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봄의 독서일기 중에서 한스 자너의 <야스퍼스>(한길사, 1998)을 읽으면서 적어놓은 메모를 옮겨놓는다. 한때는 '하에데거냐 야스퍼스냐'란 문구가 유행하기도 했을 만큼('한계상황'이란 유행어!) 카를 야스퍼스(1883-1969)는 소위 독일의 '실존철학'을 양분하기도 했던 철학자이지만, 현재의 명성은 거기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아래는 노년의 야스퍼스. 그는 가장 전형적인 독일 철학자의 인상을 갖고 있다. 강인하고 엄격한 인상 말이다).  

지금은 하이데거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동급의 사상가, 철학적 라이벌로서 인정받았던 듯하고, 독일사상에 민감했던 일본에도 그런 식으로 수용된 듯하다. 우리도 당연히 옛날엔 그렇게 수용했었고, 때문에 무슨 사상전집류들에는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 같은 책이 단골메뉴였다. 야스퍼스로서 좀 불행한 일이라면 후학이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겠다. 하이데거만 해도 데리다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뒤를 받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국내 소개된 책으론 한스 자너의 전기 외에 리하르트 비서의 <카를 야스퍼스>(문예출판사)가 있는데(자너의 책은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저자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를 공평하게 다루는 쪽이다. 저명한 하이데거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국제야스퍼스학회 공동대표를 역임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국내엔 그의 하이데거론과 야스퍼스론이 모두 번역돼 있다. 유감스러운 건, 정신의학과 철학에서의 야스퍼스의 (방대한) 주저들이 소개되지 않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개인적으론 아직 큰 흥미를 갖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폴 리쾨르가 그의 학생이었으며 가다머는 그에게서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교수직을 물려받았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기억해두기로 한다. 그의 걸출한 여제자가 한나 아렌트였다는 것도. 아렌트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하이데거와의 '관계' 때문에 하이데거의 추천에 따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오며 야스퍼스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에서 사랑의 개념'인가가 논문의 제목이었다. 이제 아래부터가 2000년의 메모이다.

 

 

 

 

한스 자너의 <야스퍼스>(한길사)를 읽는데, <루소>(한길사)만큼 재미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유는 그의 생애 전체에 대한 요약에 들어 있다: “그의 부인은 야스퍼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아낌없이 헌신하면서도 그것을 희생으로 느낀 적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세계를 감싸안는 팔’이었고, 언제나 그에게 한결같이 안정감을 주면서 삶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전체적인 흐름은 늘 그의 정신 속에 편안히 녹아들었다. 이렇듯 아늑한 삶은 역사의 유여곡절이 거의 없는 삶인 동시에 특기할 만한 개인적인 사건도 거의 없는 삶이었다. 그의 삶은 오직 사유의 세계를 위하여 송두리째 정열적으로 바쳐졌던 것이다.”(124쪽) 유태인이었던 부인 때문에, 히틀러 치하에서는 제법 고달펐음에도 불구하고 아늑한 삶으로 기술될 수 있을 만한 삶을 그는 살았다는 것이니 더는 붙일 말이 없다.

1883년생인 그의 사진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1938년 대학에서 해직을 당한 그가 거리를 걷고 있는 장면(78쪽)인데, 그는 키가 190의 장신이었다. 또 막스 베버를 대단히 존경했다는 것과 하이델베르크의 리케르트와 앙숙관계였다는 것 정도가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덧붙여서 포괄자(das Umgreifende)에 대한 그의 정의: “무규정적인 일자”. 그리고 실존. “실존은 영원을 현재화하는 것으로서 시간 속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은 초월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실존의 구조이다.”(183쪽)

<현대의 정신적 상황>(1931)에서 그가 내린 실존철학에 대한 정의: “실존철학은 모든 사실적인 지식을 이용하면서도 이러한 지식을 초월하는 사유로서, 인간은 그러한 사유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사유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하는 자의 존재를 해명하는 동시에 성취한다. 실존철학은 존재를 고정시키는 모든 세계인식을 초월하여 부유상태로 들어가게 함으로써(이것이 곧 세계정위이다) 자신의 자유에 호소하는 것이며(이것이 곧 실존해명이다), 또한 초월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제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이것이 곧 형이상학이다).”(186쪽)

또 야스퍼스의 고유한 개념인 한계상황(Grenzsituation)에 대하여: “모든 근본상황(Grundsituation)은 현존의 유한성에 근거한다. 인간이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한, 한계상황은 근본상황이다. 유한한 현존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유래를 지니고 있으며, ‘죽음’에 처해 있고, 다른 현존과의 ‘투쟁’ 관계에 있다. 또한 인간은 그때그때의 여러 가능성들을 선택함으로써 또한 가능적인 것의 개방성 내에서 다른 가능성들을 잃어버림으로써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한 인간은 ‘우연’에 맡겨져 있으며, 현실적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이다."

"야스퍼스에게는 인간이 궁극적인 여러 상황에 어떻게 관련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근본상황들을 경험함으로써만이 이러한 여러 상황은 한계상황들로 된다. 여기서 ‘한계’라는 말은 현존의 테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이 초월자를 향해 나가면서 투명해지는 위치를 가리킨다... 한계상황을 경험한다는 것과 실존한다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은 철학의 보다 심원한 근원인 셈이다.”(190-1쪽)

06.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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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주간에도 여전히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손길이 가는 책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눈길을 끈 책들 가운데 비교적 언론의 포커스를 받지 못한 책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한다. 

