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떠나며......  

 

 

13.  탁류 +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 를 보다가 문득 여행이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작정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군산행 티켓을 끊었다. 이유는 없다. 군산 터미널에 내렸을 때, < 군산 > 이라는 도시에 대한 내 첫인상은 꾀죄죄죄죄'였다. 한여름 평일 오후여서 거리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아무 생각없이 걷다 보니 추레한 저잣거리'가 나왔다. 첫눈에 이곳이 옛 시내 중심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문을 닫은 나이트클럽과 방석집들이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번성했으리라. 계속 걸으니 작은 시장'이 나왔다. 가게가 대여섯 개 정도 붙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가게 유리에 선팅을 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옥외 간판에는 모두 " 안주일절 " 이라거나 " 안주일체 " 라는 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술집인 모양이었다.

 

입간판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누구는 < 一切 > 을 " 일절 " 이라고 하고 누구는 " 일체 " 라고 하니 말이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 切 > 는 끊을 절'이라는 뜻과 함께 온통 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한자다. 하지만 뜻은 정반대'다. < 안주일체 > 는 온갖 안주'를 구비했다는 뜻이고, < 안주일절 > 에서 일절'은 " 아주, 전혀, 절대로의 뜻으로, 흔히 사물을 부인하거나 행위를 금지할 때에 쓰는 말(네이버 국어사전) " 이므로 안줏거리가 일절 없다는 소리'다. 혼자 찌질하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치질에 걸린 괄약근이 욱씬거렸다. 눈에 띄는 점은 가게마다 얼음맥주'라는 현수막을 걸었다는 점이다. 여름 한철에만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맥주면 맥주이지 얼음맥주는 무슨 뜻일까 ? 미지근한 맥주를 파는 데도 있었던가 ?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안주일절이라고 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당혹스러웠다. 맥주집이라기보다는 공사장 인부들 밥을 해주는 함바 집과 비슷했다. 벽에는 으레 D컵 가슴을 가진 비키니 차림의 여성 사진이 있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달력 속 비키니 여자는 내게 " 식욕이 성욕이에요 ! " 라고 속삭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일어났다.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오더니 큰소리로 일어나라고 한 것이다. 내가 앉은 곳은 의자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 테이블마다 놓여 있길래 의자 대용인 줄 알고 앉았더니 아이스박스였다. 박스 안에는 얼음에 담긴 맥주로 가득했다. 아, 했다. 그래서 얼음맥주'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아아, 했다. " 얼음맥주집 " 은 셀프 시스템이었다 ! 나는 다시 찌질하게 웃었다. 치질에 걸린 괄약근이 욱씬거렸다. 웃고 있는 사이, 안주일절이 나왔다.

 

완두콩, 오이, 청양고추, 간장게장, 방어회, 마른 안주 등등. 나는 깜짝 놀라서 주인에게 안주를 시킨 적 없다고 하자 주인은 또다시 큰 소리로 서비스'라고 했다. " 맥주 3병 마시면 안주는 무한정 나오니께 걱정 마시고 드시쇼. " 그러니깐 여기 셈법은 이렇다. 맥주 3병에 만 원이고, 소주는 2병에 만 원이다. ( 추가 주문 시 소주는 1병 당 오천 원 ) 그날 나는 맥주 6병을 마시고 이만 원을 냈다. 돈을 냈지만 공짜 술'을 얻어먹은 기분이 들었다. 술값이 이토록 저렴한 도시라니 ! 나는 그 길로 이곳에 방을 얻어 살기로 했다. 원없이 술이나 마시다가 죽으리라. 여기서 1년을 보냈다. 365일 술을 마셨다. 단골이 되다 보니 밥을 달라고 하면 밥도 주었기 때문에 끼니와 함께 술도 마실 수 있었다. 

 

술집에서 나는 프로야구를 보았다. 엘지는 항상 졌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취해서 무작정 길을 걷고 있었다. 사진관을 지나쳐 갔는데 문득 기시감이 들어서 뒤돌아보았다. 맙소사,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 에 나왔던 그 사진관이 아니었던가 ?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영화가 군산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 그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고는 했다. 한석규와 심은하가 달리기를 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가고, 해망동에도 갔다. 사실 군산은 볼거리가 거의 없는 곳이다. 유적지나 명승지라고 해봐야 은파 유원지나 히로쓰 가옥이 전부였다. 일자리도 없어서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날 궁리만 했다. 하지만 나는 80년대 어느 즈음에서 멈춰버린 듯한 군산을 좋아했다.

 

군산은 자연 환경이 수려한 고장이 아니었다. 군산 바다는 흙탕물에 가까웠다. 탁류였다. 젊은이들은 자조섞인 말투로 똥물이라고 했다. 채만식 소설 < 탁류 > 는 바로 군산이 무대'다. 내용은 출판사 책 소개로 대신한다.

 

『탁류』의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초봉이다. 돈에 눈먼 아버지 정주사 때문에 사기꾼이자 호색한인 은행원 고태수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는데 결혼한 지 열흘을 겨우 넘겨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장형보의 농간으로 남편 고태수는 탑삭부리 한참봉에게 맞아죽으며 그러는 사이 장형보는 초봉을 겁탈한다. 평소 초봉이 믿고 의지했던 약국 주인 박제호는 부인과 별거함과 동시에 초봉의 처지를 이용해 첩으로 들이는데 초봉이 딸 송희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욕정이 시들해져버리자 마침 송희의 친권을 주장하며 나타난 장형보에게 모녀를 떠넘겨버린다. 초봉은 제게 순종을 강요하며 아이를 학대하는 장형보를 맷돌로 쳐 죽이고 만다.

 

 - 출판사 책 소개글에서 발췌 

 

 

나는 그림엽서에 나올 만한 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도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겨울이 되자 술집들은 더 이상 얼음맥주를 팔지 않았다. 아이스박스에 보관하지 않아도 얼음처럼 시원했으니깐 말이다. 술 마시다가 죽으리라던 애초의 계획은 틀어졌다. 꼬박꼬박 술집에서 밥을 먹다 보니 오히려 살이 붙어서 건강해졌다. 내가 군산을 떠나던 날, 비가 미친듯이 쏟아졌고 방수비닐을 뒤집어쓴 책 절반 가량은 빗물에 젖어서 울고 있었다. 너만 울었냐 ? 나도 울었다. 시바, 되는 일 하나도 없군. 어제까지만 해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때마침 이사하는 날 비가 쏟아진 것이다. 트럭이 군산대교를 지날 무렵 이삿짐 트럭 운전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창밖을 보았다. 탁류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실없이 자주 웃었다. 그럴 때마다 똥구멍이 자주 아팠다.

