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기호학과 관련한 로트만의 저작은 국내에 세 권이 소개돼 있다.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러시아 영화론 선집인 <영화의 형식과 기호>(열린책들, 2001), 그리고 치비얀과의 공저 <스크린과의 대화>(우물이있는집, 2005)가 그것이다. 이 중 <영화기호학>과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 실린 '영화기호학과 미학의 문제'는 (내가 알기에) 같은 내용이다. 해서, 로트만 영화기호학에 대한 개괄적인 코멘트를 담고 있는, 오래전에 작성된 아래의 글은 <영화기호학>(민음사)를 대본으로 했던 것이지만 <영화의 형식과 기호>에도 적용될 수 있다(단, 페이지수는 전자의 것이다).

로트만의 <영화기호학>(1973)은 그가 결론에서 지적한 대로 ‘소박한’ 입문서이다. 무엇에 대한 입문이냐고 하면 바로 영화-언어(film language), 즉 언어(기호=약호)체계로서의 영화 입문이다. 이 입문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 영화 이해의 문턱이다. 단순하게 그렇게만 본다면, 그래서 영화기호학을 영화 이해의 한 방법이나 절차로서 인정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1968년 이후 영화연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 기호학이 처음부터 그러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하기로 하자(기호학은 “값싼 물건과 장신구로 치장한 귀부인들”이나 하는 짓(혹은 실천)이며 기호학의 일반적 태도는 “백치 수술을 받은 담비(a lobotomised ferret)의 경계심”에 불과하다는 비난 여론이 있었다).

즉 세상 대부분의 것이 그러하듯이 영화기호학 또한 자연스러운 것(선험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 모든 걸 따져볼 수는 없고(그럴 능력과 시간이 없다),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만을 잠깐 옮겨보기로 한다: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해서(사진은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언어> 영역본). 메츠의 영화기호학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이 향하는 곳은 역시 이미지와 서사 중 어느 것을 근본적으로 보는가라는 문제이다.

메츠는 의미작용을 행하는 일상적인 언어와 달리 영화에서는 이미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쇼트가 문장이나 발언에 해당하는 지위를 갖고 있음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움켜쥔 이 손의 쇼트는 ‘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손이다’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관점은 언어를 영화분석의 틀로 간주하는 전제 위헤서(만) 성립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발언으로서의 쇼트와 그의 ‘거대 통합체’는 언어학의 모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법의 산물이며 이를 통해서 영화의 분석에서 이미지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서사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와 그것들의 결합의 결과에 불과하다... 서사란 이미지의 자명한 소여가 아니며 그 이미지의 토대에 있는 어떤 구조의 효과도 아니다. 즉 그것은 가시적 이미지들 자체의 한 결과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를 사유(=서사=개념=이론적 이성=인식론)에 대비시키면서 그 존재론적, 가치론적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분명 이해의 또다른 문턱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당장에 그 문턱을 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저만치서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만을 얼핏 감지할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한 문단을 여기에 다시 옮긴다:   

“현대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박성수, '이미지와 사유: 들뢰즈의 영화기호학 비판에 대해'에서 재인용)

이 무능력 앞에서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지만, 그건 진짜 막연한 걸음이어서 과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는 과연 영화를, 삶을 이해할 수 있기나 한것인지? 도대체 그걸 전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생리적 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무능력을 염두에 두고 다시 질문하자면, 영화기호학의 알짜는 무엇인가? 그건 영화기호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얼마만큼 가능한가를 묻는 일에서 구해져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가능성의 물음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사진이나 그림처럼 연속적인, 분절될 수 없는 기호에서 과연 자연어에서의 단위와 같은 의미 단위를 찾을 수 있을까?”(<영화기호학>, 역자해설)라는 것이 그것. 그에 대해서: “(프랑스의)초기 영화기호학 이론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던 것과는 달리, 로트만은 일정한 문화적 관념들이 하나의 도상 텍스트(그림 혹은 영화의 쇼트)에 어휘적인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함으로써 이 함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개략적이지만, 여기에 처음과 끝이 다 들어 있다. 영화기호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영화언어가 가능해야 하고, 그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분절될 수 있는 어떤 (의미) 단위가 설정돼야 한다. 로트만 자신은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호체계”로 아주 기능(주의)적으로 정의한다. 뭔가(전언)를 전달할 수 있는 약호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언어라는 이름에 값한다. 그런데 영화가 바로 그렇다. 왜? 사람들은 영화를 만들고 또 보면서 뭔가를 전달하려 하고 또 전달받기 때문이다. 분명 여기에 오고가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달의 매체(매질)는 무엇인가? 조형적 기호(이미지)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의 이 기호연속체(sign continuum)가 분절되는 자리, 그러니까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자리, 그것이 바로 쇼트이다. 이 쇼트가 바로 “몽타주의 세포”이면서 영화적 의미론의 기본단위가 된다.