 

 

 

 

 
 레비나스의 책 2권이 연이어 나왔다. 한권은 그의 3대 주저 가운데 하나인 <존재에서 존재자로>(민음사)이고 다른 한권은 절친한 친우에 대한 책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동문선)이다(블랑쇼의 비평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김현의 <프랑스비평사-현대편>을 참조). 이전까지는 나는 그냥 ‘임마누엘 레비나스’라고 알고 있었는데(임마누엘 칸트처럼) 새로 나온 번역서들을 보니 ‘에마뉘엘’ 혹은 ‘에마누엘’이라고 불러야 하는 듯하다.(*레비나스에 대해선 얼마전에 여러 차례 다룬 바 있기에 좀 새삼스럽다). 

<존재에서 존재자로>는 믿을 만한 역자의 자세한 해제를 싣고 있기 때문에 굳이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블랑쇼에 대한 책 역시 블랑쇼 연구로 학위를 받은 이의 번역이므로 믿어봄 직하다. 그런데, 100쪽이 안되는 책이 9,000원이나 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일부 마니아나 도서관을 염두에 둔 책값이지 싶다(그 마니아에 내가 속한다니!). <블랑쇼>는 불어로는 단행본으로 출간됐지만,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에서는 <고유명사들Proper Names>(스탠포드대학, 1996)에 합본돼 있는데, 분량은 44쪽에 불과하다. 프랑스 철학이나 비평서들에 자주 손길이 가는 탓에 동문선의 책들을 자주 소개하게 되는데(요즘은 ‘서문선(西文選)’이나 ‘불문선(佛文選)’이라고 개명해야 할 듯싶다), 그들이 제값의 번역서들을 내고 있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레비나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10년이 넘었다. 애초에 하이데거의 책에 눈을 뜨기 시작하다가 ‘타자’에 대한 윤리학이란 구호에 매료된 거 같은데, 덕분에 관련서만 서가 한칸을 채우고 있다(에스토니아 출신인 그는 러시아문학의 영향을 많은 받은 철학자이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다). 이런 까닭에 그간 드문드문 그의 책들이 소개될 때마다 반가운 마음을 갖게 된다. <전체성과 무한>, <존재와 다른 것, 혹은 존재 사건 저편>과 같은 나머지 주저들도 마저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레비나스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서광사)이 출간됐다. 정신문화원 김형효 교수의 묵직한 책들과 함께 국내 하이데거학의 수준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동문선에서 나온 신간으론 롤랑 바르트의 <작은 사건들>도 있다(*바르트의 책은 이후에 5-6권이 더 출간되었다). 역자는 동문선의 간판역자인 김주경씨(<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역자). 바르트 전집이 잠시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출간된 이 책은 바르트 애호가들의 장서용 책이다. 주저는 아니라는 뜻이고, <카메라 루시다>에 매혹됐던 이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만하다. 아울러 바르트를 좋아하는 이들은 이번 봄호 <세계의 문학>에 실린 쇠이유의 편집자 프랑수아 발과의 인터뷰를 놓치지 마시길 바란다. 발은 바르트 생전에 매주 저녁식사를 같이 했던 친구이자 전담 편집자이고 철학자이다(그리고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동성연애자이다).

곁다리로 덧붙이자면,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4>가 마저 출간됨으로써 전 4권이 동문선에서 완간됐다. 번역은 2, 3권에서와 마찬가지로 김웅권. 도스는 역사학자로서 폴 리쾨르의 제자인데, 그가 쓴 <폴 리쾨르>도 동문선의 근간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한번 기대해봄 직하다(*이 책은 작년에 이미 출간되었다). 또 하나, 피에르 부르디외의 <맞불2>도 동문선에서 나왔다(*<맞불>은 <맞불2>보다 더 나중에 출간됐다). 부르디외의 책 리스트를 나도 웬만큼은 꿰고 있는데, 처음 들어보는 책이다. 당연히 아는 바가 없다. 시사적인 글 모음이 아닐까 싶다.

 

 

 



모처럼 사회학 이론서를 한권 샀는데, 스티븐 마일스의 <현실세계와 사회이론>(일신사)이 그것이다. 저자는 그다지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고, 다만 비교적 얇은 분량에서 대중사회, 탈산업사회, 소비사회, 탈근대사회, 맥도널드화된 사회, 위험사회, 지구사회 등 20세기의 다양한 사회이론의 흐름과 그 관계들은 잘 정리하고 있다는 게 장점인 책이다. 일종의 지도이자 매뉴얼인 셈(실제 독서에선 이런 책들이 유용하다). 책은 일신사의 사회과학신서의 한권인데, 출간된 60권의 책 가운데 내가 갖고 있는 건 고작 3권뿐이었다(나는 얼마나 책을 안 사는 것인지!). 근간 목록에 유까 그루너브의 <취향의 사회학>이 눈길을 끈다(*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 사정>(일빛)이 번역돼 나왔다. 사실 이 책은 두 주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띄길래 바로 구입한 책이었고, 은근히 괜찮을 물건 하나 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주 언론의 북리뷰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졌다. 한때 '사회'라는 말이 언제쯤 우리말 쓰임새를 갖게 됐을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현진건의 '술권하는 사회'란 단편을 떠올려 보라), 그런 류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책이 신간이다. 11개의 주요 단어들이 일본어로 옮겨지게 된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 일본어들은 곧 우리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어 사정'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다. 이런 류의 우리말 번역어 성립 사정도 누가 좀 풀어주었으면 싶다.

