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길에 지승호 인터뷰집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시대의창, 2008)을 손에 들었다. 책이 나온 건 낮에 알았다. 올 출판계의 최대 기대주 중의 한 사람이 우석훈씨인데,이 책은 에피타이저로 미리 나온 것처럼도 보인다. 책 뒷갈피에 시대의 창에서 나온 책들이 몇 권 소개돼 있길래 리스트로 만들어둔다. 오다가다 몇 권 읽게 될지도 모르기에...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88만원 세대'를 넘어 한국사회의 희망 찾기
우석훈.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2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 정인교 VS 이해영 맞짱토론
이해영.정인교.정남구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장하준 지음, 지승호 인터뷰 / 시대의창 / 2007년 11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13,500원 → 12,150원(10%할인) / 마일리지 6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4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8일에 저장



6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이번주 <씨네21>을 읽었다. 가판에서 '코언 형제에게 찬사를!'이란 문구를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코언 형제(내겐 '코엔 형제'가 더 익숙한다)는 곧 개봉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언 형제이다. 더불어 홍상수의 신작 <밤과 낮>에 대한 기사도 들어 있었으니 손이 안 갈 수 없었다(그리고 든 생각. 좋은 영화들이 나와야 영화잡지도 때깔이 난다!). 기억엔 작년인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칸느영화제에 출품됐었는데 나는 그때서야 코맥 매카시란 생소한 거장이 원작자란 걸 알게 됐고 그의 책 몇 권에 대한 판권을 간접적으로 문의한 바 있었다. 그때 이미 국내의 한 무명 출판사로 넘어갔다고 전해 들었는데, 최근에 나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사피엔스21, 2008)를 보니 그게 '사피엔스21'이었던 모양이다(특이하게도 주로 입시문제집들을 내는 곳이다. <크리티카> 같은 무크 비평지와 함께). 올해 들어 가장 기대할 만한 원작과 영화에 대한 소개기사들을 옮겨놓는다.

매거진t(08. 02. 18) [이다혜의 BOOK]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 그는 어떤 사람이오, 궁극의 악당?
그런 식으로 부를 사람은 아니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부르겠소.
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이지.
그건 범죄가 아닌데.
요점은 그게 아냐. 하나 말해 줄까.
말해 보쇼.
자넨 그와 거래를 할 수 없어. 다시 말하지. 설령 자네가 그에게 돈을 돌려준다 해도 그는 자넬 죽일 거야. 그와 얽혀들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으니까. 다 죽었지. 살 확률이 거의 없어. 아주 특이한 인간이거든. 원칙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돈이든 마약이든 뭐든 그런 것 따위를 다 초월하는 원칙.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맥카시

2.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줄거리는 이렇다. 모스는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만이 남아 있는 사막의 살육 현장에서 거액이 담긴 돈가방을 발견해 집으로 가져온다. 그 가방을 발견한 순간부터 모스는, 이 일의 끝이 단 하나 뿐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모스는 시거라는 추격자에게 쫓기며 도주를 시작한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보안관 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음울하게 바라본다.

3. 코맥 맥카시는 서부의 작가다. 현대 서부, 멕시코와의 국경 지대에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방식이 그의 책에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외에 <피의 자오선>을 관통해 국경 삼부작을 지나 <길>에 이르는 그의 서부에는 처연함만이 핏빛으로 빛난다. 소년들은 길 위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맞는다. 간결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암시하는 문장들은 책을 덮고 난 뒤 오랫동안, 입 속에서 모래의 칼칼함을, 뜨겁고 건조한 대기의 텁텁함을 느끼게 만든다.

4. 코맥 맥카시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잘해봐야 본전이다(라고 쓰고 멍청한 짓이다, 라고 읽는다). 코엔 형제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영화화한다는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 그랬다. 당시 나는 맥카시의 소설 5권을 한 달 내내 연달아 읽은 직후였고, 눈만 감으면 소설 속 장면이 꿈 특유의 과장된 필터를 거쳐 꿈으로 형상화되곤 했다. 아무래도 코엔 형제와 맥카시의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미친 게 <분노의 저격자>였다. 영화는 책을 그대로 한 땀 한 땀 옮기듯 만들어졌고(몇 부분은 생략되었지만 이 정도면 고스란히 옮겼다는 말에 준한다), 영화는 책과 또 다른 방식으로 살육의 시를, 처연한 묵시록을 써내려갔다.

5. 한동안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소설을 읽는 이유, 영화를 보는 이유가 이 한 작품의 소설 원작과 영화 버전으로 수렴되었다. 만일 책을 다 읽고도 영화를 다 보고도 이게 그저 서부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6. 이 나라는 사람들에게 관대하질 않아. 하지만 끝까지 책임을 묻는 경우도 없는 것 같아. 참 묘한 일이지. 끝까지 추궁을 안 하니 말야. 이 하나의 가족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봐. 내가 아직 여기서 무슨 영화를 보려고 얼쩡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어. 다들 젊었었지. 그 중 반은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몰라. 여기에 뭐 좋은 점이 있을까? 그래서 내가 한 번 생각해 봤지.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 나라에는 해결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못 느끼게 됐을까? 그런 걸 느끼질 못하지. 나라는 그저 나라일 뿐이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296~297)

필름2.0(08. 02. 14) 진정한 웰메이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이상한 학살 현장을 발견한다. 시체들이 널려 있고, 망가진 트럭 뒤엔 마약 더미가 가득하다. 또 다른 트럭 운전석에는 유일한 생존자가, 조금 떨어진 그늘엔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이 있다. 생존자 대신 돈 가방을 챙긴 모스는 한밤중 현장을 다시 찾지만, 마약 딜러들에게 쫓기게 된다. 그러나 더 끔찍한 추격자는 따로 있으니, 마약 조직의 의뢰를 받은 살인마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다. 마침 지역 보안관 에디 톰 벨(토미 리 존스)이 쉬거의 독특한 살인 기법을 알아보고, 필사의 탈주를 감행하는 모스와 유령 같은 사내 쉬거, 보안관 벨 사이의 괴이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서부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미국 작가 코맥 맥커시의 2005년 동명 소설을 코엔 형제가 직접 각색한 스릴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위대한 서스펜스를 소유한 영화다.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과 무너져가는 세계, 자기 자리를 잃어가는 사람들을 고요히 성찰하며 씁쓸한 어른의 시선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시퀀스에 냉정한 유머와 조여드는 서스펜스, 소름 끼치는 추격전을 뒤섞는 노련함은 코엔의 영화 중 최고다.

