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매거진 <텍스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늑장을 부린 탓에 급조한 것이지만 몇 가지 추억거리를 담고 있어서 버리기엔 아깝다. 창고에 넣어둔다.

르네 지라르(1923- )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04)에 대해서 몇 자 적어내는 것이 내게 떨어진 몫이었다(이하에서는 <사탄이 번개처럼>으로 줄임). 하지만 일은 콩구워 먹듯이 되진 않았고, 이래저래 미뤄지는 사이에 아마도 가장 요긴한 지라르 입문서가 될 <문화의 기원>(기파랑, 2006)이 장마가 시작될 무렵에 ‘번개처럼’ 출간됐다(한국어판은 전세계에서 네 번째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재작년에 불어본이 나온 이 대담집은 문학과 종교학, 문화인류학 등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이 예외적인 사상가의 ‘지적 자서전’으로 적어도 당분간은 모자람이 없는 책인데,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사들면서도 부담감을 다 떨쳐낼 수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견적이 너무 나오는 거 아니야?’라고 속으로 툴툴댔던 것이다.


사실 지라르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 않다. <문화의 기원>의 서문에서 대담자들은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는 이사야 벌린의 인용구를 재인용하면서(벌린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각각 이 ‘여우’와 ‘고슴도치’에 비유했다) 이 고슴도치-지라르의 그 대단한 것이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이라는 걸 미리 일러주고 있다. “이 두 가지 가설에서 출발한 지라르는 40년 이상을, 찰스 다윈의 말대로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을 해오고 있다.”(10쪽)


지라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단순한 것은 그 두 가지 가설만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고, 동시에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 ‘기나긴 논증’에 대해서 되짚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지적대로 단순성과 명료성은 지라르의 특장이면서 비판의 빌미이다. 나는 이 익숙한 양면성에 대해서 몇 자 거들기보다는 지라르에 대한 사적인 기억 몇 가지를 나열함으로써 내게 떨어진 발등의 불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지라르 자신보다 지라르에 대해서 더 잘 말할 자신이 없는 나로선 ‘지라르와 나’ 정도가 감당할 수 있는 주제이긴 하다.

 


 

 

 

 

 

 

 

 

지라르의 출세작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이다. 파리 고문서학교 출신인 그가 미국의 대학에서 소설을 강의하기 시작한 건 그 자신에 따르면 ‘첫 지적 모험’이었는데, 30대 중반에 스탕달과 플로베르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대단한 걸 발견한다: “그 무렵 저는 <적과 흑> <마담 보바리>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연달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원한 남편>을 읽던 때가 정말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35쪽)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세르반테스와 완전히 동일한 것을 발견하며 이로써 ‘모방의 리얼리스트’로의 길로 접어든다.

 

지라르의 이 출세작은 비교적 일찍 우리말로 번역됐는데, 전체 12장 중에서 8장이 문학평론가 김윤식에 의해 영역본에서 중역돼 나온 <소설의 이론>(삼영사, 1977)이 그것이다(<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완역본이 나온 것은 2001년의 일이다). ‘소설의 이론’이란 표제는 막바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데(물론 역자의 의도였을 것이다), 역자는 소설이론가 루시앵 골드만이 이 저작들을 ‘소설의 이론’이라 할 만한 단 두 권의 책으로 꼽고 있음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맞은 첫 여름방학에 내가 이 두 권의 책을 손에 든 것은 지극한 당연한 일. 루카치의 책은 난해했지만 지라르의 책은 읽을 만했고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론은 흥미로웠다(<영원한 남편>에 대한 그의 분석은 소설보다도 재미있었다!).  

 

 

 

 

 

 

 

 


다행히도 지라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질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문학평론가 김현의 노고 덕분이었다. 지라르 이론의 전모를 다루고 있는 최초이자 유일한 연구서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나남, 1987)가 바로 출간되었던 것이다. 240여 쪽의 비교적 얇은 분량이지만 실제 지라르론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 절반은 지라르의 도스토예프스키론과 카뮈론으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은 그럼에도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나 출간된 <문화의 기원> 이전에 르네 지라르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책이었다.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김현이 파악한 지라르 이론의 핵심은 ‘폭력’이고 ‘폭력의 구조’였다. ‘모방욕망’과 ‘희생양’이라는 두 키워드를 그는 ‘폭력의 구조’로 묶었던 것(김현은 지라르의 <희생양>을 그의 가장 좋은 책으로 꼽는다). 폭력에 대한 관심은 사실 80년대 중반 김현 비평의 화두이기도 했다. “억압적 세계의 기본적 욕망에 대한 분석․해석”을 시도한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은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며 거기엔 ‘증오와 폭력’ ‘폭력과 왜곡’이라는 두 중요한 평론이 실려 있다.


<폭력의 구조>에도 ‘지라르의 눈으로 한국의 신화 읽기’가 몇 대목 포함돼 있지만 그러한 평론들이 지라르에 대한 관심과 읽기에 힘입은 것이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폭력의 구조>의 글 머리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욕망은 폭력을 낳고, 폭력은 종교를 낳는다! 그 수태․분만의 과정이 지라르에겐 너무나 자명하고 투명하다. 그 투명성과 자명성이 지라르 이론의 검증 결과를 불안 속에 기다리게 만들지만, 거기에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래서 지라르의 이론을 처음부터 자세히 검토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거기에는 더구나, 1980년 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17쪽, 강조는 나의 것) 그는 그 폭력의 의미를 철저하게 질문한 아주 드문 비평가였다.

