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컷 ! 이라고 외치지 마세요 !

 

 

11. 봄밤과 악수 + 로프

 

 

 

 

 

누군가가 특정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작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근사한 말이다. 때마침 카잔차키스 전집이 50% 세일을 하길래, < 그리스인 조르바 > 를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냅다 구입했다. 그게 이 년 전 일이다. 그 후로 내가 읽은 카잔차키스 책은 아직까지 < 그리스인 조르바 > 가 전부'다. 달거리하듯, 그때 그때 흥미를 돋우는 책을 다달이 사다 보니 정작 카잔차키스 전집은 읽을 엄두가 , 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 문득,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 200권 묶음'을 구입한 이웃이 생각났다. 다, 읽었을까 ? 한때 알프레드 히치콕 전작주의자'가 되려는 야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주먹 불끈 쥐고 도전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히치콕이 20년대 영국에서 찍은 무성 영화'를 볼 기회가 별로 없었을 뿐더라, 그가 헐리우드에 입성해서 찍은 영화와는 다르게 영국 시절에 찍은 영화들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이내 포기했다. 그래도 그가 만든 60편 중에서 30편은 보았으니 " 전작주의자 " 는 아니어도 " 반작주의자 " 혹은 구수한 표현으로 " 반타작주의자 " 는 되지 않을까 ? 스스로 자위해 본다. 전작주의자 혹은 반작주의자'가 되다 보면 일반 평가와는 다르게 특정 작품에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 나에게는 < 프렌지/72 >와 < 로프/48 > 라는 영화가 그렇다. 이 작품들은 히치콕의 하일라이트와 비교하면 초라한 구색이지만 초라하다는 측면에서 애착이 간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대표작에 비해서 초라하다는 말이지 그저 그렇고 그런 요즘 영화와 비교하면 걸작인 영화'다. < 프렌지 > 는 노장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명한 영화여서 감동적이었고, < 로프 > 는 매우 뚱딴지 같은 영화여서 감동적이었다. < 로프 / 48 > 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매우 위험한 영화'다. long, long ago....

 

미국에서도 한때 빨갱이 사냥 시대'가 있었다. 매카시 열풍'이었다. 상원의원이었던 매카시는  1950년 2월  “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 ” 는 폭탄적인 연설'을 하게 된다. 그에게 토 다는 놈들은 모두 빠,빠빠빨갱이'로 의심을 받았기에 토, 토토토를 달 수 없었다. 토를 다는 놈은 일(자리)을 잃어서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 내내 일을 할 수 없었다. 매카시와 개새끼 같은 일당들이 보기에 체제 순응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성향을 가진 할리우드 종사자들 또한 모두 빨갱이였다. 그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지만 한국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 부류에는 동성애자'도 포함되었다. 매카시는 " 빨갱이 사냥꾼 " 이기도 했지만 " 동성애자 사냥꾼 " 이기도 했다. 매카시가 보기에 동성애자는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파괴분자'였다. 만약에 당신이 " 좌파 " 인데 설상가상 " 동성애자 " 이기도 했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텼을까 ?

 

극작가 아서 로렌츠는 좌파이면서 동성애자'였다. 그가 페트릭 해밀턴의 희곡을 시나리오로 쓴 작품이 바로 < 로프 > 였다. 원작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는데 니체의 초인론에 집착한 동성애 커플이 평소 알고 지내던 청년을 아무 이유없이 살해하고, 이 사실을 같은 동성애자인 시인'이 알아챈다는 내용이다. 일종의 게이 삼각관계'이다. 히치콕은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책임 시나리오는 아서 로렌츠가 맡았고, 게이 커플은 각각 팔리 그레인저와 존 달이 맡았다. 그리고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역할을 하는 시인(영화에서는 철학 서적 출판업자로 변경)으로는 캐리 그란트'가 맡기로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서 로렌츠, 팔리 그레인저, 존 달, 캐리 그란트 모두 동성애자'란 사실'이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 흉내를 내는 영화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동성애자가 동성애자 연기를 하는 것이다.

 

매카시 전운을 서서히 불기 시작하는 그 시대에 말이다. 결국 부담감을 느낀 캐리 그랜트는 영화에서 빠지고 대신 제임스 스튜어트'가 합류하면서 영화는 " 게이 삼각 관계 " 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사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서사 때문이 아니라 기술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기술적 실험을 했다. 히치콕은 " 10개의 롱테이크로 찍은 10개의 컷으로 이루어진 영화 " 를 만들었다. 롱테이크'만으로 이루어진 벨라 타르의 기적과 같은 영화 < 토리노의 말 > 이전에 이 영화가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동이 간편해진 현대 광학 기계에 비해 당시에는 카메라가 폭스바겐 자동차만한 크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전자가 자전거로 외줄을 타는 모험이라면 후자는 트럭으로 외줄을 건너야 하는 꼴이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히치콕은, 성공했다 !