1980년대 황폐한 서부 텍사스 국경 지역의 풍광을 훑는 오프닝부터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를 비집는 카메라와 이미지는 <분노의 저격자>(1984)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다(*원제는 <블러드 심플>. 코엔 형제의 데뷔작이자 내가 제일 처음 본 그들의 영화). 하지만 긴장의 밀도는 훨씬 높다. 손에 땀을 쥐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얼얼하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쉬거가 산소탱크에 연결된 호스로 단숨에 사람을 죽여버릴 때부터 등장하는 기묘한 웃음과 살벌한 긴장은 내내 이어진다. 쉬거가 동전 하나로 식료품점 주인의 목숨을 농락하는 순간, 모스가 마약 딜러들이 푼 맹견에게 쫓기는 순간, 코엔 형제의 괴이한 리듬감과 유머감각은 탄복스럽다. 쉬거가 돈 가방 속 추적기의 신호를 따라 모스가 묵고 있는 모텔 방문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영화 후반 살육이 벌어진 이후 방 안에 숨은 쉬거와 문 밖에 선 보안관 벨의 모습이 뚫린 자물쇠 구멍 사이로 비치는 순간 등등 곳곳에 심어진 ‘침묵의 서스펜스’는 전율의 체험을 안겨준다.

살인적 서스펜스의 진수는 악의 결정체 쉬거로부터 온다.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과 유령 같은 표정으로 희대의 살인마 쉬거를 소화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는 엄청난 충격으로 남는다. 늙은 보안관 벨 역의 토미 리 존스, 인간 욕망의 표상 모스 역의 조쉬 브롤린 등 주변 모두를 압도하는 귀신같은 연기력이다. 영화음악가 카터 버웰의 미니멀한 사운드와 정교한 편집, 빽빽한 침묵 속을 가르는 절묘한 산탄총 사운드 디자인, 야만적이면서도 신화적인 텍사스의 풍광 속에 절망적인 인간들의 대결을 잡아낸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까지 모든 요소들이 최상급이다. 웰메이드에도 어떤 경지가 있음을 정말 실감하게 된다.

08. 02. 18.

P.S. 영화에 대해서는 예고편(http://www.youtube.com/watch?v=YOohAwZOSGo)과 자세한 리뷰 '오, 형제여! 여기까지 왔는가'(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5081)를 더 참조할 수 있다. 생각해보니 그의 소설들도 작년에 구입했다! 어디에 두었더라...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18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8 22:35   좋아요 0 | URL
보셨군요.^^ <추격자>와 함께 평론가들이 요즘 열심히 강추하고 있는 영화더군요...

2008-02-18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8 23:35   좋아요 0 | URL
저는 리뷰 읽는 걸로 때우는 영화들이 많아져서요.--; 그래도 두 영화는 볼 계획입니다...

드팀전 2008-02-18 23:12   좋아요 0 | URL
하비에르 바르뎀은 아카데미에서 조연상 받을 성 싶은데..과연 어떨지 두고 봐야지요.^^

로쟈 2008-02-18 23:34   좋아요 0 | URL
주연이 아니고 조연인가요??

twoshot 2008-02-19 01:12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다니엘 데이-루이스한테 갈거 같고 하비에르 바르뎀에겐 조연상이 가지 않나 싶네요. 그나저나 저에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소설보다 영화가 더 강했습니다.

로쟈 2008-02-19 06:58   좋아요 0 | URL
저는 당연히 주연상 후보인 줄 알았더니 조연상 후보로군요. 주연은 따로 있단 얘긴데, 의외입니다.^^;

소경 2008-02-19 20:1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구미가 땡기는 영화네요. 그냥 심상치 않다고만 생각했는데 에피소드들도 읽을거리가 많겠네요. 정말 21일이 기다려져요

로쟈 2008-02-19 20:45   좋아요 0 | URL
네, 끝나가는 방학의 아쉬움을 좀 달래줄 것 같습니다...

turk182s 2008-02-22 00:48   좋아요 0 | URL
이거 초긴장 영화 입니다.. 안볼려다가 본건데 정말 솔직히 그냥 누가보라길래봤는데 예전에 본 "파고"하고 웬지 냄새가 비슷하길래,,, 알아보았더니 역시나 코엔감독이더군요...특히나 사이코패스의 엽기적행각과 각인물들의 조용한 갈등과 개성들이 스토리를 흥미롭게합니다. 다보고 너무긴장했는지 나중에 맥이빠지더군요,정말 강추합니다.
 

며칠 전 읽은 기사를 옮겨놓는다. 요즘은 '소설가' '시인' 혹은 '에세이스트'로서의 전력보다는 '보수 이데올로그'로 더 자주 '호명'되는 작가 복거일씨와의 인터뷰 기사이다.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사, 1998) 이후에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그 책도 사실 고종석의 '권유'로 읽었다), 따져보니 그가 말 많았던 '영어 공용화론'을 제기한 지 어느새 10년이다. 그 '잃어버린 10년' 이후에 다시금 영어가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이다. 복거일의 생각은 일견 나이브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가령 자신이 '주변부 지식인'이라고, '기지촌 지식인'이라고 내놓고 말하는 지식인은 많지 않다. 주로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시간을 아껴준다는 얘기이다. 시간은 돈이잖은가...