 

 



 

이론서들을 제쳐놓는다면, 가장 반가웠던 책은 조루주 벨몽의 <나의 프루스트씨>(시공사)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프루스트를 만년에 8년간 돌보았던 셀레스트 알바레의 회고담인데, 역자후기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 출간됐던 것이 이번에 재출간됐다. 재정 문제 때문에 아직 책세상에서 나온 <마르셀 프루스트1,2>를 구입하진 못했지만, 이 신간 덕분에 프루스트에 관한 연구서 두어 권을 복사했다. 언젠가 처박아놓은 책들을 찾아서 읽을 시간이 오기를 바란다.(*열화당에서 나오는 만화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현재 3권이 출간돼 있다.)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디 아워스>의 영향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대학에 들어올 때 내가 서점에서 본 울프의 책은 삼중당문고본 <댈러웨이 부인>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걸 (고생스레) 읽고 있던 친구가 그렇게 부럽진 않았다. 솔출판사에서 전공자들로 울프 전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여 더디지만, 지난 96년부터 전집을 출간하는데, 이미 댓 권이 나왔고, 이번에 <댈러웨이 부인>이 다시 나왔다(*이미지를 찾지 못하겠다). 이미 허마이오니 리의 정평있는 전기 <버지니아 울프 1,2>(책세상, 2001)도 나와 있기 때문에 이젠 버지니아 울프도 마음놓고 읽을 만한 때가 되었다.

 

 

 



<러시아현대희곡>(전3권)이 열린책들에서 나왔다. <오리사냥>의 밤필로프를 제외하면 과문한 나로서는 대부분 낯선 현대 작가들의 희곡들이 얇은 책 3권으로 묶였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내용을 살펴보고 좀 실망했다. 더 중요한 작가들의 더 중요한 작품들이 먼저 번역됐어야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 씌어진 다수의 작품들이 그들인데, <러시아희곡1,2>(열린책들)과 <러시아현대희곡> 사이에 끼인 그 작품들은 언제쯤 우리말로 읽을 수 있을까?

 

 

 



장정일 등이 쓴 <삼국지 해제>(김영사)가 두툼한 책으로 나왔고(알다시피 장정일은 문화일보에 삼국지를 연재하고 있다), 서유기의 새 번역본(임홍빈 역)도 문학과지성사에서 10권짜리고 나온다고 한다. 당분간은 이들을 챙길 여력이 없음이 유감이다. 反중화주의를 기치로 내건 <삼국지 해제>가 특별히 강조하는 건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삼국지 최고 전략가가 제갈량이 아닌 가후라는 것. 그리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천하통일에 실패했기에 유비와 조조는 역사의 실패자라는 것.

이 책에 대한 소설가 조성기(<삼국지>의 역자 중 한 명이다)의 서평(<한국일보>, 4월 5일자) 중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삼국지>는 사실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내용이 있을지는 모르나 배워 본받을 만한 내용은 별로 없는 책이다. <삼국지>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정치, 문화, 경제가 삼국지 수준에 머물고 있는 나라인 셈이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세계도 삼국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공감한다.

 

 

 



교양과학서로 사두고 싶은 책은 제임슨 왓슨의 (사이언스북스)이다. 1953년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하여 분자생물학 혁명을 가져온 왓슨의 지적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론 상당히 고집이 세고 오만한 성격이라는데(에드워드 윌슨의 자서전 <자연주의자>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의 시대를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선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겠다.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전기 <우리 수학자는 모두 약간 미친 겁니다>(승산, 1999)를 좀 뒤늦게 읽고 있는데, 그는 생애 만년의 25년간 하루 19시간씩 수학에 매달렸고, 하루 10-20밀리그램의 벤제그린, 강한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인 알약을 복용했다. 그러면서 그가 즐겨 한 말. “수학자는 커피를 정리(定理)로 둔갑시키는 기계이다.” 수학이 아닌 모든 것을(심지어 여자도) 귀찮게 여겼던 그가 한 말 중에 인상에 남는 것: “몇몇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사유재산이 훔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사유재산이 귀찮은 것이라고 말하겠어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하루 19시간씩 엉뚱한 책을 읽어야겠다.

 

 

 



끝으로, 음미해볼 만한 기사는 <중앙일보>(4월 5일자) 죽비소리에 실린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인덱스 없는 출판관행에 대한 비판이다. 필자가 거명하고 있는 책들은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문학과지성사),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문학과지성사), 소광희 교수의 <시간의 철학적 성찰>(문예출판사) 등이다. 나도 다 갖고 있는 책인데, 이 두툼한 책들의 공통점은 인덱스가 빠져 있다는 것. 대표적인 인문학출판사를 자처하는 곳들에서 나오는 책들이 이렇듯 (비용을 좀 줄이려는) 얄팍한 계산하에 출간된다는 것은 새삼 부끄러운 일이다. 정신 좀 차릴 일이다!

 

 

 

 

보너스. 당대비평 특별호로 나온 <탈영자들의 기념비>(생각의나무)가 이 주에 읽어볼 만한 저널북이다. 책갈피에 인용된, 네그리/하트의 <제국>에서 재인용된 대목: "탈영자들을 위한 기념비들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대표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모두는 전쟁을 저주하면서 그리고 탈영자들의 행복을 부러워하면서 죽어갔기 때문이다. 저항은 탈영에서 생겨난다."(한 반파시스트 파르티잔, 1943) 미국이 승리를 선언한 이라크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이라크인들의 명복을 빈다. 더불어 그 무모한 전쟁에서 탈영한 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2003. 04. 17.

