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370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얼마 전에 언급한 바 있는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잘못된 길>(필로소픽)에 대해 적었다. 

















주간경향(20. 03. 30) 두 가지 페미니즘 '성공' 비교


제목의 ‘잘못된 길’은 구체적으로 ‘페미니즘의 잘못된 길’을 뜻한다. 그렇다고 저자 바댕테르가 반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동주의 페미니즘의 투사로 활약했고, <만들어진 모성>이란 책에서는 모성적 사랑을 신화적 믿음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저자가 페미니즘이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복수의 페미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구를 기준으로 저자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여성운동이 거둔 승리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여성운동이 미묘한 방향전환을 겪었고, 이것이 오히려 여성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어떤 변화이고 무엇이 문제인가.


유럽과 미국에서 여성운동은 1970년대에 본격화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두 계기가 피임과 낙태에 대한 권리다. 피임과 낙태를 통해 여성이 생식의 조절권을 갖게 되면서 남성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이를 바탕으로 남성에 비해 수동적인 전통적 여성상은 더 강하고 씩씩한 여성상으로 대체되었다. 남성의 영역과 여성의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성 구분은 점차 경계가 지워지면서 양성평등 사회의 실현이 가시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16세에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고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는 바댕테르 역시 이러한 시대의 공기를 호흡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론적으로는 1980년대에 미국에서 새로운 유형의 여성해방운동이 대두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종류의 남성 폭력을 고발하면서 가부장적 남성지배에 대한 전면 투쟁을 선언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으로 일컬어지는 이 새로운 입장의 주창자들은 주로 강간과 성희롱, 포르노를 주제로 다룬 책들을 통해서 남성의 폭력성을 부각시켰다. 그들은 여성을 남성 폭력의 희생자로 묘사하고 심지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에 비유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대단한 업적을 이룬 여성보다 남성 중심사회의 희생물이 된 여성에게 관심의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

‘여성의 희생자화’는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을 무능력한 피해자로만 간주하는 입장은 기껏해야 ‘더 많은 여성 희생자 내세우기’와 ‘남성들에게 더 많은 처벌 내리기’를 목표로 하게 된다. 게다가 남성 폭력을 단죄하기 위해서 남성과 구별되는 여성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모성애를 다시 소환하고 성적 자유 대신에 다시금 ‘길들여진 성’으로 회귀하게 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세대인 저자가 새로운 페미니즘에 대해 불만을 갖는 이유다.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보조를 맞춘 프랑스의 새로운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함께 여성의 희생자성을 부각시켰다. 이 과정에서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이뤄낸 성의 개방도 다시금 단죄되었다. 급진적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성의 개방이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여성을 일회용품으로 만들며 여성의 굴종을 더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성의 개방과 상업화에 대한 맹렬한 비판은 저자의 아이러니한 평가에 따르면 “오래된 유대-기독교의 권선징악적 어투를 닮아갔고, 그렇게도 힘들여 없애려고 했던 성에 대한 상투적 개념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사례지만 두 가지 페미니즘의 ‘성공’을 비교해보는 것은 우리에게도 좋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20. 03. 25.

















P.S. 저자가 많은 책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은 나도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라 다시 적어둔다(저자가 현대사회에서 유아화와 희생자화 경향을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로 안드레아 드워킨의 대표작 <포르노그래피>(동문선)도 현재는 절판된 책이다. 드워킨과 함께 급진 페미니즘을 이끈 저자로 바댕테르는 수전 브라운밀러와 캐서린 매키넌을 더 꼽는데, 강간을 주제로 한 브라운밀러의 대표작이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다. 성희롱을 주제로 한 매키넌의 책(<직장여성에 대한 성희롱>)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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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3-28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보이는 수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이상하게 이 책은 읽지 않는가 봅니다.
미국식 신보수주의 페미니즘에 완전히 동화된 사람에게는 이런 책 조차 마초적으로 느껴지겠지요..

