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지젝의 <향락의 전이> 제4장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Courtly Love, or Woman as Thing)의 새 번역이다. 제목 자체를 '고상한 사랑, 또는 물로서의 여성'이라고 옮겨놓고 있는 '고상한' 국역본의 오류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지젝이 재미있는 통찰들이 사장되는 게 유감스러웠던 차에 또다른 번역문을 인터넷상에 발견하고 반가웠다.  

 

 

  

 

해서 몇달전에 스크랩해놓았었는데, 내용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이미지 버전을 만들어 올려놓도록 한다. 역자들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분량상 일단은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이란 절만을 옮겨놓는다. 다른 대목들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옮겨놓을 예정이다(본문중의 이미지와 강조, 군말은 모두 나의 것이다).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

궁정식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가 피해야 할 첫 번째 함정은 귀부인(the Lady)을 숭고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관념이다. 대체로 우리는 여기서 영성화(spiritualization)의 과정, 즉 미숙하고 감각적인 갈망에서 고양된 영성적인 소망으로의 이행을 환기한다. 그리하여 귀부인은 우리를 더 높은 종교적 엑스터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영적인 가이드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라캉은 그러한 영성화와는 상반되는 일련의 특징들을 강조한다. 사실상, 궁정식 사랑에서의 귀부인은 구체적인 특성을 잃고 있으며 추상적인 이상으로서 언급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모든 시인들이 마치 같은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고 기록했다. 이런 시적 장(poetic field)에서 여성적 대상은 모든 실제적인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49) 그러나 귀부인의 이러한 추상적 성격은 영혼의 정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차갑고 거리가 있는 비인간적인 파트너에 어울리는 추상작용을 지시한다. 즉 귀부인은 결코 따뜻하고 동정심 많으며 이해심 있는 동료가 아니다.

"예술에 고유한 승화의 형식을 수단으로 하여, 시적 창작은 내가 오직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파트너로서 기술할 수 있을 뿐인 대상을 정립하는 것에 있습니다. 귀부인은 그녀의 어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미덕, 즉 지혜, 신중함, 혹은 심지어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현명하다고 기술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녀가 비물질적인 지혜를 구현하고 있거나 그것들을 실행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의 기능들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반대로, 자신의 하인에게 할 수 있는 한 제멋대로 시험을 부과합니다."(라캉, <정신분석의 윤리>, p.150) 

그러므로 귀부인에 대한 기사의 관계는, 무의미하고 흉폭하며 불가능하고 자의적이며 변덕스러운 시련을 강요하는 봉건영주의 주권에 대한 농노와 가신의 관계다. 이러한 시련의 비영성적 본질을 정확히 강조하기 위해 라캉은 하인에게 자기 엉덩이를 문자 그대로 핥으라고 요구하는 귀부인에 관한 시를 인용한다. 시는 하인을 그 아래에 대기하게 만든(우리는 중세에 개인위생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알고 있다) 악취에 대한, 그가 그의 임무를 완수할 때 귀부인이 그의 머리에 오줌을 싸리라는 절박한 위협에 관한 시인의 불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귀부인은 어떠한 종류의 정화된 영성(靈性)으로부터도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녀는 우리의 욕구와 욕망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다른 근본적인 타자성이라는 의미에서, 비인간적인 파트너로 기능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또한 일종의 자동기계, 즉 의미 없는 요구 사항들을 마구잡이로 말해오는 하나의 기계이다.

귀부인에게 섬뜩하고 괴물스러운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불가해한 타자성과 순수한 기계의 이러한 일치다. 귀부인은 우리의 ‘동료’가 아닌 큰 타자다. 다시 말해, 그녀는 어떠한 공감의 관계도 나누는 가능하지 않은 그 누구(someone)이다. 이러한 외상적인 타자성은 라캉이 프로이트의 용어 ‘das Ding’을 빌려 물(物; the Thing)이라고 지칭한 바 있는 바로 그것, 즉, ‘항상 그 자리로 돌아오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견고한 중핵인, 실재(the Real)이다. 귀부인의 이상화, 즉 그녀를 영적인 천상적 이상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따라서 엄격히 이차적인 현상으로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녀의 외상적 차원이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projection)이다.

이러한 정확하고 한정된 의미에서, 라캉은 “궁정식 사랑의 이데올로기에서 명확히 찾아낼 수 있는 이상화하는 찬미의 요소는 확실히 논증되었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특성상 나르시시즘적인 것입니다”라고 인정한다. 모든 실제적 실체성을 박탈당한 채로, 귀부인은 주체가 그의 나르시스적 이상을 투사하는 하나의 거울로서 기능한다. 달리 말해 - <예술가의 스튜디오에서>라는 소네트에서 가브리엘 로제티와 그의 귀부인 엘리자베스 시달의 관계를 말하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말로 하자면 - ‘귀부인은 그녀 자신으로서[그녀가 그녀 자신일 때]가 아니라, 그의 꿈을 채움으로써[채울 때] 나타난다.’

그러나 라캉에게 있어 중요한 강조점은 다른 곳에 있다. “거울은 때때로 나르시즘의 기제를 함축하며, 특별히는 우리가 후에 조우하게 될 파괴 혹은 공격성의 차원을 함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계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그것은 넘어서지지 않는 한계입니다. 그것이 참여하는 유일한 체제는 대상에 대한 접근 불가능성이라는 체제일 뿐입니다.[그것은 오로지 대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써 어떤 한계로서의 자기 역할을 수행합니다]”(라캉, 앞의 책, 151쪽)

따라서 궁정식 사랑에서 어떻게 귀부인이 실제의 여성들과 관계되는가에 대한,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살과 피를 가진 여성에 대한 굴욕을 포함하는 남성의 나르시시즘적 투사를 대표하게 되는가에 대한 진부한 문구를 포괄하기 이전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그러한 텅빈 표면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투사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열어젖히는 그 차갑고 중립적인 스크린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즉 만약에 남성들이 그들의 나르시시즘적 이상을 거울에 투사하려고 한다면, 침묵하는 거울 표면은 이미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표면은 일종의 현실의 블랙홀로서, 그것의 너머(Beyond)에 접근할 수 없는 하나의 한계로서 기능한다.

 

궁정식 사랑의 또 다른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철저하게 예절과 에티켓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장벽들을 뛰어넘으며 사회적 규칙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그런 기본적 열정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우리는 엄밀한 허구적 공식을, 즉 한 남성이 그의 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귀부인임을 가장하는 ‘마치~처럼(as~if)'의 사회적 게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궁정식 사랑과, 그 사랑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은 듯이 보이는 하나의 현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정확히 이러한 특징이다.

 

 

 

 

즉 지난 세기 중반에 자허 마조흐(Sacher-Masoch)의 문학작품과 삶의 실천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된 성도착의 특수한 형태로서 마조히즘이 바로 그것이다. 질 들뢰즈는 마조히즘에 대한 유명한 연구에서, 마조히즘이 사디즘의 단순한 대칭적 역전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사디즘과 그의 희생자는 결코 상보적인 ’사도-마조히스트‘ 커플을 형성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비대칭성을 증명하기 위해 환기하는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부정(negation)의 양태의 대립이다. 사디즘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부정, 폭력적 파괴 및 고문과 조우하는 반면, 마조히즘에서의 부정은 부인의 형태, 즉, 가장의 형태, 현실을 중단시키는 ‘마치 ~처럼’의 형태를 취한다(*마조흐의 주저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 들뢰즈의 <매저키즘(인간사랑, 1996) 외에도 <모피를 입은 비너스>(과학과사상, 1996)로 번역돼 있다).

이러한 첫 번째 대립에 밀접하게 의존하는 대립은 제도와 계약의 대립이다. 사디즘은 제도의 논리, 즉 희생자를 고문하고 희생자의 무기력한 저항 속에서 쾌락을 얻는 제도적 폭력의 논리를 따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디즘은 그 그림자로서 필연적으로 ‘공적인’ 법을 배가시키고 동반하는 외설적인 초자아 이면 속에서 작동한다. 반대로 마조히즘은 희생자의 조처(measure)로 이루어진다. 주인과의 계약을 개시하고, 그녀[주인]에게 그녀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를 능멸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주권자인 귀부인의 변덕에 따라 행위할 수밖에 없도록 그 자신을 속박하는 것은 희생자(마조히즘적 관계에서는 하인)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예속을 상연한다.

사디즘과 반대되는 마조히즘의 더 차별적인 특징은 그것이 내재적으로 연극적이라는 점이다. 폭력은 대부분 가장되고, 그것이 ‘실제적’일 때조차도 폭력은 장면의 구성요소로서, 연극적 상연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 게다가 폭력은 결코 실행되지도 않고 결론을 맺지도 않는다. 그것은 항상 중단된 제스처의 끝없는 반복으로서 중지된 채로 남겨진다.

우리로 하여금 마조히즘적 태도의 근본적인 역설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확히 이러한 부인(disavowal)의 논리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마조히즘적 장면은 어떻게 보이는가? 남성-하인은 냉정하고 사무적인 방식으로 여성-주인과 계약 사항들을 설정한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다. 그녀가 그에게 무엇을 하는가, 어떤 장면이 끊임없이 시연(試演)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무슨 옷을 입는가, 그녀는 실제적이고 육체적인 고문의 명령에서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하는가(그녀는 그를 어떻게 모질게 채찍질하고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를 사슬에 묶으며 어디에서 하이힐의 끝으로 그를 찍어 누르는가 등).