P.S. 본문중에 '동성연애자'란 표현이 나오는데, 나는 '동성애자'란 뜻으로 쓴 것이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있어서 '동성애'와 '동성연애'의 의미를 보충하도록 한다. 별다른 건 아니고, 인터넷의 지식검색 내용을 옮겨놓는다(사실 문제는 좀 복잡한데,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동성애란, 동성을 이성으로 인지/간주하는 성향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가령,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에게 당신들이 이성에 대해서 갖는 감정을 우리도 동성에게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라고 주장/호소하기도 하는데, 나는 거기에 '진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동성애란 없다!' 다만, 있는 것은 성의 불확정성이다. 생물학적 성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 간극이 있는 것. 때문에 '동성애'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동성애, homosexuality 동성애란 성 지향성 (sexual orientation)이 자신과 같은 성향의 사람에게 향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 지향 성이란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단순한 성적 취향과는 구별됩니다. 동성애는 동성을 향한 지속적인 감정적, 정서적, 신체적, 성적 끌림을 수반합니다. 즉 단순히 동성과의 성경험이 있다거나 동성과의 성행위 자체를 동성애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동성이나 이성과의 어떤 개인적인 성적 경험이 반드시 그를 동성애자 또는 이성애자로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성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이성애자임에도 동성과 성적인 경험을 가질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향을 고쳐 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성과의 성적인 경험을 갖기도 합니다.그리고 군대, 교도소, 기숙사등의 이성과 차단된 환경에서 이성애자들이 경험하는 동성과의 성접촉도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렇듯 성행위 자체가 개인의 성지향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성애라는 용어를 이해할 때는 동성에 대한 지속적인 끌림과 동성과의 성적인 경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성 지향성을 무시한 채 동성과의 성 행위 자체를 동성애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동성애'와 '동성연애'의 개념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성적인 성향이 궁금하십니까? 여러분이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성의 사람에게 감정적, 정서적, 신체적, 성적으로 가장 끌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동성연애, same-sex acts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기사를 다룰때 거의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일반인들도 동성연애라는 표현에 훨씬 더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구별합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동성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기인하 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동성애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 에서 그 원인을 찾을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동성과의 어떤 성적인 경험 내지는 성행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삶 자체로 보기보다는 삶의 어떤 선택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성애는 변태 아니면 이성과의 섹스에 싫증난 사람들의 도착적인 행동이나 노력만 하면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도덕적인 일탈행위로 치부됩니다. 즉 동성연애라는 말속에는 동성애를 치료 가능한 정신질환의 일종이나 타락한 인간들의 행태, 할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간주할려는 시각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동성애는 do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곧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행위는 존재에 수반되어 나타날수 있는 것이겟지요. 어떤 외국의 천주교 신부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사제로서 독신으로 살겠다는)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어떤 성관계도 갖지 않겟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 중에는 동성과 성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나중 에 동성의 사람을 사귀고 섹스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는 기본적으로 이성애자인 사람이 이성을 사귀고 섹스를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동성애'를 성적인 행동만 없다면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성애'를 성적인 행동만 없다면 인정하겠다는 억지 주장과 동일합니다. 동성애자에게 있어서 동성과의 성적인 경험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이성과 성 경험을 갖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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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에(*이 글은 2003년 4월초에 씌어졌다) 나온 책들 혹은 눈에 띈 책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나 그린비에서 나온 고전 리라이팅 시리즈이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권용선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3권이 1차분으로 먼저 나왔는데, 기획으로서는 책세상의 우리시대에 비견할 만하다.

 

 



 

 

 

 

 

내가 먼저 산 책은 <니체의 위험한 책>이다. 아마도 정서적인 친화성 때문일 텐데, 이 책은 니체 입문서로서 아주 훌륭하다. 무엇보다도 니체에 대한 저자의 사랑 혹은 우정이 아주 잘 전달된다. 요컨대 저자는 도체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라도 누구든지 니체에 '감전'될 만하다. 책의 말미에는 '니체를 알고 싶을 때 도움이 되는 책들'이란 제목으로 니체에 관한 책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또한 유익하다. 여러 책들 가운데, 저자가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오이겐 핑크의 <니이체 철학>(형설출판사, 1984)(저자는 <니이체의 철학>이라고 오기하고 있지만)과 네하마스의 <니체-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이다.

 

 

 

 



 

 

 

네하마스의 책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지만(특히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 하기락 선생이 옮긴 오이겐 핑크의 책은 몇년 전 한창 찾을 때 구하지 못했던 책이다. 최근에 도서관 장서들을 검색해 보니까 일부 도서관들에 책이 소장돼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저자가 최고의 책으로 꼽는 것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 이 책은 인간사랑에서도 <니체, 철학의 주사위>란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이다. 고미숙과 권용선의 책은 여유를 두고 읽을 작정이다(*나중에 사두긴 했지만, 아직은 탐독하지 않았다).

 

 

 

 

 

 

 

 

 

'러시아 형식주의'를 유럽(프랑스)에 최초로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진 불가리아 출신의 문학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의 <산문의 시학>(예림기획)이 번역돼 나왔다(*토도로프에 관해서는 이전에 다룬 바 있다). 토도로프를 아는 이라면, 그거 번역이 있지 않어? 란 생각이 들텐데, 맞다. 지난 92년에 문예출판사에서 <산문의 시학>이라고 번역돼 나왔고,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두 번역본의 차이점은 전자가 불어 원본의 번역이고, 후자는 영역본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영역본에는 조나단 컬러가 쓴 서문이 들어가 있고, 불어본에는 영역본에 빠져 있는 '형식주의가 남긴 방법론상의 유산'이 1장으로 들어가 있다(그래서 더 두껍다). 참고로, 이 <산문의 시학>에는 아주 난해한 20세기 러시아 시인 흘레브니코프에 대한 글도 한편 실려 있다.

