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장이 화려하고 값도 어지간한 양서를 뛰어넘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양질의 책들이 출간되고 있는지는 의문인데, '외화내빈'의 책들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과 편집 등에서 발견되는 실수와 오류 들이 결코(!) 줄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데 이를 꼬집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출판에서도 실수나 오류가 '관행'으로 굳어지는 걸 자주 경계할 필요가 있다(물론 사람이 저지르는 게 실수다. 문제는 '태만한' 실수이고 그런 실수의 '구조적인' 방조다). 어느 분야나 가만 앉아있어도 알아서 좋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은가.

경향신문(08. 05. 03) [책동네 산책] ‘책 만드는 장인정신’ 아쉽다

존 뮤어(1838~1914)는 미국 국립공원의 아버지로 불리는 환경주의자이자 자연주의 작가다. 지난주 나온 책 ‘나의 첫 여름’(사이언스북스)은 1869년 여름 요세미티 지역을 탐험한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 미국 생태문학의 고전으로 칭송받는 작품이다.

호기심에 차서 책장을 넘겨보다가 의아스러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옮긴이의 글에서다. 뮤어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를 요세미티로 초청해 이틀간 야영을 같이한 후 아이젠하워가 백악관으로 돌아가 이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선포하게 한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일화”라고 썼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시기는 1953~61년. 뮤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는 한 그를 만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출판사 측은 이 같은 내용을 그대로 담은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에도 버젓이 올라있다. 허술한 교정·교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지만 너무한다 싶었다. 게다가 상대는 국내 유수의 출판사인 민음사의 계열사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일이 우연히 발생한, 예외적인 경우는 아닌 모양이다. 같은 주 나온 피터 드러커의 ‘경제인의 종말’(한국경제신문). 몇 장 펼치지도 않았는데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나왔다. 이번에도 옮긴이 해설이다. “ ‘경제인의 종말’ 이후 드러커의 모든 저서들을 분석하고 예측한 것을 시간의 검증을 거쳐 ‘경제인의 종말’에서 다시 분석하고 예측하였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다. 그 앞 문장에 비슷한 문장이 있긴 했다. 담당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최종교정을 편집장이 봤다며 바꿔준다. 그의 대답이다. “이런, 실수했네요. 앞 문장을 잘못 반복한 것 같습니다.”

이름깨나 날린다는 출판사들이 이 모양이니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사실 요즘 출간되는 책들 가운데는 과연 교정·교열을 꼼꼼하게 봤나 싶을 정도로 오·탈자와 비문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오·탈자의 발견’은 책읽기의 일상적인 사건이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 도서평론가는 “이제 그런 일이 너무 많아서 그냥 포기하고 읽는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한 출판인은 “아주 구조적인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출판사들이 ‘양’으로 승부를 내다보니 책을 ‘찍어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책에 대한 ‘장인정신’은 뒷전이라는 것이다. 교정·교열 능력을 제대로 갖춘 유능한 편집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지 못하는 출판계 시스템도 문제다. 요즘에는 교정·교열을 아예 외주로 돌리는 출판사도 많아서 편집자가 자신이 내놓는 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모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최근 문학과지성사가 내놓은 ‘한국문학선집 1900~2000’ 중 작가 김성동씨에 관한 해제에 심각한 오류가 발견된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혹 이 사건이 한국 출판이 자초할 위기를 경고하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 같은 게 아닐까. 화려한 장정과 디자인을 앞세운 한국 출판이 정작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다는.(김진우기자)

08. 05. 04.

P.S. 기자의 지적대로 부실한 편집/교정은 현행 출판시스템의 문제이다. 교정/편집자가 전문화되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현재의 시스템은 오히려 정반대로 가는 듯하다.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내실을 동반하지 못하는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해두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교정/편집의 부실은 사소한 경우라도 책에 대한 신뢰를 치명적으로 잠식하는 수가 있다. 최근의 경험을 들자면,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정치철학>(삼우사, 2008)의 '감사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폴리티출판사 사람들, 특히 나의 편집자 존 톰슨, 길 모틀리, 데비 세이무어, 팜 토머스 그리고 제니퍼 스피크와 함께 일하는 기쁨을 가졌다. 어떤 저자도 훌륭한 출판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저자가 출판 편집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상례적인 문구이다. 한데, "어떤 저자도 훌륭한 출판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역자의 무지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편집자는 이 대목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책의 두번째 페이지인데(원서로 치면 첫페이지이다!). 이 문장은 "No author could wish a better publisher."를 옮긴 것이다. "어떤 저자도 이보다 더 좋은 출판사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도의 뜻 아닌가('publisher'는 '발행인'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저자가 상찬하고 있는 건 폴리티출판사(Polity Press), 혹은 그 발행인이다. 그것이 어떻게 "어떤 저자도 훌륭한 출판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로 번역되는 것인지는 미스터리다.   