경향신문(08. 02. 14) “지식인은 자기의사 펴야 한다”

보수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차기 보수정권은 그 첫번째 정책으로 영어 교육 강화를 내세웠다. 두 사안을 한 묶음으로 놓으면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있다. 작가 복거일씨(62)다. 10년 전 홀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고 외쳤던 복씨. “독도 문제에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등 우파 지식인들이 드러내놓고 찬성하기 어려운 견해를 공론의 장에 던져온 그다. 그래서 최근엔 작가보다는 보수 이데올로그로 불린다.

영어 몰입교육이 한창 논란을 일으키는 와중에 그를 만났다. 보수 이데올로그들이 말을 아끼는 상황이지만 그는 선뜻 나섰다. “지면이 있으면 자기 의사를 펴야 한다”는 게 그의 변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토의와 설득이 부족했지만 방향은 옳다”면서 영어 공용화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밝혔다. 독설에 가까운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중심 문화를 인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뭘 하겠다고 나오면 의기는 가상하지만 현실적으론 열악한 형태의 문화를 재발명하는 것밖에 안된다”고도 했다. ‘아메리카 제국’이 중심이 된 지구촌의 외곽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주변부 지식인’이라는 인식이 문제 의식의 출발점이라고 부연했다.

인터뷰 중간에 “우리나라 역사 교과사는 국제적인 기준에 따라 객관적으로 성립된 것이 하나도 없다. 주변부의 빈약한 역사, 열등감을 감추려고 사회가 공모한 것”이라거나 “사회적으로 문학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등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의 문학 생활에 대한 아쉬움도 비쳤다. 그는 “시와 소설만 쓰려고 했는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옹호할 지식인이 없어서 나섰다”면서 “한창 생산적일 때 혁명적인 작품 하나 못 쓰고 정력과 시간의 대부분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데 바친 것이 아쉽다”고 했다. 데뷔 소설 ‘비명을 찾아서’ 이후 이를 넘어서는 작품을 내놓지 못한 아쉬움으로 들렸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연극을 하나 올리려고 희곡을 준비 중입니다. 한·미 동맹이 우리 사회 안보와 번영의 기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인데 그동안 그것을 너무 훼손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께서 한·미 동맹의 회복을 외교의 핵심으로 삼는 것에 부응해서 여기에 맞는 연극을 해보려고 해요. 지금 주한미군들이 (반미 감정에 대해) 섭섭해합니다. 미군이 6·25 때 엄청난 희생을 치렀고, 외지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데, 2002년 대선 때 성조기가 찢어지는 것을 보고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분들에게 (성조기가 찢어진 게) 우리 국민 다수의 뜻은 아니었고, 특수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현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6·25 전쟁을 미군 병사의 시각에서 본 연극을 올리려고 해요. 미군부대에 찾아가서 공연할 겁니다. 우리 배우들은 (한국어) 대사를 할 거고 청중은 미국인이니까 (영어) 자막을 무대에 투사해야 합니다. 우리말 대본과 영어 대본을 같이 쓰고 있는데, 영어 대본이 생각보다 어려워요. 제목이 ‘잊혀지지 않는 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잊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요.”

-영어 말씀을 하셨으니, 여쭙겠습니다. 1998년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서 ‘국제화 시대에 영어를 배우는 건 필수고, 영어를 결국 영어를 배워야 할 수밖에 없다’는 영어공용화론을 제기하셨습니다. 영어몰입 논란까지 부른 현 정부 영어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방향은 옳고 의욕도 참 좋아요.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는데,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현재의 영어교육은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훨씬 늘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수위가 앞질러 나갔다가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거든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과감하게 의견을 내놓고 시민들이 원하지 않으면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실수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지금이 선거철이라서 더욱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초·중등 교사들이잖아요. 그분들이 바꿀 수 있는 능력이나 의향에 한계가 있잖아요. 그걸 고려해서 충분한 토의와 설득을 선행했어야 하는데, 불쑥 목표를 내세운 셈이 됐지요. 인수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하고 거기에 대해 저항하게 됩니다. 정권이 들어서서 집행하면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정책이 나오겠죠.”

-중심부인 미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주변부 지식인‘이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폈습니다.

“현재 지구에선 미국이란 나라가 수도가 됐고, 중심지가 돼 버렸습니다. 동아시아 자체가 주변부가 됐습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 환경을 이해해야 효율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어요. 중심부와 우리 사이의 문화적 격차를 줄이는 것이 합리적인 방안이죠. 그게 주변부 지식인이 할 일이에요. 주변부에 있기 때무에 우리의 전략은 주변부의 전략이어야 합니다.”

-주변부니까, 지식인의 환경은 더 나빠지는 것 아닙니까.

외국에서 직수입한 게 싸고 자연스러우니까, 우리가 허브가 되기는 힘들겠죠. 창조적인 작업은 중심부에서 하고 우리는 그것과 연계돼 부차적인 역할을 하겠죠. 중심부로 통합되니까, 창조적인 작업은 나오기 어렵습니다. (비관적인 전망을 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지식인으로서 저 혼자 작업하는 거보다 (세계인들과) 같이 공동으로 작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계화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개인들에게 활동무대를 넓혀주는 겁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는 그것을 이용해서 국내에서 정치적인 자산을 쉽게 얻으려는 정치가들”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등 금기에 가까운 발언을 하셨습니다.

