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치 와   영 화   : 








조국, 의혹의 전망대
















                                                                                        세계 최초의 영화는 << 열차의 도착 Arrival Of A Train At La Ciotat, 1896 >> 이다. 1분이 채 안 되는 영화'이니 " 최초의 영화 " 라기보다는 " 최초의 움짤(최초의 ㅡ 비디오 클립, 동영상, 뉴스릴) " 이라는 표현이 적확할 것이다. 


움짤-계의 박혁거세 격인 이 영화를 보고 싶다면 유튜브'를 통해 확인하시라.  내용은 제목 그대로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장면을 담았다.  최초의 영화에 초대된 최초의 관객은 열차가 도착하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열차가 스크린을 뚫고 객석으로 돌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극장 빤스런 사건'이다. 이 믿을 수 없는 " 옛 어르신의 빤스-런 " 은 그 당시에는 상식'에 기초한 행동이었다.  오히려 기차의 움짤을 보고도 튀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던 몇몇 관객의 행동이야말로 튀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처럼 영화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시대에 그리피스 감독은 서로 다른 시기에 발생한 4개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한, 플롯과 내러티브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 인똘레랑스 Intolerance: Love's Struggle Throughout The Ages, 1916 >> 를 만든다. 이 영화는 후세에 시대를 앞선 진일보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영화와 관객의 수준 차이'이다. 기차가 도착한다고 빤스런 했던 관객이 이 복잡한 내러티브와 세련된 플롯 그리고 영화 문법이 전무했던 시대에 교차편집과 평행편집을 선보였으니 당시의 관객이 이 영화의 급진적인 미학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이 영화에는 엑스트라 4천 명과 말 1만 마리'가 동원될 만큼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부었지만 흥행에 참패함으로써 " 미국 영화 


역사상 첫 번째 메이저 박스오피스 재앙 " 이 되었다. 이처럼 특별한 것(영화의 작품성)과 평범한 것(관객의 수준)의 간극이 클 때 비극은 발생한다. 오손 웰즈는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걸작 << 시민 케인 >> 의 흥행 참패로 몰락했다. 이 영화는 관객뿐만 아니라 비평가에게도 신랄한 혹평을 받았다. 찰떡을 만들었는데 개떡이라고 욕을 한 것이다. 버스터 키튼 또한 그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 제너럴 >> 을 완성했으나 흥행 실패로 몰락했으며, 마이클 치미노의 << 천국의 문 >>은 후세에 " 저주받은 걸작 " 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감독에게는 치명적인 아퍼컷'이었다. 그외 몇몇 천재 감독들도 그런 방식으로 잊혀져 갔다. 


이 글에서 언급한 << 인톨러런스 >> , << 시민 케인 >> , << 천국의 문 >> 은 모두 복잡한 서사의 영화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관객은 단선적이며 단순하고 선명한 서사'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 해도 이야기 전개가 복잡하여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면 쉽게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판을 정치판으로 옮기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조국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조국 >> 이라는 영화는 단선적이고 단순하며 선명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유권자'에게는 꽤나 복잡하며 배배 꼬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 배배 꼬였네 ~ 들쑥날쑥해 ~ " 


조국 딸 특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학종 " 이라는 별종을 이해해야 하고, 수시와 정시의 세계를 파악해야 하며, 특례와 특혜의 사전적 차이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깐 << 조국 >> 이라는 영화는 내러티브와 플롯이 복잡해서 관객은 조국이라는 캐릭터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헷갈린다. 마치 << 천국의 문 >> 에서 제임스'라는 캐릭터를 두고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를 두고 끝장 토론을 펼치는 영화광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 그러다 보니 같은 영화인데도 영화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못해 초초하다. 동일한 텍스트를 두고 다양한 해석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 조국 >> 이라는 영화는 꽤 훌륭한 영화'다. 