그들이 결국 고유한 마조히즘적 게임으로 넘어갈 때, 마조히스트는 끊임없이 일종의 반성적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결코 실제로 그의 감정에 굴복하거나 그 자신을 게임에 완전히 내어주지 않는다. 게임의 중간에 그는 갑자기 적어도 ‘환영을 파괴함’이 없이 정확한 지시(그 지점을 더 세게 누르시오, 그 운동을 반복하시오...)를 내리는 무대 연출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일단 게임이 끝나면, 마조히스트는 다시 존경스러운 부르주아의 태도를 채택하고 평범하고 사무적으로 주권자 귀부인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같은 시간에 볼 수 있습니까?” 등등.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조히스트의 가장 내밀한 열정의 완전한 자기-외부화(self-externalization)이다. 가장 내면적인 욕망이 계약의 대상이 되고 협상을 구성한다. 마조히즘적인 연극의 본성은 따라서 완전히 ‘비(非)심리학적’이다. 사회적 현실을 중단시키는 초현실적이고 열정적인 마조히즘적인 게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일상적 현실과 조화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마조히즘이라는 현상은 라캉이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니라고 여러 번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예증한다. 마조히즘은 우리로 하여금 ‘허구’의 질서로서의 상징적 질서라는 역설에 직면하게 한다. 마스크 밑에 감추어져 있는 것에서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마스크에,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게임에, 우리가 복종하고 따르는 ‘허구’ 속에 더 많은 진리가 있다는 역설 말이다. 그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상연중인 게임 속에서, 마조히스트의 존재의 중핵은 외부화된다.

그리고 폭력의 실재(the Real)는 정확히 마조히스트가 히스테리화될 때 분출한다. 주체가 그 자신의 타자의 향락의 대상-도구의 역할을 거부할 때, 그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대상 a로 환원될 것이라는 예감으로 인해 공포에 떨 때 말이다. 이런 교착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그는 '행위로의 이동'에, 즉 타인을 겨냥한 부조리한 폭력에 호소한다. 제임스의 <죽음의 취향(Taste for Death)>의 말미쯤에 살인자는 범죄의 환경을 기술하는데, 그의 망설임을 해결하고 그를 행위(살인)로 이끄는 요소가 희생자(폴 베론 경)의 태도임을 보여준다.

 

 

 

 

-그는 죽기를 원했어. 신은 그를 부패시켰고, 그는 그것을 원했어! 그는 실제로 그것을 요구했지. 그는 날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탄원하며 논쟁하고 싸움을 할 수도 있었어. 자비를 구걸할 수 있었지.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내가 그에게 원했던 것은 그것이 다였어. 오직 그 말 한 마디…… 그는 경멸감으로 날 쳐다보았지. 그때 그는 알았어. 물론 그는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내가 심지어 반쪽짜리 인간인 양 그가 내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난 그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는 심지어 놀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지. 그가 공포에 질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었어…… 그는 마치 “당신이로군. 당신이어야 한다는 건 참 이상하군.”이라고 말하듯이 날 쳐다볼 뿐이었지. 마치 이런 것처럼, 난 선택권이 없어. 도구일 뿐이야. 어리석은. 그러나 난 선택했어. 그리고 그 역시 그랬지. 제길, 그는 날 멈출 수도 있었어. 그는 왜 날 멈추지 않았지?

 

 

 

 

죽기 며칠 전, 폴 베론 경은 상징적 죽음과 유사한 ‘내적인 몰락’을 경험하였다. 그는 장관직을 사퇴하고 모든 ‘인간적 유대’를 절단함으로써, 어떤 상호주체적인 공감의 관계를 배제하는 성인이라는 ‘배설물적’ 위치, 즉 대상 a의 위치를 취하였다. 이런 위치는 살인자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살인자는 $, 즉 분열된 주체로서의 그의 희생자에게 접근했다. 다시 말해 그는 희생자를 죽이기를 원했으나 동시에 희생자로부터 두려움과 저항의 기호를, 살인자가 행위를 완수하지 못하게 막는 기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는 살인자를 (분열된)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살인자를 주체화시키게 될 어떠한 기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폴 경의 비저항과 무관심한 분노의 태도는 살인자를 큰 타자의 의지의 도구로 환원함으로써 그를 객체화하고,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남기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살인자가 행위하도록 강제한 것은 희생자를 죽이려고 하는 그의 욕망과 희생자의 죽음충동을 일치시키는 경험이었다.

 

이러한 일치는 히스테리컬한 남성 ‘사디스트’가 여성에 대한 자신의 구타를 정당화하는 방식을 환기시킨다. “그녀는 왜 내가 그 짓을 하게 만드는가? 그녀는 실제로 내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기를 원하고, 내가 그녀를 때려 그녀가 그것을 즐기게끔 나를 몰아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릴 것이며,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실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녀에게 가르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조우하는 것은 희생자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의 오(지각)된 효과가 사후적으로 그 행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리(loop)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녀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 나는 실제로는 그녀의 노예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구타를 원하고 내가 그렇게 하기를 자극했기 때문에 - 나는 실제로 미쳐서 그녀를 때렸다...(*'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로 이어질 것이다.)

06.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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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0-22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면서 사드 후작의 작품 <소돔 120일>이 떠오릅니다.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로쟈 2006-10-2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미덕의 불운>이나 <규방철학>이 재미는 더 있을 거 같네요...

마태우스 2006-10-23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가 무릎꿇은 그림은 워터하우스 거 아닌가요??

로쟈 2006-10-2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정식 사랑의 '이미지'만 보여주려고 했지 출처는 상관이 없었는데요, 찾아보니까 Edmund Blair Leighton란 화가의 'The Accolade'(작위수여식)이란 그림이네요...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제2장 '유물론 다시 보기'에는 레닌과 포퍼에 관한 간략한 언급이 포함돼 있다. 레닌의 <유물론론과 경험비판론>에는 정작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빠져 있으며, 이때의 레닌은 반헤겔주의자로서 칼 포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을 루치오 콜레티는 '레닌과 포퍼'에서 지적하고 있고, 콜레티가 인용하고 있는 포퍼의 사적인 편지를 지젝은 재인용하고 있는데, 1970년에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 포퍼가 격찬하고 있는 레닌? 이건 어찌된 일인가? 내용의 자초지종을 따라가본다(국역본과 영역본을 가급적 같이 인용한다. 독어본에 따르는 국역본보다 확장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영역본이 이해에 더 용이하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의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의 분위기에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 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주장하는 것은 매력적이다. 오늘날의 양자역학에 대한 대중적인 독해는 레닌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과학 자체가 마침내 유물론을 넘어섰다는 '통념'으로 이어져, 물질은 '사라진' 것처럼, 즉 에너지의 비물질적 파동에서 용해됐다는 것으로 여겨진다."(51쪽)

Lenin's truth is ultimately that of materialism, and in fact, in the present climate of the New Age obscurantism, it may appear attractive to reassert the lesson of Lenin's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in today's popular reading of quantum physics, as in Lenin's times, the doxa is that science itself finally overcame materialism - matter is supposed to "disappear," to dissolve in the immaterial waves of energy fields.(178쪽)

먼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아침(1989)과 돌베개(1992)에서 두 종의 국역본이 출간된 바 있다. 물론 모두가 품절된 책들이다(러시아에서조차 레닌의 책들을 구하는 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지젝은 그 '레닌'을 우선을 다시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레닌의 진실이란 궁극적으로 유물론의 진실이다."라는 단언에서 '진실'은 '진리'의 뜻으로 새기는 게 낫겠다. 지젝에게서 truth'는 대부분의 경우 '진실'보다는 '진리'의 뜻을 더 강하게 갖는다(국역본 1장의 제목이 '진실을 위한 권리'로 옮겨진 것은 그래서 유감스럽다).  

"(루치오 콜레티가 장조했듯이) 레닌은 물질을 철학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으로 구분함으로써 '자연(에서)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정신에 독립해 존재하는 실체로서 물질의 이 철학적 개념은 과학에 대한 철학의 개입을 배제한다. 그러나... 이 '그러나'는 <유몰론과 경험비판론>에 변증법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It is also true (as Lucio Colletti emphasized), that Lenin's distinction between the philosophical and the scientific notion of matter, according to which, since the philosophical notion of matter as reality existing independently of mind precludes any intervention of philosophy into sciences, the very notion of "dialectics in/of nature" is thoroughly undermined. However... the "however" concerns the fact that, in 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there is NO PLACE FOR DIALECTICS, FOR HEGEL."

같은 버전인 독어본/국역본과 러시아어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역본에는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 'FOR HEGEL'이 들어가 있다. 즉, 여기서의 변증법은 '헤겔' 혹은 '헤겔의 변증법'을 가리키며, 레닌의 물질 개념에는 그 변증법/헤겔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는 것. 왜? 그는 물질을 규정함에 있어서 철학과 과학을 구분했고, 이 경우 '자연변증법' 같은 철학적 개념이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물질'에는 대입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레닌의 기본테제인가?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즉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사물이 우리의 정신과 독립적을 존재하는 방식을 알게 된다는 주장 - 악명 높은 반영이론)는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지식은 항상 제한적이고 상대적이며, 오직 무한한 근사의 과정에서 외부의 실체를 '반영'한다)와 짝을 이룬다."(52쪽)

" What are Lenin's basic theses? The rejection to reduce knowledge to phenomenalist or pragmatic instrumentalism (i.e., the assertion that, in scientific knowledge, we get to know the way things exist independently of our minds - the infamous "theory of reflection"), coupled with the insistence of the precarious nature of our knowledge (which is always limited, relative, and "reflects" external reality only in the infinite process of approximation)."

