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제 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언제나 이맘때면 내가 부산에 사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작년엔 사정상 <전,란> 한 편만 봤지만 올해는 조금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일단 개막작인 <어쩔 수가 없다>는 너무 치열할 것 같아서 미리 포기했다. 어차피 극장에 바로 올라오기도 하고, 여기 매달리면 다른 작품은 하나도 못 볼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예매 성공한 게 <프로젝트 Y>, <친애하는 X>, <탁류>, <완벽한 집> 이었다. 남편은 <탁류> 대신 <루의 운수 좋은 날>을 예매했다. 그리고 <타년타일>도 예매했는데 결국 취소했다. 그렇다. 우린 저질 체력이었다.


2015년인가 하루에 영화를 세 편씩, 몇 날을 봤더랬다. 그 때 봤던 영화가 <헬라스로 가는 길>, <비행기처럼>, <시카리오>, <주바안>, <디판>, <벨아미>, <사랑의 법정>  등등 이었다. 이후에 아마 영화를 좀 멀리했더랬다.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래서 매년 한 두 편씩만 보다가 대망의 2022년 양조위 특별전 때문에 확 불이 붙어서 부국제를 신나게 즐겼다. 양조위 배우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다니... 근데 그게 벌써 3년 전이라니 너무 놀랍다. 후아....

<무간도> GV


그리고 작년에 <전,란> 보고 게스트와의 만남에서 전설의 강동원 배우 다리꼬는 모습을 직접 봤다. 영화를 본 직후 감독과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은 정말 흥미로웠다. 이게 부산국제영화제의 근사한 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김신록 배우의 말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 그녀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전,란> GV - 강동원 배우 다리 길이가....


그리고 이번 부국제 역시 재밌었다. 예매 전에 남편한테 영화 뭐 볼까 물어봤는데 너무 심드렁해서 내가 볼 영화만 빼곡히 뽑았다. 사실 부국제 할 때, 상영하는 영화는 많은데 정보는 많지 않아서 좀 선택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래서 최대한 내 관심사에 맞추는 편인데, 이번에 꼭 보고 싶은 영화는 <어쩔 수가 없다> , <안녕, 용문객잔>, <친애하는 X>, <탁류>, <실연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프로텍터>, <쓸모있는 귀신>, <완벽한 집>이었다. 이 중에 <친애하는 X>와 <탁류>는 ott에 상영할 시리즈 드라마 두 편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온 스크린 섹션이다. 


하지만 역시 이 많은 영화를 다 볼 수도, 예매할 수도 없었기에 정말 열심히 볼 영화들만 고른다고 고생했다. 1순위는 <친애하는 x>와 <탁류> 였다. 작년에 <전,란>을 큰 스크린으로 보니 너무 좋은 거다. 그래서 대형 스크린으로 볼 수 없는 것 중 기다리던 작품을 골랐고, <프로텍터>와 <안녕, 용문객잔>은 상영시간이 안 맞아서 제외했다. 그리고 예매 당일 참전한 남편이 꼭 보고 싶다고 한 영화 <프로젝트 Y>를 넣었고, 시간대가 맞은 <완벽한 집>을 예매할 수 있었다. 솔직히 <어쩔 수가 없다> 보고 싶었으나 유리 같은 부국제 예매 사이트 서버 때문에 포기했다. 어찌됐든 모든 걸 볼 수는 없지만 적당히는 볼 수 있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진짜 올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너무 화려해서 좀 놀랐다. 유명한 감독, 배우들 다 오고 멋진 영화를 상영해서 눈이 돌아갔지만 난 몸이 하나라서 아주 아주 많은 것을 포기했다. 내가 올해만 살 수는 없잖아... 