사소한 한 문장이지만, 이런 대목은 저자/역자나 편집/출판인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걸 암시해준다. 미심쩍어하면서 더 읽어봤지만 아래 대목에 이르면 (역자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원서와 대조하지 않으면 독서의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나는 아렌트의 저작에 있어서 공적 삶과 정치적 생각함 사이의 결합 및 각자가 다른 사람을 아는 방식을 추적하려 한다."(17쪽)

"In this book, then, I attempt to trace out the connections in Arendt's work between public life and political thinking, and the ways in which each informs the other."(4쪽)

여기서 "the ways in which each informs the other"를 역자는 "각자가 다른 사람을 아는 방식"이라고 옮겼는데, 나로선 의외이다. 상식적으로 'each'는 바로 앞에 나오는 'public life'와 'political thinking'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저자가 이 책에서 따라가보고자 하는 것은 아렌트의 저작에서 (1)공적인 삶과 정치적 사유간의 관계, 그리고 (2)공적인 삶과 정치적 사유가 서로를 특징짓는 방식, 이다. 나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모처럼 소개된 무게 있는 연구서를 반갑게 손에 들 수 없는 건 울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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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5-04 23:13   좋아요 0 | URL
제가 과외 가르쳤던 학생에게 했던 말...비교급에 부정문 나오는 것 제대로 해야해요.이거 하다가 영어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요...한나 아렌트 번역 오류를 보다가 갑자기 이 생각이 나네요.

로쟈 2008-05-05 16:59   좋아요 0 | URL
간혹 눈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도 단순한 오역들이 창궐해서요...

turnleft 2008-05-05 06:41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번역자들이 초벌 번역을 컴퓨터 영한 번역 프로그램으로 돌리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더군요 -_-+
(제 전공이 컴퓨터공학인데 과 교수님이 개발한 영한 번역기가 있었어요. 거기서 "Time flies like arrow" 를 넣으면 "시간 파리들은 화살을 좋아한다"라고 결과가 나오더라는..;;)

로쟈 2008-05-05 17:00   좋아요 0 | URL
거의 그런 수준의 오역들이 너무 많습니다. 비상식적인...

드팀전 2008-05-05 09:29   좋아요 0 | URL
파하하...시간 파리..

로쟈 2008-05-05 17:00   좋아요 0 | URL
'시적인' 번역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5-05 21:59   좋아요 0 | URL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폴란드...라고 해서(제프리 배러글러프:현대사의 성격 김봉호 역 삼성문화문고92번)이거 뭔 소리? 했는데 홀란드를 폴란드라고...그리고 리델 하트 전략론(신상초 번역)엔 캠페인이라는 단어가 하도 많이 나와서 이게 뭐야...했는데 군사영어에선 대규모 전투를 캠페인이라고 한다는 걸 알고 실소...아마 번역자는 캠페인은 침뱉지 말자...줄서자...그렇게만 알았던 모양이예요.

로쟈 2008-05-05 23:08   좋아요 0 | URL
'세르비아'를 '시베리아'로 옮기는 등 코믹한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시적이고 유머러스한 사례들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5-05 22:12   좋아요 0 | URL
아,,,그리고 문지사와 김성동 씨의 갈등은 지금 어떻게 되나요?

로쟈 2008-05-05 23:07   좋아요 0 | URL
보도로는 법정 분쟁에 들어간 상태로 보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06 00:29   좋아요 0 | URL
김성동 씨 성깔 있는데...제가 문단 뒷이야기...그런 류의 책을 즐겨 읽거든요.적나라한 것 좋아해서...예전에 유신시절 김성동 씨가 스님일 때 결혼식 하객으로 갔는데 주례사하는 김동리 씨가 내내 유신체제 찬양만 하길래 김성동 씨 왈...저러니 늙으면 죽어야지...

