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원 모어 타임 플리즈 ! "










                                                                                                       한때 시네마 떼끄가 우후죽순처럼 들쑥날쑥하던 때가 있었다. 퀄리티를 놓고 보면 죽(竹)인지 쑥인지 알 수 없는 죽 쑨 시설도 많았지만 지하 골방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말로만 듣던 세계 명작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복이었다. 


장 비고의 << 품행 제로 >> 를 그곳에서 보았으며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 거울 >> 도 그곳'에서 보았다. 영화의 원형을 경험한다는 것은 묘한 감동을 준다. 서부극은 시네마 떼끄의 단골 상영작 목록이었다. 존 포드의 << 역마차 >> 에서 존 웨인은 서부 영화의 원형에 가까웠다. 서부인은 적과 싸울 뿐만 아니라 거친 자연과도 싸운다. 존 웨인은 현대극 이전의 존 맥클레인이었고 존 람보'였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역경을 헤쳐나가며 적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는 홀연히 떠난다. 영광은 잠시뿐, 굴비는 짜다 !  서부극은 앞모습으로 시작해서 뒷모습으로 끝나는 장르'였고 나는 그 영웅들의 뒷모습을 좋아했다. 


앞모습은 초라해 보일지라도 뒷모습이 당당한 남자야말로 진짜 사나이'가 아닐까 ? 프레드 진네만 감독이 연출한 << 하이 눈 >> 은 전통 클래식 웨스턴 무비'와는 사뭇 다르다. 은퇴한 보안관을 연기하는 게리 쿠퍼는 늙고 지쳐 보인다. 그의 뒷모습은 당당하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며 불안해 보인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자고 애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악당 프랭크 일당이 공동체의 위협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무질서의 세계가 누군가에게는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보안관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프랭크 밀러 일당과 싸워 이긴다. 이 승리에 크게 환호하는 사람도 없고 적으로부터 마을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주인공의 자부심도 없다. 보안관은 경멸인 듯 아닌 듯 마을 광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그곳을 떠난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보인다.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이 영화가 나를 매혹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입이 바짝바짝 마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다른 서부극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이 직립의 애티튜드는 장렬하다기보다는 나약해 보였다. 


오래전 내 기억 속에서 이 영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영화가 아니었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흠뻑 빠졌다. 게리 쿠퍼가 연기한 윌 케인 보안관은 서부극 영웅의 전통적인 영웅이 아니다. 그는 고독한 영웅이라기보다는 절망하고 고뇌하며 다가오는 죽음에 불안해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이 영화 속에서 은퇴한 보안관은 적과의 " 대결 " 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 대화 " 를 시도하지만 그가 이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거대한 권력과 무소불위의 힘 앞에서는 약해지는 인간의 추악한 속성'이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이 과정을 통해서 서부영화 장르의 허망한 판타지를 낱낱이 고발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정의롭고 정직하다. 프랭크 밀러 일당 네 명 중 두 명은 에이미(그레이스 켈리 분)'가 처단한다. 주류 서부 영화가 주로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남성(게리 쿠퍼)를 구원하는 사람은 여성이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진보적이고 전복적이다.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혹은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동일한 텍스트를 반복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텍스트를 경험하는 행위'다.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어제 본 영화와 오늘 본 영화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만날 때마다 새로운 기쁨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좋은 사람은 항상 새로운 사람이다. 영화도 그렇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삭매냐 2019-08-21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 무삭제 장 자끄 베네의
<베티 블루> 세 시간을 아무런 자막
도 없이 그림만 보며 황홀해 하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리고 보니 링클레이터의 <비포어
선라이즈>도 시네마떼끄에서 본
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8-21 17:08   좋아요 0 | URL
제 친구가 프랑스 유학 갔을 때 티븨에서 베티블루 무삭제판 상영했다고 편지에다 구구절절 적었더군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