<프로젝트 Y> GV


영화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잘 만들었다는 느낌. 남성-남성, 여성-남성, 남성-여성 조합이었으면 식상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잔인하기도 했지만 너무 불편하지는 않아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좋았다. GV에 오지는 않았지만 김신록 배우 멋진 연기였고, 멋진 역할이었다. 근데 다들 연기를 왤케 잘해.... 어떤 일이든 쉽게 돈을 벌 수는 없고, 어디서든 돈과 권력에 미쳐 사기치는 놈들이 있다. 누가 누구를 구원하나,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는 거지. 맞는 말이다. 이환 감독이 제목 프로젝트 Y에서 관객들이 생각하는 Y는 무엇인가 물어보는데 지금부터 생각해봐야지...



<친애하는 X> GV


<친애하는 X> 야외무대인사


드라마 너무 기대된다. 2편까지 먼저 봤는데 11월 초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싶었다. 피카레스크라기엔 아직 악하다고 보기 어려운데 3편부터는 학교라는 작은 공간이 아닌 사회라는 큰 공간에서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싶다. 재미도 있는데 일단 배우들 영상미가 너무 예뻐서 즐거웠다.


<친애하는 X>는 티빙에서 볼 수 있다.


<프로텍터> 야외무대인사 - 밀라 요보비치 너무 멋지고 생기 넘친다. 작가가 한국인이라니 놀랍다. 


<탁류> GV


조선시대 나루터에서 시작한다. 나루터라는 공간에서 로맨스도 있을 수 있고 스릴러도 있을 수 있는데 감독은 일단 먼저 왈패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처음은 느와르다. 하지만 혹독한 세금에 시달리던 민초들의 삶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주인공들의 은밀한 사정들은 제쳐두고 권력 관계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율과 정천에겐 무슨 사연이 있으며, 무덕은 어떻게 한양에서 버틸 것이며, 최은은 상단에서 최고 자리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디즈니가 저작권에 엄청 신경쓴다더니 상영하는 내내 특수장비를 찬 스태프가 다니면서 불법촬영을 못하게 한다고 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폰으로 문자를 했더니 요원이 와서 엔딩크레딧 다 올라간 뒤에 폰 하라고 주의를 줬다.


<루의 운수 좋은 날> GV 장첸


<파과> GV를 마치고 나온 연우진 배우와 이혜영 배우


<완벽한 집> GV


청년들의 주거 문제와 노인들의 고독사 문제를 결합하여 만든 공포물이다. 재개발 지역의 무너져 가는 집에서 금림이 친구인 순복의 시체를 발견하면서 시작한다. 묘하게 집과 몸이 연결되어 끝까지 주제를 놓치지 않는 느낌이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 자체를 가지지 못한 청년들의 불안과 건강하게 살아갈 육체를 가지지 못한 노인들의 불안,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있는 자신들의 욕망만이 우선인 탐욕스러운 존재들까지 결합하여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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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9-21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제 라는 것이 이런 분위기군요. 부럽습니다!!!
개인적으로 <안녕, 용문객잔>이 궁금하네요.

꼬마요정 2025-09-22 10:51   좋아요 0 | URL
정말 축제 같고 재미있고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영화를 보는 점도 있구요, 영화제라 영화비도 조금 저렴합니다. 예전에 5천원, 6천원, 8천원 이랬는데 올해는 만 원이네요. 작년에도 만 원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 물가상승률이 어마어마합니다.

오늘 <안녕, 용문객잔> 보러 갑니다. 용케 표를 구했어요. 시간상 안 될거라 포기했는데 가능하게 되었거든요^^

페넬로페 2025-09-21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가 30주년이라 행사를 크게 하는 것 같네요. 제가 다른 도시에 살 기회가 된다면 살고 싶은 곳 1순위가 부산입니다.

꼬마요정 2025-09-22 10:54   좋아요 2 | URL
30주년이라 진짜 크게 해요. 유명한 감독들, 배우들 많이 오구요. 제가 영화를 잘 모르는데 아는 감독들이 오더라구요. 기요르모 델 토로나 차이밍량 같은 외국 감독부터 박찬욱, 봉준호, 변영주 등 한국 감독들까지 부산국제영화제 위상이 많이 높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특히 올해부터 경쟁부문 생겨서 영화제에 힘이 더 실렸다고 하더라구요.