 

그때였다, 갑자기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급히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차가 기울어지더니 이내 금강 하구로 추락했다. 절반만 젖었던 책은 탁류에 잠겼다. 물론 나도 탁류에 잠겨 사망에 이르렀다. 탁한 물색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어가면서 나는 생각했다. 시바, 재수 존나게 없군. 책이 다 젖었어 ! 쓸데없는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났다. 그럴 때마다 똥구멍이 자주 아팠다. 똥구멍이 아픈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죽음으로 인하여 가족은 3억에 가까운 보험금을 받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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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고양이 2014-04-1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란 노래가 떠오를까요. 무심코 영화를 보다가 떠나고 싶다고 떠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1:43   좋아요 0 | URL
여수 좋죠.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폐허가 된 도시가 좋더군요. 강원도 통리라던지 군산 같은 도시가 좋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도시가 막 끌려요. 봉준호 영화, "마더"의 배경이 된 소도시처럼 보통 사람들이 지명조차 잘 모르는 그런 동네. 군산하면 징게멩게와 더불어 조정래,『아리랑』이 자동으로 떠오르는데. 식신이라 간장게장도 생각나고. 그런데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네요. 기아 타이거즈의 허접한 두번째 홈구장이 있는 곳이기도 한데요. 그렇게 오랫동안 앉았던 아이스박스 안깨졌습니까?^^ 아무래도 그 박스에서 풍겨나는 냉기에 그 구녘^^이 아팠을 것 같은데 말예요. 오히려 아이스박스 자체는 덜 차가울 지도 모르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3:45   좋아요 0 | URL
피식... 얼른 일어나서 의자에 앉았습니다. 전 진짜 그게 의자인 줄 알았어요. 왜 푹신하니까 인테리어 겸 소품 활용이구나 했거든요. 거기서 맥주를 꺼낼 줄은 꿈에도 몰랐음... 아, 사진 있는데 고 사진 올려드리겠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5 13:58   좋아요 0 | URL
앗 사진 보니까 아이스박스가 깨지지 않는 대신 곰발님의 고것(?)이 왜 얼갈이배추무늬가 된 건지 알겠네요. 남도는 역시 음식 인심이 후하죠. 안그랬다간 쪽박나는 거예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4:03   좋아요 0 | URL
서울에서는 저 안주 정도면 한 2,3만 원 하지 않을까 싶군요.
제가 자주 가던 곳은 자매 할머니 두 분이 하셨는데
제가 가면 특별히 삼계탕 끓여주시고는 했습니다.
주위 손님들에게 원성이 자자했음... 저에게만 특별식으로 해주시고는 했거든요..ㅋㅋㅋㅋㅋㅋㅋ
주위 사람들이 막 뭐라하면 한말씀 하시고는 하셨죠.

" 왜 지랄들이여, 내 돈으로 자식새끼 같은 총각 먹인다는데... "

저 떠날 때 작별인사했더니 펑펑 우시더군요..

엄동 2014-04-15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주값이 맥주값보다 싸군요!

히치콕영화나 채플린영화를 다룬 글들도 좋지만
전 곰발님의 이런 글들이 좋아요

선명하고 화사하기보다
추레하고 꾀죄죄해도.
그로 인한 흐린시야가 맘을 참 편하게 해주는
그런 동네들처럼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8:58   좋아요 0 | URL
제가 군산에 대해서 기묘하게 정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그래서일 겁니다.
뭔가 추레한 느낌... 전주 같은 고장은 마치 민속 박물관 같잖아요.
보여주기 위한....... 처음에는 참 좋은데
이게 나중에는 그닥... 질리더라고요. 이런 지적은 내 이웃이 한 지적인데
그 친구가 워낙보는 눈이 있어서 저는 그냥 생각지 못했는데
그친구는 정확히 말하더군요.

엄동 2014-04-16 10: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민속박물관 같은...

와. 적확한 비유네요

정혁 2014-04-1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두를 구우면 군만두.

산을 구우면 군산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6 03:20   좋아요 0 | URL
그럼 군인은 사람을 구워서 군인'입니까!!! ( 발끈 ㅋㅋㅋ )

rtour 2014-04-1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군산에도 있군요, 이런 술집이요. 군산이 참 황량하죠. 일본식 가옥은 멋지더군요, 정원을 고려한 배치라서. 어쨌건 술 한 잔 하고 싶은 기분 들게하는군요!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8:56   좋아요 0 | URL
네, 군산이 참 황량합니다. 정말 지방에 이런 곳은 강원도 광산촌 빼고는 처음입니다. 볼 게 진짜 없어요. 그런데 그게 은근 매력있습니다. 일본식 가옥이 참 많아요. 군산에는... 옛날에는 < 탁류 > 에서 나오듯이 쌀거래소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다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지만.... 일본의 흔적이 고스란히 있는 곳이 군산입니다.
80년대 분위기가 있어서 영화 촬영을 자주 하는 곳이기도 하죠. 고량주 한 잔 하십시요.

아진 2014-04-29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집 '대박'이네요.. 코가 비뚤어질 때가지 먹고 싶네요. 서울에도 진귀한 집 좀 소개해주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29 08:33   좋아요 0 | URL
아, 아진 님이시군요. 제가 서울 출신이지만 서울에는 진귀한 집을 단 한 군데도 본 적이 없습니다.
비극입니다.
 

 

 

 

 

 

번역'에 대한 생각(들)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남자'였다. 그는 일단 마음에 안드는 학생을 불러내서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두른 후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른 폭력 선생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주먹으로 학생을 개 패듯 때렸지만 거친 말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거친 말은커녕 고운 말을 하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상황을 재현하자면 : ( 따귀를 연속으로 다섯 대 때린 후 ) " 내가 화난 이유를 알겠어요 ? 몰라요 ?! 왜 몰라요 ? 말을 알아들으라고 귀가 달린 거 아닌가요 ? - 이런 식이었다. 우리들은 이 상황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주먹질과 존댓말의 이상한 동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유일하게 존댓말로 수업을 하는 선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주먹질을 가장 빈번하게 날리는 폭력 선생이었다. 이 사람은 수업 시간에 영어사전과 함께 국어사전'을 가지고 다닐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사전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해서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수업 시간에 맞는 아이들은 대부분 영어사전이나 국어사전을 가지고 오지 않는 학생들이었니 괘씸죄'가 적용된 탓이리라. 그가 영어 시간에 국어사전을 가지고 오라고 한 이유는 영어 독해를 잘하려면 국어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 개똥 철학 "  때문이었다. 모범생들은 영어 선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란 듯이 " 대따 큰 " 사전 두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선생이 자신을 보아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푸들처럼 말이다. 선생이 특정 단어를 찾아보라고 명령하면 선생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몇몇 학생은 경쟁을 하듯 사전을 넘기며 단어를 찾아내서 큰소리로 뜻을 읊었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그 학생을 향해 방긋 !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생이 가르친 수업은 < 영어 수업 > 이 아니라 < 번역 수업 > 이었다.

