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와 루시
켈리 라이하르트 감독, 미셸 윌리엄스 출연 / 키노필름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그때 미안했어요 ! 










                                                                                               3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  검은 천 가방 몇 개를 양쪽 어깨에 짊어진 그녀는 행색이 초라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매니큐어가 떨어져나간 손톱 밑에는 검은 때가 끼어 있었다. 여행 중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짐이 많았고 동네 주민이라 하기에도 짐이 너무 많았으며 그것이 자신이 가진 소유물의 전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짐이었다.


당시에 나는 서울역 학원 옆 건물에서 퍼펙트월드라는 이름의 영화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영화 한 편을 고르더니 망설이다가 내게 십만 원짜리 수표를 건넸다. 신분증을 확인하고 수표를 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대부분은 신분증 확인조차 하지 않았었다) 나는 단칼에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부탁도 없이 퉁명스럽게 수표는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의 행색이 초라했기에 수표의 출처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라한 행색만 보고 그녀를 향해 싫은 내색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타인의 차별이 일상이라는 듯이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비디오테이프를 다시 제자리에 꽂은 후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황급히 나갔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한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먹을거리가 들어있었는데 아마도 다른 곳에서 수표를 교환할 목적으로 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진열대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는 몇 편의 영화를 선택해서 카운터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고른 영화 목록들은 내 영화적 취향과 많이 닮아서 깜짝 놀랐다. 그녀가 지폐 몇 장과 먹을거리가 담긴 비닐봉지를 내 앞에 내밀었다. " 아까 잔돈을 미리 마련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 " 


그녀의 말에 나는 귀밑까지 빨개져서 어쩔 줄 몰랐다. 내가 그녀에게 행한 차별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서울 극장 영화관에서였다. 10년 만의 재회였는데 나는 보자마자 그녀를 알 수 있었다. 당시, 상영작은 영화 << 원스 >> 였다.  불이 켜지고 관객들이 출구로 나갈 때, 나는 그때 그녀를 보았다. 커다란 가방들은 보이지 않았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한 것일까 ?  나는 그녀와 거리를 유지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다가가 인사를 하는 것이 좋은 결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시야에서 멀어졌고 그렇게 사라졌다. 


영화 << 웬디와 루시 >> 를 보았을 때 문득 손톱 밑에 때가 낀 손으로 돈과 간식을 건네며 미안하다고 말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 잔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영화적 취향이 비슷하니 어쩌면 그녀도 이 영화를 보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훗날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뒤늦은 사과를 그녀에게 전하고 싶다.  그때 정말 미안했어요. 이 영화 참...... 좋죠 ?








웬디는 자신이 잃어버린 개 루시가 어느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을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개를 되찾을 목적으로 찾아간 그녀는 정리가 잘 된 정원에서 놀고 있는 루시를 발견하고는 계획을 변경한다. 그녀는 되돌아오기 위해 떠나야 된다는 결심을 하지만 이 결심에는 굳은 결의가 없다. 어쩌면 떠나야 한다는 변명을 하기 위해 되돌아온다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기차 화물칸에 무임 승차한 웬디는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밖의 풍경을 본다. 볕이 들지 않는 울울한 삼림의 풍경이 표정 없이 지나간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 공장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자본주의 미국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룰은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철학이 때로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폭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고발하고 있다.  영화는 반전도 없고 행운도 없다.  묵묵히 불행을 견디는 여자 웬디는 사랑하는 개 루시를 두고 길을 떠난다. 기똥차게 잘 만든 영화'다. 당신이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다. 놓치면 후회할 영화'다. 보시라.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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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이트 스토리 - [할인행사]
데이빗 린치 감독, 리차드 판스워드 외 출연 / 이지컴퍼니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리차드 판스워스 스토리






 



