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사유들'의 여섯번째 손님은 재작년에 방한한 바 있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이다(이름은 나오는 책마다 다르게 표기된 바 있다). "'새로운 인간’ 향해 계몽을 계몽하자"란 게 기사의 타이틀이다. 시리즈를 옮겨놓기로 했으니 하던 일은 계속하는 수밖에.

대학신문(07. 10. 15)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⑥ 페터 슬로터다이크

현대 인문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산 생명을 복제하는 유전공학이 출현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새롭게 구축되는 이 제국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다. 이런 현실의 도래는 이미 전통적 인문학이 표방해온 휴머니즘에 위기를 안겨다 줬으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찾도록 다그치고 있다.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의 중심부에, 기존의 휴머니즘의 종언을 고하고, 견유주의(犬儒主義)와 유전공학의 결합으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창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1999년 7월 16일 바이에른 엘마우 성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해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럽 지성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그 동안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해 온 기존의 휴머니즘적 인간관이 인간의 야생성을 길들이면서 은폐하고 있음을, 게다가 자기행복에 매몰되거나 냉소주의에 몰입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의 공범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과 문자에 기초해 인간성을 동물성과 구분해왔던 기존의 시도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공산주의, 민족주의, 아메리카니즘도 모두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유하는 동물’이 ‘사유하는 인간’으로 전환됨으로써 인간 그 스스로가 문화라는 우리에 갇혀 가축화되고, 그래서 식물처럼 생각하지만 육식동물처럼 살고, 착한 목자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나쁜 가축 떼처럼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화에 저항하지 못하는 ‘낡은 인간’에 얽매여 ‘작은 사육자’로 살아가는 차원을 넘어, 이것을 깨뜨리고 위대한 정치, 위대한 예술, 위대한 사상을 감행해 ‘새로운 인간(위버멘쉬)’을 향해 나아가는 ‘큰 사육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의 이 ‘큰 사육자’의 길은, 하버마스를 비롯한 독일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듯이, 단순히 인간개종을 위해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감행하는 신종 나치스트의 길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근접성을 주장한 저 고대의 견유주의와 오늘날 유전공학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서로 보호되는 길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가 이와 같은 길을 택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인간을, 자연이라는 실험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거쳐 온 진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기존의 휴머니즘적 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된 휴머니스트들처럼 유전공학의 도래로 새롭게 시작된 삶의 놀이를 냉소적으로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해방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인가라는 대원칙 아래서, 그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괴물이 되고 잡종의 형태가 될 위험은 유전공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아적인 사유방식에 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의 이 주장은 당시에 싹튼 것이 아니라, 그의 핵심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냉소적 이성 비판』(1983)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냉소주의 역시 계몽에 지친 무력한 인간의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현대의 기술문명이 우리의 환경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이 문명에 계속 동참하고 있듯이, 계몽 속에서 더불어 자라난 냉소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더 많은 압박과 고통에 더 잘 순응하도록 이끈다. 계몽은 이 허위의식을 제거하기보다는 이를 대중적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며, 마침내 스스로를 배반하고 비합리성으로 추락한다.

그는 이런 추락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주관이성과 객관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이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공존하는 ‘혼성적 실재’를 추구하며, 인간-동물-식물-기계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성’을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한다. 그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유럽의 도가주의』(1989)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입장은 여러 다양한 글들에서,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시대의 거대한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있다. 그는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몸의 지혜’로 거대한 지배체제와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역사시대’를 종식하고, ‘지역’들이 존중받으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진정한 다원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마지막 인간’을 넘어, 역사 이후의 ‘새로운 인간(post-human)’을 유전공학과 견유주의의 연대를 통해 재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연대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지식인들도 이제 그가 제시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전망을 고뇌하지 않고 더 이상 미래의 인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김석수교수_경북대 철학과)

07. 10. 14.

P.S. 지난 2005년 방한시에 강연한 내용들이 최근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세계의 밀착>(철학과현실사, 2007). 개인적으로 슬로터다이크의 책들에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엔 사정이 다를지 모르겠다. 궁금한 건 번역본 <냉소적 이성 비판>의 제2권이 언제 마저 출간되느냐는 것. 반쪽짜리 책이라 구입도, 독서도 미뤄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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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04913)으로 올려놓은 에드워드 윌슨의 신작 <생명의 편지>(사이언스북스, 2007)에 대한 자세한 리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구입하지 못했는데 여유가 생기는 대로 그의 생태학 관련서들을 모아놓을 작정이다.