 

요즘 출판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는 소식은 단연 " 이방인 번역 논란 " 이다. 이번 논쟁'을 보면서 새삼 " 번역이란 무엇인가 ? "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번역 > 이란 주부가 살림을 조금만 게을리하면 티가 팍 나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티가 나지는 않는 < 집안일 > 같다. 번역은 돈이 되는 일도 아니요, 명성을 얻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사소한 이익보다는 번역에 따른 손실이 클 확률이 높다. 번역을 깔끔하게 매조지한다고 해서 칭찬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반대인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반응은 매섭다. " 번역이 개판이네...... " 라는 독자평은 " 배송이 빨라서 좋아요 ! " 라는 댓글 문장만큼 인기있는 레퍼토리'다. 언론사 서평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사 서평 담당 기자들이 "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 라거나 " 번역이 거칠다 "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던데 그럴 때마다 의문이 든다. 원서를 읽고 나서 대조 평가 끝에 나온 평가인가 ? 그럴 일은 거의 없다.

 

매주 쏟아지는 신간을 읽기에도 빠듯한 서평 담당 기자 양반들이 원서까지 꼼꼼히 살펴서 서평을 쓸 리는 거의 없다. 번역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원작의 문장 자체가 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란 자신만의 개성적인 문장을 가지고 있다. 코맥 매카시 소설과 플로베르 소설은 느낌이 확~ 다르다. 만약에 플로베르 문장이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해서 단문 형식으로 하드보일드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 ? 원작이 난해하면 난해하게 번역해야 한다. 오히려 난해한 원작을 쉽게 번역하면 그 번역은 나쁜 번역이다. 무조건 쉬운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을 내면서 " 세대마다 고전 문학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 라고 주장하며 젊은 감수성을 주장하지만 고전을 젊은 감각에 맞게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비장한 저 말은 그저 책을 팔아먹기 위한 상술일 뿐이다. 19세기 소설에는 19세기 감수성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을 21세기 감수성으로 번역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번역된 외국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번역 작품은 절대 오리지날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 아무리 훌륭한 번역'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번역은 필연적으로 번역투 문장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번역 소설을 두고 번역투 문장이라며 비판한다면 어불성설이 된다. 나는 이정서의 도발이 쓸모없는 논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소모전이라고 생각한다. 지지한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화가 나서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자중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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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4-04-1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모작가의 개츠비 번역을 질색.합니다. 이 동네의 번역 논쟁은 재미진데, 포탈에선 무반응이라 슬퍼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4 20: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도 여기서 번역 논쟁이 일길래 이야 포텔 반응 좀 볼까나, 하고 들어갔더니 새벽 3시의 밤처럼 조용하더군요..

asnever 2014-04-1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민음사 번역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네요.
호밀밭의 파수꾼 앞 몇장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http://asnever.blog.me/70188360728?Redirect=Log&from=postView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4 21:12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번역가를 매우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번역이라는 게 득이 거의 없어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욕만 먹는 작업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몇몇 고약한 번역만 아니면 모두 땡큐입니다. 전 무식해서 잘은 모르겠으나
민음사 출판사 자체가 좀 꼴보기 싫다고나 할까요 ? ㅎㅎㅎㅎㅎㅎ. 하여튼 이자리를 빌려 번역하시는 분들 대단하십니다. 독자로써 고맙습니다. 몇몇 꼴보기 싫은 고약한 번역가를 빼고 말이죠.....

과객 2014-04-1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유종호 교수의 <파리대왕>은 일본어판을 참고한 것 같네요. 어휘가 그러네요.
제가 읽었던 책은 다른 사람 번역이었던 모양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이방인> 번역 논쟁을 보면서 참 많이 씁쓸하네요.
출판업이 그렇게 서로 치고 싸우고 할 정도로 힘든 상황인가 싶기도 하고,
번역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른 채로 그냥 떠들어대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기자들마저도......

이게 우리 문화의 수준이려니, 할까요? 말까요?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07:12   좋아요 0 | URL
일본어판을 꽤 참고하신 것 같죠 ? 저는 문예출판사로 읽었던 것.. 아니다. 잘 모르겠네요....
누가 원문과 대조를 해서 올렸으면 합니다.
유종호가 " 하층토 "라고 옮긴 것 원문에는 영어로 뭐가 쓰였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만......
전 역설적이게도 이번 소란을 보면서 번역가가 참 소중한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 김화영을 비판할 생각도 없고 이정서를 비판할 생각도 없습니다.
솔까말 서평 쓰는 기자들 책 다 읽었을까 항상 의문이 들어요. 대충 읽죠. 그리고는 서평 쓰고.
전 신문 서평 읽고서 기자들이 제대로 읽었구나, 이런 생각한 적 한번도 없습니다.

rtour 2014-04-1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번역..잘 해야죠. 근데 돈도 안되고, 힘 들고..욕 안먹으면 다행인 일인 것도 사실. 안하고 싶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07:11   좋아요 0 | URL
번역하는 일'은 정말 소중한 일입니다. 전 항상 고마운 생각으로 읽고는 하죠. 번역가가 없었다면 읽지 못하니깐 말입니다.

마립간 2014-04-15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창작/감동에는 옳고 그름이 없지만 (수평적 가치관의 적용), 번역에는 옳고 그름이 있는 것(수직적 가치관의 적용)으로 이야기하더군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동양의 고전도 주석을 읽으면서 실제 원작자가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썼을까 의심하죠. 가끔 알리딘 서평을 읽고 책을 읽을 때, 책보다 서평이 더 좋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미뤄 생각하면 원저보다 번역서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을 생각합니다. 확률적으로 희박할지라도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하는 상황은 조금 우습지만,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비판할 수 있나도 정확한 판단이 안 섭니다.
저는 방식/예의도 중요시 여깁니다. (이에 관해서는 옳고 그름의 판단이 비교적 쉽죠.)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1:4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종종합니다. 너무 과한 후세의 해석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서평이 책보다 더 화려한 글빨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서평은 좋은 서평이 아니죠..ㅋㅋㅋㅋㅋㅋ

예의 중요하죠. 하지만 싸울 땐 물불 안가리고 싸우는 것도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싸울 때 " 너 몇 살이야 ? " 이런 말 하는 인간만큼 꼴불견도 따로 없죠...

마립간 2014-04-15 12:09   좋아요 0 | URL
저의 의견을 수정합니다. 책보다 좋은 느낌을 주는 서평은 나쁜 서평으로. 대신 서평 자리에 독후감 또는 그냥 글로 대체합니다.

실제 전쟁과 정치는 예禮는 커녕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잘못된 결과가 수정되지도 않습니다. - 그래서 이 두 분야는 저의 스타일이 아니죠. 이 두 분야의 책은 거리감 때문에 읽게 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고 농담한 건데 수정까지 하시면..... ㅎㅎㅎ.