기승전결에서 결(結)은 누에 실(絲)과 길하다(吉)가 결합한 것으로 좋은 방향으로 매듭을 짓는다는 뜻이다. 해피엔딩을 위한 강요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매듭을 짓는 종결보다는 매듭을 묶지 못한 채 미완성으로 끝나는 종결을 좋아해서 끝이 선명하고 안전하며 예쁜 것에 대해서 항상 회의적- 이다. 영화 << 연어알 >> 에서는 한 여자가 한 여자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현관문을 노크한다. 영화는 그 장면에서 느닷없이 끝난다. 일반적인 연출이었다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서로 화해하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을 텐데 이 영화는 서로를 묶지 않은 채로 끝난다. 사람들인 불성실한 종결에 툴툴댔지만 나는 결이 없는 이 영화의 결'을 좋아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엔딩이었다. 데이비드 린치의 << 스트레이트 스토리 >> 도 훌륭한 엔딩의 모범이다. 동생은 중풍으로 쓰러진 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사람의 보폭보다 조금 빠른 트랙터를 몰고 6주 간의 기나긴 여정을 떠난다. 그가 먼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형과 화해를 하기 위해서다. 미안하다는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난 앨빈 스트레이트는 형의 집 앞에서 그 이름을 부른다. 두 형제가 십 년 만에 만나는 자리이지만 뜨거운 눈물도 없고 포옹도 없다. 그저 낡은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영화는 거기에서 끝난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았던 용서와 화해의 방식이 아니었지만 그 어떤 장면보다도 뜨거웠다. 내가 감독이었다고 해도 그 장면에서 대화를 넣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개입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리차드 판스워스와 해리 딘 스탠튼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리차드 판스워스의 마지막 얼굴은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 속 캐릭터의 얼굴이 아니라 리차드 판스워스의 얼굴이었다1). 그의 얼굴에서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노인과 바다)이 떠올랐다. 그는 어부였고 트랙터와 짐칸은 거대한 청새치처럼 보였다. 꿈을 이룬 자의 허무였을까 ? 영화 촬영을 끝낸 후, 그는 권총 자살로 생을 끝낸다. 그의 나이 79살이었다. 또한 이 영화는 그의 첫 번째 주연 작품이었다.  







​                       

1)    영화를 보다 보면 종종 캐릭터의 얼굴(감정)이 아니라 배우의 얼굴(감정)이 보일 때가 있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연출한 영화 << 거미의 성, 1957 >> 에서 미후네 도시로는 반란군이 쏜 화살-들 때문에 사색이 되는 연기를 펼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장면은 죽음의 공포에 사색이 된 캐릭터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공포에 떠는 미후네 도시로의 실제 상황처럼 보였다. 후일담으로 전해진 사실에 의하면 미후네 도시로를 향해 날아든 화살들은 특수 효과가 아니라 실제로 양궁 선수들이 배우를 앞에 두고 화살을 쏜 것이라 한다. 한끗만 빗나가도 죽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배우 입장에서 보면 그 표정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의 공포 체험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리차드 판스워스의 회한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먼길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문장 대신 표정으로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한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뭉클했다. 잊지 못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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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잘 가요. 해리 !






 


 



내가 무명의 단역 배우에게 홀딱 반했던 이유는 그의 주름투성이 얼굴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생기는 것이 주름이라지만 사실 해리 딘 스탠튼은 스무 살에도 주름 접힌 얼굴이었다. 그의 팬이 된 이후, 그가 출연한 영화는 거의 다 보았다. 그는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했지만 언제나 분량은 짧았다. 대부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거나 형편없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곤 했다. 사람들이 주연배우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면 나는 전체 런닝타임에서 1분 정도 등장했다 사라지는 그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곤 했다.  어느 날, 그가 내 꿈에 나타났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나의 팬이 되어 고맙다고 말했다.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기억에 남는 대화는 깡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길바닥에 떨어진 깡통을 보면 발로 찬다고,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인 깡통은 또 누군가의 발길질에 날아간다고, 비록 깡통은 발이 없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멀리 떠나 있다고. 자신은 어쩌면 그런 존재였다고.  생각해 보니 그가 내 꿈에 나타났던 것은 며칠 전에 보았던 영화 << 럭키 >> 에 대한 잔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영화에서 그는 주연배우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풀타임으로 등장한다. 그가 지금까지 출연했던 모든 영화의 런닝타임을 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출연 분량이었다. (피식) 노인네, 소원 성취하셨네.         나는 그의 추레한 모습을 좋아했고, 그의 깊은 주름과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좋아했다. 또한 독한 위스키로 폐가 손상된 그가 억지로 공기 반 소리 반 노래를 할 때, 그 깔딱거리는 호흡의 불균질성을 좋아했다. 해리는 영화 << 럭키 >> 를 찍은 해에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생각하면 경주마 차밍걸1)이 생각난다. 96전 96패를 기록한 경주마 차밍걸의 최고 기록은 3위가 전부였지만 어지간해서는 꼴찌를 한 적도 없는 성실한 경주마였다. 나에게 해리는 그런 배우였다.  2017년 9월 15일. 그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던 밤. 한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펑펑 울었다. 안녕. 잘 가요, 해리 ! 