소위 '악명 높은 반영이론'을 고집하는 한 레닌의 "지식을 현상적 혹은 실용적 도구주의로 환원해버리는 데 대한 거부"는 불가불 "우리가 가진 지식의 불확정적 성질에 대한 강조"와 궁합이 맞아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지젝의 발빠른 지적이 뒤따른다.

"그런데 이 말들을 뭔가 익숙한 말이 아닌가? 이는 바로 분석철학의 앵글로색슨적 전통에서 볼 때, 전형적인 반헤겔주의자인 카를 포퍼의 기본 입장이 아닌가. 콜레티는 짦은 글인 '레닌과 포퍼'에서, <디차이트>를 통해 최초로 공개되었던 1970년의 사적인 편지에서 포퍼가 실제로 다음과 같이 적었음을 상기시킨다. '레닌의 경험비판론에 대한 책은, 내 견해로는 진짜로 뛰어납니다.'"(강조는 나의 것)

"Does this not sound familiar? Is this, in the Anglo-Saxon tradition of analytical philosophy, not the basic position of Karl Popper, the archetypal anti-Hegelian? In his short article "Lenin and Popper," Colletti recalls how, in a private letter from 1970, first published in Die Zeit, Popper effectively wrote: "Lenin's book on empiriocriticism is, in my opinion, truly excellent.""

 

 

 

 

조지 소로스의 스승이기도 한 포퍼가 플라톤과 헤겔, 마르크스를 '열린사회의 적들'로 규정하고 공박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이 反헤겔주의자가 헤겔-마르크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레닌의 주장에 어떻게 감복할 수 있을까? 그건 포퍼의 변덕보다는 레닌의 오류에 기인한다. 그 오류에 대해서 짚어보기 이전에 최근에 출간된 포퍼의 글모음집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부글북스, 2006)에 대한 리뷰를 따라가면서 포퍼주의적 입장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정리해두도록 한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책은 포퍼 입문서로서 몇년전에 출간된 <우리는 20세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생각의나무, 2000)와 짝지어 읽어볼 만하겠다(포퍼에겐 모든 일이 배우는 것이며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그 이전까지 포퍼 입문서 역할을 했던 책은 브라이언 매기의 <칼 포퍼>(문학과지성사, 1982)였다.

 

 

 

 

동아일보(06. 10. 21) 진리는 열려 있다 -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이 책은 ‘열린사회를 꿈꾼 비판적 합리주의자’ 칼 포퍼(1902∼1994)가 1980년대 중반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썼던 수필과 강연 원고 모음집이다. 포퍼의 대표 저작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 ‘추측과 논박’을 이미 읽은 독자보다는 그의 저작을 접해본 적이 없는 독자에게 권한다. 일종의 ‘포퍼 입문서’로 제격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에 가장 맞춤한 독서법은 평생에 걸쳐 과학과 역사 이론을 검토하고 검증하며 진리에 다가가려 매진한 원로 철학자가 들려주는 삶의 태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글 모음집이라 다루는 폭이 넓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비판적 합리주의’와 ‘낙관주의’다. 포퍼가 말하는 합리주의자란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서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야기하는 내내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남의 마음을 사로잡기 바라는’ 지식인, ‘확실성 없이 살아갈 용기’가 없어 예언가를 기다리는 대중 모두 포퍼의 비판을 비켜가지 못한다. 시행착오와 오류의 수정은 생물의 진화에서도 거의 유일한 진보의 수단이었다.

포퍼는 “모든 생은 문제해결의 과정”이라고 단언한다. 동물의 생이 바로 그러하다(*그러니까 포퍼의 주장은 인간도 동물인 한에서 유효하다. 하지만, '병적인 동물'이라면 사정은 좀 달라지는 것 아닐까?) 동물의 눈이 물체와의 충돌을 피하도록 경고를 받기 위해 발달된 기관이듯, 우리의 감각기관은 특정한 생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형성된 도구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도 ‘문제’가 관찰이나 감각 인식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어떤 도그마도 인정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는 포퍼의 경고 대상에는 ‘무제한의 자유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인류가 ‘공존’한다는 것에는 당연히 ‘모든 개인의 무제한적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포퍼는 ‘자유시장을 절대적 가치로 추구하는 이념적 원리’를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자유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기오염 같은 문제는 특별법 제정을 필요로 하며, 빈곤 문제의 해결을 시류에서 벗어난 문제로 돌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낙관주의’다. 포퍼는 낙관론자를 자임하면서 자신의 낙관주의는 “미래가 아니라 오직 현재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구분 짓는다. 포퍼는 평생에 걸쳐 비판했던 마르크스와 자신의 차이를 낙관주의를 기준으로 설명한다(*'낙관주의와 그 적들'?).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좌우대립의 양극화 시대에 포퍼의 낙관론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많다. 그는 ‘낙관주의는 의무’라고까지 주장한다. 미래가 열려 있고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퍼는 ‘이데올로기라는 색안경을 버리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좌우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어느 한 정당이 나서서 이념 전쟁의 기계를 해체하고 공동의 인도주의적 노선을 채택하자고 제안하라’고도 조언한다.

포퍼가 ‘나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를 설명한 대목도 재미있다. ‘쓸모 있는 일’에 관심이 많아 가구제작자 자격증명서까지 획득한 그는 단 한 번도 철학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학교 교사에서 전문 철학가로 ‘진화’했다. 그 비결을 포퍼는 “나의 것으로 간주한 ‘문제들’이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아마도 포퍼에게 세상은 '호기심천국'이었음에 틀림없다).

진정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바칠 멋진 ‘문제’ 하나를 찾아보기, 해법을 열심히 찾되 우리가 생각해내는 해법은 전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늘 겸손해야 하며 모를 때는 모른다고 인정할 줄 알기. 포퍼가 권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아니, 어쩌면 인생 방법론이다. 원제 ‘All Life is Problem Solving’(1994년).(김희경 기자)

다시 반복하자면, "마르크시즘은 역사의 발전을 믿는 반면 ‘탐욕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바라보는 냉소주의적 역사관’이다. 반면 포퍼는 진보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역사적으로 체험한 정치적 세계 중에서는 최고라고 믿는 낙관주의자다." 그러한 낙관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과학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현실정치 또한 끝임없는 문제해결의 과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이 과정은 무한한 근사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답이 정답은 아니더라도 과거에 제시된 답들보다는 언제나 근사치에 가깝다. 이 어찌 만족하지 않을쏘냐? 그런데, 문제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레닌의 입장이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

"이 <경험비판론>의 중요한 유물론적 핵심은 레닌이 헤겔을 재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1915년 <철학노트>에서도 견지된다. 왜일까? 레닌은 <노트>에서 아도르노가 그의 <부정변증법>에서 부딪혔던 것과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분투한다. 즉 직접성을 비판하고 주어진 객관성에 대한 주체적인 조정을 주장하는 헤겔의 유산을 아도르노가 '객체의 우월성'이라 부른 유물론의 최소 명제와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이것이 바로 레닌이 인간의 사고는 객관적 실체를 거울모사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한 이유이다."(52-3쪽)

"This hard materialist core of Empiriocriticism persists in the Philosophical Note-Books from 1915, in spite of Lenin's rediscovery of Hegel - why? In his Note-Books, Lenin is struggling with the same problem as Adorno in his "negative dialectics": how to combine Hegel's legacy of the critique of every immediacy, of the subjective mediation of all given objectivity, with the minimum of materialism that Adorno calls the "predominance of the objective"; this is why Lenin still clings to the "theory of reflection" according to which the human thought mirrors objective reality."

<노트>에서도 견지되는 <경험비판론>에서의 유물론은 실상 유물론에 미달하는 유물론, 곧 유사-유물론이고 암묵적 관념론이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사과 객관적 현실(objective reality)을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반영이론'을 고수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반영론자로서의 레닌은 헤겔의 재발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물론에 미달하게 되는 것. 레닌은 무어라고 말하는가? "여기에 실제로, 객관적으로,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 10자연 2)인간의 인식=인간의 뇌, 그리고 3)자연이 인간의 인식에 반영된 형태, 그리고 이 형태는 정확하게 개념, 법칙, 범주 등으로 구성된다..."(53쪽)

영역본은 이 대목을 영역본 레닌 선집에서 가져오고 있다: "Here there are actually, objectively, three members: (1)nature; (2)human cognition=the human brain; and (3)the form of reflection of nature in human recognition, and this form consists precisely of concepts, laws, categories, etc..."(179쪽) 참고로,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레닌 전집 29권 164쪽에 나온다. 

인용한 대목을 근거로 지젝은 아도르노와 레닌이 '인식주체 - 반영 - 자연/대상'이라는 반영론의 구도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각주3)에 밝혀진 대로 유스타체 쿠벨라키스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게 각주에서 "'Eustache Kouvelakis'(Paris)"가 뜻하는 바이다('유슈타슈 쿠벨라키'라고 읽어야 하나?). 찾아보니까 쿠벨라키스는 <철학과 혁명: 칸트에서 마르크스로>(2003)의 저자이다.  

"하지만 아도르노도레닌도 여기에서 잘못된 방식을 취한다. 유물론은 사고의 주체적 조정의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라는 최소 명제를 고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고가 스스로와 완전한 동일체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장애물의 절대적인 내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주장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점을 양보하고 장애물로 외부화하는 순간 사이비 문제 살정, 즉 우리는 영원히 파악불가능한 '객관적 실체'에 점근(漸近)할 뿐 절대로 이를 그 문한한 복합체에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되돌아간다."(53-4쪽)

"However, both Adorno and Lenin take here the wrong path: the way to assert materialism is not by way of clinging to the minimum of objective reality OUTSIDE the thought's subjective mediation, but by insisting on the absolute INHERENCE of the external obstacle which prevents thought from attaining full identity with itself. The moment we concede on this point and externalize the obstacle, we regress to the pseudo-problematic of the thought asymptotically approaching the ever-elusive "objective reality," never being able to grasp it in it infinite complexity."