내가 이 영화를 흥미롭게 관람하고 나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조국은 입시제도의 특례를 활용한 것이지 특혜를 입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한국인의 특권 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자신이 누렸던 특권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흑인 여자는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서 " 흑인 " 여자를 보지만 백인 여자는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서 " 여자 " 를 보는 것과 유사하다.  특권을 가진 자는 특권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복잡한 내러티브를 20자평으로 요약하는 기술이 탁월한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내린 20자평은 다음과 같다. " 특례는 활용했으나 특혜는 없었다. " 이 20자평을 보다 짧은 10자 내외의 촌평으로 압축하자면 " 특례 OK, 특혜 N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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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8-31 1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국 개인보다도 이 ‘문제적 인물‘을 자기 편의적, 일방적, 단선적으로만 해석하는 이들을 볼 때면 두통을 느낍니다. 자한당 계열의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누렸던 특권을 조금도 인지하지 않으면서 조국 일인 때리기에만 광적으로 몰두하고 있고, 민주당과 우호적인 사람들은 ‘자한당 배후설‘을 주장하거나 ‘오직 조국만이 희망이다‘라는 식으로 일관하면서 특례의 문제성과 정당성에 대해선 ‘그래도 불법은 없었다‘는 태도만을 보이고 있더군요.
저도 제 서재에 조국에 관해서 쓰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상황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조국 일인의 장관 임명 여부를 넘어서 절차의 공정성과 정치적 정직성, 기득권의 형성과 대물림에 대한 총체적인 고찰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울러 부언을 하자면 저는 일명 SKY라고 불리는 대학들에 소속된 학생들이 추진하고 있는 집회와 시위에 대해서도 (그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의심과 아쉬움도 들더군요. 이들도 이른바 ‘명문대‘라는 영역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인데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지언정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나 입학 과정, 입신 욕망에 대해서는 자기 점검하는 기색이 별반 없더군요. 과연 이런 이들이 ‘명문대‘라는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 여러 가지 이유로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 그 대학조차 갈 여력이 없어서 일찌감치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젊은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8-31 15:04   좋아요 1 | URL
저도 서울대 고대 촛불 집회 보고서.. 의아.... 아니 그들은 ˝ 기울어진 운동장 ˝ 운운하던데, 사실 그들도 기득권의 핵심에 진입한 이들 아닙니까.... 좀 웃긴 일이었음 -_- , 조만간 한 잔 ~

겨울호랑이 2019-08-31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발님께서 명쾌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8-31 15:03   좋아요 1 | URL
ㅎㅎ 명쾌하쥬 ?
 











조국과 케네디







                                                                                               며칠 전에 조국에 대한 짧은 글을 쓴 적 있다. 그때 내 결정은 " 에포케(판단 정지) " 였다. 쏟아지는 의혹(조국 후보'로 검색되는 기사 567,998건)이 너무나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의혹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가에 대한 의문도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에포케 선언은 언론이 쏟아내는 정보 홍수에 대한 피로감의 반향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언론은 " 조국 " 이라는 키워드를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 거룩 " 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 얼룩 " 이 묻은 인간이었다는 폭로야말로 느와르 펄프픽션의 짜릿한 서사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들이 내놓은 의혹은 때론 터무니없거나 혹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조국 딸 입시 논란(에 한정해서)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 가족이 일반 국민에 비해 학종의 정보를 과독점했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적 문제'에 가깝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보 접근성이 일반인보다는 특권 엘리트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ㅡ 공정하지 않은 교육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제도화된 틀 안에서 정보를 최대한 활용한 것뿐이다. 마이클 키멜은 백인 여자는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서 " 여자 " 를 보고, 흑인 여자는 거울 속에서 " 흑인 " 여자를 발견하고, 백인 남자는 거울 속에서 " 인간 " 을 본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결핍은 눈에 잘 띈다. 다이안 아버스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치명적 약점이 된다. 다시 거울 이야기로 돌아가자. 두 여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사람은 백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흑인이다. 백인 여성이 말했다. " 모든 여성은 여성으로서 동일한 억압에 직면해 있어. 그래서 여성은 연대감이나 자매애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 


그러자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의 말을 되받아쳤다. " 나는 너의 말에 대해 확신이 없어. 내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 ?  네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볼 때 뭐가 보이지 ? " 백인 여성은 당연히 거울 속에는 여자가 보이지 _ 라고 말한다. 그러자 흑인 여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 그렇지, 나한테는 그게 문제야. 왜냐하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나는 흑인 여자가 보이거든. 나한테 인종은 가시적인 거야. 하지만 너에게 인종은 눈에 보이지 않지. 넌 그걸 보지 않아. 그게 특권이 작동하는 방식이지.  특권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아 ! "  


이 대화에서 흑인 여성의 지적이 백 번 천 번 옳다고 해서,  우리는 백인 여자가 거울 속에서 " 여자 " 를 본 인식론적 인지 행위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도덕적 오류도 아니고 인식론적 오류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국이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특권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행위를 무조건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 ?  거울이 왜곡된 상을 비춘다면 우리는 기꺼기 그 거울을 깨야 한다.  당신이라면 그 왜상의 거울을 깨는 도끼는 누구 손에 쥐여 주어야 옳을까. 나무꾼에게, 아니면 난봉꾼에게 ? 


