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나와서 무얼 할까 1 - 살아 있는 12가지 직업이야기 미대 나와서 무얼할까 1
박정준 지음 / 안그라픽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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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전공자나 지망생이 아니어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미술을 직업으로 하는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느 책이기 때문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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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나와서 무얼 할까 2 - 살아 있는 12가지 직업이야기 미대 나와서 무얼할까 2
박정준 지음 / 안그라픽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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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가이드북은 아님. 저자의 고민이 많이 녹아있는책인것 같습니다. 미술을 선택해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들 있는지를 탐구한 책임. 은근히 `당신도 예술을 인새에서 선택해 보라`는 설득을 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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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는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가 던진 질문이면서, 자크 오몽 등이 지은 영화학 입문서 <영화미학>의 4장(영화와 언어) 2절 제목이기도 하다. 1983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프랑스에서 나온 대표적인 입문서로 보이는데, 이미 지난 94년에 강한섭 교수에 의해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열린책들)란 제목으로 국역본이 나오기도 했다(현재는 절판됐다). 그때 후배들과 영화학 세미나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우리말로 읽기에 난감했던 기억은 없다. 'code'를 '기호'라고 옮긴 것이 다소 낯설었을 뿐. 이 책의 새로운 국역본이 <영화미학>(동문선, 2003)이며 역자 후기에 따르면, 1994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을 옮긴 것이다(들뢰즈에 관한 내용이 추가된 걸로 돼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들뢰즈의 <시네마1,2>는 <영화미학>의 초판 이후에 출간됐다).

 

 

 

 

자크 오몽의 책으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영화학자 4인의 공저로 돼 있는 이 '교과서' 말고도 또다른 공저 <영화분석의 패러다임>(현대미학사, 1999)과 단독저서인 <영화감독들의 영화이론>(동문선, 2004)이 번역/소개돼 있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오몽은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여럿의 한국인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런 인연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한국영화의 옹호자이다(특히 홍상수를 지지한다고). 이른바 '한국통'인 것이다. 해서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되어 나쁠 건 없어 보인다(개인적으론 그의 '교과서적인' 책들에 큰 감흥을 느끼진 않지만, 영화학도들이 적극 추천하는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의 영역본까지 구해두었다) .

이런 '좋은 얘기'들로 화기애애하게 책 이야기를 이어나갔으면 좋겠지만, 굳이 이런 자리를 빌어 오몽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영화미학>의 번역에 다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정색을 하기로 하자. 오래전 책이라 책꽂이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영화미학>보다는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판단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란 절이며 여기서는 213-4쪽 두 페이지를 따라가본다. 내가 읽은 것은 국역본 외에 2004년(5판)에 나온 영역본 (텍사스대학출판부)이다. 이 영역본은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1983년의 초판본을 옮긴 것이고(해서 본문에서는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등장한다), 참고문헌만이 업데이트 돼 있다. 덧붙여 말해두자면, '영화와 언어'를 다룬 4장은 공저자 중 미셸 마리가 집필했다.

영화학사에 관련한 책을 한번이라도 들춰본 독자라면 '영화와 언어'라는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그것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섯 가지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여러 영화학자들이 '영화언어'에 대해 언급하고 자기주장을 펼쳤지만, 이 문제에 관한한 권위자는 단연 메츠이다. 일단 그 자신이 언어학자였던 메츠는 영화학에서 다소 무분별하게, 혹은 언어학적 엄밀성을 결여한 채 사용되고 있던 영화-언어의 문제에 메스를 가하면서 이 문제를 새롭게 정식화한다.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라는 물음은 그러한 메츠의 문제의식을 집약해주는 물음이다.

문제는 불어에서의 '랑그'와 '언어(랑가주)'의 구별을 영어나 한국어는 안 갖고 있다는 것. 해서, 불어권에서 유의미하게 제기되고 정리된 문제가 영어나 한국어에서는 다소 현학적인 논쟁으로 비쳐질 수 있다. 불어의 '랑그'나 '랑가주'나 일반적으론 '언어'라고 통칭되기 때문이다(마치 '개'나 '소'나, 처럼). 둘 사이의 구별을 영어에서는 '언어체계(language system)'와 '언어(language)'라는 말로 표시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어 대응어가 다소 어색한 조합이지만 '랑그'와 '언어'이다.