로쟈 2008-05-06 13:52   좋아요 0 | URL
ㅎㅎ 언젯적인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7 00:28   좋아요 0 | URL
만다라 쓰기 전이니까 70년대 중반에서 말 무렵이나 될까요? 우리나라 문인들 중 김동리 문하생들이 많잖아요.이문구 씨도 그렇고 박경리 씨도...그런데 김성동 씨 성향은 김동리 씨같은 강경한 반공하고는 안 맞죠.박헌영을 정통으로 보는 것 같아요.게다가 김동리 씨는 5공 때도 유명했잖아요.이병주 씨와 막상막하였죠.

로쟈 2008-05-07 23:27   좋아요 0 | URL
김동리 사단이라고 했지요. 박경리, 오정희 선생도 다 '문하'인데, 박완서 선생만 예외인가 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9 00:26   좋아요 0 | URL
서영은 씨도 빠질 수 없죠.손소희 씨 타계후 재혼상대였으니까요.제가 소장한 손소희 작품집엔 김동리 씨와 찍은 사진이 있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합니다.

로쟈 2008-05-09 11:0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서영은씨는 요즘 작품활동이 뜸하시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9 23:53   좋아요 0 | URL
글쎄요.아직은 작가로는 한창인데요...
 

고인의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책들을 몇 권 주문할 생각이다. 그의 동화들은 '어린이날' 선물로 쓸 생각이고, 나는 <우리들의 하느님> 등을 읽어볼 작정이다. 이 참에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동화의 경우 일부의 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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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 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
이원준 지음 / 작은씨앗 / 2008년 5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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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권정생의 삶과 문학
원종찬 엮음 / 창비 / 2008년 5월
20,000원 → 19,000원(5%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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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2월 9일 (월)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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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신정판
권정생 지음, 이철수 그림 / 분도출판사 / 2007년 9월
8,500원 → 7,650원(10%할인) / 마일리지 42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5월 04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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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북리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사는 이번에 1주기를 맞는 권정생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 기사이다. 작년 5월 그의 죽음을 계기로 '권정생의 삶과 문학'(http://blog.aladin.co.kr/mramor/1119478)이란 페이퍼를 올려두기도 했는데, 어느새 1년이다. 비록 고인은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다행스럽다. 이달의 첫주문은 그의 책들로 할 작정이다. 

한겨레(08. 05. 03) 민들레 꽃씨로 돌아온 노란 그리움

이름 그대로 ‘정생’(正生)이었다. ‘바른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름값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바른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고쳐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높이에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알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라면 너무 어려워 도저히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인간은 생전에 아무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단호한 겸손 때문에 그는 ‘사랑이라는 진리에 가장 가까이 간 정신’이었다. 오는 17일은 바로 그 정신이 하늘로 간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타계 1주기에 즈음해 그를 기리는 책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아동문학 평론가 원종찬 인하대 교수가 엮은 <권정생의 삶과 문학>은 ‘기림’의 뜻에 가장 충실한 책이다. 고인을 추억하는 시들을 앞세운 이 책은 권정생 연구를 위해 참고가 될 만한 평론과 회고글들을 가려 뽑았다. 그런가 하면 <권정생-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는 어린이들이 읽기 좋게 쓴 전기다. 가난과 고난의 참담한 생애를 보낸 뒤 아름다운 작품만 남기고 병고의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70년 삶이 단출하게 담겼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1996년에 나왔던 고인의 첫 산문집에 그 뒤 쓴 두 편의 글을 보태 펴낸 개정증보판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제 우리는 더는 저 조탑리의 작고 어두운 골방으로부터 나오는 유례없이 부드럽고 간곡한, 그러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목소리를 듣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며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이 증보판을 낸다고 책머리에 밝혔다. <랑랑별 때때롱>은 타계하기 넉 달 전에 연재를 마친 고인의 유작이다. <강아지 똥>에서부터 <몽실 언니>를 거쳐 40년 동안 이어진 권정생의 문학적 삶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작품인 셈이다. 과학문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생명에 대한 사랑임을 거듭 일깨우는 동화다.

