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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치질
12. 상처적 체질 + 캐스트어웨이
충무로에서 일할 때 영화 포스터를 붙인 적 있다.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시나리오 보조 작가로 들어갔으나 원고지 대신 영화 포스터가 내 손에 쥐어졌다. 화딱지가 났으나 까라면 까는 세계가 바로 충무로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장이 포스터 붙이는 일을 정상 근무 외 잔업으로 인정해서 가욋돈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근무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다. 가욋돈 외에 점심값에 차비까지 주니 수입이 꽤 쏠쏠해서 일이 끝났을 때에는 아쉬워하기도 했다. 쪽을 파는 것도 며칠 지나다 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담벼락 > 이었다. 포스터를 붙이기에 좋은 담벼락이 있고, 포스터를 붙이기에 고약한 담벼락도 있었다. " 맙소사, 좋은 담벼락과 성질 고약한 담벼락이 존재하다니 ! "
박연폭포처럼 넓고 빙판처럼 매끈해서 영화 포스터 열 장'을 한꺼번에 붙일 수 있는 담벼락은 넉넉한 녀석이었다. 이런 담벼락은 발품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넉넉한 담벼락은 매우 귀했다. 특히 종로나 강남 같은 경우는 더했다. 그래서 우연히 이런 담벼락을 발견하게 되면 불알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워서 널찍한 등짝을 " 쓰담쓰담 " 하거나 벽에다 대고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유증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 가욋일이 끝났지만 한동안 담벼락만 보였다. 포스터 열 장을 붙일 만한 담벼락을 만나면 잠시 서서 아쉬워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런 담벼락을 만나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 담 씨 ! 아니... 벼락아, 잘 컸구나, 잘 컸어 ! " 인간'이란 어떤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만 보인다.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구두를 유심히 보게 되고, 가방을 만드는 사람은 가방을 유심히 보게 된다.
" 사랑하면 보이나니... " 라는 말은 옳은 소리'다. 내가 영화 포스터를 붙이지 않았다면 담벼락'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미친 놈이 좋은 담벼락 나쁜 담벼락을 구별할 것이며, 넓은 등짝을 " 쓰담쓰담 " 하겠는가 ? 실실 웃으면서 말이다. 과식을 해서 배가 아픈 사람이 길을 걸을 때에는 음식점 간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반면 약국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쉽게 눈에 들어온다. 반대로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약국 따위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음식점만 눈에 보인다. 이처럼 결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관심을 낳는다. 나는 그동안 치질로 고생을 꽤 한 터라 류근 시집 제목 < 상처적 체질 > 은 이상하게 < 상처적 치질 > 로 읽혀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는 했다. 버스 안에서 서서 갈 때마다 쑥덕거리던 그 말, 말, 말, 말. " 저 사람 치질인가 봐 ! " 아, 아아아.....
내가 치질에 대해 집요하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알고 보면 건강한 괄약근을 잃었기에 가능했다. 이처럼 결핍은 그 대상을 눈에 띄는 존재로 만든다. 팔이 없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팔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 상처적 체질 " 을 " 상처적 치질 " 로 읽었다면, 영화 < 캐스트어웨이 > 에서 톰 행크스는 배구공을 사람 얼굴로 읽는다. 로버트 저맥키스가 감독한 < 캐스트어웨이 > 는 " 결핍 " 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가 物物이 넘치는 과잉의 공간이라면 무인도는 철저하게 物物이 부족한 공간'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연기하는 톰 행크스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 역설적이지만 배구공'이었다. 그는 배구공으로 윌슨'으로 불리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가 망망대해에서 배구공 윌슨을 잃고 대성통곡했을 때, 나는 묘하게 그가 느꼈을 처참한 심정에 마음이 통했다.
나도 한때 등짝이 넓은 담벼락을 만나면 말을 주고받았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담벼락이었다. 건물은 우후죽순 새롭게 태어나지만 좋은 담벼락은 점점 사라진다. 골목길이 사라지니 좋은 담벼락 또한 사라지는 것이다. 터'가 좋은 가게는 담벼락을 털고 통유리를 깔거나 집 안에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주차장 셔터'를 낸다. 안타깝다. 영담모( 영화 포스터를 붙이기에 좋은 담벼락을 사랑하는 모임)라도 만들어야 겠다. 당신들은 모른다. 담벼락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말이다. 그리고 괄약근을 업신여기지 말기를. 나이 들면 남근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괄약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