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관련 기사를 몇 개 옮겨온 김에 교수신문(06. 06. 21)에 게재된 김진석 교수의 문화비평도 옮겨온다. 타이틀이 '축구열풍이 그저 파시즘이라고?'이다. 내가 잘 쓰는 표현으로 그의 주장은 '상식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그 상식을 잊거나 헐거워한다. 필자의 시론집 제목을 반복하자면, 우리는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그런 상식이 좀더 강화되었으면 싶다.  

-다시 뜨거운 월드컵바람. 2002년과 달리 거리응원이 광장을 독점 계약한 기업과 미디어의 주도와 후원 아래 놓이고, 방송들은 과잉편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열풍만이 아니다. 4년 전에도 그랬지만 벌써 그 열풍을 다시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냉풍들도 윙윙거린다. 이 냉풍은 저 열풍과 맞물리면서, 이것이 뜨거워지면 더 차가워진다. 뜨거운 축구상업주의 바람이 드는 것도 짜증스럽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축구에 들뜨고 환호하는 풍경 자체를 파시즘의 광기로 낙인찍어야 하는가. 열풍의 지나침을 경계하면서도, 그것을 금방 파시즘의 광기라고 말하지 않는 태도도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뜨거운 바람 속에 서있으며 그 바람을 맞을 각오만 있다면.

 

 

 


-뜨거운 바람들이 폭력적 경향을 띠기 쉬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경향성 때문에 축구에 달아오르는 몸과 마음들에 파시즘의 낙인을 찍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예민하게 태도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알게 모르게 다수의 폭력적인 바람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며, 금방 거기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무망하기 때문이다. 월드컵열풍처럼 다소 폭력적인 현상들이 일어나더라도 그것들이 일어나는 구조적 정황을 고려하거나 인정한다면, 그것을 금방 파시즘적 광풍으로 몰고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월드컵 혹은 축구 바람이 민족주의나 상업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이 아니라 자본이 응원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국가적으로 환호하고 열광하는 모습에 병리학적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극단적인 행위들을 빌미로, 그것들과 닿아있는 모든 적극성과 능동성에 파시즘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 이 경우 ‘파시즘’이란 표현이야말로 과도하게 남용되는 것이며, 심지어 그 말의 그런 과도한 사용행태도 자칫하면 ‘거꾸로 파시즘적’일 수 있다(*이 파시즘 남용/남발에 나도 불편하다).

-‘파시즘’이란 말은 오늘날 수사학적 표현으로 널리 쓰인다. 이 경우 그 말은 사회와 정치의 폭력적 불모성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표현하는 역할을 널리 수행한다. 반면 그 말은 과도하게 사용되고 남용될 때도 있다. 우선, 어떤 집단적 행위들이 폭력적으로 보이더라도, 다만 그 이유로 그것들을 모조리 파시즘의 광기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정치적 차원에서 폭력의 원인과 결과, 배경과 맥락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폭력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먼저 유발한 더 폭력적인 원인이나 주체가 있다면, 우선 그것에 비판의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모든 폭력적 현상을 똑같이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일은 공허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주변의 강한 권력과 폭력의 자장 때문에 시달려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내부의 폭력적인 증상들을 다룰 때도 세심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파시즘 개념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은 전혀 폭력에 손을 담그지 않고 있고 우매한 사람들만 스포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상정하는데, 이런 지적 계몽성은 편협하거나 공허하다.

-월드컵이 괴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대학도 지식폭력을 생산·소비하는 괴물 아닌가. 월드컵이 상업주의에 물들어있는 것을 마치 시민들이 모르는 것처럼 훈계하는 비평들도 많다. 환호하거나 감동하는 민중이 그저 바보일까. 함정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몸을 싣는 복잡한 행위가 존재한다. 그들은 칸막이된 지적 비평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폭력적 사회구조 안에 빡빡하게 끼인 채 그것을 살짝 타고 넘어야 하는 실존들이다.