권정생의 일생은 20세기의 모든 고통이 한데 집결한 것과도 같은 일생이었다. 부모는 먹고살려고 식민지를 떠나 제국의 수도 도쿄에서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 2세가 어린 권정생에게 할당된 첫 번째 삶이었다. 1946년 귀국선을 타고 아버지의 고향 경북 안동으로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이 안겨준 건 헐벗음과 굶주림뿐이었다. 하루 세끼 끼니를 때울 수 없었던 가족은 말 그대로 먹을 것을 찾아 안개처럼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한국전쟁 중에 가까스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권정생은 중학교에 갈 학비를 마련하려고 피란지 부산에서 점원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5년의 극빈 생활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늑막염에 폐결핵뿐이었다. 스무 살 청년의 생기를 파먹고 들어앉은 결핵은 평생토록 숙주의 몸을 떠나지 않고 창궐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난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집은 결핵 환자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남은 기운마저 빼앗았다. 슬픔과 눈물이 꼬막만한 오두막을 넘쳐 흘렀다. 결핵균이 폐를 뚫고 신장과 방광까지 덮쳤다. 병에 곯은 청년에게 유일한 위안은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의 나날 속에 살아 있는 주검 같은 몸을 지탱해준 것이 교회였다. 64년, 겪은 것이라곤 오직 굶주림과 막노동뿐이었던 어머니가 68년의 삶을 등졌다. 동생이라도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병든 형이 지키고 있으면 누가 시집오겠느냐는 아버지의 한숨에 권정생은 이듬해 집을 떠났다. 석 달 동안 풍찬노숙보다도 못한 유랑걸식을 했다. 밥을 빌어먹고 거적때기를 덮고 자는 병자-거지에게 그 석 달은 “가장 혹독한 밑바닥 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여기서 더 푸르게 살아났으니, 그는 뒷날 이때를 돌이켜보며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인생 체험”이었다고 썼다. “예수님의 40일간 금식 기도만큼 나에게 산 교훈을 일깨워준 기간이기도 했다.”(권정생,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아픈 몸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그해 겨울 아버지마저 영영 어머니 곁으로 떠났다. 결핵균이 홀로 남은 그 몸에 결정적 일격을 가했다. 신장 하나를 잘라내고 방광을 드러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남은 목숨이 2년이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2년이 지나고도 살아남았다. 죽음의 두려움을 잊으려고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책 읽기와 글쓰기였다. 그 무렵 그는 이웃 일직교회 문간방에 종지기로 들어갔다. 새벽마다 종을 치고, 힘이 남으면 글을 썼다. 1969년 그의 첫 작품 <강아지 똥>이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공모에 뽑혔다. 모두들 더럽다고 피하는 강아지 똥이 스스로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내용은 권정생 자신의 삶의 투영이었다.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짧은 동화는 한국 아동문학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어놓았다.”(이현주, ‘동화작가 권정생과 강아지똥’)

82년 권정생은 16년 동안 살았던 교회 문간방을 떠나 작은 흙집으로 이사했다. 아픈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창작열도 함께 흙집으로 이사했다. 84년 불후의 명작 <몽실 언니>가 태어났다.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었다.”(권정생, <몽실 언니>) 다리를 절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동생을 돌보는 몽실 언니는 둘로 나뉘어 불구가 된, 그러나 희망을 놓을 수 없는 한반도의 은유였다.

어린 것들, 아픈 것들을 언제나 애틋한 마음으로 감싸안았던 권정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는 잔인하지만 생명은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무소유라는 말이 외려 사치스러울 정도로 완전한 가난 속에 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그는 생전에 인세로 들어온 돈을 꼬박꼬박 모아 모두 뒷세대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평생 모은 5000만원으로 옥수수를 사서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고명섭기자)

권정생은 타계하기 2년 전, 그를 따르던 지인 정호경 신부의 권유로 유언장을 작성했다. 피고름 오줌을 쏟고 정신이 혼몽한 중에도 그는 자기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면서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고 겸허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유언장 전문을 싣는다.(고명섭기자)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 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1일 쓴 사람 권정생

여기까지가 기사다(세상엔 아직 얼간이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권졍생의 '환생'은 물 건너간 게 아닌가 싶다). 다른 자료들을 둘러보다 보니 이후에 남긴 편지도 눈에 띈다. 아마도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놓은 대로 부탁 드립니다. 제 시체는 아랫마을 이태희 군에게 맡겨 주십시오. 화장해서 해찬이와 함께 뒷 산에 뿌려 달라고 해 주십시오.

지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퉁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지난 날에도 가끔 피고물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재작년 어린이날 몇 자 적어 놓은 글이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2007년 3월 31일 오후 6시 10분 

08. 05. 04.

P.S. 어제는 아이의 체육대회가 있어서('운동회'란 말이 없어졌다!) 반나절 동안 운동장에 나가 있었다. 당초 김유정과 요네하라의 '유언'들까지 묶어서 세 사람의 유머에 대해 다루려고 했으나 여기저기 쑤시는 곳이 많아서 기사만을 옮겨놓는다. 이달 안으로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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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5-0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ㅜㅜ

로쟈 2008-05-04 18:48   좋아요 0 | URL
......

