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이 참 좋다 :
카메라와 만년필

21세기의 비극은 휴대폰에 카메라'가 장착되면서 시작되었다. 원숭이도 찍을 수 있다는 똑딱 카메라(자동 카메라) 기능에 사진을 간단하게 보정할 수 있는 만능 기능도 있다 보니 누구나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일단 찍고 본다. 광각으로 찍어서 원하는 부분만 blow up 시킬 수 있으니 각도에 대한 고민과 프레임 안팎의 첨삭에 대한 고민도 없다. 이런 주장이 우습게 들리겠지만 : 디지털 카메라의 득세는 곧 문학의 쇠퇴'를 가져왔다. 사진이 < 직유 > 라면 문학은 < 은유 > 이다. 사진은 새콤달콤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서 음식 사진을 찍으면 되지만, 문학은 새콤달콤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오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만약에, 새콤달콤한 맛을 표현하기 위해서 단순히 " 새콤달콤하다 " 라고 직설하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다.
문학은 직설의 다른 방식인 셈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문학이 가지고 있는 < 더디게 재현하는 기능 > 을 제거한다. 현대인은 굳이 새콤달콤한 맛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만약에 마르셀 프루스트가 21세기 인물이었다면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라는 걸작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마들렌과 홍차의 맛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무려 14년 동안 말이다. 디카 식 표현법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마르셀 프루스트 식 재현은 참을 수 없는 과정이다. 그들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이렇게 외칠 것이다. " 마르셀 아저씨 ! 그러니깐, 내 말은 옛날 계란 과자(마들렌) 사진이나 얼릉 올려달라고요요요오 ~ "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개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재미없어 !!! ㅡ 이런 태도. 이러한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 엉덩이 > 다. 옛날에는 대중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 여러 장치가 동원되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제 가수는 앞을 보고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엉덩이를 내보인다. " 솔까말, 너희가 원하는 거 엉덩이 아니었니 ? " 이런 메시지'다. 현대인의 소비 패턴이 이 지랄이니 문학이 소비될 리 없다. 더군다나 시(詩)는 더더욱 그렇다. 시인은 압축하고 독자는 그것을 해제해야 한다.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시의 세계는 알집(AL Zip)의 세계인 반면,
한국 사회는 << 시(視 : 볼 시)의 사회 >> 이다. 설현의 통신사 광고 사진을 보다 보면 엉덩이에 홀린 한국 사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통신과 엉덩이는 무슨 사이 ?! 기변이 참 좋다는 통신사 카피는 마치 대변이 참 좋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정도 수준이면 누군가는 한국 사회를 항문기 고착 사회'라고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