-물론 국가와 자본의 이름으로 경기에 열광하는 집단행위에 광적인 도취가 불안하게 어른거리곤 한다. 그러나 거기서 꼭 국가와 자본의 큰바위얼굴만을 보아야 하나. 그것이야말로 그 얼굴들을 근엄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오늘 이 불안한 시대에도, 아니 어쩌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감동하고 몰입하고 때로는 싸우는 경기장을 원하는 듯하다. 국가와 자본, 특히 큰 것이 너무 불안하다고? 그럴수록 그것들의 이름을 빌려 그것들 사이에서 기쁘게 싸우고 대적하는 살풀이 마당이 있을 법하지 않은가.

06. 06. 22.

P.S. 참고로, 이 칼럼에 붙은 댓글 하나는 이렇다: "수십만명이 밤에 잠도 안자고 거리에 나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제스처를 하고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 이는 병적인 애국주의이다. 이 정도로 광분하는 나라는 없었고 없고 없을 것이다. 한국인임이 수치스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댓글의 제목은 '파시즘이 아니라 미친 또라이들'이다. 문제는 파시즘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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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 2006-06-23 03:58   좋아요 0 | URL
-_-;;; 댓글에 공감.. 읽기 꽤 불편하네요..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의 광기로 몰아세우는 것도 볼쌍사납지만 월드컵을 불쾌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높은 테라스에 앉아 혀를 끌끌차는 지식인들의 잘난척으로 획일화시켜서 보는 진석이님의 시선도 거북하네요. 진석이아저씨 또한 자신을 얍쌉하게 괄호치는건(난 엘리트의식에 빠지지 않은, 하지만 상업주의에 대책없이 빨려들어가는 대중도 아닌 양식있는 지식인이다.) 마찬가지인듯.

로쟈 2006-06-23 07:52   좋아요 0 | URL
축구 열광을 불쾌해/불편해하는 것과 그것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건 다른 문제라고 봅니다. '폭력과도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라는 포지션 자체가 '얍쌉한' 건 아니고 그걸 유지하기가 힘든 게 아닐까요? 어부님도 광화문에 나간 이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보십니까?..

어부 2006-06-24 00:36   좋아요 0 | URL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 라는 어조거든요.

어부 2006-06-24 00:40   좋아요 0 | URL
자신이 하는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근본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의식. 하지만 다른 비판적 발언들에 대해선 근본주의 어쩌구 판결 내릴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한는 것. 훨씬 근본주의적으로 보입니다.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이들과 그들을 또 근본주의로 몰아붙이는 진석이님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겠다는 거죠.(근본주의는 남발해도 되는 말이지만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이고이 아껴서 순도측정 한 다음에 사용해야 되는 말이라고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_-)
비판적 입장에 대해.. 자신도 결국 똑같은 애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떼쓰고 있는듯이 보이거든요.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에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괜한 심통..^^

2006-06-24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4 12:18   좋아요 0 | URL
어부님/ "댓글에 공감한다는건 저역시 그들을 미친 또라이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진단과는 무관할 뿐이다. 그저 난 그들이 불쾌한 것이다."라고 하신 건 '댓글'에 대한 취사선택 아닐까요? 월드컵 열광에 불편/불쾌해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축구 열광을 파시즘으로 지목하거나 열광적인 응원자들을 '미친 또라이들'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저는 두 가지가 차이가 있다고 보며, 김진석 교수의 견해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꼴보기 싫은 것은 자신의 시선만이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수아저씨의 태도"라고 하셨는데, 월드컵 열광을 파시즘으로 규정짓는 태도를 그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인가요(그렇다면, 꼴보기 싫은 대상에는 '근본주의자들'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괜한 심통'이라고 하시면 할말은 없지만...