아, 누가 한 말인지는 까먹었는데 책에 이런 소릴 하더군요.
전쟁의 추동은 대개 노획물 때문이었다라고 말이죠. 약탈하고 강간하는 것 때문에 병사들은 열심히 싸웠다고....
누가 말했더라? 하여튼 누가 그리 말했는데 전 이 말에 굉장히 와닿더라고요.
사실 전쟁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를 위한 싸움이기는 보다는 주로 노획, 강간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번역이 너무 어색하면 책이 안읽혀요. 지금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 몇 번이나 읽다가 만 소설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애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영어를 일본에서 해석한 것을 한자로 옮겨적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얘기에 무척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식이 아닌 일본식 한자조어를 쓰다보니 이게 이해가 될 리가 없죠. 제가 가장 민감하게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거의 광분하는 정도지요. 일본식 어투, 일본식 한자조어. 그래서 일본소설의 번역투도 너무 일본식이라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늘 의문을 가지거든요. 일본어로 "쏘오까나"였을 "그럴까나" 등으로 하는 식이요. 우리는 "그럴까"가 편하고 당연한데, 일본어처럼 "~까나"를 붙이는 걸 보면 화가 나서^^ 씩씩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4:08   좋아요 0 | URL
그럴까나///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게 그런 의미였군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유종호의 파리대왕이 아마 전형적인 일본어 번역판을 참고해서 나온 걸 걸 겁니다.
막힌다 싶으면 일본판 봤겠지요. 저렇게 해놓고 새로운 번역 운운하다니...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막 끌어다쓰다보니 저런 단어들이 작품에 무작정 들어간 거 아니겠습니까.

samadhi(眞我) 2014-04-15 14:1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진짜 잘 안쓰는 한자어 보니 정말 갑갑합니다. 누군가 아주 잘 정리해 놓았군요. 저도 그런 거 보면 막 교정하고 있어요. 짜증만 내고 책에 몰입할 수가 없어요. 작품 자체의 수준까지 의심하게 돼요.
법조문이 가장 심하죠. 행정법 공부하다가 마구 살의가 일어나더라구요.

엄동 2014-04-15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저 원작의 전달자 노릇을 충실하게 하겠다.. 란
어느 번역자의 말이 생각이 나네요
(정확한 워딩은 아님)

사회초년생때
회사에서 국어사전 떠들어가며
문서를 작성하곤 했는데
(다른건 몰라도 단어의 의미를 모르고 쓰거나 틀리게 쓰는건 되게 자존심이 상했었음)

불과 몇년 사이에
그 두꺼운 사전은 행방이 묘연해졌네요
(회한)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5 19:01   좋아요 0 | URL
어떤 한계 아닐까 싶어요. 번역이라는 게 말이죠.
오리지날을 뛰어넘으로고 하면 안됩니다.
전 어느 신문 서평에서
원작보다 훌륭하다는 번역본'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런 말을 쓴 기자의 글을 봤는데 욕 나오더라고요.
그건 오리지날에 대한 모독입니다.
최소한의예의 아닐까 싶습니다.

그나저나 엄동 님 사전을 끼고 사셨군요 ? 허허..

스누피 2014-05-02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출판사 사장 새끼가 가명 쓰고, 불어 원본도 아닌 영어판 중역 했다는 군요. 참 대단하고 새로운 이방인 번역입니다. 젠장.

곰곰생각하는발 2014-05-04 06:19   좋아요 0 | URL
그렇더군요. 상상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영어판 중역을 하고 과연 이게 최고의 번역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전 처음에 이 호기로운 선언을 의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이가 없더군요..
 

 

 

 

 

 

 

 

 

 

 

 

 

 


 

 

 

상처적 치질

 

 

12. 상처적 체질 + 캐스트어웨이

 

 

 

 

충무로에서 일할 때 영화 포스터를 붙인 적 있다.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시나리오 보조 작가로 들어갔으나 원고지 대신 영화 포스터가 내 손에 쥐어졌다. 화딱지가 났으나 까라면 까는 세계가 바로 충무로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장이 포스터 붙이는 일을 정상 근무 외 잔업으로 인정해서 가욋돈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근무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다. 가욋돈 외에 점심값에 차비까지 주니 수입이 꽤 쏠쏠해서 일이 끝났을 때에는 아쉬워하기도 했다. 쪽을 파는 것도 며칠 지나다 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담벼락 > 이었다. 포스터를 붙이기에 좋은 담벼락이 있고, 포스터를 붙이기에 고약한 담벼락도 있었다. " 맙소사, 좋은 담벼락과 성질 고약한 담벼락이 존재하다니 ! "

 

박연폭포처럼 넓고 빙판처럼 매끈해서 영화 포스터 열 장'을 한꺼번에 붙일 수 있는 담벼락은 넉넉한 녀석이었다. 이런 담벼락은 발품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넉넉한 담벼락은 매우 귀했다. 특히 종로나 강남 같은 경우는 더했다. 그래서 우연히 이런 담벼락을 발견하게 되면 불알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워서 널찍한 등짝을 " 쓰담쓰담 " 하거나 벽에다 대고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유증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 가욋일이 끝났지만 한동안 담벼락만 보였다. 포스터 열 장을 붙일 만한 담벼락을 만나면 잠시 서서 아쉬워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런 담벼락을 만나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 담 씨 ! 아니... 벼락아, 잘 컸구나, 잘 컸어 ! " 인간'이란 어떤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만 보인다.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구두를 유심히 보게 되고, 가방을 만드는 사람은 가방을 유심히 보게 된다.

 

" 사랑하면 보이나니... " 라는 말은 옳은 소리'다. 내가 영화 포스터를 붙이지 않았다면 담벼락'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미친 놈이 좋은 담벼락 나쁜 담벼락을 구별할 것이며, 넓은 등짝을 " 쓰담쓰담 " 하겠는가 ? 실실 웃으면서 말이다. 과식을 해서 배가 아픈 사람이 길을 걸을 때에는 음식점 간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 약국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약국 따위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음식점만 눈에 보인다. 이처럼 결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관심을 낳는다. 나는 그동안 치질로 고생을  꽤 한 터라 류근 시집 제목 < 상처적 체질 > 은 이상하게 < 상처적 치질 > 로 읽혀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는 했다. 버스 안에서 서서 갈 때마다 쑥덕거리던 그 말, 말, 말, 말. " 저 사람 치질인가 봐 ! " 아, 아아아.....

 

내가 치질에 대해 집요하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알고 보면 건강한 괄약근을 잃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결핍은 그 대상을 눈에 띄는 존재로 만든다. 팔이 없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팔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 상처적 체질 " 을 " 상처적 치질 " 로 읽었다면, 영화 < 캐스트어웨이 > 에서 톰 행크스는 배구공을 사람 얼굴로 읽는다. 로버트 저맥키스가 감독한 < 캐스트어웨이 > 는 " 결핍 " 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가 物物이 넘치는 과잉의 공간이라면 무인도는 철저하게 物物이 부족한 공간'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연기하는 톰 행크스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 역설적이지만 배구공'이었다. 그는 배구공으로 윌슨'으로 불리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가 망망대해에서 배구공 윌슨을 잃고 대성통곡했을 때, 나는 묘하게 그가 느꼈을 처참한 심정에 마음이 통했다.