기본단위는 그렇다 치자. 그럼 어떤 방식으로 이 단위들의 통사론과 의미론이 가능한가, 즉 영화에서의 의미작용 메카니즘은 무엇인가? 이건 그다지 어려운 물음이 아니다. 일단 단위가 주어진다면, 그걸 배합해서 잘 버무리는 일은 그저 ‘솜씨’에 달려 있을 따름이니까. 쇼트들을 a, b, c, ...라고 해보면, 이들간의 연결관계가 문제된다. 즉 가능한 관계, 가능한 경로가 문제되는 바, a-b-c의 조합이 가능할 수 있고, a-b-d의 조합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조합들 중에서 보다 중립적인(비표지적인) 것을 표준으로 놓는다면, 이 표준으로부터의 표시될 수 있는 거리 관계, 일탈 관계(말하자면 기대-위반의 메카니즘)가 바로 의미발생의 전조건이 된다(<영화기호학>, 67쪽 참조).

이건 보다 매크로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될 수 있다. 어떤 한 묶음의 쇼트(단어 혹은 문장)를 시퀀스(담화discourse)라고 한다면, 이 담화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적, 사회적, 이념적 의미소들과의 결합(연루) 관계에 의해 영화적 담론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의미기능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 대충 그런 식이다. 좋은 영화건 ‘나쁜 영화’건 영화가 말하는 방식, 그러니까 말하게 되는 방식은 그런 식이다(사진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계단 시퀀스에서 사자상 몽타주).    

이제, 무얼 더 말해야 할까? 영화기호학의 대강이 그러하니까 이젠 그것의 디테일에 대해서 말할 차례인 듯한데, 로트만은 그 디테일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건 아랫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 듯하다. 그는 요컨대, 기본만을 말하는 것이며, 전략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건 조건적 기호조형적 기호라는 로트만의 기호 이분법이다. 물론 이 두 기호는 고정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그러니까 모든 기호는 이 두 극단 사이에 퍼지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거기에 어떤 변증법적 운동이 가능해지는데, 로트만이 보기에 시(문학예술)는 조형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건적 기호이고, 영화는 조건적 기호를 지향하는 조형적 기호이다.

 

지향한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끝까지 잘 안된다는 것이다. 이때 잘 안되기 때문에 생기는 긴장이 바로 기호의 존재론적 긴장이고 의미론적 긴장이다. 글자들은 이미지를 동경하면서도 완강하게 글자들로 남으며, 이미지들은 이야기를 동경하면서도 또 굳건하게 이미지로 남는다. 로트만은 바로 거기까지만 얘기한다(그리고 나머지는 암시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에겐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는다. 서로를 마주보며 애닯도록 깃발을 흔들어대는 시와 영화에 대하여, 그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시텍스트의 분석과 영화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에 대하여(그 공통점과 차이에 대하여). 사실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가? 생각할 거리들이 좀 남아 있다고. 이하는 <영화기호학> 후반의 내용정리이다(전반부는 다른 사람이 정리했던 모양이다).  

 

10장 시간과의 투쟁

영화는 세계를 모형화한다.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시간과 공간이다. 모형의 시간-공간적 성질에 대한 대상의 시간-공간적 특성의 관계는 모형의 본질과 그 인식적 가치를 여러 모로 규정한다. 모형의 인식적 가치는 모형화의 방법을 선택하는 예술가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높아진다. 이 때문에 자연히 예술가는 세계의 시간-공간적 변수를 영화 속에 자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영화는 창조행위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객관적 시공간의 등가물들이 갖는 고유의 엄격한 체계를 예술가에게 부과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채로 영화의 경계내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가에게 남겨진 것은, 다름아닌 영화적 수단을 가지고 이들과 투쟁하여 이기는 일뿐이다.

 

시각 및 도상적 기호화 관련된 모든 예술에서 예술적 시간은 오직 하나, 즉 현재밖에는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각 예술에 있어서의 시간은 언어 예술에 비하여 궁핍하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배제한다. 시각적으로 지각되는 행위는 오직 하나의 양태, 즉 현실적인 양태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영화는 현재 시제의 필연성과 스크린상의 행위가 갖는 현실적 양태를 한꺼번에 돌파해야 할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그 초기부터 꿈, 회상, 의사 직접 화법 등의 전달을 위한 수단을 모색하면서 디졸브를 비롯하여 일련의 수단들에 기대어왔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영화는 여러 가지 동사 시제를 현재 시제에 의해 전달하고, 비현실적 사건을 현실적 사건으로 전달하는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삶의 템포에 대한 자동 기록장치로부터 시간의 예술적 모형으로 전화시키기 위하여 영화 필름에 가해진 힘은, 관객에게 예술적 에너지로, 긴장과 의미 포화성으로 느껴진다.

