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연습 위픽
김지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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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담임 선생님이 일기를 확인했더랬다. 5학년이던 시절, 나는 뭔가 특별한 아이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안네의 일기>를 읽고 감명 받았던 터라 나는 일기장에게 '안네'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일기는 늘 '안네에게.'로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가. 나는 중, 고등학교 시절이 좀 어두운 편인데, 엄마와 사촌언니의 억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사촌언니가 과외를 명목으로 오면 나는 화장실 가서 변기를 끌어안고 잠들곤 했다. 여러 힘든 일들이 있었기에 나는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엄마한테 언니랑 과외를 안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 때마다 인생 다 망할 것이라는 저주나 들을 뿐이었다. 나는 일기장에 언니 욕을 한바가지 적곤 했는데, 내 책상을 자주 뒤지던 언니가 그 일기장을 읽었다. 그리고는 울면서 집에 갔다. 한 6개월 언니를 안 봤는데 사실 너무 좋았다. 남의 일기장을 왜 보는지 끔찍했지만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다.


나에게 일기란 어떤 때는 친구였고, 어떤 때는 탈출구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기를 썼기에 위로 받고 좋았던 일이 더 많았다. 그래서 양지 할머니에게 마음이 갔다. 양지 할머니는 외롭고 막막할 때 어떻게든 있었으면 하는 일을 적었을지도 모른다. 적고 나면 마치 그 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말이다. 때론 자기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어린 피자 배달부의 사고를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려고 돌아서 왔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기로 결정하던 순간의 기분이 떠올랐다. 이만큼이나 살았는데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은 또 보고 싶어서 그게 새롭다고 생각되어서 걸음을 돌린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싶어서 그게 새로운 것이어서 자극이 되어서 삶에 활력이 되어줄까봐 그랬다. 넘어진 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얼른 걸음을 돌렸다. 너무 오래 살았다는 기분이 든다. (68쪽)


양지 할머니의 그런 고독하고 외롭고 적막한 마음을 담은 일기는 홍미에게 전해졌고, 이는 어쩌면 홍미에게 삶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홍미에겐 아직 마음이 잘 맞는 친구가 있었고 새해에는 다른 직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으니까.


일기장을 받아들고 자신이 물려받은 것이 할머니가 살던 집이나 땅이었으면 했던 홍미는 옆집 아주머니에게서 양지 할머니에 대해 듣게 된다. 홍미와 민석은 둘 다 양지 할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일인 것만 같아 두렵지만 애써 그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한다. 아무도 없는 삶은 어떤 것일까. 이는 모든 사람이 맞이할 수 있는 삶이기에 남일 같지 않았다. 양지 할머니만 해도 아들이 있었고 손녀가 있었으니까. 양지 할머니의 일기는 계속 홍미의 마음을 흔들었고, 홍미는 흔들리기 싫어 일기장을 세단기에 넣었다.


어릴 때부터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홍미는 법 테두리 안에 살기를 바랐다. 사회와 법이 주는 안전망만이 전부였던 홍미는 양지 할머니의 일기를 태우지도 못했다. 불법이었으니까. 


오늘 저녁 창문을 타고 타는 냄새가 심하게 들어와 밖을 내려다보니 아래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나고 불빛이 어른거렸다. 놀라서 119에 신고하려 내려가보니 1층 아주머니가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신고를 할까 하다가 나와 남편이 번갈아가며 눈치를 주자 다 태웠는지 불을 끄긴 했는데, 어이가 없었다. 응징을 위해 신고를 하는 건 소방이 필요한 곳에 폐를 끼칠 것만 같아 이번엔 넘어가기로 했지만 홍미가 생각났다. 법도 믿을 구석이 없어야 지키는 것일까.


어쩌면 삶의 벼랑으로 몰린 것 같지만 홍미는 하루 일찍 새해 인사 연습을 한다. 우리는 누구나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이 부서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부서진 희망 가운데서도 또 새로운 희망이 생기기 마련이니. 홍미와 민석이 따뜻하고 다정한 새해를 맞이하길 기대해본다.


인간이란 그렇게 거짓과 진실 속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삶을 직조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짓인 걸 알면서도 위안을 얻고 진실인 걸 알면서도 외면한다. 하지만 작은 거짓과 작은 진실로 짜인 삶은 어쩌면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공씨가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왔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까봐 거짓을 말한 양지 할머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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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2-30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어릴적에 그림일기를 썼는데 이사 몇번 다니면서 모두 사라졌어요.그리고 중학교떄까지도 일기를 썼는데 고등학교 이후로는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지금 돌이켜보면 계속 일기를 썼더라면 아마도 하루 하루 충실하게 더 살았을 것 같고 과거 일기를 보면서 내 스스로를 뒤돌아 보면서 반성도 많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