한 사람이 살아갈 힘을 줄 수도 있다. 나에게 그런 음식은 무엇일까. 오늘 저녁은 김밥천국 메뉴판을 펼쳐놓고 정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