 

나도 한때 등짝이 넓은 담벼락을 만나면 말을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담벼락이었다. 건물은 우후죽순 새롭게 태어나지만 좋은 담벼락은 점점 사라진다. 골목길이 사라지니 좋은 담벼락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터'가 좋은 가게는 담벼락을 털고 통유리를 깔거나 집 안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주차장 셔터'를 낸다. 안타깝다. 영담모( 영화 포스터를 붙이기에 좋은 담벼락을 사랑하는 모임)라도 만들어야 겠다. 당신들은 모른다. 담벼락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말이다. 그리고 괄약근을 업신여기지 말기를. 나이 들면 남근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괄약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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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누피 2014-04-1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목에서 이미 게임 끝났네요. 버빠 박진영 말대로, 첫 소절 듣는 순간 게임 끝났다,한 것처럼요. 우하하하하하, 정말 죽이는 제목입니다. 영담모 발기, 파이팅!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3 19:05   좋아요 0 | URL
영담모 발기인 대회 때 스누피 님을 총무 대행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담벼락에 붙은 영화포스터를 보며 어떤 영화를 볼 지 잔뜩 기대감에 부풀곤 했는데 그 풍경이 그리워지더라구요. 대형영화사(?) 엔터테인먼트인가 대형극장주인가 뭐가 정확한 용어인지 모르겠으나 걔네들에게 극장이 잡아먹힌 뒤로 도저히 그 배우라고 생각할 수 없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간판도(그렇지만 정이 가는^^) 담벼락에 겹겹이 붙어있는, 가끔은 뜯어낸 자국이 남아있는 영화포스터도 이제는 볼 수가 없네요. 그 시절 참 느긋하고 촌스럽고 낙낙했는데 말예요. 요즘 아해들은 그것을 못보고 자랐네요. 안타까워라.^^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4 02:15   좋아요 0 | URL
이젠 거리에 영화포스터 붙지 않죠. ㅋㅋㅋㅋㅋ 다 옛일이 되었습니다. 저도 옛날에 담벼락에 포스터 붙으면 그거 보면서 흥분하고는 했는데 말이죠. 영화 간판도 사라지고, 제가 영화에 대해 흥미를 잃기 시작한 시기와 멀티플렉스의 번성과 맥을 같이 하는 거 같습니다. 차라리 집에서 보는 게 낫죠. 낙원동 아트 시네마'가 제 유일한 단골 극장입니다. 이것이 번성해야 하는데 보아 하니 곧 무너질 것 같기도 하고....
 

 

 

 

 

 

 

 

 

 

 

 

 

 

 

 

 

 

 

 


 

 

이판사판

 

 

 

 

 

 

알앤비 그룹 '솔리드'가 " 이 밤의 끝을 잡고 " 란 노래를 불러서 인기를 얻은 적 있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안으며 /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 / 마지막 입맞춤이~베이베에에에우에에에 / 아쉬움에 떨려도 / 빈손으로 온 내게 세상이 준 선물은 / 너란 걸 알기에 참아야 겠지 / 내 맘 아프지 않게 그 누구 보다도 / 행복하게 살아야 해 모든 걸 잊고 /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는 나의 사랑이 더 이상 / 초라하지 않게 나를 위해 울지 마, 나는 괜찮아~
 

이 가사에서 " 이 밤의 끝을 잡고 ~ " 는 어느 " 때 " 를 말하는 것일까 ?  23 : 59분까지를 < 밤의 끝 > 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4호선 당고개행 첫차가 사당에 도착하는 시간 05 : 10분을 끝으로 보아야 할까, 혹은 그린장 모텔 카운터 직원이 전화를 걸어와 22:00까지 방을 비워야 한다고 야속하게 말하는 그 시간일까 ?! 이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 밤의 끝 > 이 아니라 " 끝 " 이라는 낱말이 주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의 서정'이다.  이 노래에서 < 끝 > 은 송곳처럼 날카로워서 심장을 찌른다. 화자는 " 내 맘 아프지 않 " 도록 " 참아야 겠 " 다고 다짐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 박연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애써 참으며, 상대방 어깨를 토닥인 후, 마지막 키스를 팍, 끄읏 !

 

< 이방인 > 번역 논란이 식을 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가 스무살 무렵이었나(그 이전인지도 모른다) ? 그 시절에 손에 잡히는 불문학 책은 김화영 아니면 김치수 교수가 번역한 책이 팔 할이었다. 아마도 나는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 이방인 > 을 읽은 모양이다( 아니면 김치수겠지).  뫼르소의 살해 동기는 불분명하다. 그는 눈이 부셔서 권총으로 쐈다고 자백한 후, 내내 횡설수설로 일관한다. 사형집행일에는 구경꾼이 많이 모였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허세(?)도 부려본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서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 했던 것일까 ? 이 아리송송한 판독 불가'는 곧 < 부조리 > 로 퉁치게 된다. " 카뮈 하면 부조리'잖아 !! "

 

그렇다, 카뮈 소설이 조리 있게 판독 가능한 텍스트'라면 그것은 더 이상 부조리 소설이 될 수 없다 - 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 이방인, 이정서 번역 > 은 " 독해 " 를 막는 " 난해 " 는 김화영이 번역을 엉터리로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이 재미있어서 서너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소설인데 김화영이 " 트위스트 " 했다고 말한다. 번역 비판의 흔한 예는 역시 비교'다  :

 

 

 

(1)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김화영 역, 민음사, 135쪽)

(2)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정서 역, 새움, 165쪽)

 

 

김화영은 " 밤의 저 끝 " 을 새벽 동틀 무렵으로 이해한다. 뱃고동 소리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 분위기를 감안하면 뱃고동 소리는 왠지 뜬금없다. 신파 통속극이나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게 바로 뱃고동 소리이니 말이다. 반면, 이정서는 " 한밤의 경계선 " 을 자정으로 이해한다.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때문이다. 여기서 이정서가 지적하는 < 경계선 > 은 날짜가 변경되어서 새롭게 시작되는 자정 전후'이고, 김화영이 지적하는 < 끝 > 은 날짜가 변경되고 나서 몇 시간이 흐른 지점'이다. 이정서에게 < 자정 > 과 < 새벽 > 은 매우 중요한 차이'인 모양이다(이정서 번역본을 안 읽어봐서  내용은 잘 모르겠다). 그가 느끼기엔 자정 이후 서너 시간이 지난 " 새벽 " 은 맥주 병뚜껑을 딴 후 한참이 지나서 마실 때 느끼게 되는 미지근한 맛?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다. < 이판 > 은 스님이 기도에만 전념하는 일을 뜻하고, < 사판 > 은 절 살림을 맡아 하는 일을 말한다. 이판'만 신경 쓰면 살림이 엉망이 되고 반대로 사판에만 신경을 쓰면 수도修道를 게을리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쉽게 말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는 소리'다. 이판사판 다 하다 보면 제대로 하는 판이 없게 된다.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된다는 말이다.  " 이판사판 " 이라는 표현을 노무현 식으로 말하자면 " 이 정도면 막가자는 " 것이고, 근사하게 말하자면  " 케 세라 세라 세라 " 이며, 유물론적 사고로 번역하자면 " 기회비용 " 이다. 이판'을 선택하면 사판을 잃고, 사판을 선택하게 되면 이판을 잃는다. 나는 김화영 번역이 이판인지 사판인지 잘 모르고, 이정서 번역 또한 이판인지 사판인지 잘 모른다. 다만 이정서가 이런 식으로 딴지를 거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한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지지해야 한다. 비록 그 권위가 무소불휘의 빛나는 왕관이라고 해도 못난 아들은 끊임없이 연못에 돌을 던질 권리가 있다. 한국 문단은 지나치게 늙은 아버지'에게 쩔쩔맨다. 딴지를 거는 놈은 괘씸한 놈이 된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것은 원래 " 괘씸 " 해야 한다. 문학이 원하는 인물상은 착한 아들이 아니라 지독한 아들'이다. 한국인은 논쟁을 소모적이라 생각해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쓸모 있다. " 논쟁 " 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소모'다. 오히려 독재 정권일수록 논쟁을 불허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정서의 도발'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 도발이 어설프다고 해도 말이다.

