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읽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서 한 대목을 다시 뜯어 읽는다(지난번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1715228 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계기는 아렌트에 관한 서평기사를 찾아 읽다가 문득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의 상당부분은 그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읽었기에 상기된 면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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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2장은 지식인과 철학자의 (가상)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과학은 재정이 튼튼한 국가가 공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경우에는 소수가 다수를 더욱 교묘하고 덜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입니다."라는 '지식인'의 비판에 "정말로 그러했다고 믿는다면, 왜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지요?"라고 '철학자'가 반문하자 '지식인'은 다시 이렇게 답한다(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글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전문 지식인인 저는 기존의 모든 연구 방식에 대해 한결같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월급을 받는 철학자의 사치를 누릴 처지가 못됩니다. 학생들은 순수한 형태의 회의주의를 알기 위해 철학강좌를 들을 수도 있지만, 지식인이 줄 수 있는 교훈은 좀더 화해로운 입장에서 나온 해답을 통해 회의주의를 희석시켜서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활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는 일부러 연출한 상황일 수 있는데, 사회과학자들은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 주인이란 그들에게 보수를 지불하는 특정한 고객과 그들의 작업을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입니다."(114쪽)
간단히 말하면 용역을 받은 것보다 많은 지식이 생산되며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고, 이러한 과잉/잉여를 통해서 사회과학자들은 '특정고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있다는 것. 지식인은 물론 이러한 '떡고물 지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을 관심대상으로 한다. '지식인'은 이렇게 부연한다.
"여기서 지식인들은 20년 전에 시카고 대학교의 도서관학 학자 돈 스완슨이 발견한 현상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현상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undiscovered public knowledge)'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완슨은 단지 연구문헌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의학 연구의 고질적인 문제를 의미있게 제시할 수 있었고 어쩌면 해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114-5쪽)
무슨 얘기냐면 새로 연구비를 투자하지 않고 기존의 연구문헌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르도 어떤 과제들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과학연구가 지나치게 전문화된 나머지 '진짜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분리되고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연구결과들간의 소통과 연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 "연구를 더 많이 의뢰하다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해답의 대부분이, 어쩌면 해답의 전부가 다양한 과학 저널에 이미 나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문헌들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지요."란 결론은 그래서 나온다(덧붙이자면, 지난번 페이퍼에서 역자가 오역했다고 한 'across'의 용법은 여기서도 나온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across specialities').
돈 스완슨의 경우엔 "젊은 여성의 손가락을 마비시키는 병인 레이노드 증후군의 사례에 대해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고,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의학이라는 전문분야에서조차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많은 연구비를 요구하는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를 참조해서 자신들의 통찰을 얻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스완슨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스완슨은 소위 '정보학자'이지 '생명과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사례가 되겠지만 최근 BBK 이면계약서의 '진실'을 들춰낸 네티즌들의 경우에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티즌들이 한 일은 단지 몇 년전 신문기사들을 찾아낸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현재 보수언론들이나 유권자들이 모른 체하고 있는 'e-bank 사업자 이명박'의 진실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스티브 풀러에 따르면 바로 그러한 역할이 지식인의 역할이다(혹은 대중지성으로서의 네티즌의 역할이겠고). 그렇다면, 이러한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은 지식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지식인들에게 학자들이 가끔 신문이나 서평에서 내세우는 극단적인 주장에 더욱 대담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까 과연 그것이 정말로 참신한 발견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가 훌륭한 선구자를 잊었던 것에 불과한지를 묻게 합니다.(...) 두번째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좀더 긍정적입니다. 즉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식인의 잡식성 독서 습관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독창적인 연구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지식인들이 너무 많이 양보하는 셈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연구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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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장이 '대중지성'(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181826481&code=210000)의 일원으로서 내게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1)잡식성 독서 습관은 정당하다, (2)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해도 좋다. 이 두 가지는 사실 이제껏 해온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걸 격려삼아 '인터넷 서평꾼'으로서, 그리고 '대중지성'으로서 (내게 보수를 주는 '특정한 고객'은 아직 따로 없지만)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과 대면하는 일을 앞으로도(적어도 당분간은) 계속해나갈 것이다(짝짝짝!).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한다면 혹 우리가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이 약간 나아질지 모른다는 '실현되지 않은 기대'를 걸고서...
07.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