부산 좋습니다^^

카스피 2025-09-21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산국제영화제를 직접보신다니 넘 부럽습니다.에전에 보수동 헌책방거리를 방문한적이 있는데 참정감있는 곳이더군요

꼬마요정 2025-09-22 10:55   좋아요 0 | URL
보수동 헌책방거리 좋지요. 고즈넉하고 정감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도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어디서나 개발 광풍에 영업 부진에 안 힘든 곳이 없는 듯 합니다.ㅠㅠ

skarly 2025-09-22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럽네요🤣 저도 젊었을때는 부산영화제때마다 내려갔는데 나이가 드니 관절이 아파서 영화 많이 못보겠..😭

꼬마요정 2025-09-24 10:29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부산 사는 게 아니라면 힘들지 않겠어요. 저도 뮤지컬이나 연극 보러 서울 자주 갔는데 이젠 너무 힘들더라구요ㅠㅠ 일단 기차든 비행기든 이동하는 게 너무나 힘들더군요.

관절이 아픈 건… 혹시 주짓수 때문일까요? 다치면 뼈 붙기 힘들어요 ㅎㅎㅎ 같이 조심해서 오래오래 운동해요!!!

서곡 2025-09-24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장첸!! 저는 안녕 용문객잔 전에 봤는데요 극장에서 보기에 너무나 딱인 영화입니다 즐감하시길요~~

꼬마요정 2025-09-25 10:53   좋아요 1 | URL
장첸 강렬하죠 ㅎㅎㅎ <안녕, 용문객잔> 극장에서 보기 딱인 영화 맞더라구요. 이제는 쇠락해버린 그 공간이 계속 생각납니다. 영화제가 끝나가니 좀 아쉽습니다^^

책읽는나무 2025-09-26 0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 많은 곳 다녀오기가 참 힘들어 부국제를 한 번도 다녀와본 적이 없네요.ㅜ.ㅜ
하지만 해운대 영화의 전당을 지나가다 보면 한 번 가보고 싶은 부국제입니다.
글을 읽다 김신록 배우 이름과 얼굴을 보니 반갑네요. 김신록 배우 제가 넘 좋아하는 배우라.^^
이혜영 배우의 포스는 와 진짜👍
배종옥 배우는 나이 들수록 우아해지네요.
제가 알아보는 배우가 몇 명 안되는군요.ㅋㅋ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도 요즘은 참 쉽지가 않던데 요정 님과 남편분 부러 시간 내서 다녀오셨다면 의미있는 시간이었겠어요.
요즘은 체력적 소모도 생각해야 하니까 더더 뜻깊었겠어요.^^
저는 영화관 다녀오는 것도 힘들어서 딸이 같이 영화 좀 보고 오자고 막 졸라도 겨우 한 번 다녀오곤 하거든요.ㅋㅋㅋ
암튼 덕분에 좋은 영화 그리고 귀한 사진 즐겁게 봤네요. 감사해요.^^

꼬마요정 2025-09-28 23:51   좋아요 1 | URL
작년에 김신록 배우 너무 멋졌어요. 아직도 생각나네요. 생각도 연기도 너무 멋진 배우입니다. 이혜영 배우 포스는 말해 뭐해 입니다. 진짜 멋집니다!!! 배종옥 배우도 진짜 우아하고 배포도 크고 연기도 좋았어요.

장첸 배우도 아실 것 같아요. 또 김유정 배우나 박지환 배우, 최귀화 배우 아실 것 같아요. ㅎㅎㅎ 아, 밀라 요보비치 배우도요. 진짜 에너지가 넘치더라구요. 요즘 어휘량이 부족해지는 거 느끼는데요, 멋지다 외에 다른 말도 많은데 자꾸 멋지다 밖에 모르겠어요ㅠㅠ 책 읽은 거 헛거인가...ㅠㅠ