 

영화는 수많은 쇼트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 < 사이코 > 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샤워실 살해 장면은 카메라 위치를 무려 77번이나 변경해서 만들어낸 장면이다. 샤워 장면은 1개의 시퀸스이지만 그 안에는 최소 77쇼트로 분절되어 있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완성된 문장은 시퀸스이고, 그 문장을 이루는 명사, 조사, 보조사, 마침표, 쉼표 따위는 쇼트'다. 쇼트가 모여서 시퀸스'가 되고, 이 시퀸스가 모여서 영화 한 편이 완성되는 것이다. 오규원 시 < 봄밤과 악수 > 는 영화 < 로프 > 에 사용된 롱테이크 기법을 살린 시'다.

 

 

 

 

봄밤과 악수

 

오규원

 

문 앞에서 다른 문이 되어 웃고 서 있는 박만식과 악수를 하고 문 뒤에서 몸 반을 지워버린 이훈직과 악수를 하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보이는 김종서와 악수를 하고 김종서에게 몸을 반쯤 먹혀버린 박지수와 악수를 하고 모자를 벗었다 다시 쓰며 손을 내미는 천동복과 악수를 하고 안경 밑의 눈을 불빛이 가져가버린 장병호와 악수를 하고 등을 벽에게 맡겨버린 유자강과 악수를 하고 한꺼번에 덤비는 김중식과 이차중에게 왼손과 오른손을 내밀어 동시에 악수를 하고 왼손으로 사타구니를 추스르는 박수길의 오른손과 악수를 하고 자기 그림자를 밟고 서 있는 최명숙과 남의 그림자를 어깨에 멘 정영자와 악수를 하고 남인숙에게 안겨 있는 방말자와 방말자를 안고 있는 남인숙과 차례로 악수를 하고 눈을 바닥에 내려놓은 조인종과 악수를 하고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이창순과 박찬휘와 주인환과 김신중과 이민국과 악수를 하고 다른 무리를 이루고 있는 송상복과 차대식과 양진미와 함학도와 백기준과 악수를 하고 사람들을 등 뒤에 두고 밖에 차오르고 있는 봄밤을 뒤지고 있는 사공직과 나란히 서서 손이 어두운 악수를 하고

 

-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맹이

 

 

악수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 시는 행과 연을 나누지 않는다. 화자는 박만식과 악수를 한 후, 이훈직과 악수를 한 후, 김종서와 악수를 하고, 박지수와 악수를 하고, 다시........... 이 시가 수록된 시집 <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맹이 > 에는 이런 식으로 物物을 반복적으로 나열한 시가 많다. 처음에 이 시를 읽고 나서 뭐, 이런 개똥 같은 시가 다 있나 했다. 시인은 이 시 작업을 " 날이미지 " 라고 하던데, 나는 도통 모르겠는 거라. 그래서 도움이 될까 하고 정과리가 쓴 해설을 읽었는데 도움은커녕 더 헷갈린 소리만 해대고 있었다. 이럴 땐 덮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요즘은 히치콕 영화에 대한 열정이 유령처럼 살아나서 어제는 < 로프 > 를 보다가 불현듯 < 봄밤과 악수 > 라는 시가 떠올랐다. 왜 이 시가 떠올랐을까 ? 곰곰 생각하다 보니 연출 기법이 동일했다. < 봄밤과 악수 > 는 행을 나누지도 않고, 연을 나누지도 않는다. 심지어 마침표도 없고, 쉼표도 없다. 시인이 행, 연, 쉼표, 마침표 따위로 분절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감독이 " 컷 ! " 이라고 외치지 않는 것과 같다. 시인은 나누지 않고 계속 연결해서 적는다, 혹은 찍는다. 이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마치 " 롱테이크 " 같다.  행과 연을 나누지 않으니 장소가 변경되지도 않는다. 이 시에는 그 흔한 편집이 없다. 당연히 점프컷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동시성'만 있는 것이다. 시인의 카메라는 그저 박만식으로 시작해서 양진미, 함학도, 백기준을 수평적으로 따가갈 뿐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대상을 깔보거나 우러러보는, 시선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나열된 物物인 A와 B는 " 사이 " 로 이루어진 관계다. " 위 " 도 아니고 " 아래 " 도 아니며 " 옆 " 도 아니다. 그래서 A는 B를 내려다보지 않고, B는 C를 곁눈질하며 흘기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평등하다. 시적 카메라는 오로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라갈 뿐이다. 그렇다면 악수를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  시 제목이 < 봄밤과 악수 > 다. 봄밤은 김종서와 악수를 하고, 박지수와 악수를 하고, 함학도와 악수를 하고, 백기준과 악수를 한다.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밤이다, 봄밤'이다.