 


한 비평가에게는 ‘소설의 이론’을, 또 다른 비평가에게는 ‘폭력의 구조’를 의미했던 지라르가 내게 의미했던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였다. 그의 <도스토예프스키: 이중성에서 단일성으로>(1963)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묵시록’을 마지막 장으로 갖고 있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보유편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새로운 전망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란 절로 <소설의 이론>을 마무리한 젊은 루카치가 이후에 쓴 도스토예프스키론에 비교될 만한 것이었다. 두 걸출한 이론가에게서 소설론의 끝은 도스토예프스키였던 것이다.

 

 

 

 

 

 

 

 


‘소설의 이론’ 이후에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으로 나아가며 ‘소설의 진실’을 발견한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1972)으로 넘어간다(나는 두 사람의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참조한 졸업논문을 쓰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지라르는 문학비평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넘어간 자신의 작업이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라는 우려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되짚어보면, 그의 본류는 ‘모방욕망의 인류학’ ‘종교적인 것의 인류학’이었고, 그러한 작업의 영감을 문학비평에서 가져왔다는 점이 특이할 따름이다.


우리에게도 소개돼 있는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1997)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1978)과 짝패를 이루는 책이다. “제가 <폭력과 성스러움>을 쓸 때 처음에는 2부의 책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부는 고대문화, 2부는 기독교에 관한 내용으로 말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료는 다 모아놓고도 기독교 부분은 제쳐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문화의 기원>, 52쪽)


이 2부는 두 사람의 동료/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대담의 형식으로 출간된다. 말 그대로 기독교에 관한 부분인데, <희생양>(1982, 국역본1998)이 1부의 보유라면, <사탄이 번개처럼(1999)은 2부의 보유쯤 된다. 후자의 경우엔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온 것들>의 두어 가지 실수를 바로잡은 것이라고 지라르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실수란 건 기독교와 연관된 것에 대하여 ‘희생’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백하는데, 실상 <사탄이 번개처럼>에는 ‘희생’이란 말이 낙석처럼 널려 있다.


여느 저작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지라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그는 신화와 기독교를 구별하면서 그 둘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신화가 가해자의 편인 데 반해 기독교는 희생양의 편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신화의 해석은 집단 폭력의 희생물을 죄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완전히 잘못이고 환상이며 그러므로 거짓이다. 반면에 성경의 해석은 이 희생물을 무고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해석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고 믿을 만하며 그러므로 참이다.”(14쪽)


이러한 단언은 어떤 기시감으로 우리를 안내하지 않는지? 이를테면, ‘신화의 거짓과 성경의 진실’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이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 <사탄이 번개처럼>을 구성한다. 모방적 경쟁관계로 빨려 들어감으로써, 즉 스캔들에 불가피하게 말려들어감으로써 ‘모방의 회오리’, 혹은 무차별적 폭력에 도달하게 되는 메커니즘 자체가 바로 사탄이다(예수 가라사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스캔들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에 휩싸인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이 메커니즘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러한 폭로를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전범적이다. 그의 소설들은 나폴레옹 모방에서 그리스도 모방으로의 이행, 곧 신화(변증법)에서 복음서로의 이행을 표시하고 있는 이정표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르네 지라르와 도스토예프스키, 이 두 ‘두더지’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결점도 비슷하고. 지라르에게서 맹목적인 서구 및 기독교 우월주의의 냄새가 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사실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맹목적인 러시아 및 정교 우월주의의 냄새를 다 가리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도 이 '인문학의 다윈'은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 할 만하다(나의 졸업논문은 ‘인류학자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것이었다)!    

 

06. 07. 24.

 

P.S. 물론 투명성과 자명성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미덕이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미덕이 아니다.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고 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두 사람의 '두더지적 성향'과 종교적 지향이다. 더 파고들어가면 두더지도 여러 종류가 있다(독백적 두더지, 대화적 두더지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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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6-07-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르네 지라르에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를 알수있는 글이네요.."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라..일단 <사탄이 번개처럼..>하고 <문화의 기원>을 보관함에 넣어 봅니다. 근데 지라르에 대해서 가장 유용한 입문서로는 어떤 책이 좋은가요?..
아 그리고 한가지 질문더..본문에서 지라르의 신화와 기독교의 구분이 무슨 말인지 그리고 지라르는 왜 신화에서 기독교로 이행하는지 이해하기 힘들군요. 좀더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

로쟈 2006-07-2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 적은 대로입니다.<문화의 기원>이 가장 좋은 입문서일 텐데, 사실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같은 책을 재미있게 읽어본 경험이 있어야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거 같네요. 신화와 기독교의 구별은 본문에서 적은 바대로이고, <사탄>에서 지라르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모방욕망과 그 결과로서 발생하는 희생양 제의의 메카니즘을 기독교는 폭로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지라르는 호교론적인 입장까지 보이는데, 아주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아마 이들 책들에 대한 리뷰들을 참조하신다면 좀 나으실 것 같네요...

푸른괭이 2006-07-25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상 <영원한 남편>은 지라르의 '발견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토에서도 정말 연구 안 된 작품이거든요.(키르포친조차도 내용 훑기 정도 밖에 못했으니까요. 발표도 한 번 한 적 있지만, 참 뛰어난 작품인데 말이죠.) 전체적으로, 지라르는 본원적 의미에서의 도-키 연구자는 아니었을 수 있지만 여하튼 바흐친 급입니다. 개념틀을 선물해주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 루카치가 도-키에 대해 조금만 더 많이 써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아 있습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지금 읽으니 더더욱 좋더군요.

로쟈 2006-07-25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보다 지라르를 먼저 읽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시각으로 읽게 되더군요. 그러한 '발견'이 비평가의 진정한 몫이 아닐까 싶고...

로쟈 2006-07-2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얼마전에 전해듣긴 했습니다. '독자들의 힘'에 한몫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