 

 

fin

 


 

 

 

 

누군가가 하늘과 바다는 파란색이 기본이므로 " 푸른 물결 " 이라거나 " 푸른 하늘 " 이라고 표현하면 잘못된 문장이라고 지적한 글을 본 적이 있다.  < 푸르다 > 는 풀빛이 바탕이니 녹색이고 하늘과 바다는 파란 빛이 바탕이므로 하늘과 바다를 푸르다고 쓰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정말 바다를 단순하게 파란색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 나는 그가 너무 당당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 사실을 지적해서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속초에서 1년 동안 살면서 날마다 본 바다'는 파란색이 아니라 풀빛이었다. 그런데 그는 " 푸른 바다 " 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니 무조건 " 파란 바다 " 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보는 이에 따라서 바다는 " 푸른 바다 " 이기도 하고 " 파란 바다 " 이기도 하다. 物物이 가지고 있는 바탕색만을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을 종종 노란색으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빛은 바탕이 투명하므로 노랗게 표현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마찬가지 이유로 백인이 아닌 한국인에게 " 하얀 피부 "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도 틀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나 ?  

 

" 새파랗게 질린 얼굴 " 이란 표현은 어떤가 ?  아무리 핏기를 잃어도 그렇지 붉은색이 파란색이 될 리는 없다. 더군다나 " 새 ~ " 라는 접두어를 써서 blue보다는 deep blue 로 강조했으니 더더욱 말이 안되는 소리다. 한국인이 아바타'인가, 스머프인가 ? 하지만 이런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표현의 자유와 허용 때문이다. 평소 붉은 혈색을 가진 건강한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는 의미는 색이 변했다는 게 아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로 보는 관점에 따라 색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번역도 마찬가지다. 번역자의 색깔과 온도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파란 바다 " 도 있고 " 푸른 바다 " 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내가 보기엔 파란 바다(이정서)라는 문장도 맞는 표현 같고,  푸른 바다(김화영)라는 문장도 맞는 표현 같다. 하지만 무조건 " 파란 바다 " 라고 써야지만 정답이라고 우기면 쎄에에에련되지 못한 자세'다.

 

하여튼 이번 " 이방인 번역 논란 " 꽤 재미있다. 애들만 싸우면서 크냐 ? 아니다, 어른도 싸우면서 큰다. 원래 싸움 구경이 재미있는 법이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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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쟁이 2014-04-1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주 화끈한 글이군요. 백배 만배 공감합니다. 특히 "문학이 원하는 아들은 착한 아들이 아니라 '지독한 아들'이다." 부분은 더더욱! 불온한 아들이어야 우리의 삶이, 이 세계가 갱신되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3 05:41   좋아요 0 | URL
사실 이번 논란에 대해서 할 말이 없어요. 이정서의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고 대조도 해보지 않았으니 말이죠. 다만 이런 식의 싸움 환영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 이야... 번역 또한 새로운 창작에 버금가는 고통 속에서 쓰여지는 거구나... " 라는 걸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 양반이 정면으로 나와서 아예 링에서 싸워주셨으면 합니다.

수다맨 2014-04-1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오늘 한겨레 기사를 읽고는 이정서 씨의 저의에 좀 의심이 가더군요. 저 역시 다양한 색채와 온도를 지닌 번역들이 존재해야 하며, 서로 다른 번역본들 간의 충돌이나 논쟁도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김화영을 공격하는) 이정서 씨의 호전적(!)인 태도에는 약간 망설임이 생기더라구요. 마치 김화영의 번역은 '가라'고 자신의 번역만 '정본'처럼 내세우는 뉘앙스는 -출판사의 마케팅 전략일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물론 이러한 번역 논쟁과는 다르게 (김윤식)표절 문제와 같은 것은 이것보다 더 예리하고 단호해야죠).
저 역시 권위에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그 표적을 조금 더 정확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지는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3 05:45   좋아요 0 | URL
김화영 번역본이 가라'면 당연히 이정서 번역본은 오라'입니다. 제가 보기엔 위에 언급한 예도 그리 큰 차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정서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 세계와의 단절이라는 점은 모두 같잖아요. 이정서는 이걸 크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이니 딴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뭐, 저는....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지라..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자식들이 불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입니다. 하여튼 제가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할 말이 있겠는데 안 읽어본 상태라 뭐라 말을 할 수는 없겠습니다.

르미에르 2014-04-13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다 빛깔은 거의 무한에 가깝죠.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다르고요
새벽 아침 점심 오후 노울질때 비올대 흐릴때 맑을때 다 달라요...

어떤 멍청한 시퀴가 바다 색깔이 파랗다고 우깁니까?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3 07:54   좋아요 0 | URL
속초 있을 때 걸어서 1분인 곳에 살다 보니 날마다 바다를 보게 되더군요.
내가 머문 곳은 약간 초록빛이었습니다. 무척 깨끗한 바다였죠. 르미에르 님은 누구보다도 바다 근처에 사시는 잘 아실 겁니다. 정말 바다는 시시각각 다르더군요. 정말로 새벽에 보는 바다와 아침, 점심이 달라서 깜짝 놀라고는 했습니다. 또 멀리서 보느냐 가까이서 보느냐도 다르고....

아마 풀장만 다니는 사람은 바다가 무조건 파란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왜 풀장은 파란색으로 칠을 해서 파랗게 보이잖습니까....

르미에르 2014-04-1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군요 ㅋㅋㅋ 눈감고 코끼리 더듬고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 궁시렁 거렸다는 우화가 생각나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3 19: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죠. 풀장의 물색이 파랗다, 에는 동의하겠습니다.

samadhi(眞我) 2014-04-1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2 때 이방인을 읽었어요. 읽고나서 사춘기 절정이어서 그런가 한없이 우울했던 기억이 나요. 뜨거운 바닷가 모래가 생각나요. 지금 다시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잊고 지냈는데.

