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
알앤비 그룹 '솔리드'가 " 이 밤의 끝을 잡고 " 란 노래를 불러서 인기를 얻은 적 있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의 입술이 너의 하얀 어깨를 감싸안으며 / 그렇게 우린 이 밤의 끝을 잡고 사랑했지만 / 마지막 입맞춤이~베이베에에에우에에에 / 아쉬움에 떨려도 / 빈손으로 온 내게 세상이 준 선물은 / 너란 걸 알기에 참아야 겠지 / 내 맘 아프지 않게 그 누구 보다도 / 행복하게 살아야 해 모든 걸 잊고 / 이 밤의 끝을 잡고 있는 나의 사랑이 더 이상 / 초라하지 않게 나를 위해 울지 마, 나는 괜찮아~
이 가사에서 " 이 밤의 끝을 잡고 ~ " 는 어느 " 때 " 를 말하는 것일까 ? 23 : 59분까지를 < 밤의 끝 > 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4호선 당고개행 첫차가 사당에 도착하는 시간 05 : 10분을 끝으로 보아야 할까, 혹은 그린장 모텔 카운터 직원이 전화를 걸어와 22:00까지 방을 비워야 한다고 야속하게 말하는 그 시간일까 ?! 이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 밤의 끝 > 이 아니라 " 끝 " 이라는 낱말이 주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의 서정'이다. 이 노래에서 < 끝 > 은 송곳처럼 날카로워서 심장을 찌른다. 화자는 " 내 맘 아프지 않 " 도록 " 참아야 겠 " 다고 다짐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 박연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지만, 애써 참으며, 상대방 어깨를 토닥인 후, 마지막 키스를 팍, 끄읏 !
< 이방인 > 번역 논란이 식을 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가 스무살 무렵이었나(그 이전인지도 모른다) ? 그 시절에 손에 잡히는 불문학 책은 김화영 아니면 김치수 교수가 번역한 책이 팔 할이었다. 아마도 나는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 이방인 > 을 읽은 모양이다( 아니면 김치수겠지). 뫼르소의 살해 동기는 불분명하다. 그는 눈이 부셔서 권총으로 쐈다고 자백한 후, 내내 횡설수설로 일관한다. 사형집행일에는 구경꾼이 많이 모였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허세(?)도 부려본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서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 했던 것일까 ? 이 아리송송한 판독 불가'는 곧 < 부조리 > 로 퉁치게 된다. " 카뮈 하면 부조리'잖아 !! "
그렇다, 카뮈 소설이 조리 있게 판독 가능한 텍스트'라면 그것은 더 이상 부조리 소설이 될 수 없다 - 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 이방인, 이정서 번역 > 은 " 독해 " 를 막는 " 난해 " 는 김화영이 번역을 엉터리로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이 재미있어서 서너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소설인데 김화영이 " 트위스트 " 했다고 말한다. 번역 비판의 흔한 예는 역시 비교'다 :
(1)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김화영 역, 민음사, 135쪽)
(2)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이정서 역, 새움, 165쪽)
김화영은 " 밤의 저 끝 " 을 새벽 동틀 무렵으로 이해한다. 뱃고동 소리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 분위기를 감안하면 뱃고동 소리는 왠지 뜬금없다. 신파 통속극이나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게 바로 뱃고동 소리이니 말이다. 반면, 이정서는 " 한밤의 경계선 " 을 자정으로 이해한다. 자정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때문이다. 여기서 이정서가 지적하는 < 경계선 > 은 날짜가 변경되어서 새롭게 시작되는 자정 전후'이고, 김화영이 지적하는 < 끝 > 은 날짜가 변경되고 나서 몇 시간이 흐른 지점'이다. 이정서에게 < 자정 > 과 < 새벽 > 은 매우 중요한 차이'인 모양이다(이정서 번역본을 안 읽어봐서 내용은 잘 모르겠다). 그가 느끼기엔 자정 이후 서너 시간이 지난 " 새벽 " 은 맥주 병뚜껑을 딴 후 한참이 지나서 마실 때 느끼게 되는 미지근한 맛?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있다. < 이판 > 은 스님이 기도에만 전념하는 일을 뜻하고, < 사판 > 은 절 살림을 맡아 하는 일을 말한다. 