제가 5월에 폰을 바꿨는데 6개월 요금제를 강제로 써야 하는 것 때문에 영화를 매달 한 편씩 보거든요.(영화 공짜가 있어서요) 이번에 본 영화는 연상호 감독과 박정민 배우의 <얼굴>이었는데, 그 영화도 진짜 좋았어요. 그거 보고 부국제 영화 보고 와... 체력이 체력이... 진짜 막내가 준 경옥고 먹고 버텼어요. 아, 내년에도 이렇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즐거웠어요^^
 
창귀
문화류씨 지음 / 북오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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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식총과 창귀는 떼어낼 수 없는 사이다.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은 다음 사람을 꾀어내어 호랑이에게 바쳐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기에 창귀가 된 이는 아는 사람을 부른다. 그러니 밤에 누가 부른다면 세 번 부를동안 대답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호식총에 묻혀 창귀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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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18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창귀란 단어는 참 오랜만에 들어보네요.사실 한국은 예전부터 호랑이의 피해가 많아서 호랑이한테 죽은 귀신인 홍살이 귀신이나 가문굴기라는 토착 귀신이 있었다고 합니다.창귀느 사실 중국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워뜻은 1.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영혼 2.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창귀가 오히려 호랑이를 돕는다는 것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데 위호작창(爲虎作倀), 원 의미는 ‘호랑이를 위해 창귀가 되다‘란 뜻으로, 악인을 도와 일하는 사람들을 비유하는 말과 같은 고사성어가 있을 정도지요.
실제 창귀에 대한 기록인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에 주로 등장하는데 중국의 경우는 당나라시대 전기라는 책에 등장할 정도로 중국이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꼬마요정 2025-09-18 22:24   좋아요 0 | URL
창귀가 물귀신 또는 호랑이를 돕는 귀신인 건 알았는데 당나라 때 귀신인 건 몰랐네요. 가문굴귀나 홍살이 귀신보다 창귀가 더 익숙한 건 좀 슬픕니다ㅜㅜ 위호작창이란 고사성어 기억해둘게요.(기억해야할텐데요 ㅎㅎ) 착호갑사란 직종이 따로 있을 정도로 호랑이가 많았는데 이젠 찾아보기 힘들 정도죠ㅜㅜ 그것 또한 나름 슬픈 일입니다ㅜㅜ

바람돌이 2025-09-18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엥 이제 밤인데 무서워요. 이제부터는 딱 2번까지만 대답해야겠다. ㅎㅎ

꼬마요정 2025-09-18 22:18   좋아요 1 | URL
앗 아니에요. 세 번 부를 동안 답하면 안 돼요!! 네 번째로 부르면 그 땐 답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보통 세 번 부른다고 하니까요. 밤에 누가 바람돌이~ 바람돌이~ 바람돌이~ 이렇게 부르면 답하시면 안 돼요 ㅎㅎㅎ

근데 이게 또 이런 썰이 있더라구요. 창귀가 지인들을 데려가는데 그게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혀가면서 도와달라고 아는 사람을 부르는 건데 도와주러 나가면 같이 잡혀갈거니까 무서워서 못 나갔다는 게 이렇게 전해져오는 거라구요. 슬프죠ㅠㅠ

바람돌이 2025-09-18 22:26   좋아요 1 | URL
어머나 너무 어렵잖아요. 3번 부를 때까지 대답 안하면 성질 낼텐데... 그럼 소심한 저는 세번째쯤 기죽어서 대답하다가 끌려갈듯요. 창귀는 처음 듣는데 호식총은 어디서 봣지 했더니 예전에 읽었던 소설 <연록흔>에 나왔었어요. 그 에피소드 참 슬펐는데... 옛날엔 진짜 종로에도 가끔 호랑이가 내려왔다니 이런 공포가 가능했을거 같아요.

