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ㅣ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경주를 좋아한다. 그곳엔 천 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나라의 깊음이 있기 때문일까. 경주에 유명한 곳이 어디 한 둘이겠냐만은 나는 특히나 선덕여왕릉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에 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갈 때마다 사람이 없어서 좋다. 사천왕사지를 둘러보고 선덕여왕릉으로 가면 뭔가 다른 세상, 도리천으로 가는 것만 같다. 지금은 비록 사천왕사도 없고, 선덕여왕릉에서 진평왕릉이 정확히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래도 신비로우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나를 압도하는 곳이다.
이 책에 나오는 재서와 이본은 지극히 현실세계에 사는 젊은이들이다. 지방대학 건축학과에 재학중인 재서는 자신의 과가 폐과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자신의 작업물에 확신이 없다. 그런 재서가 보는 이본은 철두철미한 능력자다. 타과에서 전과했음에도 기한 내에 과제를 완벽하게(재서가 보기에) 수행하고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나 교수님에게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런 그들이 문목현 교수가 진행하는 서머스쿨에 선정되어 경주에서 고택을 연구하고 개축 설계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왜 그 두사람이었을까.
자기 의심이 강한 재서와 자기 확신이 강한 이본. 두 사람이 경주에서 보게 된 것은 지은 지 이백 년이 넘은 고택이었다. 둘은 집을 살펴보며 재건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다. 의견을 모은다기보다 재서가 이본에게 끌려가는 모습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집주인인 권정연 씨는 집을 고쳐서 쓰기를 원했다.
문 교수는 둘에게 경주를 찬찬히 돌아볼 것을 권했고, 둘은 또 열심히 첨성대부터 돌아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백 년을 산다치면 그 사람이 열 번을 나고 죽는 시간을 넘게 살아 온 그 도시의 모습은 두 사람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우리는 잠깐 머물다 가지만 늘 거기 있을 풍경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연필 제도를 고집하는 문 교수와 첨성대를 해설해주는 할아버지, 이백 년이 넘은 고택에서 살아가는 권정연 씨 모녀, 지진이 일어났을 때 손을 잡아주는 마을 사람들... 그들은 모두 천 년을 넘게 살아 온 도시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집을 짓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 역사를 만드는 것은 모두 자그마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작고 소중한 것들이 모여 뼈대를 이루고 관계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든다. 모든 것은 나 혼자만이 할 수 없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어긋나면 다시 부수는 것보다 그 어긋남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자연과 삶에서 어우러질 수 있는지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나왔던 '차경'이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경치를 빌린다는 뜻으로, 건축물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내가 소유가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이며 그 순간을 누려야 한다고. 나는 다시 선덕여왕릉을 찾을 것이고 역사책에서 봤던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 순간 도리천을 오르는 선덕여왕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흐뭇할 것이고, 그 흐뭇함을 주는 그 풍경을 소중하게 간직할테지.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물다 가지만 그 풍경은 오래도록 남아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