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공식적으론' 방학에 들어간지라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게 됐다(강의 없는 강사는 대략 백수이다. 즉, '니그로'이다. 아무리 할일이 많다고 저 혼자 우길지라도 말이다). 당장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피아노학원에 보내고 데려오고 하는 일이 '아빠의 일'로 다 떨어진다. 그나마 유치원으로 데리러 가는 일도 딸아이와 사이가 좀 좋아졌기에 '허락'받은 일이다.

학원에서 데려와 이것저것 챙겨주고 잠시 놀아주고 저녁 먹이고 양치질 하게 하고 공부하자고 꾜셔서 한글 두어 쪽과 수학 두어 쪽 문제풀게 하고(이런 공부도 딸아이는 '연극놀이'로 하는 걸 좋아해서 내가 친구나 동생 역을 맡아서 문제를 풀어달라고 졸라야 한다) 자리 펴주고 재우고 나니 9시 반이다.

아이는 자기 전에 꼭지점 댄스를 두번 연습했고(아이는 모레 상암경기장에 견학을 간다), 박지성이 골 넣는 장면에서 프랑스 선수가 뒤늦게 볼을 잡으려고 애쓰던 장면이 너무 웃겼다고 어제 새벽의 경기를 한번 더 되새기고는 잠이 들었다(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좀 늦게 퇴근한 엄마에게 꼭지점 댄스를 한번 더 보여주고 잤다). 아이는 어제 경기 후반전의 후반에 잠이 깨어 극적인 무승부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유시간'이 됐길래 학회 발표문을 정리한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를 굴리면서 이곳저곳의 뉴스들을 훔쳐보는데 딸아이의 블로그에도 한번 들어가보라는 핀잔이 들려온다. '무관심한 아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이미 듣고 있지만) '쑥쑥 자라는 종팔이!'(박찬욱 감독이 써먹은 거지만, 나도 그냥 '종팔이'라고 해둔다)에 들어가 새로 올려진 사진들을 훑어본다. 그리고는 그 중 한 장을 옮겨놓는다(두 손가락 포즈가 아이의 '공식' 포즈이다). '자상한 아빠'의 가장 확실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기 위해서.  

아빠, 엄마의 '결점'들을 모두 타고난 탓에 (한)약을 달고 사는 편이지만, 아이는 잘 먹고 잘 자라주었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달력에다 스케줄을 잔뜩 적어놓으면서도 문득 딸아이를 위한 스케줄은 전혀 없다는 걸 얼마전 발견하고 반성한 적이 있는데, 이번 방학때는 얼마나 교정될 수 있을지(사실, 나는 내 스케줄도 다 소화를 못하고 있다. 무슨 '업적'을 남기는 이들은 대체 어떤 묘수를 갖고 있는 것인지?).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나인 '우리 동네'이다. 말은 '동네'이지만, 아이의 '우주'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동산과 교회와 가게와 만화가게는 피아노 학원이 있는 건물 하나에 다 들어 있지만, 아이는 모두 독립시켜서 따로 그려놓았다. '우리동네'인 아파트는 15층 건물이지만, 아마도 정서적인 축약을 거쳐서 2층짜리가 된 듯하다.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건 그런 정도이다. 아이의 마음을 읽기 위한 투자를 좀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 어떤 아빠로 기억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 스무 살 남짓 되던 나이에 나는 인생의 목표가 한 여자에게 존경받는 거라고 친구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염두해둔 '한 여자'는 '딸아이'였다. 적어도 딸아이에게만은 존경받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게 나의 심사였고 그럴 경우 구제받을 만한 인생이 아닐까라는 게 계산이었다. 한데, 이후에 여러 '딸들'에게서 확인한 바이지만, 그 '존경'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노력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반복적인 일상이다. 그리고 물론 가끔씩의 이벤트이다!

 

다 뒤져보니 지난 겨울에 롯데월드에 데리고 갔던 게 마지막 '이벤트'였다(장시간 걷고 기다리고 하느라고 아이는 녹초가 됐고 결국 저녁을 먹으러 들른 분식집에서 오후에 먹은 걸 다 토해냈다. 덕분에 나는 롯데월드에 다시는 안 가도 될 '명분'을 쌓았다!). 아이의 생일이 여름방학때인지라 이번엔 뭔가 또 '계획'을 세워야 한다(작년 여름을 조용히 보낸 탓에 더더욱). 이 또한 한참 머리를 굴릴 일이다.

흔히, 학문은 이루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생각해 보면, 아빠의 일, 곧 부업(父業)도 마찬가지이다. 그걸 '아르바이트'로 대충 때우려고 하면 금방 들통난다. 대개 아이들은 아빠의 머리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들이 능숙하게 꼭지점 댄스를 추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지 않은가?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어떨 때는 이 아이가 혹 아빠의 인생이 구제할 만한 것인가를 탐색하러 온 '스파이'가 아닌가란 생각도 한다. 그 정도면 나는 이미 '세상의 음모'를 모두 간파한 수준이다. 그래서 오늘도 딸아이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몰래 이 페이퍼를 쓴다. 내일 아침에는 고구마 맛탕을 해줄 것이다(아빠식 맛탕이다). 이틀 정도는 아빠를 존경해주지 않을까? 아니면 반나절? 안되겠다, 좀더 연구해봐야겠다...