요즘 부산에 멧돼지 출몰 문자 너무 많이 나오지 않나요? 요즘은 멧돼지가 맹수니까 안 잡혀가도록 절대 대답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마음을 꽉 잡습니다. ㅎㅎ

꼬마요정 2025-09-18 22:37   좋아요 1 | URL
오오 금호 사건 아닌가요. <연록흔> 오랜만이네요. 재밌었는데…

그래도 참은 김에 세 번까진 참아봐요. 살고봐야죠. ㅎㅎㅎ 멧돼지 출몰 안내문자 자주 와서 놀라곤 합니다. 아무래도 산을 깎아 재개발을 많이 하다보니 멧돼지들이 먹을 게 없나봐요ㅜㅜ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경주를 좋아한다. 그곳엔 천 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나라의 깊음이 있기 때문일까. 경주에 유명한 곳이 어디 한 둘이겠냐만은 나는 특히나 선덕여왕릉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에 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갈 때마다 사람이 없어서 좋다. 사천왕사지를 둘러보고 선덕여왕릉으로 가면 뭔가 다른 세상, 도리천으로 가는 것만 같다. 지금은 비록 사천왕사도 없고, 선덕여왕릉에서 진평왕릉이 정확히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신비로우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는 곳이다.


이 책에 나오는 재서와 이본은 지극히 현실세계에 사는 젊은이들이다. 지방대학 건축학과에 재학중인 재서는 자신의 과가 폐과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자신의 작업물에 확신이 없다. 그런 재서가 보는 이본은 철두철미한 능력자다. 타과에서 전과했음에도 기한 내에 과제를 완벽하게(재서가 보기에) 수행하고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나 교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런 그들이 문목현 교수가 진행하는 서머스쿨에 선정되어 경주에서 고택을 연구하고 개축 설계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왜 그 두사람이었을까.


자기 의심이 강한 재서와 자기 확신이 강한 이본. 두 사람이 경주에서 보게 된 것은 지은 지 이백 년이 넘은 고택이었다. 둘은 집을 살펴보며 재건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다. 의견을 모은다기보다 재서가 이본에게 끌려가는 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집주인인 권정연 씨는 집을 고쳐서 쓰기를 원했다. 


문 교수는 둘에게 경주를 찬찬히 돌아볼 것을 권했고, 둘은 또 열심히 첨성대부터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백 년을 산다치면 그 사람이 열 번을 나고 죽는 시간을 넘게 살아 온 그 도시의 모습은 두 사람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우리는 잠깐 머물다 가지만 늘 거기 있을 풍경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연필 제도를 고집하는 문 교수와 첨성대를 해설해주는 할아버지, 이백 년이 넘은 고택에서 살아가는 권정연 씨 모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손을 잡아주는 마을 사람들... 그들은 모두 천 년을 넘게 살아 온 도시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집을 짓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 역사를 만드는 것은 모두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작고 소중한 것들이 모여 뼈대를 이루고 관계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든다. 모든 것은 나 혼자만이 할 수 없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긋나면 다시 부수는 것보다 그 어긋남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자연과 삶에서 어우러질 수 있는지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나왔던 '차경'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경치를 빌린다는 뜻으로, 건축물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내가 소유가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이며 그 순간을 누려야 한다고. 나는 다시 선덕여왕릉을 찾을 것이고 역사책에서 봤던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 순간 도리천을 오르는 선덕여왕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흐뭇할 것이고, 그 흐뭇함을 주는 그 풍경을 소중하게 간직할테지.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물다 가지만 그 풍경은 오래도록 남아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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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10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방에 사는 대학생들이 겪는 고충이긴 한데 태어나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많은 이들이 서울로 유학가다보니 실제 지방 대학의 경우 벚꽃피는 순으로 폐교된다고 많은 걱정들을 하지요.아무튼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어서 지방대는 더욱 살아나기 힘든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그리고 경주는 천년고도라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좋지만 실제 사는 분들은 개발 제한이 걸려있어서 사는것이 무척 불편하다고 하더군요^^;;;

꼬마요정 2025-09-10 10:41   좋아요 0 | URL
태어나는 애들이 줄어드는 데다가 모두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가려고 하니 지방은 정말 젊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네요ㅠㅠ 안타깝습니다ㅠㅠ 지방에 일자리가 넘쳐나야 젊은 사람들이 자리잡을텐데 쉽지 않은 일이네요...