 

 

번역은 새로 나온 예림기획본이 더 낫다. 문예출판사본은 연대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번역인데(역자는 신동욱 교수로 돼 있다), '시제'를 '시대'로 '인칭'을 '인물'로 번역하는 식이다. 멀찍이 두고 읽는다면 눈에 띄지 않겠지만, 정독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책. 그렇다고 해서 예림기획본이 맘에 드는 것도 아니다. 흔히 narrative의 의미를 갖는 불어의 'recit'를 역자는 생경하게도 '술화'라고 옮겼다. 술화는 페터 지마 번역자들이 'discourse'를 옮기던 말이다. 어쨌든 울며 겨자먹기로 사두긴 했다.

 

 

 



 

 

 

 

두어권이 나오다 만 '토도로프 선집'을 비롯하여 토도로프의 책은 국내에 비교적 많이 소개되었고, 10년쯤 전에는 방한하기도 했지만, 나의 견식으론 그에 관한 단행본 연구서가 국내는 물론 구미에서도 나오지 않은 듯하다. 다소 과소평가되는 듯한 기분인데, 60년대 문학적 구조주의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만을 먼저 지적해 두기로 한다. 특히 언어학적 전회 이후 언어학과 문학과의 관계를 질문하는 데 있어서 그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참고로, 이 주제에 대한 국내 저작으론 고대 김인환 교수의 <언어학과 문학>(고대출판부, 1999)이 있다.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분량은 아니지만 호기심은 북돋아준다.

야콥슨의 실어증론을 30년대 모더니즘 소설에 적용시켜본 문홍술의 <한국모더니즘소설>(청동거울)도 출간됐다(오늘 서점에서 눈에 띄길래 샀다). 특별히 저자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문학 단행본 연구서를 즐겨 사보는 편도 아니지만, 방법론에 관심이 가서 구입한 것. 역시나 야콥슨의 방법론을 원용한 한국시 연구서로는 권혁웅의 <한국 현대시의 시작방법 연구>(깊은샘, 2001)이 있다.

 

 

 

 



 

 

 

독일철학자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아카넷)가 번역돼 나왔다. 프레게는 후설과 비교되는 수리/논리 철학자로서 흔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언어학(의미론)에서도 곧잘 언급되는 인물이다. 프레게에 대해서는 안토니 케니의 <프레게>(서광사, 2002)가 출간돼 있고, 박이문의 <현상학과 분석철학>(일조각, 1990)이 참고할 만하다(아주 쉬운 입문서이다). 참고로, 철학자 김재권 교수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아닌) 프레게를 꼽은 바 있다.

 

 

 

 

 


 

 

 

 

번역된 고전 몇 권. 부조리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민음사)가 번역돼 나왔다. 표제작과 <수업><의자> 3편이 묶여서 나왔는데, 흔히 그의 反연극 3부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이다(물론 기존 번역들이 있긴 하다).

 

 

 

 

 

 

 

 

 

그리고 괴테의 <색채론>(민음사)이 괴테 전집의 일환으로 번역돼 나왔다. 일종의 과학론인 이 책은 괴테의 책으로는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고 한다. 그리고 세르반테스의 단편 4개가 <유리 학사>(문학과지성사)란 제목으로 묶여서 출간됐다. <모범소설집>이란 그의 단편집에 실린 12편 가운데 4편을 고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전편이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럽다(*바로 그달에 <세르반테스 모범소설>이 두 권짜리로 출간됐다).

막간에, 베르테르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최근 문학동네에서 나온 <독일문학의 장면들>이란 책에선 '젊은 베르테르'를 '젊은 베르터'로 표기하고 있다. 나는 원래의 독어 발음이 '베르터'에 가까운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같은 번역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리말의 '베르테르'에는 '베르터'가 갖고 있지 않은 문화(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를 읽노라!"). '베르터'란 이름은 실연으로 상심하기엔 너무 사무적인 이름이다(마치 무슨 하인의 이름같다).

 

 

 

 



 

 

 

쿤데라와 조금 관련있는 책으로 외대 체코어과 김규진 교수의 <체코현대문학론>(월인)이 출간됐다. 쿤데라와 보후밀 흐라발 등 20세기 체코 문학의 거장들에 대한 리뷰성 글들이 실려 있다. 좀 다른 책이지만, <한국신소설선집>(서울대출판부)도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10권짜리로 기획돼 있고, 이번에 두 권이 나왔다(*계속 나오고 있다).

 



 

 

 

 

 

 

끝으로 읽을 만한 교양과학서.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의 신간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궁리)를 읽어볼 만하다. 부제는 '한 사회생물학자가 바라본 남자와 여자'이다. 최교수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하버드대학의 에드워드 윌슨부터 사사한 정통 사회생물학자이고, 곤충과 거미류의 짝짓기에 대한 연구서를 영미의 권위있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바도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2001), <알이 닭을 낳는다>(도요새, 2001) 등의 칼럼집들이 다소 짧은 글들을 모아놓아 아쉬웠는데, 이번에 좀 긴 글들이 실려 있어서 반갑다.

 



지젝 관련 소식으로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지젝이 4권으로 편집한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작년말에 Routledge에서 나왔다(바로 도서관에 주문했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는 건 그때 얘기고 오래전에 이미 복사했다). 부제는 Critical Evaluations in Cultural Theory이고, 4권짜리인데, 1600여쪽에다 책값은 100만원 상당. 지젝만을 다룬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 'Zizek: A Critical Introduction'도 이번 4월에 출간 예정이다(*물론 이미 출간되었고 나는 복사본을 갖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국역본이 근간예정이라고 한다, 는 아니고, 근간예정인 책은 아래의 이안 파커의 책이다. 제목은 둘이 거의 같다. 현재까지 지젝 연구서는 3-4종이 더 출간되었다.) 