“독도 문제는 그냥 놔두는 게 제일 좋습니다. 풀 길이 없어요.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조금만 양보해도 그 정권은 그날로 무너집니다. 다만 일본은 여유가 있어서 지식인 중에 ‘한국이 옳다’는 사람이 나와요. 우리나라는 실수로 잘못 표현하면 그날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가 있잖아요. 이런 게 지적 풍토를 척박하게 만듭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이 공과가 있지만 시대에 주어진 핵심 과업을 잘 수행했다면서 긍정 평가를 하신 바 있습니다. 우파 진영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데 동의합니까.

잃어버린 10년, 저도 자주 씁니다만 어떤 면에서 보면 치러야 될 과정이었어요. 길었죠. 김대중 정권으로 끝냈으면 좋을 건데…. 역사적인 정황을 생각하면 호남 대통령이 언젠가 한번 나왔어야 했어요. 그거는 밟아야 할 수순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신 것은 아쉽죠. 좌파정권이 두 번 들어설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분명히 나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좌파이념은 청사진일 때는 멋진데, 막상 적용해보면 많은 문제가 나온다는 것이 판명됐거든요. 값진 경험으로 남을 겁니다.”

-같은 보수논객으로서 이문열씨와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문열씨가 ‘유교적인 보수주의자’라면 ‘복거일은 글로벌한 보수주의자’로 분류하곤 하는데.

이문열씨와 비교적 친한 사이입니다.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도 비슷합니다. 우파라고 할 때는 같은 편에 섭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일 거예요. 개인의 자유를 한 껏 늘리고 사회적인 간섭은 되도록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죠. 예컨대 매춘이라든가 인공수정 등 사회적인 간섭이 심한 것에 대해서도 당사자의 판단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소수죠. 이문열씨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지만, 자유주의자는 아닌 것 같아요. 아마 영어공용화론 같은 것도 다를 거예요. 저는 ‘개인들이 한국어도 쓰고 영어도 써서, 자기에게 편리하고 좋은 언어를 쓰고 자식에게도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문열씨는 아예 거기에는 동조하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는 안해봤지만, 그분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서 우리 말이 차지하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볼 겁니다.”

-논쟁적인 화두를 던지셨지만 이문열씨처럼 ‘시대와의 불화’를 심하게 겪지는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이문열씨는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저는 비교적 무명이잖아요. 그 차이 같아요. 이문열씨 주장은 과격하지 않고 저같이 이론을 세워서 주장한 것도 아니거든요. 제가 핍박을 받으면 더 많이 받아야 하는데 이문열씨가 좌파의 표적이 된 것은 유명세를 치른 면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비판을 받으면 대개 응수를 안합니다. 지식인의 책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지, 자기의 주장이나 아이디어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보호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저는 인터넷에도 안 들어가요.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하면 ‘그러냐. 반응이 있어서 좋다’고 하고 끝냅니다. (요즘도 인터넷에 안들어 가시나요) 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어떤 글에서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본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대쪽에 계신 지식인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나는 선배들의 글을 읽으면서 공부했으니까 뒤에 나오는 사람들의 글은 잘 못 읽어요. 강준만씨 같은 사람들의 글은 신문 같은 데서 보는 정도지 그 사람의 책을 사서 읽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잘 몰라요. 저에게 비판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죠. 그 사람들은 비판을 하더라도 저 때문에 좌표를 어느 정도 수정할 겁니다. 본인들은 못 느끼겠지만 저 자신은 그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굉장히 거세게 비판한다는 것은 무언가 영향을 줬다는 뜻이거든요.”

-내시는 책들은 많이 팔립니까.

“많이 팔릴 리가 있나요. 돈은 못 벌고 출판사에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나갑니다. 그게 지식인에게 건강해요. 돈을 많이 벌면 장당 만원을 받고 원고지를 메우지 못합니다. 맥이 풀리잖아요. 나한테 글 청탁오면 고맙게 여기고 자판 두드리는 게 고맙죠. ‘이 원고를 쓰면 안식구가 시장에 나가서 시장 볼 돈은 된다’고 생각하면 쓸 맛이 나죠. 그게 맞는 거예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무슨 공부를 하시는지.

진화론을 경제학에 도입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진화론 시각에서 경제학 이론을 보고, 사회철학을 진화론에 맞추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 방향으로 책을 썼고, 좀더 다듬어서 정교하고 발전된 사회철학을 만들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사회철학들을 재검토하고 제 나름으로 공헌해서 독창적인 무엇을 하려고 해요. 제가 볼 때 이거는 가능성이 보여서 여기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까.

잊혀질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쓴 작품들 몇은 남을 거 같습니다. ‘비명을 찾아서’ 외에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이란 작품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한국어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기 때문에 5세대 뒤에는 독자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어공용시대가 되면) 최인훈 선생은 번역이 되겠지만, 복거일은 번역이 안될 거 같아요. 말할 수 없이 섭섭하죠.”

-본업이 소설 쓰기인데,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습니까.

“소설로 걸작을 쓴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작품은 사회적인 환경과 어우러지는 것이거든요. 제가 그런 작품을 쓸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보죠. 어차피 우리는 1950~60년대, 박정희 정권까지 사회상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고 벗어날 수 없어요. 그 한계를 인식해야죠.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나는 왜 좋은 작품을 썼는데 사회는 알아주지 못하느냐’는 불만이 나와요. 그것이 작가들로 하여금 작품 속에 교훈을 넣게 하고 장광설을 늘어놓게 하지요. 그런 작가들은 늙은 거예요. (소설은 자주 안 쓰실 겁니까) 쓰긴 써야죠. 기대를 않다가 특별히 뭐가 잘 맞을 때 좋은 작품이 나오잖아요. 그런 기대를 갖고 사는 겁니다.”

