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잘 가요. 해리 !
내가 무명의 단역 배우에게 홀딱 반했던 이유는 그의 주름투성이 얼굴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생기는 것이 주름이라지만 사실 해리 딘 스탠튼은 스무 살에도 주름 접힌 얼굴이었다. 그의 팬이 된 이후, 그가 출연한 영화는 거의 다 보았다. 그는 다양한 캐릭터로 등장했지만 언제나 분량은 짧았다. 대부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거나 형편없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곤 했다. 사람들이 주연배우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면 나는 전체 런닝타임에서 1분 정도 등장했다 사라지는 그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곤 했다. 어느 날, 그가 내 꿈에 나타났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나의 팬이 되어 고맙다고 말했다.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기억에 남는 대화는 깡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길바닥에 떨어진 깡통을 보면 발로 찬다고,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인 깡통은 또 누군가의 발길질에 날아간다고, 비록 깡통은 발이 없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멀리 떠나 있다고. 자신은 어쩌면 그런 존재였다고. 생각해 보니 그가 내 꿈에 나타났던 것은 며칠 전에 보았던 영화 << 럭키 >> 에 대한 잔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영화에서 그는 주연배우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풀타임으로 등장한다. 그가 지금까지 출연했던 모든 영화의 런닝타임을 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출연 분량이었다. (피식) 노인네, 소원 성취하셨네. 나는 그의 추레한 모습을 좋아했고, 그의 깊은 주름과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좋아했다. 또한 독한 위스키로 폐가 손상된 그가 억지로 공기 반 소리 반 노래를 할 때, 그 깔딱거리는 호흡의 불균질성을 좋아했다. 해리는 영화 << 럭키 >> 를 찍은 해에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생각하면 경주마 차밍걸1)이 생각난다. 96전 96패를 기록한 경주마 차밍걸의 최고 기록은 3위가 전부였지만 어지간해서는 꼴찌를 한 적도 없는 성실한 경주마였다. 나에게 해리는 그런 배우였다. 2017년 9월 15일. 그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던 밤. 한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펑펑 울었다. 안녕. 잘 가요, 해리 !
1) 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0839301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