​                            

1) 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08393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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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4-26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해리 왕자에 대한 글을 쓰셨나?하고 들어왔다가 눈물 뽑고가요,,,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20-04-26 16:14   좋아요 0 | URL
제가 애정하는 배우입니다. 아마, 해리는 한번쯤은 보셧을 겁니다. 워낙 많은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셔서....

수다맨 2020-04-26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분에 대해서 찾아보니 대부 2에서 FBI 요원으로 나오셨더군요. 프랑크 펜탄젤리가 국회 청문회에서 ‘그동안 FBI가 시켜서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에 대한 허위 증언을 했다‘고 답변하는 부분에서 등장하네요. 해리 딘 스탠튼이 처음에는 잡아먹을 듯이 펜탄잘리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나중에는 손깍지를 끼거나 눈을 옆으로 굴리면서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주어진 역할이 어떠하건 간에 자신의 길을 한결같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는 것 같습니다. 유명 스타만이 아니라 이런 이들을 칭찬하고 존중하고 기억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4-26 16:16   좋아요 0 | URL
대부에서도 나오고, 잡다한 영화에서도 수없이 등장하죠. 워낙 짧은 등장이라 잘 모른다는... 영화 에이리언에서도 나오죠.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도 등장하고... 갑자기 제목이 생각이 안나는데 괴물에게 먹히기도 하고....

laissez 2020-04-28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어릴 때 티비에서 우연히 만났던 파리텍사스가 생각납니다, 어린 맘에도 이건 좀 심상찮은 영화구나 싶었던 생각이.
그후 비디오샵에서 빌려보고 오래 잔상에 남았었네요. 한동안 영화를 잊고 살아서 이 분이 돌아가신 줄도 몰랐었다는;;

곰곰생각하는발 2020-04-28 19:15   좋아요 0 | URL
91세이니 천수를 누린 셈이죠.
 
















꽃무늬 코듀로이 셔츠






                                              이십 년 넘게 입고 있는 꽃무늬 셔츠가 있다. 한 계절이 지나면 유행이 게눈 감추듯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나는 꿋꿋하게 이 옷을 챙겨 입는다. 셔츠 핏이 펑퍼짐해서 입으면 마대자루 뒤집어쓴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재질이 고리땡(코듀로이)이어서 지나치게 촌스러워 보이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도 아니다. 변두리 옷가게에서 파는 그 흔한 중저가 브랜드의 옷일 뿐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옷의 핏에 대해 꽤나 까다로워서 작년에 산 바지 중에서 탭을 떼지도 않은 채 버린 것만 4개나 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정리하지만 버리려고 쌓아놓은 옷더미에서 다시 꺼내 챙기곤 한다. 아까운 마음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혹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왜일까 ?  곰곰 생각해 보아도 내가 이 낡은 옷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가 결혼했을 때 친정 엄마가 마련해준 비단 이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연을 들었다. 가볍고 보온성이 뛰어난 이불에 비한다면 친정 엄마의 비단 이불은 무거운 목화솜 이불이라 유행이 지난 이불인데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꽃무늬 코듀로이 셔츠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연 속 그녀가 친정 엄마가 선물한 비단 이불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녀에게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꽃무늬 코듀로이 셔츠를 입었던 날들이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때는 젊었으며 누군가를 사랑했고, 또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시절이었다.  한여름 밤, 비가 후두둑 떨어지던 밤. 땀방울이 등골을 타고 내려와 엉덩이에 고였던,  섹스에 골몰했던 그 밤도 기억이 난다.  섹스가 끝난 후에 애인과 함께 나눠 피웠던 한 개비 담배의 맛을 잊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꽃무늬 코듀로이 셔츠에 애착을 보이는 것은 한때 행복했던 날들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면 태극기 부대에 참석하는 노인들이 박정희에게 보내는 애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에게 그들의 생애 중에서 가장 화려했던 날들은 아마도 박정희 시대였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젊었고 아름다웠으며 씩씩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박정희는 친정 엄마가 결혼한 딸에게 선물했던 목화솜 비단 이불이었고 나의 꽃무늬 코듀로이 셔츠였던 것이다. 발 딛고 있는 지금이 불행할수록 애착은 커지는 법이다.  오늘도 나는 이 낡은 셔츠를 꺼내 입는다.  목둘레가 닳아서 헤어졌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행복했던 기억이 이제는 세월이 흘러 유행에 뒤떨어진 기억의 편린이라 해도 그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으니깐 말이다.  오늘 같은 날씨에 입기 좋은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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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2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2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의 세계











                                                                                               인디밴드 카우치가 생방송 도중 빤스 내리고 거시기를 고추 세웠다가 거세되었다면  거시기 대신 가운뎃손가락 곧추세우며 카메라를 향해 침을 뱉었다가 거세되었던 90년대 얼터너티브 펑키 롹 그룹 삐삐밴드는 < 설탕 > 이라는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혓바닥 위의 설탕은 배트맨도 슈퍼맨도 왕자님도 공주님도 옆집 사는 아줌마도.......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춘향이, 말론 브란도, 율 브리너, 이소룡, 아랑드롱도 너무나도 좋아한다고. 설탕의 맛, 알랑가 몰라 ?  