"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  오해는 마시라. 나는 조국 열혈 지지자'는 아니다. 그 유명한 케네디의 연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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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30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30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8-30 16:48   좋아요 0 | URL
정말 5000원 안냈다고 지랄했었나요 ?

2019-08-30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8-31 15:01   좋아요 0 | URL
크아아아아아아아아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 그런 일도 있었군요. 역대급이네요.... 적성회비 5000원 미납했다고 지랄하는 것은 아스트랄하네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척하기에는 :










비웃음





 


▶  비의 몰락을 가속화한 전설적인 노래로 대중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한 작품. 비라는 브랜드에 지나친 자신감을 선보여 " 레이니즘 " 이라는 해괴망칙한 작명으로 자신을 뿜뿜 할 때부터 그를 좆같이 생각한 나는 깡이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 기쁨으로 충만했다. 나는 깡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 너, 좆됐어. 쪼다야 ~ " 









                                                                                                   직장에서 윗사람이 웃기지도 않는 쌍팔련도 개그를 선보일 때 아랫것은 쌍팔들어 환호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농담꾼은 보기 좋았어라. 웃기냐, 나도 웃기다 !  아재는 젊은 사원이 박장대소하는 모습에 불알이 탱천하여 의기양양하다. " 이 나이에도 저 어린것들을 웃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란 말인가. 나란 존재는 그런 존재다. "  모두 다 쌍팔 머리 위로 손 들어, 예 ~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웃어 젖히는 일도 힘든데 그 농담이 약자를 희화화하거나 성적 농담이라면 더더욱 힘들다. 그래도 웃어야 산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의 애티튜드'이다. 웃음과 미소는 약자의 방어 무기'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이 웃(어야 하)고, 윗사람보다는 아랫것이 더 많이 웃는다.  억지로 웃어야 하는 웃음 때문에 울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니,  이토록 포지티브하고 투머치 해피한 감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감정 노동'일 뿐이다. 그런데 사회적 강자들은 사회적 약자가 보내는 약호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약자의 웃음을 오해해서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니 죽을 맛이다.  웃음은 비단 약자의 애티튜드'만은 아니다. 강자도 기분이 좋으면 맘껏 웃는다. 그들이 웃는 웃음은 주로 비웃음의 형태를 띤다. 우리는 흔히 < 비웃음 > 이란 단어에서 " 비 - " 라는 접두사를 非 : 아닐 비'로 오해하는데,  여기서 < 비 - > 는 토종 브랜드 어원'이다. 비의 어원1)을 두고 논란이 많지만 내 생각에는 < 비- > 라는 접사가 " 힘껏 " 의 뜻을 더하는 옛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비웃음은 가짜 웃음이라기보다는 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힘껏 웃는 웃음인 것이다. 


종종 조폭 영화에서 눈치 없이 너무 크게 웃는 바람에 오야붕으로부터 죽도록 맞는 꼬붕을 자주 보게 되는데, 여기서 꼬붕의 죄는 한바탕 웃은 죄'다.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척하기에는 오야붕의 상처가 너무나 크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주변 상황과 관련 없이 힘껏 웃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오야붕'만 가능하다. 아양이 너무 지나치면 비아냥이 되듯이 웃음이 너무 지나치면 그것은 더 이상 웃음이 아니다. 비웃음'이다. 자주 하는 소리이지만 꼬붕은 주먹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오야붕은 손짓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오야붕의 손짓보다 한 단계 위'인 존재는 눈짓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아랫것들의 몫인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성에게 웃음을 강요한다. 웃음이 없는 여성은 애교가 없다거나 매력없다고 타박하기 일쑤'다. 반면에 웃음이 너무 많으면 문란한 여성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어느 장단에 웃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다.  타인에게 웃음을 억지로 강요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렇기에 서비스 노동자에게 웃음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여성에게 " 넌 웃을 때가 제일 예뻐 ! " 라고 말하는 교회 오빠 스타일이 최악의 개새끼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놈은 대부분 이런 소리를 자주 한다. " 오빠 믿지 ?  손만 잡고 잘께 ~ " 