 

11장 공간과의 투쟁

현실의 모든 공간적 형식과 네 변으로 한정된 평면 스크린 공간과의 동형성 위에서 쇼트의 효과는 구축된다. 상이한 것끼리의 이러한 대비 관계야말로 영화 공간의 기초를 이룬다. 스크린은 네 변과 표면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 한계 밖에서 영화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 돌파의 가능성이 언제고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속에서 스크린 내의 표면을 채운다. 클로즈업은 네 변을 위협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떨어져나온 디테일은 전체를 대신하는 환유가 된다. 따라서 스크린 위에 존재하지 않는 이 사물의 전모는 스크린의 경계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면성에 대한 공격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큰 의의를 거두고 있다.

 

Citizen Kane

 

 

 

 

 

 

 

 

 

 

 

 

 

 

 

이와 관련하여 현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른바 쇼트의 심도 구축이다. 화면의 전경에 클로즈업을 배치하고 그 후경에 롱 쇼트를 결합시키면, 이들은 스크린의 '본래적인' 평면성을 깨고 훨씬 더 엄밀한 동형성의 체계를 구축하면서 영화 세계를 만들어낸다. 3차원이며 경계가 없는 다층적 현실 세계가 평면적이며 제한된 스크린의 세계와 동형으로 되는 것이다(심도 쇼트의 탁월한 테크닉으로 <시민 케인>과 트뤼포의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공간은 특정한 액자 안으로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무한한 공간과 동형성을 갖는다는 점을 이 책의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모든 예술에 공통되며 특히 조형 예술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모순에다 영화는 자기 특유의 모순을 보탠다. 요컨대, 그 어떤 다른 조형 예술에서도, 예술적 공간의 내부 경계를 채우면서 그처럼 적극적으로 그 경계를 파괴하고 한계 밖으로 나오고자 애쓰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갈등은 영화 공간의 현실성이라는 환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12장 영화배우의 문제

영화 쇼트의 기호학적 구조 속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영화 예술은 역사적으로 두 전통의 교차점 위에서 형성되었다. 그 하나는 비예술적인 기록물의 전통에, 다른 하나는 연극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록 영화는 스크린 평면 위에서 우리에게 흑백으로 교차되는 얼룩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잊은 채 스크린 위의 형상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지각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연극은 우리에게 보통의 인간, 즉 우리의 동시대인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잊고 그에게서 어떤 기호적 본질, 예컨대 햄릿, 오셀로 혹은 리처드 3세를 보아야만 한다. 예술 영화를 이러한 두 전통에 이중으로 투영해 본다면, 예술 영화에 있어서 스크린 위의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된 관계 유형이 당장 드러나게 된다.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세 차원으로 약호화된 전언이 된다 - 1 감독의 차원, 2 일상적 행위의 차원, 3 배우 연기의 차원. 감독의 차원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쇼트 작업은 많은 점에서 다른 경우와 동일한다. 즉, 클로즈업, 몽타주, 그 밖에도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다른 수단들이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의 연기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는 이런 전형적인 영화 언어의 형식들이 특별한 상황을 창출한다.  

 

 

일상적 행동에 대한 관계는 연극과 영화에서 근원적으로 상이하다. 무대는, 그것이 아무리 사실적이라 할지라도 어떤 특별한 '연극적' 행동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배우의 행동이 일상의몸짓과 억양에 대한 복사가 아니라 단지 이를 지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상의몸짓과 행동의 정확한 재현을 위한 기술적 가능성들을 만들어낸다. 일상 관계의 기호학과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전통의 기호학을 흡수할 수 있는 영화 텍스트의 능력은 영화를 광범한 비예술적 시대 기호로 가득 차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어떤 극장 공연형식과도 비교가 안된다. (참고로) 우리시대의 여배우들은 안나 카레니나나 나타샤 로스토바의 의상을 입었다 해도 여전히 우리시대의 여자들인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이 점은 이미 결핍이 아니라 미적 법칙이다. 이는 스크린 위에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아름다운 여주인공을 보여주어야 할 때에 특히 강조된다(그레타 가르보에서 소피 마르소까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의 의상은 어떤 역사적 시기의 실제 의복에 대한 재현이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기호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다.