 

 

 

 

 

 

덧.

 

히치콕은 타이틀 시퀸스 장면에서 거리를 걷는 1인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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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4-04-1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치콕 영화를 한 편도 안봤어요. 오래된 영화를 거의, 전혀 안봐서. 제게는 기껏해야 80년대 영화 정도가 오래된 영화예요. 곰발님 덕분에 찰리 채플린 영화랑 히치콕 영화를 찾아보겠네요. 그 당시에 그런 영화를 만들다니 정말 파격이네요. 지금 만들어도 파격적일 것 같은데.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1 16:40   좋아요 0 | URL
오홋, 한편도 안 보셨나요 ? ㅎㅎㅎㅎㅎ. 사이코는 꼭 보십시요. 지금 보아도 여전히 흥미진진합니다.

samadhi(眞我) 2014-04-11 17:08   좋아요 0 | URL
네 거의 히치콕의 작품을 오마주한 것들만 잔뜩 봤지요. 저번에 곰발님 댓글에 누군가 히치콕의 싸이코 영화 주인공의 어린시절을 담았다는 "베이츠 모텔" 이라는 미드 얘기를 하던데, 그건 봤지요^^그나저나 곰발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어디까지 닿을지. 벌써 오늘 방문자수가 2073 정말 놀랍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1 17:57   좋아요 0 | URL
어라 ?! 그러네요. 아마... 이거 알리딘 오작동인가 봅니다. 평균 400정도 드는데 2000은 버퍼링일 겁니다. ㅎㅎㅎㅎ

새벽 2014-04-1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의자 뒤에 숨은 게 여덟 번 밖에 안 됐던가요?
사실 그게 반칙이라면 반칙인데 어찌 보면 콜럼버스의 달걀이고 우얏든 히치콕은 기가 막히게 해냈으니..
히치콕의 많고 많은 영화 중에도 무척 재밌게 본 작품 중 한 편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1 17:57   좋아요 0 | URL
총 10개의 롱테이크와 10개의 컷으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아닌가? ㅎㅎㅎㅎㅎㅎ.
카메라 통에 필름을 장전할 때 필름 한 릴이 보통 9분 정도 됩니다. 9분 지나면 필름을 다 쓰기 때문에 어절 수 없이 컷을 외쳐야 해요. 이 영화 컷은 9분마다 나눠서 유심히 보면 보입니다.


상당히 아기자기하잖아요. 밖 풍경울 보면 밤이 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매우 유쵀하죠. 구름도 시간에 따라 바귑니다. 감독이 구름을 따로 움직이게 할 수 있게 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고 하네요. 아주 정교한 영화예요.

한시반이지나서 2014-04-12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2 13:54   좋아요 0 | URL
저도 한 시 반이 지나서 덧글 답니다.

수다맨 2014-04-12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규원 시는 어렵기는 한데 이상한 묘미가 있어요. 어쩌면 그 때문에 읽다가 병맛 느낄 때가 많아도, 또 찾아 읽게 될 때가 더러 있더라구요.
영화와는 상관없는 얘기입니다만, 한 작가의 전집만 죽자사자로 파고드는 공부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한 작가당 독서 시간을 한 2년쯤 잡아서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포크너, 카잔차키스 이렇게 읽어나가는 거죠. 실제 이 방법을 진짜로 실행에 옮긴 사람이 옆나라 오에겐자부로라고 하더라구요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4-12 13:56   좋아요 0 | URL
저도 오규원 시와 황병승 시는 잘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땡기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시를 거의 몰라서 미래파 어쩌구 저쩌구 하면 성질부터 나는 편인데
황병승의 시는 이상하게 와닿는 구석이 있습니다. 김경주는 잘 모르겠고, 이장욱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전작위주로 읽으면 굉장히 재미있긴 할 겁니다. 제가 히치콕 영화를 보며 사소한 것에 감동하듯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