어부 2006-06-25 01:38   좋아요 0 | URL
전 댓글에 '동의'가 아닌 '공감'한다고 했는데요..-_-;;;

진석아저씨가 그들에게 근본주의자라는 모자를 씌우는 순간 그의 비난이 스스로를 향하게 된다는 것. 비난하려는 대상의 면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월드컵 열풍에 대해 불평하는 발언들과 그들을 몰아세우는 진석아저씨의 발언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닌데요..
진석아저씨의 시각과는 다르게 월드컵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소수의 발언일 뿐이며 여간 귀를 귀울이지 않고는 잘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라고 보여지는데.. 로쟈님 말씀대로 그들을 파시즘으로 보는 이들도 또 다르게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 다른 목소리들이고 귀 귀울여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열광을 파시즘적으로 보려는 이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라고 보구요. 그렇게 주장하게 된 맥락을 따져보고 비판하려면 월드컵 열풍을 파시즘으로 보는것이 어떤 부분에서 부적절한지를 지적하면 그만입니다. 근본주의 어쩌구 하는 틀을 함부로 씌울만큼 진석아저씨가 그들의 주장을 빠짐없이 들어보았는지 의문이구요.
파시즘이란 고전적 모델에 대한 어떤 원형이 존재하는지 지식과 생각이 짧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오리지날리티를 가려내는 일이 과연 생산적 사유인지 모르겠군요. 지금의 우리들은 특정 체제를 파시즘으로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파시즘적 경향성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질문해 보는 것이 훨씬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이전에 잠깐 훓어보았던 권명아 선생의 '역사적 파시즘'에 이끌렸던것 같습니다.) 월드컵 현상에서 파시즘적 경향을 읽어내려는 시도들을 무작정 근본주의로 깎아내리는 것은 문제있어 보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을 진석이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없는 의심만 생기네요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단일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는 경향들에 세포를 열어두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논점이 좀 멀리 간듯..-_-;;;;
마지막 사족은 제게 괜한 심통이라 하신다면 제쪽에서 할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엽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또한 제 서툰 발언을 가다듬게 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어서 감사하지만 거칠게나마 제가 말하고자 한 전체논점에 대한 생각도 말씀해주시면 더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로쟈 2006-06-26 13:12   좋아요 0 | URL
너무 덩치가 큰 문제들이 걸려 있는 듯한데, 간단하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부님은 파시즘에 대한 낡은 시각틀에 대해서 의문시하며, "파시즘이란 용어는 고유하고 엄밀한 틀이 있어야 한다고 보진 않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어떤 용어 사용이 취미나 취향의 문제와 연관될 경우에 의미의 전용은 문제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공론장 같은) 대화적 소통 상황에서라면 가급적 정확하고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야겠죠.

'파시즘'이란 말이 사용된 고유한 역사적 문맥이 있고, 일차적인 의미는 거기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그런데, 파시즘이란 말이 포괄하는 여러 의미역 가운데, 한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춰서 '파시즘'이라고 '일반화'할 수도 있겠구요. 그러는 가운데, 의미의 전이, 수축/확장이 발생하는 것일 텐데, 제가 보기에 몇 년전부터 '남용'되는 듯한 '파시즘'은 본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이/전용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인바 거기서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 반복'을 지적해내는 게 아니라면 과잉일반화(오버)라고 생각합니다(대개 그러한 일반화는 대에충 게으름의 산물입니다. 당대적 현실에 대한 '적확한' 분석/설명에의 요구로부터 빠져나가는).

시각에 따라 "역사적으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정도의 문제까지 집어넣으면 '50% 파시즘' '70% 파시즘' 등의 다양한 유형학까지 세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 생산적일지는 의문입니다.

수잔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미의 전이 혹은 어떤 단어의 은유적 사용은 시적인 특권일 수도 있지만 때론 위험한 만용이거나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축구에 대한 열광을 '파시즘적'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에이즈를 '현대판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태도만큼이나 부정확하다고 봅니다. "나는 에이즈를 혐오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이즈는 우리 시대의 흑사병이야!"라고 말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지적조차도 어떤 우월적인 포지션을 전제로 한 오만한 태도이며 똑같이 '파시즘적'이라고 한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말씀대로 '다양한 파시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막을 도리는 없어 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