로쟈 2020-03-28 16:08   좋아요 0 | URL
잘못 든 길에서 벗어나는 건 특별한 충격이 없다면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전출처 : 로쟈 > 스티븐 핑커가 발견한 마음

13년 전의 글이다. 스티븐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아직도 다 못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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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을 떠나겠다는 사전공지를 올렸는데, 미리 작별인사를 받아서 머쓱하다. 비유하자면 명예퇴직 의사를 밝힌 것이고, 날짜는 미정이다(한두 달 정도 준비기간을 가질 예정이다). 20년간 머물렀던 곳이므로 단박에 모든 것을 정리할 수는 없고(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조금씩 해나가려고 한다. 이사에 비유하자면 이사를 결정했을 뿐 아직 옮겨갈 집도 정하지 않은 상태다. 다만, 모든 이사가 그렇듯이 떠난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한다(흔히 하는 말대로 시원섭섭하다). 그래도 아주 떠나기 전까지는 하던 일을 계속할 예정이다(때가 되면 모든 흔적을 지울 수도 있다). 

















이번주에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망자들>(을유문화사)이 나왔다. 크라하트는 독문학 작가이지만 국적으로는 스위스 작가다. 안 그래도 (여행은 무산되었지만) 스위스문학클럽 강의를 마무리짓고 있어서(로베르트 발저를 다루는 다음주 강의가 종강이다) 관심을 두게 된다. 1966년 스위스 자넨 출생. 소개는 이렇다. 


"새로운 소설적 표현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세계적인 작가,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최신작 <망자들>이 을유세계문학전집 101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동시대의 세계 문학이 낳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소설”, “위대한 파우스트적 우화”라는 찬사를 받으며 현대 문학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떠올랐으며, 크라흐트는 이 작품으로 헤르만 헤세 문학상, 스위스 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새로운 소설적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뜻은 쉽게 말하자면 잘 읽히진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격찬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독어권 작가로는 제발트의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이제까지 세 권의 소설이 번역되었는데, 2016년작이 거기에 추가되었다(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간 작품들 가운데 최신작이 아닐까 싶다!). 크라흐트의 작품은 데뷔작 <파저란트>(1995)부터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2008), <제국>(2012)까지 주요작이 번역된 상태다. 언젠가 제발트 작품을 읽은 것처럼 강의에서 서너 작품을 연속해서 다루면 좋겠다 싶다. 


작가 연보에는 나오지 않는데, 크라흐트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작가다. 주한 독일문화원의 초청으로 2009년 방한하여 연희문학창작촌에 체류한 바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처음 소개되는 건 2012년이니까 한국에서는 '무명 시절'이었다. 모르고 지나쳤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만나볼 수 있겠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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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자는사람 2020-03-25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그냥 있어주세요, 로자님~

로쟈 2020-03-25 08:31   좋아요 0 | URL
20년 근속이라 명퇴가능합니다.^^

걸으며자는사람 2020-03-25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덕분에 책을 알기 시작하고 읽게 되었는데, 가신다니 섭섭하네요. 정 가시겠다면 앞으로 10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가세요.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지 마시고요...

로쟈 2020-03-25 10:42   좋아요 0 | URL
사라지는 건 아니고 플랫폼을 바꾸려는 거에요. 이곳은 너무 오래 있었고요..

포스트잇 2020-03-2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땜에 알라딘 오는건데 아쉽네요.. 어디로 가시든 따라가야죠 뭐~

로쟈 2020-03-25 10:42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래 있다보니 ‘적폐‘라는 생각에..^^;

2020-03-25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26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20-03-25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용기내봅니다. 가지 마세요ㅠㅠ;

로쟈 2020-03-26 00:19   좋아요 0 | URL
더 늦지 않게 익숙한 것과 작별을.^^;
 

알라딘 시절(그렇게 부른다면)을 조만간 마감하려고 한다. 알라딘서점이 21주년을 맞은 올해 나도 알라디너 20년차가 되었다. 20년간 무언가를 꾸준히 해온 데 의미가 없진 않지만 계속해나갈 만한 동력은 진작 떨어진 상태였다(서재 방문자도 예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눈치없이 오래 머물렀다는 뜻이리라).

