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정치적이다
남들이 책상에 앉아서 학문에 힘을 줄 때, 나는 주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학문에 힘을 준다. 누군가 친절하게 항문에 힘을 준다고 써야 할 것을 학문에 힘을 준다고 잘못 쓰셨어요. 호호호 _ 라고 지적한다면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리라. " 아닙니다. 저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학문에 힘씁니다. "
몸속에 있는 모든 적폐를 몸밖으로 내보낼 때까지 변기에 앉아서 국어사전을 읽는다. 스스로 탁월한 결정이란 생각을 한다. 화장실에서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인에 대한 모독이며 << 폭풍의 언덕 >> 따위를 읽는 것도 그 작가에게 민폐'다. 저토록 쓸쓸한 몰락 앞에서 똥을 누면서 함께 슬퍼한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화장실에서는 만만한 게 사전이다, 사전은 읽는 이의 서정을 요구하지는 않으니까(사전을 읽다가 우는 놈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 미친놈이다). 나랏 말쌈이 듕국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한 국어사전을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왕정복고로 되돌아가려는 잔재들이 눈에 보인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신분에 따른 차별 없이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한글이라는 세계는 철저하게 남근 중심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좆은 항상 젖보다 앞선다. " 부부(夫婦) " 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다. 아내(婦)보다 앞서는 것은 남편(夫)이다. 그러니까 婦夫라는 단어 조합은 가부장 사회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외국어 중에 서열을 이미 못 박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부부를 뜻하는 (married) couple'이라는 단어에는 성차에 따른 서열의 우선순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차가 아닌 남성 간 서열을 정해야 되는 경우는 나이가 권력이 된다. " 형제兄弟 " 라는 단어는 나이가 유세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같은 이유로 " 자매형제 " 라는 단어는 없지만 " 형제자매 " 라는 단어는 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는 시대에 한글은...... 유감스럽게도 지위의 고하를 졸라 따지는 언어'로 성장했다. 그것이 어디 언어 탓이랴. 그런데 한글 특유의 서열 정리가 딱 한번 전복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 연놈 " 이라는 단어'다. 제일 먼저 욕을 먹는 부류는 놈이 아니라 년'이다. 무릎을 탁 _ 치고 아 _ 하게 된다. 이토록 치밀한 어깃장 ! 민물장어도 아니면서 꽤나 꼼꼼하시다. 이처럼 한글은 성차별적일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권력을 좇는다는 점에서 이명박스럽다. 한글의 성차별적 사례를 열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굳이 특정한 성을 명시하는 것도 성차별적이다. 여류 화가나 여류 소설가는 있지만 남류 화가나 남류 소설가라는 표현은 없다. 그리고 " 여교사 " 라는 단어는 있지만 " 남교사 " 라는 단어는 없다. 여배우, 여가수, 여교수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런 단어들은 성중립적 단어가 아니라 성차별적 단어에 해당된다. 만약에 성을 굳이 명기해야 된다면 " 여교사 " 라는 단어보다는 " 여성 교사 " 라는 문장 구성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정치적이다 ■
덧대기 ㅣ 순우리말인 " 가시버시 " 는 부부(夫婦)라는 뜻인데 여기서 < 가시 > 는 아내를 < 버시 > 는 남편을 뜻한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한자 조합으로 구성한 것이 바로 夫婦다. 이런 단어들은 대부분 양반 계급이 한자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그러니까 성차별적 언어를 창조하신 주체는 지배 계급인 양반이다. 이밖에도 부부를 가리키는 우리말에는 ‘팍내’, ‘한솔’이 있는데, < 팍내 > 는 가슴팍을 맞대고 사는 사이를 뜻하고 < 한솔 > 은 옷감의 끝단을 서로 잇는 하나의 솔기처럼 서로 엮인 사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부부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에는 성차에 따른 위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