문화일보(07. 10. 12) 생명의 위기… 老과학자는 왜 종교에 도움 청했나

“나에게 우리 사이의 차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무엇보다 창조물(the creation)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살아 있는 대자연을 지키는 것은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적 또는 이념적 교의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교의를 조장하지도 않습니다.”

통섭(統攝·consilience)의 사상가이자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창시자,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에드워드 윌슨(78·하버드대 생물학과 석좌교수)이 지난해 펴낸 책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 과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회생물학을 만든 윌슨은 이어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 지식의 대통합(통섭)을 주장하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젊은 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을 만큼 현존 최고의 과학저술가로 꼽힌다.

하지만 이번 책은 그의 사상적 궤적에서 한 발 비켜나 있는 내용이다. 그는 돌연 생명의 위기를 소리높이 외치며 종교에 손을 내밀고 있다. 과학과 종교가 함께 나서야 할 급박한 위기라고 호소하고 있다. ‘과학의 힘’을 신봉하는 환원주의자인 윌슨이 마치 종말론의 기독교인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종교에 호소하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대과학자가 가진 생명 위기의 ‘절박감’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책은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교파인 남침례교 목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의 형식을 취한다.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자에게 호소하는 셈이다. 저자가 책의 원제목을 ‘THE CREATION’이라고 한 것도 기독교적으로 ‘피조물’의 의미와 겹치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왜 종교에 호소한 것일까. “그것은 종교와 과학이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과학이 생명의 보전을 위해 연대한다면 그 문제는 곧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에 손을 내민 것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어 보인다. 말 그대로 ‘현실적 힘’에 기대는 측면도 있고, 저자가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바로 기독교가 ‘선택된’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과 그들의 터전을 정복하고 파헤치는 자본주의 이념의 배후라는 측면도 있다. 윌슨은, 현실적으로도 미국인의 60%가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을 믿으며, 단지 지구를 잠시 거주하는 곳 정도로 대한다고 근거를 들어 비판한다.

“이런 유형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다른 생물 1000만종의 운명은 일말의 가치도 없습니다.(…)그것들은 절망과 무자비의 복음입니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본령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내가 틀렸다고 말해주세요!”

윌슨은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완전히 갈라진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다시 손을 맞잡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옥스퍼드대 생물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 책을 과학이 종교에 보낸 ‘외교문서’라고 평가했다.

윌슨은 지구환경의 위기를 절박하게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지구의 산소공장이자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열대우림의 70%가 파괴됐고, 담수 생태계 역시 80% 이상 파괴되면서 담수생물들의 무수한 멸종은 물론, 인류가 사용할 물도 거의 사라졌다. 지구상 동식물 종의 절반이 금세기 말이면 멸종을 맞거나 그럴 운명에 처할 것이며 4분의 1은 기후 변화만으로도 50년 이내에 멸종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멸종 속도는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이전 속도의 100배이며, 다음 수십 년 안에는 최소한 1000배는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윌슨은 “문명은 자연에 대한 반역을 통해 이룩됐다”며 이를 그만두고 ‘대자연을 향한 등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풀어야 할 3가지 난제로 제시하는 것은 환경에 대한 무지, 과학교육의 부실, 생물학의 급격한 발달이다. 환경에 대한 무지와 과학교육의 부실은 연관이 깊다. 그는 우리의 아이들은 자연주의자로 키워야 한다고 역설하며 그 구체적인 교육방식까지 설명한다. 과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자연주의자가 많이 육성되면 세번째 쟁점인 ‘생물학의 급격한 발달’로 인한 문제는 해소된다. 모든 사람이 과학적 활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다보면 다소 ‘썰렁한’ 느낌이 든다. 역시 과학의 힘을 빌려 해결하겠다는 결론인데, 생명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상당부분 져야만 할 과학을 통해, 더 나아가 2세들의 과학교육을 통해 과연 생명의 위기가 해소될까. 여기서 과학적 환원주의자인 윌슨의 한계를 보는 듯도 하다.



실상 그의 ‘통섭 사상’도 동등하고 양방향적인 관점의, 말 그대로 ‘통섭’이 아니라, 일방향성의 환원적 통합이며, 여러 학문들 사이에는 위계 질서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 중심에는 항상 과학이, 물리가 놓여 있다. 결국 과학이 왕이고 다른 인문학은 모두 과학으로 ‘헤쳐모여’라는 식이다.