섬나무 2008-05-0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하다는 선생님을 닮은 유언장이네요.
이오덕 선생님과 주고받은 짧은 편지글들이 있던데 어떤 심오한 이론이나 아름다운 문장들보다 가슴에 깊이 닿았습니다.
건강한 남자로의 환생을 잠깐 언급하는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픕니다.
환생할 유일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로쟈 2008-05-04 18:05   좋아요 0 | URL
그런 태도를 초등학교 때부터 '주입'시켜야겠어요! 그럼 좀 나이지려나 싶기도 하고...

파란여우 2008-05-04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해 권샘님 댁을 갔었습니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번지...
일직교회가 저만치 보이는 얕으막한 동산 아래 아주아주 작은 집에요.
열평도 될까말까한 그 집 마당에 걸린 솥과 포도나무를 보고 한참 울먹였습니다.
모두 그 현장에 꼭 가보시길 권합니다.
그 이유는 가 보심 알게 되지요.
저는 권샘님 댁 갔다와서 한동안 글을 못썼습니다.

참고로 30여분 걸리는 의성의 사찰 '고운사'도 가 보세요.
권샘께서 즐겨 찾아가시던 곳입니다.
솔향이 그윽하니 좋습니다.

로쟈 2008-05-04 18:47   좋아요 0 | URL
사진으로만 본 곳이군요. 유택의 보존 여부를 놓고 말들이 좀 있었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됐나 모르겠습니다. 권정생 문학관이라도 꾸며지면 좋을 듯한데, 고인이 싫어하실 것 같기도 하네요...

Mephistopheles 2008-05-04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이...참 빨라요...
벌써 1주년이라니, 1년동안 기가막힌 일들이 참 많이도 일어나고 있기도 하고요.

로쟈 2008-05-04 20:40   좋아요 0 | URL
갈수록 가관인 것 같습니다.--;

마늘빵 2008-05-0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운동회 가서 열심히 뛰셨군요!

로쟈 2008-05-04 21:32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요! 사실 운동회랑은 별 관계가 없고, 아침에 어정쩡한 자세로 다림질을 한 시간 하는 바람에 그만... 워낙에 근육들을 잘 안 쓰는지라.--;

노이에자이트 2008-05-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홍성원,정공채 씨도 저 세상으로...

로쟈 2008-05-05 16:57   좋아요 0 | URL
아, 그렇지요...

프레이야 2008-05-05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호경 신부에게 쓴, 권선생님의 마지막 글 앞에 먹먹해집니다.
여우님이 자세히 써 둔 주소대로 선생님의 집에 꼭 가봐야겠단 생각만
다시 합니다.... 한 시간동안 다림질을 하셨군요. ^^

로쟈 2008-05-05 16:58   좋아요 0 | URL
제가 잘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순오기 2008-05-0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5월 17일 제가 '몽실언니' 리뷰를 올리고 난 두 시간 후에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한동안 마음 붙이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권정생님 같은 분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광주의 5.18뿐 아니라, 4년전 5월 18일에 돌아가신 시어머님 제사도 있고 5월은 제게 여러가지로 근신하게 하는 달이랍니다.

로쟈 2008-05-05 16:56   좋아요 0 | URL
그런 인연이 있으시군요.^^;
 

러시아의 문화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의 책들이 그간에 여러 권 소개된 적이 있다. 반수 이상은 현재 절판된 듯한데, 얼마전 <기호계>(문학과지성사, 2008)도 출간된 김에 '잔여병력'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이번주 시사인을 보다가 생각난 건데, 미학자 진중권의 석사학위논문이 로트만의 예술기호학에 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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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계 : 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
유리 로트만 지음, 김수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27,000원 → 24,300원(10%할인) / 마일리지 1,3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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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월)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8년 05월 03일에 저장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1- 러시아 귀족의 일상생활과 전통(18~19세기 초)
유리 M. 로트만 지음, 김성일.방일권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3월
32,000원 → 32,000원(0%할인) / 마일리지 320원(1% 적립)
2011년 04월 07일에 저장
품절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 2- 러시아 귀족의 일상생활과 전통(18~19세기 초)
유리 M. 로트만 지음, 김성일.방일권 옮김 / 나남출판 / 2011년 3월
25,000원 → 25,000원(0%할인) / 마일리지 25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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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월)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1년 04월 07일에 저장