-영상매체의 등장으로 소설이 위기를 맞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소설의 미래는 어떻게 보십니까.

15년 전인가, 문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에 대본을 주는 장르로 바뀔 거 같다’고 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고전적인 형태의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지금의 판소리 명창처럼 틈새시장에서 살아남겠죠.” (이용욱기자)

08. 02. 17.

P.S. 인터뷰에서 눈에 띄는 건 문학에 대한 복거일의 양가적 감정. 문학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고 믿고 한국어의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작가가 자기 작품에 나름대로 애착을 보인다는 건 좀 특이한 일 아닌가(그는 왜 아예 영어로 글을 쓰지 않는 것일까?). 또 한가지는 진화론을 경제학에 도입하고자 하는 그의 구상. 21세기판 사회진화론자를 자임하고자 하는 듯하다. 경제학자 우석훈 또한 생물학과 경제학을 결합해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접한 듯하다. 두 사람의 '작업'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8-02-17 22:35   좋아요 0 | URL
재미있고 뇌구조가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런 사상이 주류가 되는 세상을 생각하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로쟈 2008-02-17 23:01   좋아요 0 | URL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건 '주변부 작가'라는 콤플렉스입니다. 흥미롭게도...

kimdan 2008-02-19 22:18   좋아요 0 | URL
(이미 아실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경제학 분야와 진화론 분야가 결합된 '진화경제학' 분야는 많은 연구가 되어 있습니다. 진화경제학 분야는 사회진화론에 가깝다기 보다는, 전화론에서 쓰이는 메커니즘을 도구적으로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진화론과 진화경제학은 많이 다른 분야죠. 우석훈씨는 생태경제학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쪽 분야는 저도 잘 몰라서... (제가 진화론 관련 생물공부를 하거든요..)

로쟈 2008-02-19 23:1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억엔 진화경제학 관련서라 할 만한 책으로 작년에 <부의 기원>이란 책이 나왔었지요. 그런데 경제학과 진화론을 결합하는 방식에 우파적인 방식과 좌파적인 방식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복거일은 전자를, 우석훈은 후자를 대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확하게 그런 포지션을 자임하는 건 아니더라도요.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은 저도 언제나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입니다.^^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손길이 가는 건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마음산책, 2008)이다. 막간을 이용해 겸사겸사 그의 책과 영화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2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우디 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
우디 앨런 외 지음, 로버트 E. 카프시스.캐시 코블렌츠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품절
우디가 말하는 앨런
스티그 비에르크만 지음, 이남 옮김 / 한나래 / 2006년 5월
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절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같은 세상
우디 앨런 지음, 김연 옮김 / 황금가지 / 2000년 12월
8,000원 → 7,2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절판
The Insanity Defense: The Complete Prose (Paperback)
Allen, Woody / Random House Inc / 2007년 6월
33,520원 → 27,480원(18%할인) / 마일리지 1,38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3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2월 16일에 저장



2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16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6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다룬 바 있다. 그의 책들이 올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90626).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이어서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이 연이어 출간됐고 앞으로도 몇 권의 책이 더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어떤 책들인가 궁금하신 분들은 한겨레의 리뷰를 길잡이 삼아 읽어보실 수 있겠다. 

한겨레(08. 02. 16) '반목의 철학’ 랑시에르의 ‘배제된 자를 위한 정치’

자크 랑시에르(사진)가 국내 지식계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철학자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익숙한 관념에 매달리는 사고의 관성을 깨뜨려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여는 일은 친절한 방식으로는 될 수 없다고 믿는 듯하다. 흐릿한 안개 속에 겨우 윤곽만 보인 랑시에르의 철학적 사유를 좀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 한 달 사이에 잇따라 번역됐다.

먼저 나온 2005년 저작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펴냄)와 이번에 출간된 2000년 저작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랑시에르 저작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랑시에르를 공부한 오윤성씨가 번역한 〈감성의 분할〉은 옮긴이의 소개문과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발문(‘랑시에르의 교훈’), 그리고 랑시에르 용어 해설을 부록으로 달아, 랑시에르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1940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공부한 랑시에르는 전형적인 ‘68혁명 세대’ 좌파 이론가이자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주창자 루이 알튀세르 문하 출신의 철학자다. 65년 알튀세르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펴낸 〈‘자본’을 읽자〉에 공저자로 참여했던 랑시에르는 68혁명의 열기 속에서 알튀세르를 떠나 프랑스 마오쩌둥주의로 옮겨간다. 그를 유명인사로 만든 사건은 〈알튀세르의 교훈〉(1974) 출간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알튀세르가 자신의 지적 지배 위치를 지키고 지식 엘리트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비난했다. 학문적 부친 살해라 할 이 책을 통해 그는 옛 스승 알튀세르와 떠들썩하게 결별했다. 이런 거침없는 도발 때문에 그는 ‘반목의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철학적 사유의 여정은 대체로 ‘정치’와 ‘미학’ 두 단계로 나뉜다.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1981)에서부터 그의 정치적 사유가 응집된 〈불화〉(1995)까지가 ‘정치’ 단계라면, 96년 이후 문학·영화·예술에 관한 저술들은 ‘미학’ 단계를 이룬다. 이 미학 시기에도 그는 정치철학적 저작들을 몇 권 펴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그 가운데 하나다. 또 같은 시기에 출간한 〈감성의 분할〉은 부제가 보여주는 대로 미학과 정치를 동시에 주제로 삼은 저작이다.