이번 책에서도 종교와 열어놓고 손을 내밀기보다는 결국 과학 우위라는 저의를 숨기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생명의 위기를 초래하는 데 과학과 종교가 모두 한몫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시 씁쓸해지기도 한다. “현재의 우리는 종교와, 과학에 기초한 계몽 운동에서 비롯된 문명의 산물입니다”라고 윌슨은 ‘실토’하고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어쨌든 윌슨의 희망어린 제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노학자의 꿈과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을 만한 책이다.(엄주엽기자)

0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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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16 16:28   좋아요 0 | URL
캬캬캬 저는 구해놓았지요!!

로쟈 2007-10-16 16:36   좋아요 0 | URL
저보단 형편이 좋으시네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의 머리말을 읽다가 흥미로운 '오역'이 있어서 적어둔다. '오역'이라기보다는 '실수'라고 해야 할 텐데, 벤야민의 에세이 제목인 '번역자의 과제'가 갖는 중의성에 빗대자면 '번역가의 과제'에 충실하다 빚어진 '번역자의 실패'라고 할 만하다. 어제 잠시 들춰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앨피, 2007)에 나오는 한 대목은 이렇다.  

 

 

 

 

"드 만에 따르면 '번역자는 그 정의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어떤 번역도 늘 원 텍스트에 부차적인 것이고, 번역이 원전과 마찬가지의 일을 수행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하고 있다. 벤야민의 독일어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과제Die Aufgabe des Ubersetzers'이다. 여기서 '과제Aufgabe'는 '과제'와 '포기하는 자'(프랑스 투어를 포기하는 사이클 선수는 '아우프가베aufgabe'라고 불린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따라서 벤야민의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실패'로 옮길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번역자는 원전을 옮기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 그리고 번역 자체는 늘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번역자는 원전을 제공하는 시인이나 예술가와는 다르다."(117쪽)

원론적으로 말해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다고 하니까 역자가 머리말에서 실패하는 일이 이상한 것은 아니겠다. 그것이 거꾸로 말해주는 것은 '번역자의 과제'를 현재 수행중이라는 것일 테니까(모든 번역자가 갖는 느낌이겠지만 번역은 마치 장거리 사이클링처럼 고단하고도 지리한 자기와의 싸움인지라 언제라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머리말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여러분들이나 나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한다.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시작이 이렇다. 데리다는 이 두번째 문장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je voudrais apprendre à vivre enfin)"에 대한 자세한 검토(내가 '뜯어읽기'라고 부르는 것)로부터 자신의 발언을 시작한다(이건 거의 그의 스타일이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9쪽)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진 불어의 '이상한 표어'는 'apprendre à vivre'를 옮긴 것인데, 특이하게도 불어에서 이 문구는 사는 법을 가르치다와 배우다,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며칠 전에 '공부'에 대한 짤막한 원고를 썼는데, 불어의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할 뻔했다. 가르치기와 배우기의 변증법!). 이것은 역자도 각주2)에서 설명해놓은 것이다(영역본에서는 첫번째 각주로 나온다) "프랑스어에서 'apprendre'는 '-을 배우다'는 뜻과 함께 '-을 가르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번역 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용문을 옮길 때 역자는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다른 번역서들에서도 중의적인 의미는 모두 병기해주던 역자가 왜 이 대목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란 시작을 우리말로는 동어반복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실상 원문 자체가 '동어반복'이긴 하다.

"Apprendre à vivre. Etrange mot d'ordre. Qui apprendrait? de qui? Apprendre à vivre, mais à qui?.." 하는 식으로 'Apprendre à vivre'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맥상 둘은 의미가 같지 않다. 첫번째 'Apprendre à vivre'는 뒤에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Qui apprendrait? de qui?)'가 따르므로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야겠지만, 두번째 'Apprendre à vivre'에 뒤따르는 'à qui?'는 나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라(de qui?)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을 가리키는 '누구에게?'이다. 즉, 이렇게 돼야 한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 사는 법을 가르치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르치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

