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우가 신경숙에게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5496.html
정치판에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트로이카 전성 시대를 열었다면, 문학판에서는 불문학을 중심으로 한 3김(김현,김치수,김화영)이 트로이카 전성 시대를 열었다. 이들은 실존주의 문학 오따꾸였다. 나 또한 그들의 영향 아래에서 실존주의 문학을 탐독했다.
알랭 로브그리예 소설을 좋아했던 적이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로브그리예'로 옮겨 간다. 당시 사르트르는 독보'였고 로브그리예는 듣보(잡)였다. 로브그리예는 그 바닥에서 칼을 잘 쓴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사르트르나 카뮈에 비해 대중 인지도는 별로 없었다. " 언더그라운드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뭐. 예술성과 대중성은 갈 길이 다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로브그리예 소설을 애타게 찾아 읽었던 데에는 과시욕이 팔 할'이었던 것 같다. 구하기 힘든 컬트 영화만을 찾아다니며 지적 허세를 뽐내려는 사이비 영화광처럼 말이다. 남들이 < 독보 > 스필버그 영화 < 쥬라기 공원 > 을 이야기할 때 < 듣보 > 알레한드로 조도로브스키의 < 엘 토포 > 를 지껄이며 " 그 영화 봤어 ? " 라고 말할 때 오는 쾌감.
나는 로브그리예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항상 실패했지만 똥 싸다가 만 듯한 학문의 떨림에는 깊이 감동했다. 됐다 싶어서 변기에서 일어나면 다시 항문을 향해 몰려오는 묵직한 그 진동 말이다. 로브그리예 소설은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 끝 > 에서 시작해서 < 시작 > 으로 끝나고, < 끝 > 난 시점에서 다시 < 시작 > 을 알리는 뫼비우스의 구조 말이다(주인공은 미로 같은 마을을 헤매지만 끝날 무렵 그는 다시 처음 그 장소에 있다). 하일지는 장정일과 함께 느닷없이 출몰하였다. << 경마장 가는 길 >> 은 똥 싸다가 만 듯한 학문의 압력이 제대로 구현되었다. 리얼리즘 소설에 질려버린 나는 환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론가 남진우가 하일지의 << 경마장 시리즈 >> 에 대하여 로브그리예를 표절했다면서 츄잉껌을 씹으며 면도칼 같은 날카로운 저잣거리 입말로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말이 비평이지 비평을 가장한 욕이었다. 뜨기 위해 지지 않겠다는 태도'가 엿보였다. 새도 세상을 뜨다 보니, 이제는 욕도 평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내뱉으면 학문이 되는 세상이구나. 똥 싸다가 만 듯한 학문의 압력이 표절이라면 그런 작품은 볕 좋은 5월, 빨랫줄에 걸린 빨래처럼 널리고 널렸다. 이상한 것은 표절이라고 했으면 구체적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데 꼴랑 똥 싸다가 만 듯한 느낌이 전부였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충 " 작가의 심리적 동기가 불순 " 하다는 식이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는 뉘앙스'였다. 남진우는 궁예의 관심법이라도 터득한 것일까 ? 이 이상한 궤변과 논조. 이후, 남진우는 많은 동료 평론가들로부터 명확한 근거가 없으면서 특정인을 타켓으로 한 인신 공격이라고 비판받아야 했다. 역공을 당한 꼴이었다.
그런 그가 돌아왔다. 신경숙 사태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던, 문예창작과 교수이면서 시인이면서 문학평론가'인 그가 < 현대 시학 > 에 << 판도라의 상자를 열며-표절에 대한 명상 1 >> 이라는 글을 실을 예정인 모양이다. 한겨레 신문이 이를 보도했다. << 판도라의 상자를 열며 - 표절에 대한 명상 1 >> 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한겨레 기사만 가지고 논하자면 정말 어, 어어어어어이가 없다. 그동안 표절 작가에 대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던 그가 이제는 이렇게 말한다.
" 지금 우리 사회에선 표절이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양심의 문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어 선악 이원론적 판결이 요구되는 법정으로 직행하곤 하는데 문학 예술의 창작에서 표절은 종종 텍스트의 전환, 차용, 변용 등의 문제와 결부되어 숙고해야 할 점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 숙고를 회피한 채 이루어지는 표절 논란은 대부분 무분별한 여론 재판이나 ‘잘못의 시인’ ‘선처에 대한 호소’ ‘대중의 망각’으로 이어지는 막간의 소극으로 귀결되기 쉽다 "
세상에, 표절 킬러'라는 별명이 붙었던 남진우가 이렇게 달라졌어요 !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지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기존 입장을 180도로 변환하는 것을 보면 마치 중국 " 변검 " 을 보는 듯하다. 그가 표절은 문학의 일부라며 주장을 하기 위해 내세운 보르헤스의 단편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에 언급 또한 기절초풍할 대목이다. 우선 이 소설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 소설 속 인물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 > 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필사(정확히 말하자면 9장, 38장 전체, 22장 일부)를 한다. 그런데 원본 << 돈키호테 >> 보다 사본인 << 돈키호테 >> 가 더 위대한 작품이 된다. 아비보다 자식이 뛰어난 경우다. 사극 버전으로 말하자면 불초소생이 아버지를 능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서 < 표절의 문학적 수용 > 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 보르헤스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표절이 아니라 " 수용문학, 현상학, 독자반응 이론,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고찰이었다. 남진우가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 라는 단편을 표절의 문학적 수용 따위로 인식했다면 그는 문학평론가로서 자질이 없는 사람이고, 알면서도 어깃장을 부린다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 표절 > 은 원본을 숨기고자 하는 사본의 사악한 욕망일 뿐이지 " 피에로 메나르'st 리라이팅 Rewriting " 이 아니다. 피에르 메나르의 창조적 필사는 원본에 대한 경의, 도전, 재해석에 해당되지만 표절은 원본에 대한 경의, 도전, 재해석 따위 자체가 없다. 그저 남모르게 도둑질을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표절'이란 독한 말을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변형시킨다. " 말(語)에 주인이 있다고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고 보는 사고는 어쩌면 잘못된 믿음의 산물이며 보편적 편견일 수 있다. " 거대한 절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여기까지 오면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집 나간 말의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사고는 잘못된 믿음의 산물이 아니며 보편적 편견도 아니다. 남진우가 착각하는 것은 표절이란 집 나간 말을 절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굿간에서 훔쳐오는 행위'다. 설령, 집 나간 말을 절취한다 해도 그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그 정도는 초등학생도 안다. 지갑을 주으면 경찰서로 가는 행위가 과연 잘못된 믿음의 산물이며 보편적 편견인가 ? 해명이 길면 변명이 되고, 변명이 길면 구차해지는 법이다.
박근혜의 말(지금 하고 있는 주장)은 박근혜의 말(과거에 했던 말)로 그 모순을 지적할 수 있듯이, 남진우의 말은 남진우의 말로 그 모순을 지적할 수 있다. 표절 킬러가 표절을 옹호한다는 것은 금연 홍보 연예인이 골초'인 경우만큼이나 생경스럽다. 그 유명한 금자 씨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로 한다. " 너나 잘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