 

 

 

 

참고로, 국역본에는 표시돼 있지 않지만 영역본의 인용문에 붙은 각주에서 지젝은 아도르노의 '객체의 우월성'론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믿음에 대하여> 2장을 참조하라고 적어놓았다. 이럴 때마다 믿을 수 없는 국역본 번역은 유감스럽다. 지젝이 이해못할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잖는가?  

'사고의 주체적 조정(thought's subjective mediation)이라고 옮겨진 것은 '사고의 주관적 매개'라고 옮기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싶다. 이 '사고'의 바깥에 객관적 현실/실체가 존재한다고 하는 반영론적 전제를 고수하는 한 지젝이 보기에 '유물론은 없다!'. 인식의 장애물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애물을 외부화하는 순간, '객관적 현실'을 그 무한한 복합성 속에서 포착하지 못하고 다만 점근해갈 뿐리는 사이비 문제틀, 혹은 포퍼주의적 문제틀로 후퇴하게 된다. 포퍼와 헤겔 사이의 레닌?

"레닌이 주장하는 '반영이론'의 문제점은 그 이론이 가진 암묵적 관념론에 있다. 물적인 실체가 의식 바깥에 독립적을 존재한다는 강박적인 주장은 징후적 전치로 읽혀야 한다. 왜냐하면 '의식 그 자체'가 암묵적으로 그것이 '반영하는' 실체으 외부에 있게 되는 중요한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질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방식, 그 객관적 진실에 무한히 접근한다는 은유가 이러한 관념론을 폭로한다."(강조는 나의 것)

"The problem with Lenin's "theory of reflection" resides in its implicit idealism: its very compulsive insistence on the independent existence of the material reality outside consciousness is to be read as a symptomatic displacement, destined to conceal the key fact that the consciousness itself is implicitly posited as EXTERNAL to the reality it "reflects." The very metaphor of the infinite approaching to the way things really are, to the objective truth, betrays this idealism:"(179-80쪽)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사이비 관념론, '암묵적 관념론'에서 벗어난 '진짜' 유물론인가? 내용이 좀 길어져서 다른 자리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06. 10. 21-22.

P.S. 문제해결의 연속 혹은 진화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벼락도끼와 돌도끼에서 원자탄으로의 연속/진화이다. 과연 인류사의 분쟁과 불화를 제거하는 방법도 진화돼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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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교보에 잠시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이었다. '이론(theory)'이란 말의 그리스 어원인 '테오리아'를 국역본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독어본의 원제는 '세기의 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기가 지난 세기이므로 '20세기의 책'이라 해야겠고, 그 책들이 모두 분류상 '이론서'들이다. 그러니까 테오리아의 어원적 의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대표하는 책 21권에 대한 평설집이라고 해야겠다. '20세기의 이론서 21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독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책-20세기의 이론들’이라는 기획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크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유전통과 학문분야가 20세기에 거두었거나 적어도 거두려고 애쓴 성과는 무엇인가?”와, “그 학문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시대에 관여했고,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은 무엇인가?”의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시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프로이트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21명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책, 이론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접근방법과 깊이를 가지고 밀도 있게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는 고전해제서들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해제/평설의 수준이겠다. "난해한 이론서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서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는 수준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21권의 이론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6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관심이 가는 책을 다루는 장들만 골라서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20세기를 '이론적으로' 관조하는 일에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떼는 게 옳다. 그리고는 21세기만을 한눈팔지 않고 질주하는 게. 굿바이!

남은 자들끼리 누리는 호사가적 관심거리는 과연 21권을 고른 주최측의 안목(편견 혹은 혜안)을 음미해보는 것이겠다. 대략 '상식적인' 리스트인지라 모험적이라고 할 만한 책을 그닥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 정도는 '독일'쪽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데, 이 21권 가운데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아르바이트' 중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세어보도록 한다.

1.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레나테 슐레지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꿈의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여러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비록 번역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는 의견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2. 후설의 <논리 연구> - 미하엘 아스트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저작들이 제법 소개되었고 연구서/논문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초기 대표작인 <논리연구>는 번역돼 있지 않다. 분량의 방대함이 이유인지 내용의 난해함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고전'의 네임밸류에 걸맞는 번역본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후설의 책은 왜 <논리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연구>인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왜 <철학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일까?).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헤르베르트 야우만 

지난 1995년에 범우사판으로 나와 있는 <서구의 몰락>이 유일한 완역본이 아닌가 한다. 대학원 시절에 필요 때문에 1권만 사서 부분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세기의 책'에 꼽힐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지만, 프랑스에서 21권을 꼽았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까?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한스 위르겐 헤링어 

 

올해 책세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전집이 나오고 있고, <논리철학논고>는 그 전집의 첫권이었다. 두툼한 <철학적 탐구>보다 얇은 <논고>가 선정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탐구>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약간은 덜어주니까 말이다. <논고>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설서로는 박영식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연구>(현암사, 1998)가 있다.

5. 베버의 <경제와 사회> - 볼프강 슐룩흐터

국역본은 <경제와 사회 1>(문학과지성사, 2003)로 출간되었다(*이후에 나남에서도 나왔다). 소장도서가 아니어서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완역본은 아니고 더 출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뜨지 않아 대신에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위르겐 미텔슈트라스 

두말할 것도 없는 책. 5권의 파이날(결선)을 꼽더라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이기상(까치글방, 1998), 소광희(경문사, 1995) 두 분의 번역본과 해설서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7.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 헬무트 레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비교적 많이 소개돼 있는 편이고 거기엔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도 포함된다. 하지만 당장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짐작에 21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논리철학논고>보다는 얇은 듯하니까. 이미지는 역시나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슈미트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샹탈 무페의 책들을 참조할 수 있다.

8. 겔렌의 <인간> - 카를-지크베르트 레베르크

  

아르놀트 겔렌은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보다 잘 알려진 철학적 인간학자로는 막스 셸러가 있지만(국내에도 더 많이 소개돼 있다), 독일에서는 겔렌의 <인간>이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겔렌이 책으론 <인간학적 탐구>(이문출판사, 1998)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는 책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좀더 두툼한 책이다.  

9.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 페터 뷔르거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고(<존재와 무>도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까?), 다만 해설을 쓴 '페터 뷔르거'란 이름이 반갑다. <해설자들 가운데 내가 아는 두엇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론으로 유명한 문예이론가 뷔르거의 책은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심설당, 1986)를 필두로 하여 현재 네 권 가량이 번역/소개돼 있다.

10.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게르하르트 쉬베펜호이저 

이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이겠다. 또한 <계몽의 변증법>이 확실한 고전인 것은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국역본의 역자가 전면 개정판을 내야했을 만큼 '난해한' 책이기도 해서 적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영역본의 경우도 몇년 전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고 미심쩍다.

11.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크리스타 뷔르거 

사르트르 커플의 책들이 나란히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젠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해야할 책(크리스타 뷔르거는 혹 페터 뷔르거의 부인일까?). 보부아르와 관한 특이사항이 그녀가 국내에서는 철학자로서는 거의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주로 출간되는 건 '사랑밖엔 난 몰라' 수준의 보부아르이다(그런 그녀가 여성학의 대모이다!).

12. 바흐친의 '변증법적 사유와 수사학' - 레나테 라흐만 

 

특이한 일이지만 21권의 책이라고 해놓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대표작이 명시돼 있지 않은 사상가가 바흐친이다. 일단은 국역본 <말의 미학>(길, 2006)을 대표작으로 꼽아둔다. 그리고 걸출한 연구서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의 추천서이다. 해설자인 레나테 라흐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바흐친 학자이다. 역시나 아는 이름이어서 반갑다.

13.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 발터 에어하르트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는 국역본이 나와 있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인데, <구조주의 인류학>이나 <신화학>보다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 책이 구조주의 인류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프로그램 자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지 않나 싶다. 회고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뒷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고, 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 해설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참조할 수 있다.

14.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 - 라이너 로젠베르크 

흔히 루카치의 범작으로 평가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기의 책'으로 꼽혀 있어서 놀랐다. 미완의 번역본까지 치면 세 종류의 국역본이 나와 있기도 한 책. 데카당스(반합리주의) 철학 비판서 정도로 나는 알고 있다. 보통 루카치의 주저로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꼽는 게 일반적인데, 해설을 읽어보고 소장여부를 판단해봐야겠다.

1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 기젤라 페벨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 하지만, 국역본은 분량상 아직 1/3밖에 나오지 않은 책. 그 사이에 영역본은 개정본이 나왔다. <논리연구>가 한국현상학회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진리와 방법>은 한국해석학회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고전 번역에 단합해야 하실 분들이 담합하고 계신 건 아니신지?

1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프란츠 폰 쿠체라 

 

<과학혁명의 구조>는 국내에 2종의 번역이 있다. 까치글방본(동아출판사본)과 이화여대출판부본이 그것인데, 교수신문의 번역비평에 따르면 일장일단이 있지만 원저 자체의 난해함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고. 학부 2학년 때 읽으면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반면에 해설서들은 얼마나 단순명쾌한 것인지!).  