문화 기호학
유리M.로트만 / 문예출판사 / 1998년 6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8년 05월 03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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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5-03 20:52   좋아요 0 | URL
오늘 귀가하는 길에 한 작은 서점에서 우연히 <기호계>를 구입했는데, 이런 조그만 '우연'이 저를 미소 짓게 합니다. 안 그래도 역자 후기에 로쟈님의 이름이 잠시 언급되는 것을 보고 살짝 미소를 머금었더랬지요...^^;

로쟈 2008-05-04 15:11   좋아요 0 | URL
^^
 
2008년 4월 내맘대로 좋은책 - 책의날 특집 이벤트

알라딘에서 뒤늦게 '책의 날' 행사를 한다기에 한몫 거들기로 한다. 실은 한주간의 피로를 잠시 풀 겸 '노닥'거리자는 의미가 있다. 다행이 이번주에는 손품을 팔 만한 새로 나온 책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2>가 눈길을 끌었지만 당장은 손에 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미루어둔다). 뒷북 행사라는 게 '책에 대한 10문 10답'이다. 보통은 '식상한' 질문들이 나열되기 마련인데, '특집 이벤트'라고 예외는 아니다(한몫 거들기로 했다면 궁시렁거리는 건 또 뭔가). 아니, 그런 게 '이벤트 본색'일는지도 모른다. 원래 MT가면 다들 유치하게 노는 것처럼!

1.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깔끔하게 한 줄이면 더 좋고, 길게는 두 줄 정도까지요.

네, 저는 '로쟈'입니다. '로쟈'는 '로지온'의 애칭이고요, '로지온'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입니다. <죄와 벌>의 그 살인자 말입니다. 무섭죠?

 

 

 

 

2. 일 년에 몇 권 정도 책을 읽으세요?

읽는다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같은 경우엔 보통 50권의 책들을 대출해놓고 있고 매주 10여 권 이상씩 새로 손에 듭니다. 하지만 첫페이지에서 끝페이지까지 읽는 책들은 많지 않습니다. 언젠가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도 적은 적이 있지만, 보다 많은 책을 '읽기' 위해서 대부분의 책들을 '구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유감스럽긴 합니다(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책의 세계는 이 우주처럼 점점 팽창해가고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많은 책을 읽더라도 안 읽은 책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이런 건 어린이날이나 성탄절 같은 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버스나 지하철 운행을 하시는 분들의 심정 같다고나 할까... 


 

 

 

3.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건)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

이건 좀 어릴 때 읽은 책을 골라야 할 것 같네요. 나이 먹을수록 충격에 좀 둔감해지니까요. 그런 걸로 치자면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입니다(요즘은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나온 책이 더 많군요). 아마도 중 2때 읽었던 듯하고 그때 요절했다면 '이 한권의 책'이 될 뻔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허약한 우등생 한스 기벤라트와 스스로를 동일시했었지요. 그리곤 대학 1학년 때 읽은 <시지프의 신화>에 상당히 매료됐던 듯싶네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도 '충격'을 주었던 책이고(이 경우엔 '진동'이 더 적합하겠지만). 답하면서 보니까, '충격'이란 말이 무얼 뜻하는지 모호해지네요. '자극' 정도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데, 실상 그런 책들을 꼽으려니까 너무 많네요. <장자> 또한 유쾌한 혹은 통쾌한 책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모두 20년도 더 전의 일이군요(참고로, 아래 이미지의 책들은 제가 읽은 것과는 모두 다른 판본들입니다). 

 

 

 

 

4. 읽는 도중 3번 이상 웃었다, 라는 책이 있습니까?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러시아문학쪽에서만 꼽아보겠습니다. 모두 대학에 들어와서 읽게 됐는데, 고골의 단편집,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과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니진스키의 자서전 <영혼의 절규> 등은 읽을 때마다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책들입니다. 그런 탓인지 저는 개그 프로그램을 따로 보지 않습니다.

 

 

 

 

5.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또는 닮고 싶은 책 속 인물은 누구인가요?

'로쟈'야 물론 라스콜리니코프를 닮았겠지요. 아니, 자기 자신을 닮는다는 건 좀 이상한 말이네요. <수레바퀴 밑에서>의 한스 얘기는 했으니까 이후의 닮은 꼴을 찾아야 할 텐데 <말테의 수기>가 그래도 먼저 떠오릅니다. 대학 2학년때 전방에 입소했을 때는 별명이 '슈호프'였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나오는 주인공. 역시나 갓 20대에 읽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 그리고 석사논문에서 다룬 <우리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 등이 떠오릅니다. 이 역시 딱 꼬집어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로군요.