 

기호적 의미의 세번째 층위는 바로 배우의 연기에 의해 구축된다. 스크린상의 인간 행동이 지니는 기본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는 생생함, 즉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현실을 관찰한다는 환상을 갖게끔 한다는 데에 있다. 이 '생생함'이란 느낌은 실은 영화배우의 연기 구조 속에 내재된 모순으로부터 생겨난다. 한편에서 보면 영화배우는 최대한 '자유롭고'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자 애쓰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영화 연기의 역사는 현대의 연극에 비해 더 상투어, 마스크, 역할의 컨벤션, 전형적인 제스처들의 복잡한 체계에 의존해 왔다. 영화는 컨벤션 연기의 다양한 유형을 단지 이용할 뿐만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창조해 왔다(감독의 영화/ 배우의 영화). 영화배우 연기의 컨벤션이 갖는 또다른 유형은 영화의 장르적 성격과 관련된다. 하나의 예술적 세계에 대한 특별한 조직 유형으로서의 장르는 연극에서보다 현대의 영화에서 훨씬 더 강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기대와 관련된 충족은 물론, 그 파괴까지도 많은 예술적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영화의 특정한 부분에서 조건성의 정도를 심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전체 속에서 배우 연기가 갖는 기호성이 제고될 수 있다.

 

13장 영화 - 종합예술  

우리는 "움직이는 그림의 도움을 빌린 이야기"가 전달하는 복잡한 의미구조를 고찰했다. 그렇지만 현대의 영화는 단지 이 언어로만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 전언, 음악적 전언, 텍스트 외적 관련의 활성화를 포함하며, 이들은 영화에 다양한 의미구조들을 보태준다. 이 모든 기호학적 층위들은 또한 의미적 효과를 창출한다. 영화의 이와 같은 능력 때문에 우리는 영화의 종합적 특성 혹은 다성적 특성을 거론하는 것이다. 다양한 기호체계의 복잡성, 텍스트 약호화의 다회성 그리고 이와 관련된 예술적 다의성 등은 현대 영화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비슷한 걸로 만든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가 어떻게 고도의 기호적 복잡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교육의 수준이 천차만별인 광범한 관객 대중의 이해에 부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로, 어떤 체계를 사용하는 것과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복잡성을 갖는 문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둘째로, 영화는 다층적 구조이며 그 구조의 층위들은 상이한 정도의 복잡성으로 조직되어 있다. 교육 정도가 다른 관객들은 각각 다른 의미 층위들을 취한다. 세 번째로, 텍스트는 또다른 의미에서 다성적이다. 그것은 한 차원 위에서 다양하게 움직이는 기호들의 다발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상이한 차원들 위에서의 동시적인 움직임을 제시한다. 관객에게는 텍스트와 나란히 약호가 주어진다. 영화란 하나의 교육기제이다. 그것은 정보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취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14장 기호학과 현대 영화의 진로

기호와 의미의 문제에 대한 증대된 관심은 단지 학문적 기술에서의 특성일 뿐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문화적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기호의 문제는 언어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 속으로도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베르히만(<페르소나>), 펠리니(<8 1/2>), 안토니오니(<블로우업>) 등과 같은 여러 예술가들의 흥미를 끌었다...  

 

 

<블로우업>(1967)에 대한 분석... 안토니오니를 그의 주인공(사진작가)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그럴수도 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니가 작품의 플롯을 그런 식으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와 주인공과의 분리를 증거해준다. 안토니오니는 <배회하는 카메라>의 이념으로부터 분석의 영화로 옮겨간 것이다('확대'란 뜻의 '블로우업'은 국내에 <욕망>으로 출시돼 있다).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현대 영화의 자발적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증거이다. (<블로우업>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살인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이 세계에 대한 기호학적인 분석은 사실의 부동성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흔들면서 영화적 진실에로의 길을 열어준다. 또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예술가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보다 정신적, 예술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하는가? 안토니오니는 예술가가 하나의 ‘개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메타-언어에로의 무한소급 문제. 이러한 과학적 진리는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함의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예술이 그 대상이 삶보다 논리적 추상화에 있어 높은 차원의 언어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학 텍스트에서는 메타 언어의존재 자체가 연구자로 하여금 연구 대상의 바깥에 있게끔 보장해준다. 예술의 경우 이 점에서 예술가의 이념적이고 도덕적인 자질이 더욱 불가결하다. 예술가는 종종 자신 속에서 기술자와 기술 대상, 의사와 환자를 겸하고 있는 까닭이다. 안토니오니의 영화에 나오는 사진작가는 다면적인 의식으로 인해 후자에 속하며, 바로 그 때문에 전자의 위치를 가질 수가 없다. 의사, 재판관, 삶의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주인공이 필요하다. 안토니오니는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결론

이 책은 영화의 기초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도 아니고 영화의 문법서도 아니다. 이 책이 추구하는 목적은 가장 소박한 것, 즉 관객들에게 영화 언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나아가서 영화언어를 관착하고 그 영역에 관해 숙고하게끔 자극하자는 데 있다. 영화언어의 이해는 20세기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인 영화의 이념적-예술적 기능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뿐이다...

 

06.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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