갑작스레 문을 닫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미리 공지를 해둔다. 서재를 정리하는 건 한두달 정도의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유튜브로 옮겨가는 건 아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2009)가 나왔을 무렵이 알라디너로서는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그 사이에 책도 이미 절판되었다.

알라딘에 진 빚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거꾸로 코로나 시절에 알라딘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인연이 다했을 뿐(코로나와 함께 휴지기를 갖고 다른 플랫폼에서 다른 활동을 하려고 한다). 나보다 먼저 떠난 이들의 뒤를 따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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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devous 2020-03-24 18:2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한참 본격적으로 공부하던 시점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나 비평고원을 알게 돼 부럽고 아쉬웠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 솔라리스 상영 때 강의로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도 뵐 수 있길 기대하며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

헛헛헛헛 2020-03-24 1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았던 하나의 시절이 지나가는 걸 목도하는 거 같아 많이 아쉽습니다. 다른 플랫폼에서 곧 찾아뵙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했습니다.

Blue 2020-03-24 2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쉽네요... 어디로 가실지 알려주세요...

2020-03-24 2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더 좋은 곳에서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건강하세요!

로제트50 2020-03-24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때가 왔네요!
언젠가 쌤의 계획을 본 기억이 나네요...
사실, 여기 알라딘은... 로쟈님은 아까운 분이세요^^*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는 악역만 맡은 건 아니네요.
저도 마스크 판매로 지치는 날들이지만 소중함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제 밤에, 몇 주간 빠졌던 시리즈물 마지막 회를 보았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그랬지요, Stay...
로쟈님도 따뜻한 공간 만나시길 바랍니다.
로쟈님 덕분에 고전에서의 몇 가지 고찰과 생전 첨 들은 사상가들, 한걸음 더 들어간
지식 등을 접하게되어 감사합니다!


blanca 2020-03-24 2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09년을 기억합니다. 눈부신 시절이었지요. 이렇게 얘기하니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느낌입니다. 로쟈님의 글을 통해 독서의 지평을 넓혀 갈 수 있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시더라도 건승하시기를 바랍니다.

산책자 2020-03-24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이곳을 떠나신다니 무척 아쉽네요!
(어쩌면 저보다 알라딘이 더 아쉬울지 모르겠네요^^)

개인적으로 좋은 책을 추천받아서 사보고 빌려보며 독서근육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조금 과장하면 로쟈님은 인터넷으로 배우는 저의 독서교육선생님이셨습니다.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 가시더라도 독서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아 계속 인연을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직선과 곡선 2020-03-2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덕분에 이 곳에서 가보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꼭 찾아뵙겠습니다!!

2020-03-24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20-03-2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로자님의 컨텐츠가 꾸준하게 책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켜준 경우가 많았을 겁니다.
어디에서 활동하시게 되건, 응원하겠습니다.

주니다 2020-03-2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카스피 2020-03-25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남 어딜 가시든 건승하세요^^

2020-03-25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mandante 2020-03-2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시는건 매우 아쉽습니다(알라딘에 접속하는 이유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알라딘 서재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결정이 아닌가 싶네요.
 
 전출처 : 로쟈 > 직장인이 묻고 로쟈가 답하다

7년 전에 <아주 사적인 독서>(웅진지식하우스)를 펴내고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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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2020-03-2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지금은 독서근육, 정신근육, 마음근육이
필요할때인가 봅니다. 모두 함께 전진!

로쟈 2020-03-23 22:38   좋아요 0 | URL
전진하기보다는 얌전히 지내야.

2020-03-23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책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로자님 책을 읽으며 신기해 했던 것두요. 읽을 책이 많을수록 배부른 것 같던 느낌도 ^^ 지금도 그렇지만 ~

로쟈 2020-03-23 22:38   좋아요 0 | URL
그게 역설입니다. 책을 읽을수록 읽을 책이 더 불어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