17. 푸코의 <말과 사물> - 우르줄라 링크-헤르

바케트빵처럼 팔려나갔다는 푸코의 이 주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이 국내에선 절판중이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언제'라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빵집들이 고급 바케트를 내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제빵공은 있나?). 이미지로 대신 올려놓은 것은 개리 거팅의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이다.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18.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 베르너 슈테크마이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도 절판된 민음사판까지 포함하면 2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초기 데리다의 간판격이 책이지만 역시나 읽은 사람 몇 되지 않는다(나도 완독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역본들 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본까지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마스터해줄 책으로 꼽고는 있다. 조만간 해설서들도 나올 듯하고. 현재까지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이론 읽기>(한신문화사, 1999)의 해설이 요긴하다.

19. 부르디외의 <실천이론 연구> - 에곤 프레이크  

부르디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물론 <구별짓기>이지만, '이론서'로 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나 보다. 한데, <실천이론 연구>가 정확히 어느 책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실천이성>도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짐작엔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역본의 제목이 그렇고, 불어본의 제목은 <실천의 의미> 정도이다. 러시아어본도 출간돼 있는 책.

20.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 - 콘라트 오트 

 

올해 가장 번듯한 번역본이 나온 책.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21. 루만의 <사회의 사회> - 위르겐 포르만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사회학을 양분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책들은 국내에 좀 얄팍한 책들만 세권쯤 출간돼 있다. 거기에 입문서 한두 권. 그의 방대한 저작 <사회체계>가 구내에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 고 적었는데 번역돼 나왔다. <사회의 사회>가 그 사회체계론의 일부인지 독립된 저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결론적으로 21권의 책들 가운데 5-6권 정도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작들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3-4권은 더 번역돼 있어야 했다. 21권의 책들 가운데 독어권의 책이 13권이니까 과반수가 넘는다. 불어 6권, 영어 1권, 러시아어 1권 순이다. 한편,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기의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06.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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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0-2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역시 독일스러운 면이 있네요 ㅎㅎ 독일철학전공자들의 당당함도 못 본지 꽤 됬네요. :)

로쟈 2006-10-2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스트만 보면 독일철학이 압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 역시 시차겠지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0-2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용-

파뉘르주 2009-03-07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락해주실 줄 믿고 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웹저널 'Bad Subjects'에 실린 지젝과의 인터뷰 기사를 자료로 옮겨놓는다. 지난 2002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인데, <반자본주의 독본(The Anti-Capitalism Reader)>이란 책에 포함돼 있다고 한다. 책의 제목과 성격상 국내에 곧 소개가 될 법도 한데, 그때에라도 영문 인터뷰는 요긴한 참조/대조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I am a Fighting Atheist: Interview with Slavoj Zizek

Issue #59, February 2002 (Interview by Doug Henwood, Intro by Charlie Bertsch)

It's hard to become a superstar in the world of scholarly publishing. Most of the people who read its products can also write them. To stand out in a crowd this smart requires both luck and perseverance. Slavoj Zizek has demonstrated plenty of both. When Yugoslavia started to break up in the aftermath of the Cold War in 1990, pristine Slovenia was the first of its republics to declare independence. We were thrilled to be witnessing the rebirth of "nations" that had disappeared into Germany, the Soviet Union, or, in the case of Slovenia, first the Austro-Hungarian Empire, and then Yugoslavia. .As this little-known land's leading thinker, Zizek basked in an aura of novelty. His work, simultaneously light-hearted and deep, invoked the dream of a post-Cold War world in which free thinking would transcend all borders.

A decade later, we know how quickly that hope turned to despair. But Zizek's star hasn't dimmed. If anything, it has grown brighter. People who started reading Zizek because they couldn't believe that Communist Europe could produce such a supple thinker read him now for the simple reason that he is Zizek. For anyone who has tired of the dumbing down of mainstream political discourse in the West, who finds it hard to believe that the bone-dry American leftism of a Noam Chomsky represents the only possibility for resistance, who wants to critique global capitalism without falling back on faded Marxist slogans, Zizek's work flashes the promise of something better. From his ground-breaking 1989 boo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to his trenchant 1999 critique of Western governments' intervention in the former Yugoslavia, titled NATO as the Left Hand of God?, Zizek has never failed to stimulate thinking. And what more can we ask of an intellectual? As Zizek himself suggests in the interview here, philosophy helps us, not by "purifying" our thought, but by making it more complex.

What really sets Zizek apart from other major scholars is his willingness to take risks. If you were to read all of his books in rapid succession, you would see that they sometimes contradict one another. But you would also see how the tension between them reflects Zizek's real purpose: to make us see the world with fresh eyes. Unlike the vast majority of academic thinkers, Zizek is not worried about being "careless." He roots around in the realm of ideas looking for whatever will prove useful. It doesn't matter if his findings come from different intellectual traditions, if they are, in some sense, philosophically incompatible. Zizek's writing forces them to collaborate. Marx, Freud, Hegel, Kant, Lacan...and Alfred Hitchcock, David Lynch, and the Slovenian electronic agit-prop band Laibach all come together in a delightful mix. This delight, finally, is what seals the deal for Zizek's readers. It's one thing to illuminate contemporary political concerns with the help of dense philosophical points; it's another entirely to make that insight fun. Zizek does.

Left Business Observer editor and Wall Street author Doug Henwood talked with Zizek prior to the September 11th terrorist attack on the Pentagon and World Trade Center, then asked a few follow-up questions in its aftermath. In the days following the attack, Zizek's take on its significance — an incredibly moving essay titled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circulated on e-mail lists worldwide. Unlike the vast majority of commentators, Zizek was not content to express disbelief and outrage. His words offered an antidote to the mindless drivel on the major networks, CNN, and Fox News. Reflecting on the many "previews" of the tragedy in American movies, Zizek refused to blunt his critical edge: "In a way, America got what it fantasized about."

This interview is excerpted from BS editor Joel Schalit's anthology The Anti-Capitalism Reader, forthcoming from Akashic Books in the summer of 2002.(*그러니까 이미 출간된 책이다.)

BS: In general, anarchism plays a big role in American radical politics and countercultures. Do you have any thoughts on this influence?

Zizek: I certainly can understand where the appeal of anarchism lies. Even though I am quite aware of the contradictory and ambiguous nature of Marx's relationship with anarchism, Marx was right when he drew attention to how anarchists who preach "no state no power" in order to realize their goals usually form their own society which obeys the most authoritarian rules. My first problem with anarchism is always, "Yeah, I agree with your goals, but tell me how you are organized." For me, the tragedy of anarchism is that you end up having an authoritarian secret society trying to achieve anarchist goals. The second point is that I have problems with how anarchism is appropriate to today's problems. I think if anything, we need more global organization. I think that the left should disrupt this equation that more global organization means more totalitarian control.

BS: When you speak of a global organization, are you thinking of some kind of global state, or do you have non-state organizations in mind?

Zizek: I don't have any prejudices here whatever. For example, a lot of left-wingers dismissed talk of universal human rights as just another tool of American imperialism, to exert pressure on Third World countries or other countries America doesn't like, so it can bomb them. But it's not that simple. As we all know, following the same logic, Pinochet was arrested. Even if he was set free, this provoked a tremendous psychological change in Chile. When he left Chile, he was a universally feared, grey eminence. He returned as an old man whom nobody was afraid of. So, instead of dismissing the rules, it's well worth it to play the game. One should at least strategically support the idea of some kind of international court and then try to put it to a more progressive use.

America is already concerned about this. A few months ago, when the Senate was still under Republican control, it adopted a measure prohibiting any international court to have any jurisdiction over American citizens. You know they weren't talking about some Third World anti-imperialist court. They were talking about the Hague court, which is dominated by Western Europeans. The same goes for many of these international agencies. I think we should take it all. If it's outside the domain of state power, OK. But sometimes, even if it's part of state power. I think the left should overcome this primordial fear of state power, that because it's some form of control, it's bad.

BS: You describe the internal structure of anarchist groups as being authoritarian. Yet, the model popular with younger activists today is explicitly anti-hierarchical and consensus-oriented. Do you think there's something furtively authoritarian about such apparently freewheeling structures?

cruising picture!

Zizek: Absolutely. And I'm not bluffing here; I'm talking from personal experience. Maybe my experience is too narrow, but it's not limited to some mysterious Balkan region. I have contacts in England, France, Germany, and more — and all the time, beneath the mask of this consensus, there was one person accepted by some unwritten rules as the secret master. The totalitarianism was absolute in the sense that people pretended that they were equal, but they all obeyed him. The catch was that it was prohibited to state clearly that he was the boss. You had to fake some kind of equality. The real state of affairs couldn't be articulated. Which is why I'm deeply distrustful of this "let's just coordinate this in an egalitarian fashion." I'm more of a pessimist. In order to safeguard this equality, you have a more sinister figure of the master, who puts pressure on the others to safeguard the purity of the non-hierarchic principle. This is not just theory. I would be happy to hear of groups that are not caught in this strange dialectic.

BS: We've seen over the last few years the growth of a broad anti-capitalist — or as we say in the U.S., anti-corporate or anti-globalization — movement, a lot of it organized according to anarchist principles. Do you think these demonstrations are a sign of any left revival, a new movement?

Zizek: Mixed. Not in the sense of being partly good and partly bad but because the situation is undecided — maybe even undecidable. What will come out of the Seattle movement is the terrain of the struggle. I think it is PRECISELY NOW — after the attack on the World Trade Center — that the "Seattle" task will regain its full urgency! After a period of enthusiasm for retaliation, there will be a new (ideological) depression, and THAT point will be our chance!!!

BS: Much of this will depend on progressives' ability to get the word out.