경주는 진짜 집 하나 고치는 데도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고도 제한도 엄격하고 말이죠. 외부인이 보기에는 낮은 건물에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참 멋스럽고 좋은데 사는 사람들은 불편하겠습니다. 그런 불편함도 함께 감수해서인지 경주 사람들끼리 매우 끈끈하다고 합니다. 보존과 개발이 공존하기는 어렵겠지요ㅠㅠ

책읽는나무 2025-09-1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경.
참 아름다운 뜻이 담겨있는 말이로군요.
저도 경주를 참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자주 가보는 곳이기도 하구요.
저는 불국사가 갈 때마다 좋았던 것 같아요.
주로 봄,가을에 가서 그랬었는지도?
스무 살엔 친구들과 고건축 답사 숙제가 있어서 여름방학 숙제? 한다고 불국사를 찾아갔었는데 더웠는데도 좋았어서 그 후로 불국사에 한 번씩 가보곤 합니다.
올라가는 길이 좀 바뀌었더군요.
그리고 좀 떨어진 감은사지 삼층 석탑 그 곳도 좋았었는데…생각해보니 선덕여왕릉 쪽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 같네요. 나중에 경주를 가게 되면 사천왕사지를 둘러보고 선덕여왕릉 코스로 나들이 다녀와야겠어요. 그리고 바람돌이 님이 알려주신 맛집과 카페로…^^
책 내용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책이네요. 그리고 성해나 작가의 책이구요.
찜해두겠습니다.^^

꼬마요정 2025-09-11 00:26   좋아요 1 | URL
봄, 가을 경주 너무 좋죠!!! 저도 예전에 봄에 덜 바쁠 때에는 경주 곧잘 갔어요. 벚꽃 구경도 하고 한 때 유명했던 까페 명가 딸기 케이크도 먹고 명동 쫄면도 먹었어요. 사을엔 김유신 묘 은행나무 구경도 가고요, 고즈넉한 백년 찻집도 가고 말이죠. 이제는 없어진 운곡서원 찻집도 좋아했는데... 글고 오릉 근처에 돗자리 깔고 성동시장에서 산 문어랑 우엉김밥 열심히 먹었어요. 경주는 진짜 보물같은 곳입니다. 저도 이번에 또 가면 바람돌이 님 추천 맛집 가보고 싶어요. ㅎㅎㅎ

성해나 작가님 책 참 좋습니다^^ <혼모노>도 좋았는데 이 책도 좋았네요. ㅎㅎㅎ

바람돌이 2025-09-10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선덕여왕릉 좋아하는 사람 잘 없는데 요정님이 좋아하신다니 너무 좋아요. 저도 경주 평지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에요. 왜 평지냐 하면 경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남산이라.... 남산은 등산해야 되니까 산 빼고 평지에서는 선덕여왕릉이 제일 좋아요.
혼자 또는 둘이서 호젓하게 가기 좋은 곳이죠. 아래 쪽 입구의 사천왕사터도 좋아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주차장 만들고 하면서 예전의 호젓한 맛이 다 사라졌어요. 그래서 선덕여왕릉이 원픽입니다. 선덕여왕릉은 들어가는 길도 호젓하게 산길을 헤치고 가는 맛이 있고 막상 들어가면 엄청 아늑한 느낌이 들잖아요. 그게 잘 보면 나무들이 모두 무덤을 향해서 감싸안듯이 자라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햇빛 때문인거 같은데 그게 무덤의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주는 듯요.

혼모노 읽고 성해나 작가 관심가는 작가가 되었는데 이 책도 곧 읽어봐야겠네요.