 

 

 

 

6. 이 작가의 책만큼은 챙겨 읽는다, 누구일까요?

좋아하는 작가들을 말해보라는 것인데, '챙기는' 작가들의 원조는 밀란 쿤데라 같습니다(요즘은 책이 안 나오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의 최근간 에세이집 <커튼>까지는 챙겨두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후에 '의식적'으로 그의 책들은 구입하고 바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시대 국내 작가로는 장정일과 김훈이 그런 부류에 속했구요(김훈의 소설들은 좀 예외이지만). 철학자들 가운데는 데리다와 지젝의 책을 가급적 챙겨두는 편입니다. 국내 철학자로는 박이문 교수의 책을 즐겨 읽었고, 또 비평가로는 김현, 김윤식 교수의 책들을 사모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벌써 오래전 일들이 돼 버렸군요. '관심저자'로 좀 시야를 넓히면 20-30명은 족히 될 거 같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는 조금씩 늘어나는 편이어서 이들을 '관리'하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7. 남에게 선물로 줬던 책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남에게 준 걸 왜 기억해두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니 전혀 없는 건 아니네요. 주로 생일날엔 시집들을 선물했는데(시집이 저렴하니까요), 이성복, 황지우, 김중식 등의 시집이 아니었나 싶네요. 산문집으론 김훈의 <풍경과 상처>, 그리고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도 몇 차례 선물하던 책들입니다. 아,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도 즐겨 선물하던 책이고, 반응도 괜찮았습니다(한 사람만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선물한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 <올가의 반어법>입니다. 얼떨결에 '감수'를 맡았던 책이기도 합니다.


 

 

 

8. 소장하고 있는 책 중 가장 고가의 책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이건 국내서를 기준으로 하는 건가요? 별로 '신선'하지 않은 질문인데, 책이야 화보가 들어간 두툼한 책이 당연히 비싼 거 아닌가 싶네요. 소장본은 아니지만 옆에 있는 걸 기준으로 하면 <단테의 신곡 화보집>이 액면가 8만원짜리 책이군요(생각보다는 비싸지 않네요). 이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입니다(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서 유감인 책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셰르의 <천사들의 전설>,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등도 모두 무게와 가격이 꽤 나가는 책들인데 선물로 받은 '소장도서'들입니다.

9. '책은 나의 oo(이)다'. oo는?

<롤리타>의 표현을 빌자면,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입니다. 덧붙이자면, '나의 굴레, 나의 지옥이자 연옥이자 천국이며, 나의 연인이자 친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무덤'. 책에 파묻혀 죽을 거란 예언을 들은 바 있습니다. 내가 한 예언이던가?..

10. 이번 달에 읽은 책 중 '내맘대로 좋은 책'은 어떤 것일까요?

흠, 이건 호주머니 뒤집어보라는 질문이네요. '이번달'이 '5월'을 가리키는 거라면 어제오늘 읽은 책 중에서 고르는 것인데, 그 경우엔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밖에 없습니다(오늘 원고를 쓰느라고). 조금 읽은 것도 포함하자면,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와 타리크 알리의 <1960년대 자서전>도 포함되구요, 이제 원고 때문에 들춰봐야 하는 로트만의 <기호계>도 '내맘대로 좋은 책'입니다(지금 책상머리에 있습니다). 4월까지도 포함한다면 물론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테지요...

 

 

 

 

흠,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오래 걸리네요...

08. 05.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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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돌이 2008-05-0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페이퍼 읽다가 가끔 웃어버리는 건 저뿐만은 아니겠지요?
내가 한 예언이던가? 이부분에서 또 웃어버렸네요. 로쟈님 유머는 순간적이지가 않고 시처럼 여운이 남는 것 같아요. 가끔 생각날 때마다 재미있는 장난을 친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요
^^
진행중인 페이퍼 보려구 늦게까지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재미있었어요. 굿!


로쟈 2008-05-03 00:58   좋아요 0 | URL
기다리시기까지나!^^

stella.K 2008-05-03 11:19   좋아요 0 | URL
우주돌이님 말씀에 동감!