그런 사전지식을 배경으로 다음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연구 방법의 출발점은 이런 명제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어법으로 가정되지만 곧 문법적으로는 언어로서 연구된다." 무슨 뜻인가? 문제는 제목에서 던진 '랑그'와 '언어'의 대립이 이 두 페이지에서는 실종되고 대신에 '언어'와 '어법'으로 대치된 데 있다(이건 좀 이상한 일인데, 214쪽부터는 '랑그'란 말이 다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이 두 페이지만 어떤 미숙한 조력자가 번역을 따로 했던 것일까?)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불어본과 별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영어본에서 이 대목을 옮겨오면 이렇다: "By contrast, the point of departure for Christian Metz's work is based on a very different assumption: the cinema is postulated as a language, yet it is immediately studied as a verbal language system."(142쪽) 우리말로 옮기면, "크리스티앙 메츠의 작업은 이와는 좀 다른 가정에서 출발한다. 영화가 언어(=랑가주)로 간주되면서도 실제로는 랑그로서 연구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언어학에 좀 '약한' 이들이 언어와 랑그의 차이를 무시한 채 '영화언어'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짐작에 국역본은 (랑그도 아닌) '랑가주'를 '어법'으로 옮기고, '랑그'를 '언어'로 옮겼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교통정리가 되는 건지?

이어지는 문장이 더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겠다: "메츠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언어와 말의 총체로서의 어법)에서 착상하여 영화 언어를 언어를 규정하는 특징들에 대립시키면서 영화언어의 규범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이 '언어의 총체로서의 어법'이라는 내용을 어떤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혹은 인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분법이니까 우선 세 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인바, 번역문에서 그 세 항은 '언어' '말' '어법'이다. 짐작에 그 세 항은 원문에서 '랑그'와 '파롤', 그리고 '랑가주'이며, 이것은 영어로는 'verbal language system'(=랑그), 'speech-act'(=파롤), 'language'(=언어)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법'이란 것이 그보다 더 큰 '언어'와 '말'의 합, 그러니까 <어법=언어+말>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문을 따져보는 건 한가한 시간에 하고, 일단 진도를 나가자면 소쉬르가 제시한 3분법이란 <언어=랑그+파롤>을 말한다(이건 나의 '잡학'과는 정말로 무관한 지극히 기본적인 내용이다. 모든 언어학 개론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서, 인용문장을 다시 옮기면, "언어를 랑그와 파롤의 총합으로 이해하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적인 3분법에 의거하여, 메츠는 영화언어를 랑그의 특징들과 대조시킴으로써 영화언어의 지위를 자세히 해명하고 있다."

언어체계로서의 랑그란 말이 생소한 분이 있다면, '이중분절체계로서의 언어'라는 걸 떠올리시면 된다. '이중분절'이란 건 우리가 쓰는 자연어(한국어, 불어, 영어 등)에서 각 단어가 형태소로 분절되고, 또 그 형태소는 더 작은 단위의 음운으로 분절되는 식의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절의 가능조건은 '형태소'나 '음운' 같은 단위들의 존재이다(기호학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은 그러한 단위들을 분리/추출하는 것이다). 영화의 쇼트나 프레임이 그러한 단위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영화언어'의 지위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메츠의 입장은 영화언어가 그런 이중분절체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 즉 랑그가 아니라는 것이다(에코는 보다 강경하게 랑그로서의 영화언어를 주장한다).

뒤따르는 부연설명: "이런 대조적인 측면은 본질적으로 1964년 <코뮈니카시옹> 제4호에 처음으로 실렸고 <영화의미론> 제1권에 수록된 "영화, 언어인가 어법인가?"라는 논문에서 알 수 있다. 이 잡지에는 또한 그후 10년간 기호학 연구의 프로그램에 뛰어든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의 여러 가지 요소"라는 논문도 실려 있다." 즉, <코뮤니카시옹>이란 잡지의 제4호에 매우 중요한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 것. 메츠의 책 <영화의미론>의 원제는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시론> 정도가 되며, 두 권짜리이다. 그 중 1권이 <영화언어(Film Language)>로 영역돼 있다. 바르트의 책은 흔히 <기호학 요강>으로 알려진 책이고, <영도의 에크리뛰르/ 기호학의 원리>(동인, 1994)란 책에 포함돼 있다(역시나 번역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리고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에 뛰어든" 게 아니라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기호학이 본격화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기호학은 다른 어법들의 언어학적 착상의 분석방법의 일반화로 규정될 수 있다." 젠장, 오역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어가 왜 이 모양인가? 영어로는 "Semiology may be summarized as the application of the process of analysis originating in linguistics to other languages."이다. 이런 대목은 기호학의 기본 상식이기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기호학은 언어학의 분석절차를 다른 언어들에 적용하기로 정리될 수 있다." 이때 다른 '언어들'이란 '영화' '회화' '음악' '사진' 등등을 말한다. 그리고 물론 '언어학'은 우리가 쓰는 자연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지식을 뜻한다. 이게 모델이 되는 것이고, 그걸 다른 분야(언어)들에 적용해본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1964-1970) 연구의 주종은 내러티브 연구, 즉 서사학이었다. 브레몽, 주네트, 토도로프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브레몽의 단행본 저작은 번역된바 없으며, 토도로프의 경우엔 <구조시학>(문학과지성사, 1987)이나 <산문의 시학>(문예출판사, 1992; 예림기획, 2003) 이 대표적인 초기 연구서이다. 서사학 관련서들은 차고 넘치지만, 영화와 관련하여 네 권만 언급하자면, 앙드레 고드로 외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생각의나무, 2003), 그리고 채트먼의 책 두 권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처음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이 안전할 듯하며, 서사학 전반에 대한 개관으로는 박진의 <서사학과 텍스트이론>(중앙M&B)을 참조하는 게 간편하겠다(신간인 이 책은 나도 아직 실물을 구경하지 못했다). 사실 나로선 현단계 서사학에 별 흥미를 못 느끼지만, 유리 로트만의 플롯이론이나 폴 리쾨르의 철학이 접맥되고 정신분석적 서사론이 더 보강된다면(피터 브룩스가 대표적이다) 서사학도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은 있다.