하지만 벌꿀(꿀벌이라고 썼다가 화들짝 놀라서 급하게 고쳤다. 아, 나의 지적 수준이 결국은 박근혜였단 말인가!)을 한 사발 담아 단번에 꿀떡 삼키라고 한다면 쉽지 않다.   그리고 평소 음식을 짜게 먹는 사람도 소금을 한 움큼 삼키라고 하면 손사래를 칠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좋아하는 맛이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의 미각(짠맛, 신맛, 단맛, 쓴맛, 감칠맛)이 결합된 상태'이다.   그렇기에 훌륭한 요리는 다섯 가지 미각이 절묘한 비율로 조율된 맛을 제공한다.   감칠맛 나는 단짠 요리에 신맛과 쓴맛이 가미된 포도주가 최상의 궁합인 이유이다. 배우의 연기도 마찬가지'이다. 


JTBC 상류 가정 파탄 에로틱 스릴러 막장 맞바람 불륜 삼류 드라마 << 부부의 세계 >> 에 등장하는 중년 여성 배우들의 연기를 보다 보면 단세포적인 연기에 질려서 감탄하게 된다. 김희애는 슬픈 연기를 잘한다. 행복한 연기도 훌륭하고 분노한 연기도 훌륭하다. 문제는 행복할 때에는 행복한 감정만 연기하고, 분노할 때에는 분노한 감정만 연기하고,  슬플 때에는 슬픈 연기만 연기한다는 점이다.   진짜 문제는 그녀의 얼굴에는 딱 하나의 감정만 표출된다는 점이다.  시청자들은 그녀의 연기가 훌륭하다며 손뼉을 치는데 나는 당최 그 연기들이 지나치게 단세포적이어서 떨떠름하다. 


인간은 다양한 종류의 근육이 있는데 상당 부분이 얼굴에 집중되어 있다(전두근, 추미근, 소 광대근, 대 광대근, 볼근, 구각하제근, 하순하제근, 광경근,안륜근, 비근근, 비근, 상순거근, 구륜근, 교근, 이근, 흉쇄유돌근(목빗근), 사각근, 저작근. 저작근- 교근, 내측익돌근, 외측익돌근, 측두근). 여기서 " 표정 " 이란 두 개 이상의 근육이 움직여서 교집합을 형성할 때 발생한다. 즉, 어떤 근육이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표정은 단순할 수도 있고 오묘할 수도 있으며 심오할 수도 있다.  좋은 배우일수록 보다 많은 얼굴 근육을 사용하여 깊은 표정을 만든다. 


그렇기에 훌륭한 배우가 연기한 얼굴 표정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감정이 드러난다. 그것은 마치 모나리자의 얼굴 표정과 비슷해서 그 표정을 딱 한 가지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김희애의 얼굴 표정은 매우 단순하다. 아, 슬프구나. 아, 기쁘구나. 아, 화가 났구나.......   설탕을 찍어 먹으니 단맛이요, 소금은 짠맛이요, 식초는 신맛이니라.  뭐, 이런 감상 ?!   김희애라는 배우의 연기가 형편없는 이유는 그녀가 근육을 사용해서 밥벌이를 하는 진짜 노동자가 아니라는 데 있다. 김희애만 탓할 일은 아니다. 