 

 

2003.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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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05-13 13:57   좋아요 0 | URL
'Zizek: A Critical Introduction'란 아이언 파커Ian parker의 책을 말하는 것인가요?
슬로베니아,계몽주의(헤겔), 정신분석학(라깡), 정치(맑스)로 엮여있던 책의 개요가 일목요연하면서도 흥미로웠는데요. b에서 근간된다는 것을 책날개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벌써 3년이나 지난건가요-.,-?

로쟈 2006-05-13 14:55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잘못 말씀드렸네요. 거의 같은 제목이지만 도서출판b에서 근간예정인 책은 사라 케이의 것이 아니라 이안 파커의 것입니다...
 

2000년 봄에 쓴 독서일기의 일부분을 옮겨온다. 칼 뢰비트(1897-1973)의 <지식, 신앙, 회의>에 관한 대목인데, 그의 책으론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2006)가 얼마전에 새단장을 하고 재출간된 바 있다. 기억에 뢰비트는 하이데거의 제자로서 가다머급의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철학자이다. 저서로는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 등이 더 번역돼 있다.

 

 

 

 

도서관에서 서머셋 모옴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김성한 옮김(신양사. 1958)와 칼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 임춘갑 옮김(창림사, 1961)을 대출했다. 앞엣것은 The Art of Fiction(1955)의 일부를 옮긴 것이고, 나중것은 Wisen, Glaube und Skepsis(1956)를 옮긴 것이다.

뢰비트 책은 양질의 종이로 되어 있어서 거의 새책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교양서적이었을 것이다(*가끔 도서관에서 1960년대에 나온 책들을 찾아보고 감탄할 때가 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와 도스토예프스키 때문에 대출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70년대말에 평화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돼 있다.

(*)임춘갑 선생 번역의 <그리스도교의 훈련>은 2005년말에 다산글방에서 재출간됐다.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1>(새물결)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언급을 참조할 수 있다. 아마 그 책에 대한 관심은 고진에게서 비롯됐을 것이다. <탐구1>에서는 일역본을 따라 <그리스도교의 수련>이라고 옮기고 있다. 아마 이 글은 고진의 책들을 읽던 시절의 일기인 듯하다. 아래 사진은 칼 뢰비트.  

주말에 뢰비트의 <지식, 신앙, 회의>를 다 읽고, 야스퍼스의 전기를 읽고 있다. 뢰비트의 책은 얇은 분량이지만, 힘과 재미가 느껴지는 책이다. 문제의식이 살아있고, 초점도 명확하다. 역자는 저자의 주장을 “철학은 다시금 철학의 본영토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그리스도교의 창조설의 사상에 물들지 않은 그리스철학의 모습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요약한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비판하면서 니체야말로 유일한 현대철학자라고 추켜세우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또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아르키메데스의 점과,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아르키메데스의 점에 대한 비교의 꼬투리(이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다.)

3장에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비판: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그리스도교는 오로지 세계를 잃고 실존하는 외톨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잃은 신, 이 두 개밖에는 모른다.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고 서로 병렬케 하는 그런 창조에의 신앙이 키에르케고르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창조에 관한 이 실존신학적인 결함은 이미 데카르트파의 파스칼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종류의 실존철학에 있어서는 언제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자연적으로 살고, 또 죽는 것, 그러한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자연적인 개념이 결핍되어 있다.”(123쪽, 강조는 나의 것)

각주에는 “니체의 동일물의 영겁회귀의 철학“이란 글을 참조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튼 이 세계라는 개념의 결핍은 비단 키에르케고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리다. 생물학과 형이상학, 두 가지만은 사고의 축으로 삼아온 나에게도 근래에 경험하는 현실은 또 다른 실세에게 관심을 갖도록 부추긴다. 그것은 돈, 혹은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돈의 철학으로서의 경제학, 거기에 숨겨져 있는 법칙과 비약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그런데 이런 건 누구에게 배워야 하나?). 이건 물론 포지티브한 관심은 아니다. 문제를 배제하고 소거시키기 위한 관심이다. 내가 거기에 얽매여 있기 때문.

마지막 4장 “창조와 실존”은 실존철학에 잔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토미즘이라는 것이다. “파스칼에서 시작하여 사르트르에 이르러 극단화되어, 비그리스도교화 되고만 현대의 실존 개념은 창조설을 제거한 그리스도교적, 토마스학파적인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158쪽)

(*)'유령-독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때 나는 그냥 인상적인 구절들과 그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만을 기록했었다. 이런 빛바랜 글을 밖으로 꺼내놓으니까 좀 머쓱하군. 창고에나 집어넣어야겠다...

06. 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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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3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oshot 2006-05-13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쓱해서 창고에 집어넣으시면 안됩니다. 삼삼오오, 귀를 쫑긋세우고 모여드는게 어디 유령 뿐이겠습니까...