꼬마요정 2025-09-11 00:32   좋아요 0 | URL
아니!! 선덕여왕릉 좋아하는 분 발견!!! 저도 너무 좋습니다. 이 곳은 드라마 선덕여왕 때문에 유명해졌다 했는데도 아는 사람이 잘 없더라구요ㅠㅠ 아마 생각했던 유적지가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평지 중에서 제일 좋아하신다구요 ㅎㅎㅎ 선덕여왕릉 나름 조금 걸어 올라가긴 하지만 평지로 인정합니다 ㅎㅎㅎ

사천왕사지보다 사천왕사터 좋네요. 거기 주차장 만들어서 좀 그렇긴 하죠ㅠㅠ 그래도 나름 상상해봅니다. 여기 커다란 절이 있고 그 위에 도리천이 있다... 무섭지만 멋진 사천왕사들이 호위하고 말입니다. 진짜 햇빛이 나무 사이로 비치는 거 사진에 담아보려고 했는데 그 느낌이 잘 안 살더라구요. 그래도 몇 장 찍어서 배경화면 해놓곤 했는데 실제로 보는 게 젤 좋죠.

이 책 좋았습니다.^^

서곡 2025-09-14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꼬마요정님 일요일 잘 보내고 계신지요 성해나 첫 소설집을 잘 읽은 기억이 나네요 이 작품은 경주가 배경이군요 전 경주 어릴 때 가보고 어른 되어선 안 가봤는데 지금 가면 굉장히 새로울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5-09-17 23:35   좋아요 1 | URL
서곡 님 안녕하세요~ 벌써 한 주의 절반이 지나갔네요. 이제 더위도 한풀 꺾이고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입니다. 성해나 작가 소설은 소설집 <혼모노>와 이 책 뿐인데요, 둘 다 괜찮아서 다른 책도 읽어보려구요. 어릴 때 보신 경주의 모습과 지금 경주의 모습이 유적지라는 면은 같겠지만 그 외에는 완전 다를 것 같아서 그 느낌도 새로울 듯 합니다. 가신다면 꼭 후기 부탁드려요^^
 
귀신새 우는 소리
류재이 외 지음 / 북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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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에는 귀신새가 운다. 사실 귀신새는 사시사철 운다. 억울하거나 탐욕에 찌든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토대로 무서운 이야기가 되었다.

박연폭포에 가보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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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02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억이 가물가물 해서 그런데 박연폭포는 개성에 있는 것이지요?

꼬마요정 2025-09-02 18:44   좋아요 0 | URL
네네 맞아요. 개성에 있습니다. 금강산도 그렇고 못 가 보는 곳들이 참 아쉽습니다.
 
앙심 위픽
전건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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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한 적이 있는가. 그 죽이고 싶은 마음, 앙심은 언제까지 지속되었는가. 결국 그 미운 사람이 죽는다면 평안을 얻을 수 있는가.


후덥지근한 여름밤, 나의 연인인 K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더운 날엔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인데다 K가 심령 현상을 믿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던 나는 K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예전에 노숙자 쉼터에서 알바를 했던 K는 우연히 최 씨를 도와주었는데, 최 씨는 고맙다며 누군가를 죽여주겠다고 했다. 딱 한 사람, K가 이름을 쓰면 지목된 사람은 죽는다는 거였다. 말로야 누구는 귀신이 안 잡아가나 하지 실제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하필 그 당시, K는 앙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지금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도 내가 앙심을 품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짧기도 하지만 재미있어 한 번 잡으면 끝을 볼 때까지 죽 읽게 되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저주하여 목숨을 앗아가면 나 역시 잃는 것이 있을텐데 감당할 수 있을까. 정말 그 사람이 죽는다면, 나는 평안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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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9-01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름을 쓴다고 하니 데스노트가 생각나네요 누군가를 죽게 하면 자신도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요 그런 거 생각하고 참아야 할지, 벌 받으면 되지 할지... 두 가지 마음이 싸우겠습니다


희선

꼬마요정 2025-09-01 23:11   좋아요 0 | URL
이름도 쓰고 생년월일도 써야 해요. 데스쪽지 입니다. ㅎㅎ 어려운 일이죠. 내 손에 피 안 묻힌다는 점에서 혹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에게 준 피해가 죽을 정도의 죄일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