요즘 배우들은 얼굴에 성형 칼을 마구 휘둘러서 섬세한 근육을 죄다 잘라 놓고 설상가상 보톡스로 근육마저 마비시킨다. 그것은 마치 팔 자른 목수 같다. 24시간 퉁퉁 부은,  팽팽한 얼굴로 연기를 하니 단세포적인 표정만 생산할 수밖에 없다. 김희애의 친구로 등장하는 박선영은 더욱 심각하다(성형한 배우치고 연기 잘하는 배우를 본 적 없다. 박근혜를 보라). 이런 종류의 배우들은 부족한 표정 연기를 목소리 연기로 커버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배우의 본질은 목소리가 아닌 표정 연기에 있다. 목소리 연기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성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얼굴 근육을 사용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그냥 유한계급 같다. 그럴 때마다 영화 << 마더 >> 에 나오는 김혜자의 얼굴을 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적어도 그녀는 한 개의 표정을 만들 때 여섯 가지 이상의 근육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표정은 너무나 섬세하고 깊다. 특히 주름은 표정을 강조하기에 무엇보다 훌륭한 재료'다. 훌륭한 요리가 다섯 가지 미각의 총합이듯이 훌륭한 배우의 표정 연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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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마더 >>   :    김혜자의 표정을 감상하는 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 모나리자 >> 그림을 감상하는 일만큼이나 행복하다. 두 표정의 공통점은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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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1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1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막시무스 2020-04-21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수가 아닌 복수의 감정표현! 정말 좋은 지적이신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ㅎ

곰곰생각하는발 2020-04-21 20:01   좋아요 1 | URL
전 배우의 알듯모를듯한 표정을 좋아합니다. 슬프다가 막 펑펑 우는 연기는 질색이고요..ㅎㅎ

수다맨 2020-04-21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봉준호의 ˝마더˝를 군대에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금요일 밤이었는데 그날 훈련을 뛰고 와서 피곤했던 탓인지 중반까지만 감상하다가 잠들었고, 지금까지도 굳이 찾아서 전편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데 김혜자가 피해자의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신들린 듯한 표정으로 자기 아들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던 장면만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김혜자가 유족들에게 뺨을 맞은 뒤 공동묘지로 돌아와서 다소 태연한 표정으로 입술 화장을 고치던 모습도 강렬하게 생각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04-21 20:02   좋아요 0 | URL
다시 한번 보세요. 뒤로 갈수록 강렬해집니다.. 봄날이니 조만간 술 한 잔 합시다. 낙원동에서 봐요.

레삭매냐 2020-04-21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드라마는 보지 않지만,
왠지 간접적으로나마 본 듯한
기시감이 들 정도네요.

요즘에는 영상물을 거의 안보
다시피 하게 되어서 더더욱
실감이 난다고나 할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04-21 20:04   좋아요 0 | URL
배우들이 너무 목소리만 가지고 연기를 해요. 뭐, 하긴 보톡스에 얼굴이 마비되니 어쩔 수 없이 목소리 연기만으로 커버해야 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전 좀 보기 힘들더군요.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왜 그렇게 울고 왜 그렇게 부들부들하는지....

2020-04-21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22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0-04-22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오셔서 또 이렇게 멋진 글을 써주셨군요!!^^ (아니다, 선거 이야기 하셨더랬죠~. ^^;;)
저는 부부의 세계를 너무 보고 싶었는데 이태원 클라쓰는 해주는 넷플릭스가
부부의 세계는 안 해주는 거에요!!! 정말 너무하더라구요.ㅠㅠ
암튼 그래서 원작인 Dr. Foster를 봤어요.
그 여자는 연기 잘해요. 김해자씨 만큼은 아닌데, 그러니까 복수는 아니라도 이수(두수? ㅎㅎㅎ) 정도는 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04-22 12:02   좋아요 0 | URL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박선영 연기 보다가 계속 이상한 겁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고통에 못 이겨 슬픈 목소리를 내는데 표정이 무표정한 겁니다. 이거 뭐지 하며 집중해서 얼굴 표정을 보니 얼굴이 마비가 되었어요. 왜 사랑 퉁퉁 부으면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잖아요. 그거 더라고요. 보톡스와 성형 수술 때문에 얼굴 근육이 파괴된.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엇습니다. 자식이 사고로 죽었는데 형사가 장례식장에 갔는데 나중에 그 부인을 체포합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슬픈 표정이 없는데 우는 척을 해서 이상해서 그리 했다고 .. 나중에 알고 보니 보톡스로 인해 표정이 마비되었는데 형사가 그것을 착각한 것이죠..

고양이라디오 2020-05-26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여자친구가 추천해서 부부의 세계를 함께 봤습니다. 시청률도 높고 연기도 좋다고 해서 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곰발님의 글을 보니 무릎을 탁치게 됩니다. ‘마더‘와 비교하니 극명하네요. 저는 도통 드라마의 과장된 연기가 적응되질 않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5-27 16:06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저도 보면서 왜 저렇게 과장된 연기를 하지 ? 말투도 그렇고... 참.. 이게...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