영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To learn to live: a strange watchword. Who would learn? From whom? To teach to live, but to whom?.."(역자는 왜 영역본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요점은 불어의 Apprendre à vivre란 관용어가 To learn to live와 To teach to live란 의미를 둘 다 가지며 우리말 번역에서도 불가불 그렇게 따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문맥에서 독립적인 Apprendre à vivre는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데리다가 애용하는 '결정불가능성'의 또 다른 사례이겠다). 이 점은 데리다가 곧바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맥락 바깥에서 그것 자체만 놓고 볼 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한 문구를 이룬다. 더욱이 그 관용어는 어느 정도까지나 번역될 수 있을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ce mot d'ordre sans phrase'를 옮긴 것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sans phrase'는 '쓸데없는 말은 빼고' '간단 명료하게'란 뜻도 갖고 있다(영역본은 'sans phrase'를 따로 옮기지 않았다). '이 표어 자체로는' 정도의 뜻이면 충분할 듯하다('Apprendre à vivre'는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에 '문장이 없는 이 표어'란 번역은 어색하다. '앞뒤로 따라붙는 문장이 없는'이라고 풀어준다면 모를까). 즉, 문맥 바깥에서(out of context) 'Apprendre à vivre'란  이 문구(관용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하다(의미를 확정지을 수 없다).

한 가지 더 역자의 실수라고 할 만한 것은 인용문 안의 ('문맥'이란 말을 보충하는) 삽입절을 누락한 것. 원문으로는 "mais un context, toujour, reste ouvert, donc faillible et insuffisant'이 번역에서 빠졌다. 영역으로는 "but a context , always remains open, thus fallible and insufficient"이고 우리말로는 "하지만 이 문맥이란 것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에 틀리기 쉽고 불충분하다" 쯤이다. 다시 말해서 문맥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의미의 불확정성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서로에게 배움/가르침을 주고 받으며(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가?) 아무리 험한 길이더라도,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07. 10. 13.

P.S. 집에 돌아와 예전 번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에서 같은 대목을 찾으니 이렇게 옮겨져 있다: "사는 법을 배움: 이상한 구호이다. 누가 그것을 배웠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누구에게 배운다는 말인가? 누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가? 우리가 사는 법을 알고 무엇보다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가? 그리고 왜 '궁극적으로'인가?.."  사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이런 대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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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2007-10-13 18:3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을 따라' 데리다를 언제 한번 읽어보자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로쟈 2007-10-13 19:12   좋아요 0 | URL
기분이 좋아지셨다니까 저도 좋군요.^^

hemiola 2007-10-13 22:14   좋아요 0 | URL
아. 아프렁드흐 아 비브흐요.. ㅋ 예전에 뽀네뜨(Ponette) 란 영화를 보다가 apprendre a vivre 란 대사를 보고 한참을 되새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apprendre a vivre... apprendre a vivre... 그런데 막상 한국말로 옮기려니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불어로 중얼거리기만 했죠. apprendre a vivre.. apprendre a vivre... 외국어를 느끼는 맛이란 이런 거 같아요. 직역이나 의역이나 오역을 떠나서 입에 붙고 리듬이 되고 살이 되고 그것이 때로는 사상이 되기도 하고, 어쨌든 좋은 말입니다. ㅋ

로쟈 2007-10-13 22:58   좋아요 0 | URL
네, 어쨌든 좋은 말입니다...

람혼 2007-10-14 02:24   좋아요 0 | URL
저도 apprendre의 번역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는데, 이런, 로쟈님께 선수를 빼앗겼군요.^^; "가르치기와 배우기"라는 제목을 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도 갑자기 오랜만에 떠오릅니다.^^

로쟈 2007-10-14 08:11   좋아요 0 | URL
꼼꼼한 번역에서 의외로 실수와 누락을 발견하게 되어 겸사겸사 페이퍼를 썼습니다. 디음부터는 선수를 빼앗기지 마시길.^^

yoonta 2007-10-14 11:59   좋아요 0 | URL
"사는법을 배우기"와 "사는 법을 가르치기"와 같은 관용어가 프랑스어에서는 중의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네요. '산다는 것'이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도 하고 배우면서도 동시에 가르치기도 한다는 일상적 삶의 지혜를 반영하는 것 같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하여튼 늘 느끼는 거지만 로쟈님의 "뜯어읽기"도 보통 단수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0-14 12:44   좋아요 0 | URL
영역본과 대조해서 읽다보면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했을 대목입니다. 다만, 굳이 지적들들 하지 않거나 다른 일들에 바쁠 따름이겠지요...

balmas 2007-10-14 17:52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오식과 어색한 표현들이 몇 군데 눈에 띄어서 공지를 할 생각이었는데, 로쟈님이 오역도 찾아주셨군요. 첫 대목부터 오역이 나와서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다행입니다. 로쟈님께 감사드리고, 어서 공지를 해야겠군요.