Zizek: I'm well aware of the big media's censorship here. For example, even in the European big media, which are supposed to be more open, you will never see a detailed examination of the movement's agenda. You get some ominous things. There is something dark about it. According to the normal rules of the liberal game, you would expect some of these people to be invited on some TV talk shows, confronted with their adversaries, placed in a vigorous polemic, but no. Their agenda is ignored. Usually they're mocked as advocating some old-fashioned left-wing politics or some particularism, like saving local conditions against globalism. My conclusion is that the big powers must be at least in some kind of a panic. This is a good sign.

BS: But lots of the movement has no explicit agenda to offer. Why is the elite in such a panic?

Zizek: It's not like these are some kind of old-fashioned left-wing idiots, or some kind of local traditionalists. I am well aware that Seattle etc. is still a movement finding its shape, but I think it has potential. (Even though) there is no explicit agenda, there is nonetheless an outlook reproaching this globalization for being too exclusionary, not a true globalization but only a capitalist globalization.

BS: At the same time this movement was growing, there was a string of electoral victories for the right — Silvio Berlusconi's Forza Italia in Italy, Jorg Haider's Freedom Party in Austria, our own Bush. What do you make of these?

Zizek: They're not to be underestimated. I'll put it in my old-fashioned Stalinist terms: there are two deviations to be avoided here, left and right. The right-wing deviation is to fully endorse their liberal opponents, to say, "OK, we have our problems with Gore or Blair but they're basically our guys, and we should support them against the true right." We should also avoid the opposite mistake, which is that they're all the same. It doesn't really matter if it's Gore or Bush. From this position it's only one step to the position that says, "so it's even better we have Bush, because then we see the true enemy."

We should steer the right middle course: while maintaining our critical distance towards the moderate left, one shouldn't be afraid when certain issues are at stake, to support them. What is at stake is the following: it looked in the 1990s that after the disintegration of socialism, the Third Way left represents the universal interests of capital as such, to put it in the old Marxist way, and the right-wing parties represent only particular interests. In the U.S., the Republicans target certain types of rich people, and even certain parts of the lower classes — flirting with the Moral Majority, for example. The problem is that right-wing politicians such as Haider are playing the global game. Not only do we have a Third Way left; we now have a Third Way right too, which tries to combine unrestrained global capitalism with a more conservative cultural politics.

Here is where I see the long-term danger of these right wingers. I think that sooner or later the existing power structure will be forced more and more to directly violate its own formal democratic rules. For example, in Europe, the tendency behind all these movements like Holocaust revisionism and so on, is an attempt to dismantle the post-World War II ideological consensus around anti-fascism, with a social solidarity built around the welfare state. It's an open question as to what will replace it.

[*Ed Note: Such as the new emergency powers granted the U.S. government for domestic surveillance purposes following the WTC/Pentagon attacks, which suspend habeas corpus rights for immigrants, allow security services to monitor your telecommunications activities, and review your student and bank records without permission from a judge]

BS: What about the transition from Clinton to Bush? What's significant about this from your point of view?

Zizek: The sad thing is that Clinton left behind him a devastated, disoriented Democratic Party. There are people who say that his departure leaves some room for a resurgence of the party's left wing, but that will be difficult. The true problem of Clinton is his legacy; there is none. He didn't survive as a movement, in the sense that he left a long-term imprint. He was just an opportunist and now he's simply out. He didn't emerge as a figure like Thatcher or Reagan who left a certain legacy. OK, you can say that he left a legacy of compromise or triangulation, but the big failure is at this ideological level. He didn't leave behind a platform with which the moderate liberals could identify.

BS: A lot of readers of American underground publications read Noam Chomsky and Howard Zinn, and the stuff coming out of small anarchist presses. What would they get from reading your work that they might be missing?

Zizek: Martin Heidegger said that philosophy doesn't make things easier, it makes them harder and more complicated. What they can learn is the ambiguity of so many situations, in the sense that whenever we are presented by the big media with a simple opposition, like multicultural tolerance vs. ethnic fundamentalism, the opposition is never so clear-cut. The idea is that things are always more complex. For example, multiculturalist tolerance, or at least a certain type of it, generates or involves a much deeper racism. As a rule, this type of tolerance relies on the distinction between us multiculturalists, and intolerant ethnic others, with the paradoxical result that anti-racism itself is used to dismiss IN A RACIST WAY the other as a racist. Not to mention the fact that this kind of "tolerance" is as a rule patronizing. Its respect for the other cannot but remind us of the respect for naive children's beliefs: we leave them in their blessed ignorance so as not to hurt them...

Or take Chomsky. There are two problematic features in his work — though it goes without saying that I admire him very much. One is his anti-theorism. A friend who had lunch with him recently told me that Chomsky announced that he'd concluded that social theory and economic theory are of no use — that things are simply evident, like American state terror, and that all we need to know are the facts. I disagree with this. And the second point is that with all his criticism of the U.S., Chomsky retains a certain commitment to what is the most elemental ingredient of American ideology, individualism, a fundamental belief that America is the land of free individuals, and so on. So in that way he is deeply and problematically American.

You can see some of these problems in the famous Faurisson scandal in France. As many readers may know, Chomsky wrote the preface for a book by Robert Faurisson, which was threatened with being banned because it denied the reality of the Holocaust. Chomsky claimed that though he opposes the book's content, the book should still be published for free speech reasons. I can see the argument, but I can't support him here. The argument is that freedom of the press is freedom for all, even for those whom we find disgusting and totally unacceptable; otherwise, today it is them, tomorrow it is us. It sounds logical, but I think that it avoids the true paradox of freedom: that some limitations have to guarantee it.

So to understand what goes on today — to understand how we experience ourselves, to understand the structures of social authority, to understand whether we really live in a "permissive" society, and how prohibitions function today — for these we need social theory. That's the difference between me and the names you mentioned.

BS: Chomsky and people like him seem to think that if we just got the facts out there, things would almost take care of themselves. Why is this wrong? Why aren't "the facts" enough?

Zizek: Let me give you a very naive answer. I think that basically the facts are already known. Let's take Chomsky's analyses of how the CIA intervened in Nicaragua. OK, (he provides) a lot of details, yes, but did I learn anything fundamentally new? It's exactly what I'd expected: the CIA was playing a very dirty game. Of course it's more convincing if you learn the dirty details. But I don't think that we really learned anything dramatically new there. I don't think that merely "knowing the facts" can really change people's perceptions.

To put it another way: Chomsky's own position on Kosovo, on the Yugoslav war, shows some of his limitations, because of a lack of a proper historical context. With all his facts, he got the picture wrong. As far as I can judge, Chomsky bought a certain narrative — that we shouldn't put all the blame on Milosevic, that all parties were more or less to blame, and the West supported or incited this explosion because of its own geopolitical goals. All are not the same. I'm not saying that the Serbs are guilty. I just repeat my old point that Yugoslavia was not over with the secession of Slovenia. It was over the moment Milosevic took over Serbia. This triggered a totally different dynamic. It is also not true that the disintegration of Yugoslavia was supported by the West. On the contrary, the West exerted enormous pressure, at least until 1991, for ethnic groups to remain in Yugoslavia. I saw [former Secretary of State] James Baker on Yugoslav TV supporting the Yugoslav army's attempts to prevent Slovenia's secession.

The ultimate paradox for me is that because he lacks a theoretical framework, Chomsky even gets the facts wrong sometimes.

BS: Years ago, you were involved with the band Laibach and its proto-state, NSK (Neue Slovenische Kunst). Why did you get involved with them?

Zizek: The reason I liked them at a certain moment (which was during the last years of "really existing socialism") was that they were a third voice, a disturbing voice, not fitting into the opposition between the old Communists and the new liberal democrats. For me, their message was that there were fundamental mechanisms of power which we couldn't get rid of with the simple passage to democracy. This was a disturbing message, which was why they got on everyone's nerves. This was no abstract theoretical construct. In the late 1980s, people got this message instinctively — which is why Laibach were more strongly repressed by the new democratic, nationalist powers in Slovenia than previously by the Communists. In the early 1980s, they had some trouble with the Communists, but from the mid-1980s onward, they didn't have any trouble. But they did again with the transition of power. With their mocking rituals of totalitarian power, they transmitted a certain message about the functioning of power that didn't fit the naive belief in liberal democracy. The miracle was that they did it through certain stage rituals. Later, they tried to change their image (to put it in marketing terms) and they failed.

BS: You talk and write a lot about popular culture, particularly movies. How does your thinking about pop culture relate to your thinking about politics?

Zizek: We can no longer, as we did in the good old times, (if they were really good) oppose the economy and culture. They are so intertwined not only through the commercialization of culture but also the culturalization of the economy. Political analysis today cannot bypass mass culture. For me, the basic ideological attitudes are not found in big picture philosophical statements, but instead in lifeworld practices — how do you behave, how do you react — which aren't only reflected in mass culture, but which are, up to a point, even generated in mass culture. Mass culture is the central ideological battlefield today.

BS: You have recently been speaking about reviving Lenin. To a lot of politically active young people, Lenin is a devil figure. What do you find valuable in Lenin, or the Leninist tradition?

Zizek: I am careful to speak about not repeating Lenin. I am not an idiot. It wouldn't mean anything to return to the Leninist working class party today. What interests me about Lenin is precisely that after World War I broke out in 1914, he found himself in a total deadlock. Everything went wrong. All of the social democratic parties outside Russia supported the war, and there was a mass outbreak of patriotism. After this, Lenin had to think about how to reinvent a radical, revolutionary politics in this situation of total breakdown. This is the Lenin I like. Lenin is usually presented as a great follower of Marx, but it is impressive how often you read in Lenin the ironic line that "about this there isn't anything in Marx." It's this purely negative parallel. Just as Lenin was forced to reformulate the entire socialist project, we are in a similar situation. What Lenin did, we should do today, at an even more radical level.