Joule 2008-05-0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번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무섭죠?라고 말한 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로쟈 2008-05-03 07:30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식 유먼데요.^^; 그리고 꿈 얘기 잘 읽어봤습니다.^^

마늘빵 2008-05-03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쟈님도 이벤트 참여하셨군요. 저도 이거 하려고 대기중입니다. 계속 늦게 들어와서 못하고 있는 중. 오늘도 이제 들어왔네요. -_- 내일 해야지.

로쟈 2008-05-03 00:57   좋아요 0 | URL
알라딘 품앗이네요.^^

순오기 2008-05-03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이 페이퍼 올라온 것 보면서 내가 읽은 책은 몇권인가 댓글 남기는 중이에요.^^ 로쟈님 페이퍼에도 역시~ 죄와 벌(열린책들), 독서의 기술, 수레바퀴 아래서, 시지프스의 신화, 말테의 수기,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폭풍의 언덕...뿐이군요.^^

로쟈 2008-05-03 07:31   좋아요 0 | URL
그런 책들이 일종의 '공통 도서관'이 되겠네요.^^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순오기 2008-05-03 16:38   좋아요 0 | URL
제가 댓글 달면서 보니까 공통도서관이 보이네요.ㅎㅎ
축하~~ 감사합니다! ^^

PhEAV 2008-05-03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테의 수기』를 보니 제가 평소에 정말 궁금해하던 게 하나 생각나서 여쭙습니다. 혹시 아시는지 해서... ^^;; (실례는 아니려나 모르겠네요)

원래 민음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전집》의 42권은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였고, 저는 그걸 가지고 있는데, 어느 순간 보니 그 책은 절판되고 심지어는 민음사 홈페이지에서도 검색이 안 되더라고요. 대신 『말테의 수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데, 혹시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아시나요? 전 통 모르겠어서요 ㅠ,.ㅠ;;

로쟈 2008-05-03 07:26   좋아요 0 | URL
네, 저라고 알 턱이 있는 건 아니고요(출판관계자가 아니라서^^;) 짐작으론 번역이나 판권상에 문제가 있어서 절판시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책은 갖고 있는데, '희귀본'이 되겠군요...

비로그인 2008-05-0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가 로지온의 애칭이었군요.
궁금했답니다. 하하


로쟈 2008-05-04 15:12   좋아요 0 | URL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지요.^^;

섬나무 2008-05-0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주 유익한 페이퍼네요.ㅎㅎ 책은 나의 ㅇㅇ 이다에서 로쟈님의 ㅇㅇ을 진즉부터 그리 해석한 터이므로 몹시 진솔하기도 하네요.^^

로쟈 2008-05-04 15:12   좋아요 0 | URL
진솔하기도 하고 식상하기도 하고.^^;

노이에자이트 2008-05-0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네하라 마리를 요즘 많이 소개하시네요.그 책에 추천글 쓰셨더군요.저는 <대단한 책>이 좋아서 호기심이 생긴 작가입니다.소련(및 요즘 러시아)과 동구권에 대한 관심때문이죠.대학 들어와서 스탈린이 러시아 출신이 아니고 그루지아 출신인 것을 알고 관심이 생긴 것 같아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작가들과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들을 함께 좋아하시네요.러시아 작가들은 카프카스 지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꽤 많더군요.그래서 한때는 이 지역을 다룬 작품만 연속해서 본적이 있어요.그때 <현대의 영웅>을 읽었죠.사놓고 오랫동안 안 읽다가...좋아하는 작가는 고골리,체호프...아..그리고 마르크스 전기 쓴 셀리브리아코바! 이 여인이 쇼스타코비치와 정분났다는 소문이...근데 김석희 씨는 이번에 이 책 새로 내면서 구판에 있던 인명해설을 싹 없애버렸더라구요.하긴 출판사에서 없애기로 결정할 수도 있죠.다행히 저는 헌 책을 구입했답니다.

로쟈 2008-05-04 15:14   좋아요 0 | URL
저도 <대단한 책> 때문에 주목하게 된 저자입니다. 관심을 보이니까 출판사에서 감수를 부탁해오더군요. 세베르뱌코바의 책은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2008-05-04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5-04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0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공동체 출판사 있었죠.거기서 나온 책이었어요.그땐 김석희 씨가 젊었죠.요즘은 원로대접 받던 것 같더군요.

로쟈 2008-05-04 23:36   좋아요 0 | URL
네, 책은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 긴 책은 잘 손에 들지 않았었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5-0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