2006-05-13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여기에 댓글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문자로 창작되지 않은 것은 문학이 아니다'란 주장에서 방점은 '문자'가 아니라 '창작'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술된 것을 받아적은 것'은 같은 '기록성'을 갖지만 문학이 아니다라고 하신 걸 보면요. 거기에는 아마도 "'문학'은 '문학을 한다'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에 의해서 창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전제돼 있는 듯합니다('넓은 의미의 문학'도 아니라는 뜻은 모순적인 거 같습니다. 구비문학, 구술문학이란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더불어, 저는 개인적으로 네 가지 다른 문학적 태도(문학관)을 분류하는데, 그것들이 반드시 일치될 필요는 없습니다(이념적 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유시인적 전통에서 진정한 시인은 (기록된) '시를 쓰지 않은 사람'으로 정의됩니다. 쓴다는 건 어떤 타락이나 진정성의 훼손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 경우에 '기록된 시'는 '텍스트'가 아니었습니다('텍스트'는 그 가치에 대한 인준을 요구합니다). 아마 이 문맥에서는 '문학'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문학'이 너무나도 외연이 넓은 용어인지라 그 개념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는 건 좀 소모적인 듯합니다. 다만, 역사적/형식적으로 정의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태도에 따라서 몇 가지 분류/유형학이 가능하다는 것 정도가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006-05-13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5-1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음유시인에 관해서 제가 읽은 건 러시아 기호학자의 논문이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되실 거 같습니다. 그리고, 후배님의 경우에 '근대문학'을 상당히 폭넓게 정의하는 거 같습니다. '문자'만이 문학의, 근대문학의 충분한 정의를 제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거기에 근대적인 의식, 혹은 문학에 대한 자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더불어, '철학'이란 말도 말씀처럼 그렇게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입니다(특히나 한국어에서 '철학'이란 말!). 우리에게 주어진 건 '철학들' 아닌가요?..

2006-05-1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쟁이 터지면 전쟁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이 글은 2003년 3월말에 씌어진 것이다). 그걸 출판시장에서는 '현실'이라고 부를 것이다. 어제 읽은 한 칼럼에서는 '전쟁'과 '전장(戰場)'을 구분하고 있었는데, 전쟁은 언제나 승자와 영웅을 탄생시키지만, 전장에서는 패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보다 많은 관심이 두어져야 하는 것은 물론 '전쟁'이 아니라 '전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2차대전 당시의 독소전쟁을 다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지식의풍경, 원제는 Russia's War)의 출간은 의미있어 보인다. 역자는 러시아사 전공자이다. 1941-5년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2천만명이 넘는 러시아인들이 희생됐고, 패퇴한 독일 또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패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 독일군의 만행에 대해서 러시아 영화 <컴 앤 씨>(1985)가 잘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는 역사상 세 번의 중요한 전쟁(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첫째는 13세기 타타르(몽고)의 침입을 받고 200여년간 복속되었지만, 결국 패퇴시킨 일이고(15세기), 둘째는 1812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를 패퇴시킨 일, 그리고 셋째가 바로 1945년 히틀러의 독일군을 패퇴시킨 일이다. 이번 전쟁에서 이라크 또한 미영 연합군을 패퇴시키길 기원한다(더불어 우리 공병대가 갈 일이 없기를).(*물론 턱없는 기대였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건 슬라보이 지젝의 <믿음에 대하여>(동문선)이다(*물론 이 번역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믿음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기서 믿음이란 건 달리 신앙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지젝은 '예수와 바울',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응하는 또다른 짝패를 도입하는데, 그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이다. 흔히 교조적 맑스주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젝은 과감하게 복원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레닌으로의 복귀'이다. 책의 서문조차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레닌까지"란 제목을 달고 있다. 지젝이 최근에 레닌주의에 골몰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듯 선명하게 레닌주의를 들고나올 줄은 몰랐다. 하여간에 이 희대의 재사가에 힘입어(한 출판인은 그를 가리켜 대단한 '구라꾼'이라고 했다) 레닌주의는 포스트맑수주의를 넘어서는, 아주 세련된 이론적 담론으로 재탄생한다. 예수와 더불어.



언제나 그렇듯이 책값이 좀 비싸지만(도서정가제 이후에도 동문선의 책값은 다운될 기미가 안 보이다), 얇은 분량이므로 모두가 사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문제는 번역인데, 역자는 서양사 전공자로서 조르주 뒤비의 책 등 이미 여러 권의 번역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신뢰할 만하다? 그건 아니다. 역자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보아지지만(우리말로 그래도 읽히는 편이다), 역시나 이론의 대식가이자 대중문화광인 지젝을 따라잡기에는 식욕이 좀 모자라고 걸음이 좀 느리다. 그래서 영화/작품명들을 말끔하게 옮기지 못하고 있다. 언어학자 '야콥슨'은 '제이콥슨'으로 번역하고. 영화 <브라스트 오프>는 <싫증>으로 옮기는 식이다. 처음 몇 쪽을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쁜 번역은 아닌 듯하다. 적어도 김종주나 이만우보다는 나은 번역이다(*이건 오판이었다).

 

 

 

 

프랑스의 신예작가 우엘벡의 <소립자>(열린책들)가 번역돼 나왔다(*올해 재판이 나왔다). 98년인가 출간되어 논란이 많았다는 작품이다. 굳이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지젝이 <믿음에 대하여>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겸사겸사 읽을 만한 책으로 제프 콜린스의 <데리다>(김영사)도 있다. 김영사에서 나오는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의 한권이고, 역자는 이 시리즈의 <라캉>을 번역했던 이수명 시인이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무난한 번역일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만화이기 때문에 데리다를 싫어하지만 평소에 읽을 기회가 없었던 이들에게 유익할 듯싶다(조금 알아야 욕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참고문헌에 따르면 데리다는 1996년 현재 37권의 책과 250편 이상의 에세이, 인터뷰를 출간한 다작의 저술가이다. 아직까지 완간되지 않은 하이데거 전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그는 하이데거와 경쟁한다). 그러니 좀 말려주기를...(*입방정이었다. 알다시피 데리다는 이미 투병중이었고, 이듬해 2004년 가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눈에 띈 책은 영국 철학자 러셀의 <러셀 자서전>(사회평론)이다. 상하권 합해서 12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문화과학사에서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천재의 의무>와 나란히 읽을 만하겠다. 이 러셀과 같이 <수학의 원리>를 쓴 미국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사고의 양태>(다산글방)도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화이트헤드 전문가들인 오영환, 문창옥 교수. 이로써 화이트헤드의 주저들이 대부분 번역된 듯싶다. 한때 화이트헤드 카페에서 활동한 적도 있었는데, 모아놓은 책들은 언제나 읽을는지...