랑시에르 철학의 독특한 영역은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낯익은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재해석에서 발견된다. 통상 자유주의 정치세계에서 정치는 이해가 상충하는 개인 또는 집단 사이에서 조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런 과정은 정치가 아니다. 이미 정치적 주체로 받아들여진 공동체 주체들 사이의 통치 행위일 뿐이다. 그의 용어로, 이런 정치 과정은 기존 사회질서 유지를 목표로 하는 ‘치안’에 해당한다. 진정한 정치 또는 본래의 정치는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에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기에 귀족과 교회의 지배에 대항했던 ‘제3계급’이 그런 주체화 과정을 보여주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은 정치의 본래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귀족계급 또는 과두지배자들에 맞선 ‘데모스’(인민)의 등장이야말로 정치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주체화란 지배 질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자신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는 것, 정치적 대화와 권력의 행사에서 정당한 상대자(파트너)로 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본래의 정치’다.

〈감성의 분할〉은 그런 정치의 문제를 ‘미학’(감성학)의 엑스레이를 투과해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서 ‘감성’이란 감각되고 감지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오감을 통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 감성이 분할된다는 것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나뉘어 어떤 부분이 배제된다는 것, 그리하여 존재하기는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를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한다. “말하는 동물(곧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러나 노예는 그가 언어를 이해할지라도 그 언어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다.” 노예는 ‘말하는 동물’에서도 ‘정치적 동물’에서도 배제돼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 배제를 뚫고 일어서 자신이 언어를 되찾고 자신을 보이는 자리에 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랑시에르적 정치다.

지젝은 랑시에르 철학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랑시에르의 사유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좌파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 그의 글쓰기는 ‘어떻게 우리는 저항하기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소수의 견실한 개념화들 가운데 한 가지를 제안한다.”(고명섭 기자)

08. 02. 15.

P.S. 서두에 언급된 대로 랑시에르의 이론은 "다른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무얼 번역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지만 <감성의 분할> 또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해서 예전에 복사해놓은 영역본(<미학의 정치학>)을 지난주부터 찾았지만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갑갑합을 달래려면 한번 더 복사하든지 해야 할 모양이다(그렇게 되면 세 번 복사하는 것이 된다. 분량은 100여 쪽에 불과하지만).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역시 나는 영어본을 두 번 복사해야 했다. 먼저 복사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아서였다. 당장 손에 들었을 때 읽고 정리해놓지 않으면 기억과 시야에서 멀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도 여기저기 뒤적여서야 겨우 영어본을 다시 찾았다. 몇 자 적기 위해서이다.

국역본의 경우 나는 지난달에 30-40쪽 정도 읽다가 덮어버렸다. 교정해가며 읽을 만한 수준도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래서 적은 40자평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그 이상의 오역을 읽게 될 것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830514)인데 이게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는 게시물"이란 역자의 항의에 따라 블라인드 처리됐다. 알라딘의 방침이 그러하다고 하니 따로 왈가왈부하진 않겠다. 대신에 나대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내 판단의 몇 가지 근거를 나열하는 것이 그 '대응'이다.

'서론'에서 랑시에르는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 프랑스 사회에서 벌어진 몇 가지 현상들을 나열한다(이 책의 불어본은 2005년에 나왔다). 그 중 하나가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14쪽)이고 영어본에 따르면 이것은 "a Grande E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s"을 옮긴 것이다. 믿기지 않는 노릇이지만 역자는 'Grande Ecole'을 '초등학교'로 옮긴 것이고 이건 그가 '그랑제콜(그랑제꼴)'이 뭔지도 모른다는 게 된다(불어책을 번역한다는 역자가 어떻게 프랑스 학제의 기본 상식도 모를 수 있는가?). 

알다시피 '그랑제콜'은 '초등학교'이기는커녕 '대학 위의 대학'으로 프랑스의 소수정예 엘리트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그러니 어처구니 없는 오역이지만 나름대로 진실, 무의식적인 진실을 드러내주긴 한다. '그랑제콜' 수준의 책을 '초등학교' 수준으로 번역해놓고 있다는.

내 식으로 다시 옮기면 "한 그랑제콜은 대안적인 입학제도를 도입했다" 정도이다. 그렇게만 적어놓으면 프랑스 독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먹겠지만 우리에겐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다. 영어본 주석에 따르면, 2001년초에 정치분야 그랑제콜의 하나인 '씨앙스포(Sciences Po)'가 소외계층 학생들을 위한 새로운(대안적인) 입시안을 도입했다고 한다. '학력' 외에 다른 변수를 고려한 것이고(가령 서울대의 농어촌 특별전형 같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러한 '평등에의 요구'들을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결부시킨다("이게 다 민주주의 탓이야!"). 물론 이런 정황에 대해 역자가 이해하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이어지는 번역이 이렇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신선한 화두는 아니다.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만큼이나 이에 대한 증오 역시 오랜 세월 쌓여왔다. 그렇기에 이 용어는 생성과 동시에 용어 자체에 증오심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15쪽)

"Hatred of democracy is certainly nothing new. Indeed it is as old as democracy itself for a simple reason: the word itself is an expression of hatred."(2쪽)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 영어본에 따르면 그저 '단순한 이유'란 뜻이다. 대체 어떤 번역으로 읽는 게 수월한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분명 새로울 게 없다. 실상 그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그러한데,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증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건 그 부연설명인데, 아무리 '번역'이라고 해도 우리가 꼭 이런 식의 한국어 문장을 읽어야겠는가?

"최초에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는데, 거기에는 극천박한 대중정부에 의해서 정당한 위계질서가 철저히 붕괴되는 것을 목도한 그리스인의 경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사람의 권능에 비례해서 호칭되고 출신가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던 사람들의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다."

"It was, in Ancient Greece, originally used as an insult by those who saw in the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 the ruin of any legitimate order. It remained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everyone who thought that power fell by rights to those whose birth had predestined them to it or whose capabilities called them to it."