그래서 우리말은 뭉뚱그려서 푸르다로 표현하는 게 아닐까요? 파랑도 되고 초록도 되는. 파랑과 초록사이 많은 빛깔들을 다 아우르는 넉넉한 말.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4 02:18   좋아요 0 | URL
푸르다는 풀빛 뿐만이 아니라 그냥 젊고 푸릇푸릇한 것도 모두 다 푸르다고 합니다. 싱그럽다는 느낌이 들면 푸르다 라고 쓸 수 있죠. 푸르다'라는 말은 참 절묘한 말이에요. 영어는 바다를 그냥 블루라고 밖에 하지 않지 않습니까. 푸르다는 정말 절묘한 한 수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방인 일찍 읽으셨군요. 하긴 이방인은 고등학교 때 읽어줘야 합죠. 전 까뮈 하면 시지푸스가 제일 재미있더라고요.
 

 

 

 

 

 

 

 

 

 

 

 

 

 

 

 

 

 

 

 

 


 

 

 

감독님, 컷 ! 이라고 외치지 마세요 !

 

 

11. 봄밤과 악수 + 로프

 

 

 

 

 

누군가가 특정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작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근사한 말이다. 때마침 카잔차키스 전집이 50% 세일을 하길래, < 그리스인 조르바 > 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냅다 구입했다. 그게 이 년 전 일이다. 그 후로 내가 읽은 카잔차키스 책은 아직까지 < 그리스인 조르바 > 가 전부'다. 달거리하듯, 그때 그때 흥미를 돋우는 책을 다달이 사다 보니 정작 카잔차키스 전집은 읽을 엄두가 , 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 문득,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 200권 묶음'을 구입한 이웃이 생각났다. 다, 읽었을까 ? 한때 알프레드 히치콕 전작주의자'가 되려는 야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주먹 불끈 쥐고 도전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히치콕이 20년대 영국에서 찍은 무성 영화'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을 뿐더라, 그가 헐리우드에 입성해서 찍은 영화와는 다르게 영국 시절에 찍은 영화들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내 포기했다. 그래도 그가 만든 60편 중에서 30편은 보았으니 " 전작주의자 " 는 아니어도 " 반작주의자 " 혹은 구수한 표현으로 " 반타작주의자 " 는 되지 않을까 ? 스스로 자위해 본다. 전작주의자 혹은 반작주의자'가 되다 보면 일반 평가와는 다르게 특정 작품에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 나에게는 < 프렌지/72 >와 < 로프/48 > 라는 영화가 그렇다. 이 작품들은 히치콕의 하일라이트와 비교하면 초라한 구색이지만 초라하다는 측면에서 애착이 간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대표작에 비해서 초라하다는 말이지 그저 그렇고 그런 요즘 영화와 비교하면 걸작인 영화'다. < 프렌지 > 는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명한 영화여서 감동적이었고, < 로프 > 는 매우 뚱딴지 같은 영화여서 감동적이었다. < 로프 / 48 > 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매우 위험한 영화'다. long, long ago....

 

미국에서도 한때 빨갱이 사냥 시대'가 있었다. 매카시 열풍'이었다.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는  1950년 2월  “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 ” 는 폭탄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그에게 토 다는 놈들은 모두 빠,빠빠빨갱이'로 의심을 받았기에 토, 토토토를 달 수 없었다. 토를 다는 놈은 일(자리)을 잃어서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 내내 일을 할 수 없었다. 매카시와 개새끼 같은 일당들이 보기에 체제 순응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성향을 가진 할리우드 종사자들 또한 모두 빨갱이였다. 그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지만 한국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 부류에는 동성애자'도 포함되었다. 매카시는 " 빨갱이 사냥꾼 " 이기도 했지만 " 동성애자 사냥꾼 " 이기도 했다. 매카시가 보기에 동성애자는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파괴분자'였다. 만약에 당신이 " 좌파 " 인데 설상가상 " 동성애자 " 이기도 했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텼을까 ?

 

극작가 아서 로렌츠는 좌파이면서 동성애자'였다. 그가 페트릭 해밀턴의 희곡을 시나리오로 쓴 작품이 바로 < 로프 > 였다. 원작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니체의 초인론에 집착한 동성애 커플이 평소 알고 지내던 청년을 아무 이유없이 살해하고, 이 사실을 같은 동성애자인 시인'이 알아챈다는 내용이다. 일종의 게이 삼각관계'이다. 히치콕은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책임 시나리오는 아서 로렌츠가 맡았고, 게이 커플은 각각 팔리 그레인저와 존 달이 맡았다. 그리고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역할을 하는 시인(영화에서는 철학 서적 출판업자로 변경)으로는 캐리 그란트'가 맡기로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서 로렌츠, 팔리 그레인저, 존 달, 캐리 그란트 모두 동성애자'란 사실'이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 흉내를 내는 영화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동성애자가 동성애자 연기를 하는 것이다.

 

매카시 전운을 서서히 불기 시작하는 그 시대에 말이다. 결국 부담감을 느낀 캐리 그랜트는 영화에서 빠지고 대신 제임스 스튜어트'가 합류하면서 영화는 " 게이 삼각 관계 " 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사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서사 때문이 아니라 기술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기술적 실험을 했다. 히치콕은 " 10개의 롱테이크로 찍은 10개의 컷으로 이루어진 영화 " 를 만들었다. 롱테이크'만으로 이루어진 벨라 타르의 기적과 같은 영화 < 토리노의 말 > 이전에 이 영화가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동이 간편해진 현대 광학 기계에 비해 당시에는 카메라가 폭스바겐 자동차만한 크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자전거로 외줄을 타는 모험이라면 후자는 트럭으로 외줄을 건너야 하는 꼴이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히치콕은, 성공했다 !

 

영화는 수많은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 사이코 > 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샤워실 살해 장면은 카메라 위치를 무려 77번이나 변경해서 만들어낸 장면이다. 샤워 장면은 1개의 시퀸스이지만 그 안에는 최소 77쇼트로 분절되어 있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완성된 문장은 시퀸스이고, 그 문장을 이루는 명사, 조사, 보조사, 마침표, 쉼표 따위는 쇼트'다. 쇼트가 모여서 시퀸스'가 되고, 이 시퀸스가 모여서 영화 한 편이 완성되는 것이다. 오규원 시 < 봄밤과 악수 > 는 영화 < 로프 > 에 사용된 롱테이크 기법을 살린 시'다.