06.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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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6-2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재밌다가 끝났네요...;; 로쟈님 글을 이렇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니. ^^

Joule 2006-06-20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예뻐요. 지적인 미모네요. 아빠와 딸,이라고 해서 저는 마이클 두 독 드 빗 감독의 저 유명한 애니메이션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어 들어왔다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는군요.

twoshot 2006-06-20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뛰어난 미모+근사한 그림+꼭지점 댄스를 더해보면 '결점'만 닮은 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로쟈님의 독자에게는 '고구마 맛탕(?!)'같은 페이퍼였습니다.:)

LAYLA 2006-06-21 0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인 미모라는 쥴님의 표현에 왕동감입니다

로쟈 2006-06-21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도 물정을 다 알아서 귀엽다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칭찬해주신 분들께는 아이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아이는 자고 있어서). 참고로, 종팔이는 저를 별로 안 닮았고 저보다 그림을 잘 그리며, 저보다 춤도 잘 춥니다(이건 비교 자체가 안되지만). 대신에 아직 저만큼 책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조선인 2006-06-21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딸에게 존경받는 건 쉬워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거, 그건 정말 정말 어렵다는 거 강조해 드립니다. =3=3=3

로쟈 2006-06-2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제 목표는 '다 큰 딸'에게 존경받는 겁니다. 한데, '다 큰 딸'은 이해심이 많아지지 않나요? '어린 딸들'은 변덕이 심해서, '존경'을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릴케 현상 2006-06-2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을 듯 웃지 않는 아이의 표정이 아주 예술이군요^^=3=3=3

바벨의도서관 2006-06-2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이렇게나 이쁘다니요... 저도 그런 딸 있으면 좋겠습니다^^부럽습니다...

biosculp 2006-06-2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애들 환심(아부) 사기위해서 엄마들이 질색하는 일에 맞장구를 치는데요.
가끔 피시방 데리고가 메이플이나 스타시켜주기, 드래곤볼 만화 전질 사주기, 유희왕 카드 사주기. 길거리 음식(불량식품이라고 못먹게 하는것) 사주기 뭐 이정도랄까요.
저는 아들들인데 딸들보면 이쁜 수첩에 스티커 붙이기 이런거 좋아하더군요. 그리고 어린이 보기에 유치찬란한 색이들어있는 장식품등. 저녁에 시간나시면 앞 문방구에 가서 유치찬란한 스티커만 같이 보고 사주셔도 환심정도는 얻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애들 눈높이에서

nada 2006-06-21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인상적인 사건 한두 개라도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이해하는 거 같아요. 핏줄이란 징글징글하지만 그런 미덕이 있죠. 자잘한 건 좀 미흡해 보이십니다만 큰 거 한두 방으로 때우세요.ㅋ 그나저나 저 시도 때도 없는 V자는..ㅋㅋ 전형적인 성배형 V자가 아니어서 좀 다행이긴 합니다만.. 깜찍한 얼굴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포즈를 좀더 개발해 주시어요~~~

로쟈 2006-06-21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언들 감사합니다. 스티커북들은 저도 사줍니다(기본이죠!).^^ 큰 거 한두 방이 글쎄, '자기방'을 만들어주고, '피아노' 사주고 하는 것들이라(--;), V자형 포즈는 유전형인지 다른 포즈는 어색해하더군요.^^

로드무비 2006-06-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리바이라기보다는 자랑 페이퍼 같은데요.
딸에 대한 애정을 감출 수 없는.
너무 이쁩니다.^^

로쟈 2006-06-2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입니다. "어쩌자고 세상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라는 난감함...

Joule 2006-06-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의 그 싯귀가 있는 시집 제목이 뭔가요.

SMOKE 2006-06-21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쁘군요.

에바 2006-06-2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반갑습니다. 이 서재를 거의 매일 찾고 있는데 배울 게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니 너무 진부한 인사말입니다. 그리고 따님 사진을 자주 보다 보니 꼭 제 딸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로쟈 2006-06-2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입니다.
껄껄선생님, 에바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는 딸아이가 더 인기가 있는 듯하네요(^^;)...

기인 2006-06-26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로쟈님 이쁜 따님 처음 뵙겠습니다 :) 저는 또 오타 말씀드리고 갑니다. ^^;;;
따님 사진 바로 아래 아래 문단.
아이는 혼자서 그림 그리고, 무얼 만들거나 오려붙이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데, 엄마가 올려놓은 건 그 중 '하니인'
요즘 친구들도 '달려라 하니'를 알까요. 생각해보니, 로쟈님도 모를수도;;;
(달려라) 하니가 아닌 '하나'로 추측됩니다. 저도 이쁜 딸-스파이 ^^ 한 분과 함께 할 날이 오기를... :)

로쟈 2006-06-2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밝으시군요.^^ 스파이 한 분 모시고 사는 게 공부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참고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