 

 

 

고전번역으로는 막스 베버의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1)>(일신사)이 번역돼 나왔다. 인터넷서점엔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이다. 좀 가벼운 책으론 셰리 터클의 <스크린 위의 삶>(민음사)이 있다. 저자 터클은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정신분석의로도 활동한 바 있는데, <라캉과 정신분석혁명>이 그녀의 저작이다. 현재는 MIT에서 과학사회학을 강의한다고 한다. 제목의 '스크린'은 '모니터'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했을 듯싶다. 여기서 스크린은 영화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화면을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용은 가벼워 보이지만 책은 좀 묵직하다(거의 500쪽).

진짜 가벼운 책으론 미디어학자 빌렘 플루서의 <디자인의 작은 철학>(선학사)이 있다. 플루서는 구대륙의 '맥루한'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코뮤니콜로기>(커뮤니케이션북스)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커뮤니케이션북스) <디지털시대의 글쓰기>(문예출판사) 등이 번역돼 있다. 미디어학과 관련한 국내저작으로는 이기현의 <미디올로지>(한울)도 출간됐다. '사회적 상상과 매체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이전에 나는 부르디외에 관한 그의 글을 읽은 게 전부여서 책의 수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카스토리아디스에 대한 언급이 좀 들어가 있는 게 흥미를 끄는 정도.

 

 

 



조지 커퍼드의 <소피스트 운동>(아카넷)이 김남두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플라톤 전공자인 김교수는 겸손하게도 아직 단한권의 단행본 연구서도 출간한 바 없다. 때문에 이 책은 저자보다도 역자가 더 눈에 띈 경우이다. 같은 서양고전철학 전공자인 윤구병 전 교수(현재는 농부)의 존재론강의 <있음과 없음>(보리)도 출간됐다. 여기에는 저자와 김남두 교수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철학쪽 이야기가 나왔으니 마저 하면, 유독 헤겔 책들이 여럿 나왔다. 조극훈의 <이성의 복권>(리북)이 '헤겔철학과 이성사회 실현'란 부제를 달고 나왔고, 이정일의 <칸트와 헤겔: 주체성고 인륜적 자유>(동과서)도 출간됐다. 동과서에서는 클라우스 뒤징의 <헤겔과 철학사>도 번역 출간했다. 나로선 생소한 저자들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국내 저작으론 인권운동가 서준식의 <서준식 생각>(야간비행)이 출간됐다. 읽거나 말거나 그의 책들을 사두기를 권한다. 인권운동에 작은 힘이라고 보태기 위해서. 그리고 두 저널리스트 김훈과 고종석의 글들이 각각 <김훈세설>(생각의나무)와 <히스토리아>(마음산책)으로 묶여서 나왔다. 이미 일간지 지면 등을 통해 발표된 글들을 모은 것으로 애독자들을 위한 장서용의 책이라 할 것이다. 내가 이들의 글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분량'과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서의 글쓰기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글에는 언제나 긴장이 배여 있다.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그들의 글은 좀 긴 시간을 갖고 길게 쓴 글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장인 백대웅 교수의 <전통음악의 랑그와 빠홀>(통나무)도 출간됐다. 통나무에서 나왔다는 것은 김용옥 기자와 연분이 있다는 얘기인데, 사실이 그렇다. 내가 언제 이런 책까지 사서보랴 싶지만, 책이 나왔다는 사실 정도는 기록해 두고 싶다.

더불어 이번에 방한 틱낫한 스님의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너무 많은 책들이어서 이미지 나열은 생략한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나는 명상서적이나 처세술책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따라서 돈 들일 일이 줄어드니까). 틱스님은 화를 가라앉히는 <화>라는 책으로 유명해졌는데, 사실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 자신의 성격이 오히려 불만스러울 지경이니 틱스님과는 인연이 없는 셈이다. 몇 년전에 한 외국인 지인이 선물로 준 <평화로움>이 책꽂이 어딘가에 그냥 평화로이 꽂혀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러시아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의 평화를 사랑할 수 없다!

 

 



 

끝으로 과학책 혹은 기타. 철학연구회 편, <진화론과 철학>(철학과현실사)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인 만큼 당연히 눈길이 가는 책이다.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진화론과 철학에 관한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 쓴 논문들을 모았다. 이 주제에 대한 한국학계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홀크 크루제 등이 쓴 <지능의 발견>(해바라기)도 흥미를 끄는 책이다. 부제는 '개미도 사고를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돈이 좀 있다면, <아인슈타인 파일>(이제이북스)도 사보고 싶다. 미국 FBI가 사회주의 성향이 농후했던 이 세기의 과학자를 대중에 무해한 인물로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가 폭로된다. 연대출판부에서 '문학의 기본개념 시리즈'를 출간하기 시작했다. <환상> 등 네 권의 책이 먼저 출간됐는데, 특징은 얇다는 것(얄팍한지는 모르겠다)과 국내 필자들의 저작이라는 것.

한동안 미루어둔 숙제를 한 기분이다. 이젠 하고 싶은 걸 해야지!...

2003. 0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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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2 18: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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