 

 

 

 

봄밤과 악수

 

오규원

 

문 앞에서 다른 문이 되어 웃고 서 있는 박만식과 악수를 하고 문 뒤에서 몸 반을 지워버린 이훈직과 악수를 하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보이는 김종서와 악수를 하고 김종서에게 몸을 반쯤 먹혀버린 박지수와 악수를 하고 모자를 벗었다 다시 쓰며 손을 내미는 천동복과 악수를 하고 안경 밑의 눈을 불빛이 가져가버린 장병호와 악수를 하고 등을 벽에게 맡겨버린 유자강과 악수를 하고 한꺼번에 덤비는 김중식과 이차중에게 왼손과 오른손을 내밀어 동시에 악수를 하고 왼손으로 사타구니를 추스르는 박수길의 오른손과 악수를 하고 자기 그림자를 밟고 서 있는 최명숙과 남의 그림자를 어깨에 멘 정영자와 악수를 하고 남인숙에게 안겨 있는 방말자와 방말자를 안고 있는 남인숙과 차례로 악수를 하고 눈을 바닥에 내려놓은 조인종과 악수를 하고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이창순과 박찬휘와 주인환과 김신중과 이민국과 악수를 하고 다른 무리를 이루고 있는 송상복과 차대식과 양진미와 함학도와 백기준과 악수를 하고 사람들을 등 뒤에 두고 밖에 차오르고 있는 봄밤을 뒤지고 있는 사공직과 나란히 서서 손이 어두운 악수를 하고

 

-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맹이

 

 

악수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 시는 행과 연을 나누지 않는다. 화자는 박만식과 악수를 한 후, 이훈직과 악수를 한 후, 김종서와 악수를 하고, 박지수와 악수를 하고, 다시........... 이 시가 수록된 시집 <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맹이 > 에는 이런 식으로 物物을 반복적으로 나열한 시가 많다. 처음에 이 시를 읽고 나서 뭐, 이런 개똥 같은 시가 다 있나 했다. 시인은 이 시 작업을 " 날이미지 " 라고 하던데, 나는 도통 모르겠는 거라. 그래서 도움이 될까 하고 정과리가 쓴 해설을 읽었는데 도움은커녕 더 헷갈린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이럴 땐 덮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요즘은 히치콕 영화에 대한 열정이 유령처럼 살아나서 어제는 < 로프 > 를 보다가 불현듯 < 봄밤과 악수 > 라는 시가 떠올랐다. 왜 이 시가 떠올랐을까 ? 곰곰 생각하다 보니 연출 기법이 동일했다. < 봄밤과 악수 > 는 행을 나누지도 않고, 연을 나누지도 않는다. 심지어 마침표도 없고, 쉼표도 없다. 시인이 행, 연, 쉼표, 마침표 따위로 분절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감독이 " 컷 ! " 이라고 외치지 않는 것과 같다. 시인은 나누지 않고 계속 연결해서 적는다, 혹은 찍는다.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치 " 롱테이크 " 같다.  행과 연을 나누지 않으니 장소가 변경되지도 않는다. 이 시에는 그 흔한 편집이 없다. 당연히 점프컷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동시성'만 있는 것이다. 시인의 카메라는 그저 박만식으로 시작해서 양진미, 함학도, 백기준을 수평적으로 따가갈 뿐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대상을 깔보거나 우러러보는, 시선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나열된 物物인 A와 B는 " 사이 " 로 이루어진 관계다. " 위 " 도 아니고 " 아래 " 도 아니며 " 옆 " 도 아니다. 그래서 A는 B를 내려다보지 않고, B는 C를 곁눈질하며 흘기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평등하다. 시적 카메라는 오로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라갈 뿐이다. 그렇다면 악수를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  시 제목이 < 봄밤과 악수 > 다. 봄밤은 김종서와 악수를 하고, 박지수와 악수를 하고, 함학도와 악수를 하고, 백기준과 악수를 한다.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밤이다, 봄밤'이다.

 

 

 

 

 

 

덧.

 

히치콕은 타이틀 시퀸스 장면에서 거리를 걷는 1인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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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4-04-1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치콕 영화를 한 편도 안봤어요. 오래된 영화를 거의, 전혀 안봐서. 제게는 기껏해야 80년대 영화 정도가 오래된 영화예요. 곰발님 덕분에 찰리 채플린 영화랑 히치콕 영화를 찾아보겠네요. 그 당시에 그런 영화를 만들다니 정말 파격이네요. 지금 만들어도 파격적일 것 같은데.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1 16:40   좋아요 0 | URL
오홋, 한편도 안 보셨나요 ? ㅎㅎㅎㅎㅎ. 사이코는 꼭 보십시요. 지금 보아도 여전히 흥미진진합니다.

samadhi(眞我) 2014-04-11 17:08   좋아요 0 | URL
네 거의 히치콕의 작품을 오마주한 것들만 잔뜩 봤지요. 저번에 곰발님 댓글에 누군가 히치콕의 싸이코 영화 주인공의 어린시절을 담았다는 "베이츠 모텔" 이라는 미드 얘기를 하던데, 그건 봤지요^^그나저나 곰발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어디까지 닿을지. 벌써 오늘 방문자수가 2073 정말 놀랍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1 17:57   좋아요 0 | URL
어라 ?! 그러네요. 아마... 이거 알리딘 오작동인가 봅니다. 평균 400정도 드는데 2000은 버퍼링일 겁니다. ㅎㅎㅎㅎ

새벽 2014-04-1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의자 뒤에 숨은 게 여덟 번 밖에 안 됐던가요?
사실 그게 반칙이라면 반칙인데 어찌 보면 콜럼버스의 달걀이고 우얏든 히치콕은 기가 막히게 해냈으니..
히치콕의 많고 많은 영화 중에도 무척 재밌게 본 작품 중 한 편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1 17:57   좋아요 0 | URL
총 10개의 롱테이크와 10개의 컷으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아닌가? ㅎㅎㅎㅎㅎㅎ.
카메라 통에 필름을 장전할 때 필름 한 릴이 보통 9분 정도 됩니다. 9분 지나면 필름을 다 쓰기 때문에 어절 수 없이 컷을 외쳐야 해요. 이 영화 컷은 9분마다 나눠서 유심히 보면 보입니다.


상당히 아기자기하잖아요. 밖 풍경울 보면 밤이 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매우 유쵀하죠. 구름도 시간에 따라 바귑니다. 감독이 구름을 따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게 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고 하네요. 아주 정교한 영화예요.

한시반이지나서 2014-04-12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2 13:54   좋아요 0 | URL
저도 한 시 반이 지나서 덧글 답니다.

수다맨 2014-04-12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규원 시는 어렵기는 한데 이상한 묘미가 있어요. 어쩌면 그 때문에 읽다가 병맛 느낄 때가 많아도, 또 찾아 읽게 될 때가 더러 있더라구요.
영화와는 상관없는 얘기입니다만, 한 작가의 전집만 죽자사자로 파고드는 공부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한 작가당 독서 시간을 한 2년쯤 잡아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포크너, 카잔차키스 이렇게 읽어나가는 거죠. 실제 이 방법을 진짜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 옆나라 오에겐자부로라고 하더라구요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2 13:56   좋아요 0 | URL
저도 오규원 시와 황병승 시는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땡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시를 거의 몰라서 미래파 어쩌구 저쩌구 하면 성질부터 나는 편인데
황병승의 시는 이상하게 와닿는 구석이 있습니다. 김경주는 잘 모르겠고, 이장욱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전작위주로 읽으면 굉장히 재미있긴 할 겁니다. 제가 히치콕 영화를 보며 사소한 것에 감동하듯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