이판'만 신경 쓰면 살림이 엉망이 되고 반대로 사판에만 신경을 쓰면 수도修道를 게을리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쉽게 말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는 소리'다. 이판사판 다 하다 보면 제대로 하는 판이 없게 된다. 죽도 밥도 아닌 꼴이 된다는 말이다. " 이판사판 " 이라는 표현을 노무현 식으로 말하자면 " 이 정도면 막가자는 " 것이고, 근사하게 말하자면 " 케 세라 세라 세라 " 이며, 유물론적 사고로 번역하자면 " 기회비용 " 이다. 이판'을 선택하면 사판을 잃고, 사판을 선택하게 되면 이판을 잃는다. 나는 김화영 번역이 이판인지 사판인지 잘 모르고, 이정서 번역 또한 이판인지 사판인지 잘 모른다. 다만 이정서가 이런 식으로 딴지를 거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한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지지해야 한다. 비록 그 권위가 무소불휘의 빛나는 왕관이라고 해도 못난 아들은 끊임없이 연못에 돌을 던질 권리가 있다. 한국 문단은 지나치게 늙은 아버지'에게 쩔쩔맨다. 딴지를 거는 놈은 괘씸한 놈이 된다. 그런데 문학이라는 것은 원래 " 괘씸 " 해야 한다. 문학이 원하는 인물상은 착한 아들이 아니라 지독한 아들'이다. 한국인은 논쟁을 소모적이라 생각해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쓸모 있다. " 논쟁 " 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소모'다. 오히려 독재 정권일수록 논쟁을 불허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정서의 도발'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 도발이 어설프다고 해도 말이다.
fin
덧
누군가가 하늘과 바다는 파란색이 기본이므로 " 푸른 물결 " 이라거나 " 푸른 하늘 " 이라고 표현하면 잘못된 문장이라고 지적한 글을 본 적이 있다. < 푸르다 > 는 풀빛이 바탕이니 녹색이고 하늘과 바다는 파란 빛이 바탕이므로 하늘과 바다를 푸르다고 쓰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정말 바다를 단순하게 파란색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 나는 그가 너무 당당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 사실을 지적해서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속초에서 1년 동안 살면서 날마다 본 바다'는 파란색이 아니라 풀빛이었다. 그런데 그는 " 푸른 바다 " 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니 무조건 " 파란 바다 " 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보는 이에 따라서 바다는 " 푸른 바다 " 이기도 하고 " 파란 바다 " 이기도 하다. 物物이 가지고 있는 바탕색만을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을 종종 노란색으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빛은 바탕이 투명하므로 노랗게 표현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마찬가지 이유로 백인이 아닌 한국인에게 " 하얀 피부 "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도 틀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나 ?
" 새파랗게 질린 얼굴 " 이란 표현은 어떤가 ? 아무리 핏기를 잃어도 그렇지 붉은색이 파란색이 될 리는 없다. 더군다나 " 새 ~ " 라는 접두어를 써서 blue보다는 deep blue 로 강조했으니 더더욱 말이 안되는 소리다. 한국인이 아바타'인가, 스머프인가 ? 하지만 이런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표현의 자유와 허용 때문이다. 평소 붉은 혈색을 가진 건강한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는 의미는 색이 변했다는 게 아니다.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로 보는 관점에 따라 색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번역도 마찬가지다. 번역자의 색깔과 온도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파란 바다 " 도 있고 " 푸른 바다 " 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내가 보기엔 파란 바다(이정서)라는 문장도 맞는 표현 같고, 푸른 바다(김화영)라는 문장도 맞는 표현 같다. 하지만 무조건 " 파란 바다 " 라고 써야지만 정답이라고 우기면 쎄에에에련되지 못한 자세'다.
하여튼 이번 " 이방인 번역 논란 " 꽤 재미있다. 애들만 싸우면서 크냐 ? 아니다, 어른도 싸우면서 큰다. 원래 싸움 구경이 재미있는 법이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