 

 

 

 

하여간에 당시의 그런 분위기 때문에 메츠도 영화에서의 서술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렇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미론>은 우선 영화 서술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1971년에 출간된 <언어와 영화>에서는 루이 옐름슬레우의 <언어이론의 전제 원리>(1943)의 개념들을 직접 사용하여 언어학적 착상의 방법론적 급진화가 강조되고 있다." 거명된 옐름슬레우의 책은 <랑가쥬 이론 서설>(2000)이란 제목으로 다름아닌 동문선에서 출간된 책이다. <영화미학>의 역자는 들춰보지도 않았다는 얘기(물론 그 번역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지만). 옐름슬레우 계보의 적통을 잇고 있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는 쥘리앙 그레마스이다. 메츠의 <영화언어>가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못지 않게 기이한 것은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는 것. 말도 안되는 번역서가 나오는 것보다는 그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은 들지만 인문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좀 허전한 일이다(참고로, <구조의미론>의 러시아어본은 작년에 나왔으며, 메츠의 경우 논문들은 번역돼 있지만 단행본은 출간되지 않았다).  

어쨌든 <언어와 영화>에서 메츠의 영화기호학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은? "언어학적 유산이 <상상적 기호표기>(1977)에서 더욱더 결정적인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완성된 것은 속임수와 관객에 대한 연구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충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번역은 '속임수'이다. 영역은 "It was only by Metz's gradual progression from working on film devices to working on the spectator that linguistic heritage was further complemented by the psychoanalytic illumination that gained more and more acceptance after his Imaginary Signifier(1974)." 다시 옮기면, "언어학적 유산이 정신분석적 조명(통찰)에 의해 더욱 보완되는 것은 메츠의 관심이 영화적 장치들에서 관객으로 점차 옮겨감으로써이다. 그러한 (영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조명은 그의 <상상적 기표>(1974) 이후에 더욱 광범위하게 수용된다."

이제 마지막 문단이다: "사실 기호학은 연구 분야마다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된 도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학 분야에서는 어떤 동질성이 인정될 수 있지만 그 반면에 루이 마랭의 회화기호학과 장 자크 나티에즈의 음악기호학은 이후에 폭넓게 다시 연구된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기호학과 공통성이 있다." 뜻은 이렇다. 뒤에 '기호학'이란 이름만 갖다 붙이면, '회화기호학'이니 '음악기호학'이니 '영화기호학'이니 하는 게 되지만, 이들간의 공통성, 동질성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 그저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 즉 이러한 연구들이 처음 참조하는 문헌들(가령 소쉬르의 <일반기호학 강의>나 바르트의 <기호학 요강> 같은)이나 공통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기호학 패밀리'에는 속할 테지만, 얼굴이 제각각이고 성격도 제각각이며 하는 짓도 제각각이라는 얘기다. 

영화언어와 랑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어서 계속된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 존중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인터넷 클릭만 몇 번 해도 대략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비상식적인 번역문'들이 계속 양산된다는 건 미스테리한 일이다(이젠 입아픈 일이다). 얼마만큼의 계몽이 우리에겐 더 필요한 것일까?..

05. 07. 30.

P.S. 기호학 참고문헌들을 좀 나열하다가 지워버렸다. 사실 '너무 많은' 기호학 서적들을 나열하는 것 자체는 별의미가 없을 듯하다(그냥 '기호학'을 검색어로 집어넣으면 된다). 다만, 우리에게 좀 드물게 소개된 것이 음악기호학인데, 이에 대해서는 서우석 교수 등이 쓴 <음악의 연구>(문학과지성사, 2000)에 실린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또 건축기호학과 관련하여 <현대건축과 기호학의 대화>(시공문화사, 2000)란 책도 있는데, 기호학에 문외한인 건축학 교수들이 옮긴 관계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언어학/기호학에 대한 무지가 '부실한 번역'을 낳을지언정 '부실한 건축'을 낳는 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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