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잡다
1. 은교 Eungyo, 2012 : 허지웅은 영화 << 은교 >> 에서 천재 작가 이적요를 연기한 박해일을 두고 " 박해일의 이적요 연기는 발군이지만, 이적요에 박해일 캐스팅은 실수다. " 라고 지적했는데, 이 짧은 촌평을 읽다가 어이가 없어서 욕지기가 났다. 좋게 말하면 < 언어유희 > 이고 나쁘게 말하면 < 장난 지금 나랑 하냐 > 이다. 이따위 논리는 세 살짜리 아이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모순이다. 영화 속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관계를 신체와 옷으로 비유하자면, " 캐스팅 실수 " 라는 말은 곧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혔다는 소리가 된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데 와꾸가 제대로 완성될 리 없다.
베테랑 연기자인 유해진이 감칠맛 나는 연기를 선보였다 해도 곤룡포를 입은 세종대왕 역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떤 연기자의 연기가 발군이었다면 그것은 반드시 훌륭한 캐스팅을 바탕으로 한다. 허지웅이 지적한 것처럼 이 영화에서 박해일 캐스팅은 실수일 뿐만 아니라 캐스팅에 실패했기에 박해일의 이적요 연기는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훌륭하지도 않다. 굽은 허리는 작위적이고 눈빛은 노인보다는 청년의 그것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걸음걸이가 어색하다. 밥이라 하기에는 질고, 죽이라 하기에는 되다. 허세웅이 종종 영화평론가 행세를 할 때마다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허지웅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요즘은 개나 소나 평론가 행세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2. 두근두근 내 인생 My Brilliant Life, 2014 : 원작 소설 자체가 워낙 후져서 기대도 안하고 보았지만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더 후졌다. 고로 둘 다 " 후지스 WHOOSIS " 하다. (원작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기도 하지만) 어른 같은 아이와 아이 같은 어른을 대비시킨 클리쉐는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린 녹차 티백으로 다시 우린 녹차의 맛 같아서 보는 내내 지루했다. 풀 비린내를 녹차의 맛이라 우기면 할 말이 없다. 너무 늙어버린 아이라는 비극적 설정에는 조루는 있는데 비루는 없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촌스러움이다. 강동원은 얼굴 하나 믿고 까불다고 연기를 망쳤고, 송혜교는 여전히 연기를 못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이재용은 항상 수작과 범작을 널뛰기하는 감독인데 이 영화는 아쉽게도 범작 수준을 뛰어넘어 졸작에 가깝다. 그가 일본식 미장센을 우라까이했던 작품들(순애보, 다세포소녀, 두근두근내인생)은 하나같이 모두 졸작이었다. ★
3. 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 : 이 영화는 서사의 화려한 수사를 걷어내고 묵묵히 앞만 보고 달린다. 현란한 카메라 테크닉도 없고 과도한 이펙트 사용도 없다(이 영화는 내재적 디제시스 사운드와 외재적 디제시스 사운드를 최대한 배제한다). 다큐적 접근이 만들어 놓은 정직성은 영화 주제와 맞물리면서 주제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호들갑을 떨지 않아서 좋다. 마치, MSG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천연 재료만 가지고 감칠맛을 낸 국물 같다. 일반 관객이 보기에 이 영화는 기교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난이도가 높은 기교를 선보인 작품이다. 디자인이 과도하면 싸구려 키치가 되지만 디자인을 절제하면 고급 상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폰의 혁명은 디자인을 최소화한 절제미에 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
4. 룸 Room, 2015 : 한 남자의 성적 욕망 때문에 7년 동안 룸에 갇힌 여자와 아들 그리고 극적인 탈출. 더군다나 이 영화는 실화이다. 재능 없는 감독이었다면 실화를 핑계로 자극적으로 연출했을 텐데, 감독은 탈출 이후의 트라우마를 다룬다. 감독은 가해자에 대한 복수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치유에 촛점을 맞춘다. 지옥 같은 감옥을 벗어나 꿈에 그리던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모자에게 세상 밖은 마음의 감옥일 뿐이다.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힘든 것은 정상에서 내려오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좋은 영화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췄다. 흠잡을 데 없다. ★★★★
5. 드라이브 Drive, 2011 : 폴 베호벤 영화를 주로 촬영했던 촬영감독 얀 드봉이 << 스피드, 1994 >> 라는 영화로 입봉했을 때 내심 불안했다. 배우가 감독으로 업종 변경해서 성공한 경우는 많지만, 촬영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 영화 감독으로 업종을 변경해서 성공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 열광했지만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모두 다 이 영화의 스피드가 주는, 염통처럼 쫀득쫀득한 스릴에 박수를 보냈지만 내 눈에는 식어버린 부대찌개 속 불어터진 당면 같았다. 이게 왜 쫀득쫀득한 식감이냐고요 ! 얀 드봉은 스피드를 높여야 퀄리티 높은 스릴을 만들 수 있다고 계산한 모양이다.
정말 그럴까 ? 앙리 클루조 감독은 영화 << 공포의 보수 Le Salaire De La Peur, The Wages Of Fear, 1953 >> 에서 느린 카 체이스로 최고의 스릴을 만들어낸다. << 드라이브 >> 를 연출한 리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은 얀 드봉보다는 앙리 클루조 전략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장르에 익숙한 관객들이 정박(正拍)을 예상할 때 변박(變搏)으로 치고 나가는 엇박자 기교가 뛰어나다. 한마디로 기똥찬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초입 추격전 장면은 느리지만 그 무엇보다도 스릴이 넘친다. 우아한 탱고 같다. 땅고(탱고)라는 춤이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격렬한 " 동작의 연속성 " 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찰나의 정지 " 에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