​                                  


1) 국어연구원의 대답 : ‘비웃음’은 15세기에 ‘비우’(월인석보 21:15)으로 처음 보입니다. ‘비우’은 ‘비웃-’의 동명사형이 그대로 명사화한 것으로 봅니다. ‘비웃-’은 동사 어간 ‘비-’와 ‘웃-[笑]’이 결합된 복합 동사로 추정되는데 ‘비-’의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김민수 편(1997:508) "어원사전"에서는 ‘비-’를 접사로 보고 있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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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발이냐 불발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섹스 피스톨즈





- 리오 브라보, 1959




                                                                                                    영화 속에서 " 총 " 은 " 딱딱한 페니스 " 에 대한 은유'이다(섹스 피스톨즈'라는 이름의 미국 롹밴드도 있다). 격발은 사정이며 불발은 발기 불능'이다. 그리고 총알은 강철로 만든 정자'이고 리볼버 회전식 탄창은, 음.... 그러니까, 그게 일종의 불알'이다. 


그것은 남성의 욕망이자 그 욕망이 반영된 페티시'다. 영화 << 다이 하드 >> 에서 도시를 순찰하는 흑인 형사는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총을 겨누지 못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성 불능에 대한 은유이다. 그와 무전기로 대화를 나누며 동병상련을 느끼는 존 맥클레인 형사'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는 무능한 남편으로 아내와는 이혼 위기에 처해 있으며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아내는 남편의 성을 숨긴 채 처녀적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한다. ​ 그러니깐 아내는 < 홀리 맥클레인 > 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결혼 전 이름인 < 홀리 제네로 > ​로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맥클레인 형사는 나카토미 빌딩 로비에 있는 방문자 명단에서 아내가 처녀적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린다. 맥클레인'이라는 성'은 말 그대로 아내로부터 제거(거세)된 상태인 것이다.  지금 그의 페니스는 발기와 거세 사이에 있다.  잘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꼴린 것도 아닌 상태.  마치 휴대폰 표시창에 방전을 알리는,  깜박거리는 아이콘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남근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는 자세를 고추세우며 외친다. " 우린, 죽지 않아 !!!!! " 영화 << 다이하드 >> 는 서부 LA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마천루 서부극이다. 


< 총 > 이 중요한 오브제로 활용되는 서부 영화 장르는 발기된 불알후드의 세계를 다룬다. 주인공은 총구에 불을 품어냄으로써 남성다움을 과시'한다. 퐈이야 ~             그러니까 웨스턴 무비는 기본적으로 남근 선망 판타지에 기반을 둔 장르인 셈이다. 서부 영화의 아이콘이었던 배우 존 웨인과 하워드 혹스 감독이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1952 >> 에 대하여 격렬한 어조로 비난한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윌 케인 보안관(게리 쿠퍼 분)이 히마리 없는 거세된 남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형사가 트라우마로 인해 그 어느 누구에게도 총을 겨누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 다이 하드 >> 의 흑인 형사를 닮았다. 


윌 케인 보안관은 악당과의 대결보다는 마을 사람들의 연대를 강조한다.  또한 그는 부보안관에게 애인을 빼앗긴 상관이며 그와의 몸싸움에서도 가까스로 이긴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남성'이다.  존 웨인과 하워드 혹스가 보기에 월 케인 보안관은 겁쟁이'다.  그래서 그들이 손을 잡고 만든 영화가 << 리오 브라보, 1959 >> 이다.  영화 << 리오 브라보 >> 는 << 하이 눈 >> 제작진에게 보내는 발기한 남성-들의 딱딱한 답장'인 셈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보안관(존 웨인 분)은 악당과 시시때때로 대결하는데, 그는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의 선의를 모두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독고다이 정신으로 수많은 악당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둔다. 게리 쿠퍼 보안관이 고뇌하는 햄릿 유형이라면 존 웨인 보안관은 돈키호테'다. 다시 말해서 게리 쿠퍼 보안관이 당기되 쏘지는 않는다는 " 인이불발 " 을 실천한다면,  존 웨인 보안관은 " 일단격발 一旦擊發 " 을 주장한다.  전자가 지루라면 후자는 조루다. 이처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영화를 감상하며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시각적 쾌락 너머의 지적 유희'이다.  불알후드의 극렬 다이오드적 시네마틱 극성 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고개 숙인 남성의 히마리 없는 불발'에 애정이 간다. 무릇 총이란 위험한 무기'로 언제나 격발이 가능하기에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남근도 총이다(아님 말고). 당기되 아무때나 쏘지는 마라, 잉글랜드 토끼가 비웃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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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8-22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황혼에서 새벽까지>에 나온 ‘섹스 머신’이 생각나네요. 하체로 총을 쏘잖아요.. ㅎㅎㅎㅎ 중학생 때 그 영화를 처음 봤는데, 정말 잊지 못할 캐릭터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8-22 17:10   좋아요 0 | URL
인상에 남는 캐릭터였죠. 섹스 머신.... 보고 싶네요. ㅎㅎㅎ
 