For example, at the most elementary level, Marx's concept of exploitation presupposes a certain labor theory of value. If you take this away from Marx, the whole edifice of his model disintegrates. What do we do with this today, given the importance of intellectual labor? Both standard solutions are too easy — to claim that there is still real physical production going on in the Third World, or that today's programmers are a new proletariat? Like Lenin, we're deadlocked. What I like in Lenin is precisely what scares people about him — the ruthless will to discard all prejudices. Why not violence? Horrible as it may sound, I think it's a useful antidote to all the aseptic, frustrating, politically correct pacifism.

Let's take the campaign against smoking in the U.S. I think this is a much more suspicious phenomenon than it appears to be. First, deeply inscribed into it is an idea of absolute narcissism, that whenever you are in contact with another person, somehow he or she can infect you. Second, there is an envy of the intense enjoyment of smoking. There is a certain vision of subjectivity, a certain falseness in liberalism, that comes down to "I want to be left alone by others; I don't want to get too close to the others." Also, in this fight against the tobacco companies, you have a certain kind of politically correct yuppie who is doing very well financially, but who wants to retain a certain anti-capitalist aura. What better way to focus on the obvious bad guy, Big Tobacco? It functions as an ersatz enemy. You can still claim your stock market gains, but you can say, "I'm against tobacco companies." Now I should make it clear that I don't smoke. And I don't like tobacco companies. But this obsession with the danger of smoking isn't as simple as it might appear.

BS: You've also left some of your readers scratching their heads over the positive things you've been writing about Christianity lately. What is it in Christianity you find worthy?

Zizek: I'm tempted to say, "The Leninist part." I am a fighting atheist. My leanings are almost Maoist ones. Churches should be turned into grain silos or palaces of culture. What Christianity did, in a religiously mystified version, is give us the idea of rebirth. Against the pagan notion of destiny, Christianity offered the possibility of a radical opening, that we can find a zero point and clear the table. It introduced a new kind of ethics: not that each of us should do our duty according to our place in society — a good King should be a good King, a good servant a good servant — but instead that irrespective of who I am, I have direct access to universality. This is explosive. What interests me is only this dimension. Of course it was later taken over by secular philosophers and progressive thinkers. I am not in any way defending the Church as an institution, not even in a minimal way.

For an example, let's take Judith Butler, and her thesis that our sexual identity isn't part of our nature but is socially constructed. Such a statement, such a feminist position, could only occur against a background of a Christian space.

BS: Several times you've used the word "universalism." For trafficking in such concepts, people you'd identify as forces of political correctness have indicted you for Eurocentrism. You've even written a radical leftist plea for Eurocentrism. How do you respond to the PC camp's charges against you?

Zizek: I think that we should accept that universalism is a Eurocentrist notion. This may sound racist, but I don't think it is. Even when Third World countries appeal to freedom and democracy, when they formulate their struggle against European imperialism, they are at a more radical level endorsing the European premise of universalism. You may remember that in the struggle against apartheid in South Africa, the ANC always appealed to universal Enlightenment values, and it was Buthelezi, the regime's black supporter in the pay of the CIA, who appealed to special African values.

My opponent here is the widely accepted position that we should leave behind the quest for universal truth — that what we have instead are just different narratives about who we are, the stories we tell about ourselves. So, in that view, the highest ethical injunction is to respect the other story. All the stories should be told, each ethnic, political, or sexual group should be given the right to tell its story, as if this kind of tolerance towards the plurality of stories with no universal truth value is the ultimate ethical horizon.

I oppose this radically. This ethics of storytelling is usually accompanied by a right to narrate, as if the highest act you can do today is to narrate your own story, as if only a black lesbian mother can know what it's like to be a black lesbian mother, and so on. Now this may sound very emancipatory. But the moment we accept this logic, we enter a kind of apartheid. In a situation of social domination, all narratives are not the same.

For example, in Germany in the 1930s, the narrative of the Jews wasn't just one among many. This was the narrative that explained the truth about the entire situation. Or today, take the gay struggle. It's not enough for gays to say, "we want our story to be heard." No, the gay narrative must contain a universal dimension, in the sense that their implicit claim must be that what happens to us is not something that concerns only us. What is happening to us is a symptom or signal that tells us something about what's wrong with the entirety of society today. We have to insist on this universal dimension.

0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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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저 중 한 권인 <조건들>(새물결, 2006)이 번역돼 나왔다. 또다른 주저인 <존재와 사건>과 함께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는 몇 년전부터 있었지만 잊고 있던 차에 뜻밖의(?) 책이 나온 것이다. 그간에 출간되었던 몇 권의 책이 (反들뢰즈주의자로서) '들뢰즈 이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바디우의 전모를 드러내기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졌더랬는데, 이번엔 불식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번역/연구되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의 영역본이 작년에서야 나왔고 <조건들>의 영역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스페인어본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러니 <조건들>의 국역본 출간은 얼마간 '사건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역자는 <윤리학>을 우리말로 옮긴 이종영씨이다(역시나 <윤리학> 번역에서의 불만을 말끔히 씻어주기를 기대한다).   

지젝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양에 고무되어 개인적으로 바디우의 책들은 (<존재와 사건>를 비롯하여) 저서와 연구서들을 다수 갖고 있지만 그의 철학을 일람할 기회도 없었도 따라서 몇 마디 덧붙일 만한 능력도 현재로선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길잡이가 될 만한 글 하나를 옮겨놓는 걸로 일단은 소개를 대신해두고자 한다.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 박사의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이란 글인데, 지난 2003년 '동국대 대학원신문'(5월호)에 게재됐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고 바디우의 주저들을 번역중이라고 했다. 이후 바디우의 지도하에 학위논문을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강의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철학은 시대의 징후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리스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더불어 민주정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20세기라는 역사적 시점의 지배적인 동력이었던 기술과 그 기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은 모두 시대의 징후로 읽어 내려가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하이데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수십년 이래로 우리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인간 이성으로 수립된 모든 프로젝트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간주된 과학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를,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했던 큰 흐름인 합리주의는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철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래로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리요따르는 건축술로서의 철학, 즉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을 선고하였고, 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톤 이래 철학에서 배제된 시학(詩學, poetique)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거대 담론은 해체되었고,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이었던 진리의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철학은 이제 시학을 비롯한 예술에 자신의 지위를 양도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려 한다. 철학사는 부정되었고 이제는 플라톤에 의해 추방되었던 시인들이 그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철학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철학의 시학으로의 투항에 저항하는 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이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아주 거센 굴곡을 보여준다. 싸르트르에게 감화를 받고 있던 그의 청년 시절, 알튀세와의 만남은 그를 과학적 이론의 추종자로 만들었지만 68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68혁명의 대립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알튀세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와 결별한다. 그리고는 실뱅 라자뤼스, 나타샤 미셸, 프랑수와 발메 등과 마오주의 그룹인 예난(Yenan)그룹을 결성해 프랑스 공산당에 맞서 투쟁한다.

이후 80년대에 들어 유럽에 지적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자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다른 혁명적 대안을 마련하는 시도를 행하게 되고, 그 결실은 1988년『존재와 사건』의 출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는 수학적 존재론의 구축을 통해 철학을 복권시키고, 새로운 해방적 프로젝트를 그 존재론에 담아낸다. 오늘날 그는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프랑스 철학의 중심을 흔드는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무기인 집합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만신창이가 된 철학에 그 자리를 되돌려준다.

종말을 부정하기

우선 그의 철학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을 살펴보자. 바디우는 모든 현대 철학의 지배적 경향인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이라는 페이소스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종말이라는 테마는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거대 담론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대담론' 만큼이나 거창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존재할 수 있고 우리 시대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물론 철학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근원적인 위기에 처했던 시대 역시 분명히 있었다. 철학은 항상 불연속적이었고,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철학과 그 조건들이 가지는 관계에 놓여진 불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진리라는 테마만이 철학과 그 조건이 되는 여러 사유를 관계짓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조건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공정, procedure)로서만 철학의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각자의 개별적 특성에 기반하여 진리를 생산해내고, 진리를 생산해내는 한에서만 철학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진리 생산의 사유는 철학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조건들이 생산한 진리를 개입(intervention)을 통해 명명(nomination)해낼 뿐이다. 바디우는 철학의 조건을 이루는 진리 산출의 유적1) 절차(공정, procedures generiques des verites)를 네 가지 정도로 분리해낸다. 정치, 과학(그 중에서도 수학), 사랑, 예술(시학(詩學))이 그것이다.

철학 - 봉합에서 공가능성으로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네 가지 진리의 공정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그 조건들이 모두 공존가능하다는 점을 사유하는 것이 바로 바디우가 정의하는 철학의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가지 공정이 모두 진리를 생산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바디우는 이 점을 아주 중요시하여 봉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 동안의 철학은 이러한 공가능성(compossibilite, 여러 가지 조건이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진리를 생산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동안의 철학은 다른 조건들이 가지는 진리 생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 중 하나, 혹은 일부에 대해서만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진리 생산의 다양한 가능 영역은 부정되고 진리는 어느 하나의 영역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바디우는 철학의 봉합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다양한 봉합의 실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철학이 과학적 실증주의에 봉합된 시기였고, 영미권의 아카데미적 철학은 아직도 이 봉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정치와 과학에 동시에 봉합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봉합의 복잡한 구조를 스탈린은 철학,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되어버린 과학에 반대하여 철학을 시학에 가두어버린 것으로 간주된다.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많은 비판을 통하여 화석화된 봉합일 뿐이고, 이제는 제도적이거나 아카데미적인 봉합이지만, 하이데거를 그 축으로 하는 시학(예술)에의 봉합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봉합 형태이고, 전혀 검토된 적이 없는 봉합이다.