영어본에 준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란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원래 다수(데모스)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에서 모든 합법적 질서의 붕괴를 목도한 자들이 일종의 욕으로 사용한 말이다. 권력이란 게 태어날 때부터 운명 지워진 자들이나 그에 걸맞은 역량을 갖춘 자들에게만 속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말은 혐오와 동의어로 남았다."

'익명적 다수'를 뜻하는 'multitude'는 요즘 '다중'(네그리)으로 옮기지만 'unnameable government of multitude'를 그냥 '다수의 정부라는 말도 안되는 정부'라고 풀어서 옮겼다. 민주주의의 비판자들에게 '다수의 지배'는 어불성설이라는 얘기이다(혹은 반대의 경우이긴 하지만,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그렇겠다. 민주주의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론 과두제 아니냐는). 참고로, 민주주의의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데모스demos는 '사람들(people)' 곧 '어중이떠중이'을 뜻하고 크라토스kratos는 '권력(force, power)을 뜻한다. 그걸 결합한 '데모크라시'란 고대 그리스에서 일종의 '욕'이었다는 것. "에잇, 민주주의 같으니라구!" 

"그런데도 이 용어는 인간 공동체 편재(遍在)의 유일한 합리적 근거로서 인정받는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15쪽) "And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 construe revelations of divine law as the sole legitimate foundation on which to organize human communities."

역시나 말도 안되는 번역문이다. 불어본 구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어본은 생략문이다. "it still is today for those who-"라는 건 "it still is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those who-"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민주주의란 말이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고? 이런 엉터리 번역이 계속 존속하는 건 독자들이 "번역자의 명예와 신망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개의치 않기 때문은 아닌가?(그래서 나는 역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본다. 독자들에게도 방관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명예와 신망을 위해서 다시 옮기면 "그리고 민주주의는, 신성한 법의 계시만이 인간 공동체 구성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라고 간주하는 자들에겐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책의 제목 자체는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혐오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을 번역본에서 간취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몇 걸음도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이어서 민주주의 비판을 다루고 있는 대목.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 형국을 경험해 왔다. 민주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15-6쪽) "Alongside this hatred of democracy, history has born witness to the forms of its critique. Critique acknowledges something's existence, but in order to confine it within limits."

번역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여 둘을 동일시했지만 '증오'와 '비판'은 구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함께 역사가 보여주는 건 민주주의 비판의 형태들"이라고 돼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무엇인가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단지 그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 비판의 두 가지 형태(양상)만을 더 따라가본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체제의 두 가지 주요 양상을 혹평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실세로 인정받고 있던 민주주의와 타협하길 원하던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이 그 한 양상이다. 또 다른 양상은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라는 실제로부터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개념 추출을 지향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의 전형으로서, 추출된 개념의 균형과 그 효력 배합작업의 전형을 의미한다. 이렇게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미국 헌법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양대 축이란 최선정부(best government)와 소유자 위계질서의 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6쪽)

번역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형태(양상)가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과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으로 돼 있지만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두번째 비판의 형태의 아직 언급되지도 않았다. 인용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건 전체가 한 가지 '양상'인 것이다. 이런 번역에서 대체 무얼 읽으라는 것인가? 역자는 '최소한의 성의도 인정하지 않는' 40자서평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던 듯한데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성의'는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이런 함량 미달의 번역서는 내지 않는 것이다. 인용문을 영어본으로라도 다시 읽어보면 이렇다.

"There have been two great historical forms of critique of democracy. There was the art of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 who strove to make a compromise with democracy, viewed as a fact that could not be ignored. The drawing up of the United States constitution is the classic example of this work of composing forces and of balancing institutional mechanisms intended to get the most possible out of the fact of democracy, all the while strictly containing it in order to protect two goods taken as synonymous: the government of the best, and the preservation of the order of property."(2쪽)

문장이 조금 길어서 얼핏 난해해보이지만 국역본처럼 난감하지는 않다. 다시 옮기면 "민주주의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큰 줄기가 있어 왔다. 먼저 귀족주의적 입법자들과 전문가들의 술수가 있는데, 그들은 민주주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보고 그와 타협하려고 애썼다. 미국 헌법의 제정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최대치를 얻어내고자 권력들을 조직하고 공공 기구들간의 균형을 맞추면서 한편으론 서로 동의어로 간주되는 '최선의 정부'와 '소유권 질서의 보존'이라는 두 가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엄격하게 한정한 고전적인 예이다."

'민주주의라는 현실'로 옮긴 'the fact of democracy'란 말은 '주어진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란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요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경우 민주주의의 최대치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더 큰 가치(재산)의 보호를 위해 제약하고 있다는 것. 민주주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민주주의의 존재 자체, 즉 그것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성과 대세는 인정하지만, 그 인정은 동시에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제약의 필요성으로 귀결된다. 해서 "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 좋은 제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라는 구문이 민주주의 비판의 전형적인 틀이 되겠다(알다시피 유신 정권이 내세운 '토착적 민주주의'도 이와 동일한 구문과 논리를 갖고 있었다). 번역문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한 대목만 더 읽어본다.

"이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은 성공을 거두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민주주의 세력의 성공 자양분이 되어왔던 것이다. 젊은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 지배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 여하튼 마르크스는 지금도 소진되지 않고 있는 한 표준 이념을 확립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인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행사 매개체에 불과하며, 이런 영향력 하에서 법과 제도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파악했었다."(16쪽)

"The success of that critique en acte naturally fuelled the success of its contrary. The young Marx had no troubles exposing the reign of property lying at the foundation of the republican constitution. The republican legislators had made no secret of it. But in so doing he was able to set a standard of thought whose resources have not yet been exhausted: the notion that laws and institutions of formal democracy are appearances under which, and instruments by which, the power of the bourgeois class is exercised."(2-3쪽)

민주주의에 대한 또 다른 비판자는 청년 마르크스이다. 미국식 민주주의 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성공은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비판을 유효하게 만들었다는 것. 'critique en acte'는 'critique in action'의 뜻으로 보인다. '진행/작동중인 비판' 정도일까.