미워도, 원 모어 타임 플리즈 ! "










                                                                                                       한때 시네마 떼끄가 우후죽순처럼 들쑥날쑥하던 때가 있었다. 퀄리티를 놓고 보면 죽(竹)인지 쑥인지 알 수 없는 죽 쑨 시설도 많았지만 지하 골방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말로만 듣던 세계 명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장 비고의 << 품행 제로 >> 를 그곳에서 보았으며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 거울 >> 도 그곳'에서 보았다. 영화의 원형을 경험한다는 것은 묘한 감동을 준다. 서부극은 시네마 떼끄의 단골 상영작 목록이었다. 존 포드의 << 역마차 >> 에서 존 웨인은 서부 영화의 원형에 가까웠다. 서부인은 적과 싸울 뿐만 아니라 거친 자연과도 싸운다. 존 웨인은 현대극 이전의 존 맥클레인이었고 존 람보'였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역경을 헤쳐나가며 적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는 홀연히 떠난다. 영광은 잠시뿐, 굴비는 짜다 !  서부극은 앞모습으로 시작해서 뒷모습으로 끝나는 장르'였고 나는 그 영웅들의 뒷모습을 좋아했다. 


앞모습은 초라해 보일지라도 뒷모습이 당당한 남자야말로 진짜 사나이'가 아닐까 ?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 은 전통 클래식 웨스턴 무비'와는 사뭇 다르다. 은퇴한 보안관을 연기하는 게리 쿠퍼는 늙고 지쳐 보인다. 그의 뒷모습은 당당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며 불안해 보인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자고 애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악당 프랭크 일당이 공동체의 위협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무질서의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보안관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프랭크 밀러 일당과 싸워 이긴다. 이 승리에 크게 환호하는 사람도 없고 적으로부터 마을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주인공의 자부심도 없다. 보안관은 경멸인 듯 아닌 듯 마을 광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그곳을 떠난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보인다.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가 나를 매혹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입이 바짝바짝 마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다른 서부극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이 직립의 애티튜드는 장렬하다기보다는 나약해 보였다. 


오래전 내 기억 속에서 이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흠뻑 빠졌다. 게리 쿠퍼가 연기한 윌 케인 보안관은 서부극 영웅의 전통적인 영웅이 아니다. 그는 고독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절망하고 고뇌하며 다가오는 죽음에 불안해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 영화 속에서 은퇴한 보안관은 적과의 " 대결 " 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 대화 " 를 시도하지만 그가 이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거대한 권력과 무소불위의 힘 앞에서는 약해지는 인간의 추악한 속성'이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이 과정을 통해서 서부영화 장르의 허망한 판타지를 낱낱이 고발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정의롭고 정직하다. 프랭크 밀러 일당 네 명 중 두 명은 에이미(그레이스 켈리 분)'가 처단한다. 주류 서부 영화가 주로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남성(게리 쿠퍼)를 구원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진보적이고 전복적이다.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혹은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동일한 텍스트를 반복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텍스트를 경험하는 행위'다.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어제 본 영화와 오늘 본 영화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쁨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사람은 항상 새로운 사람이다. 영화도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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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21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 무삭제 장 자끄 베네의
<베티 블루> 세 시간을 아무런 자막
도 없이 그림만 보며 황홀해 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리고 보니 링클레이터의 <비포어
선라이즈>도 시네마떼끄에서 본
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8-21 17:08   좋아요 0 | URL
제 친구가 프랑스 유학 갔을 때 티븨에서 베티블루 무삭제판 상영했다고 편지에다 구구절절 적었더군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