철학이 과학과 정치에 봉합되어 있을 당시, 시학은 철학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시인의 시대는 열린다. 그러나 여기서 바디우가 말하는 시학은 모든 시와 시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횔더린(Holderlin)에서 파울 첼란(Paul Celan)에 이르는 시기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진정한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인과 시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시학이 행한 것은 시에 의한 존재의 문제에의 접근이었다. 시인들의 공헌은 대상의 범주를 해체함으로써 탈객관화(주지하듯이 객관화는 과학의 미덕이다)를 실현해낸 데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객관성(대상성, l'objectivite)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객관적 철학의 시학적 해체를 결합시켜냄으로써 엄청난 강점을 획득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수학과 시학의 이율배반을 지식과 진리의 대립, 혹은 '주체/대상'과 '존재(Etre)'의 대립으로 엮어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랭보, 혹은 로트레아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학은 항상 수학과 사유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인들은 수학에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상의 범주를 해체하고 첼란에 이르러 시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철학이 완전한 탈봉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시대가 끝남과 더불어 열리게 된다.

진리의 사건들

우리는 이제 진리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진리는 진리 생산의 네 가지 절차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절차가 항상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요컨대 진리의 네 가지 공정은 진리의 생산이 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진리는 사건에 의존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사건의 진리인 것이고, 만일 이 네 가지 영역 속에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해낼 수 없다. 이 사건의 진리야말로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는 각각의 절차에서 드러난 상이한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정치에서의 사건은 언제나 상이한 형태(18세기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형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로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국한시켜 보자면 정치적 사건은 68년에서 80년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예로는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과 중국의 문화 혁명, 이란 혁명, 그리고 폴란드 연대 노조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명명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폴란드의 노동 운동을 제외하면 그들 정치적 사건은 그 내용의 새로움과는 유리된 낡은 사상 체계에 의해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이란 혁명은 이슬람으로의 복귀, 즉 옛 것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사건을 명명하는 철학적 개입(intervention)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 정치적 사건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기에 사건이고, 진리를 생산할 수 있지만, 그것의 명명은 아직 철학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칸토르에서 폴 코헨까지의 현대 집합 이론은 수학에서의 사건이다. 이 집합 이론은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multiplicite indiscernable)에 대한 개념을 수립해낸다. 이로써 집합 이론은 존재-로서의-존재(Etre-en-tant-qu'etre)에 대한 합리적 사유와 언어 사이의 문제를 해결한다.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를 규정하는 언어 체계를 벗어난, 즉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진리가 이러한 존재 형태를 갖는다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진리는 지식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단지 생산될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유적(類的, 산출적, generique)이며, 기존 언어를 통한 지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기존 언어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은 언어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기존의 언어에 비추어 초과분(exces)이 된다. 우리는 그것의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다. 바디우는『존재와 사건』에서 집합 이론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증명해내는데 이는 '방황하는 초과분'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고 그 자체로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

시인의 시대를 통틀어 볼 때, 시에서의 사건은 파울 첼란의 작품이다. 데리다나 가다머 혹은 라꾸-라바르뜨(이들은 바디우의 철학적 대화 상대자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요한 논적이다)와 달리 바디우는 첼란의 시에서 시는 그 자체로 충분치 않다는 고백을 읽어낸다. 그의 시는 봉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시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철학을 원한다. 말하자면, 첼란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시대의 개념적 전유를 다른 영역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첼란의 공헌은 시를 철학이 그 시대에 행해온 사변적 기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시를 진리의 나머지 절차들과 공존하게 함으로써 시에게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는 데 있다. 이것이 첼란이 행한 시의 사건의 핵심적 내용이다.

사랑의 사건은 라깡의 저작이다. 사랑에 대한 라깡의 이론은 하나(l'Un, the One)의 지배를 파괴하고 둘(le Deux, the Two)의 문제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사건이다. 라깡은 성에서의 둘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이로써 남성(손상된 전체(Tout)의 벡터)과 여성(비-전체(pas-toute))은 서로 전혀 다른 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개의 성은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만남이라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둘은 일자(하나, l'Un)의 법칙을 초과하는(넘어서는) 끝없고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을 꾸며낸다. 이것을 바디우는 성차에 대한 진리,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는 진리가, 이름없는 혹은 유적인 다수성으로서 도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사랑이란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인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계기로 생산되어 잠시 나타난(presenter)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적(事後的)으로 표상될(representer) 뿐이다. 이때 진리를 생산해 낸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 그것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고유한 활동에 전념할 뿐, 진리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그 절차들은 진리를 모른다. 그 진리의 명명작업을 해내는 것, 그렇게 다른 곳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의 작업이다. 예컨대, 철학은 이미 다른 지점에서 생산된 진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인 것이다. 이제 철학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네가지 유적 절차들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고 명명함으로써 바디우가 원하는 철학적 행동(acte philosophique)은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주체의 이론

위의 예에서 보았듯 사건은 진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지식(savoir)의 망을 교란시키고(구멍을 내는 것이다), 곧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진리의 흔적은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sujets fideles)를 통해서 밖에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체는 진리의 담지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주체인 것은 아니듯, 주체는 그 충실성을 잃고 배반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의 많은 주체들은 그 사건이 생산해낸 진리에의 충실성을 잃고 그 진리를 배반하였고, 중국의 문화 혁명도 같은 길을 걸었다. 때로는 환영(simulacre)을 사건으로 착각하여 그 환영에 충실하기도 하는데, 파시즘의 예가 그 좋은 예이다.) 진리에 의해 호출된 그들은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이다. 그 진리에 충실함으로써만 그들은 주체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들은 진리의 담지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이 드러난다.

바디우는 구조주의에 의해 부정된 주체를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객관주의를 벗어나 비로소 주체적 정치(politique subjective)를 가능하게 한다. 구조주의에 의해 단지 구조의 담지자로만 파악되었던 인간은 바디우의 손에서 다시 주체가 된다. 물론 이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선험적인 주체는 아니다. 자신의 이해(intert)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 동물(l'animal humain, 영장류 동물로서의 인간)은 진리의 사건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이해에서 벗어난 이해(intert-desinteresse)를 추구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의 진리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을 통하여 동물이었던 인간은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존재방식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e)이라고 부른다.

이 주체의 충실성이야말로 진리의 과정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다. 진리는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 지식 체계에 파열구를 만든 후 즉시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진리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객관성이 아닌 진리가 만들어내는 주체성, 바디우에 의해 충실성으로 표현된 그 주체성의 발현을 통해서일 뿐이다. 주체의 충실성은 진리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미디어와 정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유포된 '인권'과 같은 세론(世論)은 결코 윤리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우리는 이 '인권'이 미국의 주요한 공갈 협박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로지 진리의 변전만이 윤리학의 재구성을 위한 기준일 것이다. 그 윤리학의 금언은 "계속하자!(continuer!)"라고 말한다. 즉 진리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른바 진리의 윤리학의 함의가 있다. 다시 말해 바디우의 윤리학은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바디우의 이론에서 주체는 지식의 영역인 객관성의 범주에 포섭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해왔던 주체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문제틀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을 통해, 혁명적 주체성을 지녔다고 전제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성을 지닌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다. 계급은 이로써 주체성과 객관성을 아우르는 순환적인 개념이 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주체는 객관적인 수준으로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파악된 인간, 대상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그저 인간 동물일 뿐이고, 주체는 이 인간 동물에 '무엇'인가가 추가된(supplemente) 것이다. 그 '무엇'은 진리에 다름 아니고, 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 동물은 주체가 된다. 주체는 결코 선험적으로 설정될 수 없고, 인간이 사건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면,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바디우의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우리는 앞서 바디우에게 진리는 기존의 지식망을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객관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할 때, 진리는 객관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은 지식 체계일 뿐이다. 물론 진리는 오직 한 순간 빛을 발하고 지식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진리의 사건은 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롭게 열리는 진리의 지평

지금까지 살펴본 바디우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그가 진리의 문제에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알고있던 진리와는 사뭇 그 모습이 다르다. 그것은 다수의 진리로서 전혀 다른 진리의 지평을 인정하는, 결코 폭압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진리이다. 진리의 공가능성(compossibilite)은 전제적인 일자(一者, l'Un)의 모습을 부정하고 진리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진리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고하게 하며, 잃어버렸던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바디우와 더불어 합리적 사유는 마침내 가능해지고, 그것이 포함하는 혁명적 사유는 마침내 펼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젖히는, 진리의 옹호자인 셈이다. 바디우와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는 다수의 진리라는 관념이 수립되고, 진리라는 관념이 편협한 사고로 우리를 인도할 가능성은 제거된다. 마침내 열려진 지평 위에서 진리를 사고하는 일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서용순/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주1) 유적(類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generique라는 말은 논리학적으로 비결정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개별 원소가 '유적'일 때 우리는 그 원소가 어떠한 구분에 속하는 것인가만을 알 뿐 동일한 구분에 속해있는 다른 개별 원소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개별 원소는 항상 개별적이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갖는다. 진리의 서로 다른 절차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동일한 구분에 속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규정지어지지 않는다. 그 절차들은 각각의 진리를 생산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적이다.

0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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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8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책 검색하다가, 지금에서야 이 글을 봤네요. 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