로쟈 2007-10-14 18:0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예전판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번역 덕분에 데리다를 읽는 이들이 늘어난 건 고무적인 일이죠.^^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9, 10월의 사회적 독서의 주제 중 하나는 '제국'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0493). 미처 다 읽지는 못하겠지만 견적이라도 내볼 요량으로 대출한 책이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 

옥스포드대출판부에서 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의 한 권이다. 내가 '아주 간단한 입문'이라고 부르는 시리즈로서 분량 대비 만족도가 아주 높은 책들이다.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더 읽을 거리'가 제시돼 있는데 몇몇 권은 국내에 이미 소개된 책이어서 겸사겸사 참고해볼 만하다.

 

 

 

 

먼저, 중국사학자 페어뱅크의 <신중국사>(까치글방, 2005)는 '중국 제국에 관한 입문서'로 소개돼 있다. 알다시피 페어뱅크는 하버대학의 역사학부 교수로서 영어권에서는 중국사학의 대부 정도 될 듯하다. 최근에 10권과 11권이 번역돼 나온 <캠브리지 중국사>(새물결, 2007)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기도 하다. 

 

 

 

 

마셜 호지슨의 <이슬람의 모험>(1974) 전 3권도 무슬림 제국의 건설과 보편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서로 추천되고 있다. 호지슨의 책은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2006) 정도가 소개돼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물론 역사적인 '세계체제'와 '세계 제국'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의"로 꼽히는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까치글방, 1999)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D. 아베메티의 <세계 지배의 동학(The Dynamics of Global Dominance)>(2000)은 "근대 제국에 관한 개론서 중 하나로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고 소개된다.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2006)는 "식민주의에 관한 체계적이면서도 간결한 책"이라고 하며, 국역본 소개가 빠져 있지만 안토니 파그덴의 <민족과 제국>(을유문호사, 2003)은 "제국 건설과 대량 이주의 연관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책으로 아주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언급된다. 제국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주제가 오리엔탈리즘인바, 이에 대해서는 물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이 고전적인 저작이다. 저자가 거기에 덧붙이고 있는 건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이다. D. 카나딘의 책 <오리엔탈리즘: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어떻게 바라보았나>(2001)와 함께 "에드워드 사이드의 입장에 반대하는 대응들"로 제시되고 있다. 식민지와 탈식민지에 관한 연구서로는 단연 로버트 영의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포스트컨티넨털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이 역시나 국역본 소개에 빠졌지만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룬 좋은 책"이다.

  

'아주 간명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또한 영의 저작이다(앞의 책의 다이제스트판 정도 되겠다).

 

 

 

 

J.A. 홉슨의 <제국주의>(창비, 2003)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2004)과 함께 "제국에 반대하는 오랜 전통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반향을 얻고 있는 텍스트들"로 거명된다(국내엔 파농의 책 두 권과 전기 두 권이 소개돼 있다). 국내 소개돼 있는 책들 가운데 맨마지막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학사, 2001). "제국주의적 현재와 미래에 관해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 중의 하나"인데, 그 논쟁에 관해서라면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이 참조가 되겠다.

Empire: The Russian Empire and Its Rivals

끝으로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이지만 소장도서라서 저자의 언급이 반가운 책은 도미니크 리븐의 <제국: 러시아 제국과 그 경쟁자들>(2000).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의 팽창과 쇠퇴를 다루고 있다. 비교연구도 잘 되어 있다"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분량이 5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대저 이 정도는 읽어줘야한다는 얘기겠다...

0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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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16 16:46   좋아요 0 | URL
제국에 대한 책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읽고 싶은 책들 중에 번역 안된 것들 혹은 절판된 것들이 많아 포기했었어요. 아부 루고드나 사미르 아민 책 같은 것들... 혹시 읽어보셨나요? 읽어보셨다면,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영어로 사서 보려니.. 심적 부담이 넘 커서... 일단 로쟈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

로쟈 2007-10-16 17:12   좋아요 0 | URL
딸기님하고 제가 관심지역이 좀 다르죠.^^; 제국이라고 해도 저는 일반론과 러시아 제국 쪽에 관심이 있어서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가 번역됐다는 건 알게 됐습니다. 그의 <카오스의 제국>도 소개되면 좋겠네요(찾아보니 분량이 얇은 책이군요)...
 

제국과 제국주의에 관한 책들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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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스티븐 하우 지음, 강유원.한동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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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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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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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제국주의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13,000원 → 13,000원(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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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문화 제국주의
존 톰린슨 / 나남출판 / 1994년 11월
9,000원 → 9,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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