다시 옮기면, "이러한 실효적 비판의 성공은 자연스레 그 반대파의 성공을 가져왔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토대에 소유권의 지배가 놓여 있음을 손쉽게 폭로할 수 있었다. 공화주의 입법자들은 그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마르크스는 한 가지 표준적인 사상을 정립할 수 있었고 이 사상의 원천은 아직도 고갈되지 않았다.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는 단지 외양일 뿐이고, 그러한 외양 아래서 혹은 그러한 외양을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관철되고 있다는 사상이다."

마저 읽어본다.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겉치레에 대한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방안이 되었지만,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17쪽) "The struggle against appearances thus became the path leading to 'real' democracy, where liberty and equality would no longer be represented in the institutions of law and State but embodied in the very forms of concrete life and sensible experience."(3쪽)

비교해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국역본의 번역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 여기서 제시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상을 과연 독자가 읽어내는 게 가능한 것인지? 다시 옮기면, "외양만의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그리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되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라면 자유와 평등은 더이상 법제도나 국가에 의해서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과 감각적 경험 자체를 통해서 구현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영어본으로 치자면 서론의 두 문단이고, 분량으론 한 페이지 반 정도이다. 국역본은 시종 이런 식이니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오역학의 교재로서는 아주 유용하겠다.) 바로 이어지는 문단의 첫문장만 읽어본다. "이 책의 화두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민주체제의 어떤 모델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의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을지라도." 대체 무슨 소리인가?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역자는 이런 문장에 '자신의 명예와 신망'을 걸 수 있는가?

영어본의 문장으론 "The new hatred of democracy that is the subject of this book does not strictly fall under either these model, though it combines elements borrowed from both."이다. 다시 옮기면, "이 책의 주제인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엄격하게 말하면 이 두 가지 모델에 다 들어맞지 않는다. 비록 그 두 모델로부터 빌려온 요소들을 결합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정도이고.

번역에 대한 새로운 증오가 솟구치기 전에 그만 적어야겠다(이후에도 각종 난이도의 오역들이 속출한다). 이런 식의 번역이라면 어떤 독자라도 관대하게 평하기 어려울 것이다(*알라딘 관계자가 전한 역자의 말은 진의와 다르다고 하여 삭제함). 그냥 이 정도 번역이면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것인가?..

08. 02. 15-16.

P.S. 이 페이퍼 또한 역자의 요구에 따라 책소개 페이지에서 '삭제'되었다. 입에 쓰면 뱉는다는 식인가 보다. 상식이 있다면 눈 가리고 아웅하기 이전에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처분하고 개역판을 내야 한다는 게 나의 '몰상식한' 생각이다...


댓글(5) 먼댓글(1)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2008 / 02 / 29
    from Le mai 3 : The R Review 2008-02-29 21:20 
    방학동안 한 일이라곤 Monthly Review에서 몇몇 에세이를 들여다 본 것과,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영어로 조금씩 들떠본 것 밖에는 없다. 당장 오늘이 지나면 3월인데, 정말 손에 꼽을 만큼 한 일이 없다. 푸념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 랑시에르의 책을 읽다가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것 같아서 영어판을 비싼 돈 주고(!) 사 두긴 했지만, 최소한 어느 정도는 말이 되게 번역했겠지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xnekans 2008-02-16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이 나왔다기에 서점에서 살펴보다가, 책의 어느 부분에서 Ulrich Beck을 얼리치 벡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바로 던져두고 왔더랍니다. ㅎ 원래 저렇게 읽는 건가, 순간 자신없어지기도 했지만... ㅎ <감성의 분할>도 읽으면 읽을수록 미심쩍은 순간들이 종종 있더군요. 결국은 이러나저러나 영어본을 꺼낼 수밖에 없겠더군요. 후.

로쟈 2008-02-16 11:08   좋아요 0 | URL
색인에는 없어서 몰랐는데, '얼리치 벡'이라니 우습군요. '얼치기 번역'의 여러 징후들이라고 할 밖에요...

안용태 2008-08-20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책이 저렇게 오역 투성일 줄이야. 정말 관심이 많은책이라 사서봤었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걍 내 무식을 탓하며 접었더랬죠.

근데 저런 오역이 문제였다니... 쩝... 할말이 없군요.

그랑제꼴을 초등학교로 옮긴부분 할말을 잃었습니다. 그랑제꼴이 어떤곳인지는 정말 먼나라 이웃나라만 열심히 봤더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알라딘에서 저 책 소개엔 로쟈님 글이 안보이던데 블라인드 처리했을줄이야..

조금만 이글을 더 빨리봤더라면 국역본을 안사고 걍 영어본을 샀을텐데요..

로쟈 2008-08-20 07:53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보셨군요.^^; 참고로, 더 자세한 번역비평은 람혼님의 서재에 있습니다...

바르타쉐비치 2010-01-0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동안 랑씨에르를 탐독할려고... "감성의 분할","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무지한 스승", 문학의 정치","미학 안의 불편함"을 모조리 샀답니다. '감성의 분할"을 20장도 채 읽지 못하고... "문학의 정치"를 펴 들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였어요. 그저 나의 무지 탓이려니 하다가... 아침에 로쟈님 검색창에 랑씨에르를 쳤더니... 이런 글들이 있네요.
물려 달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아직 못 펼쳐 본 책에 희망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