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내맘대로 좋은책 - 책의날 특집 이벤트
알라딘에서 뒤늦게 '책의 날' 행사를 한다기에 한몫 거들기로 한다. 실은 한주간의 피로를 잠시 풀 겸 '노닥'거리자는 의미가 있다. 다행이 이번주에는 손품을 팔 만한 새로 나온 책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2>가 눈길을 끌었지만 당장은 손에 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미루어둔다). 뒷북 행사라는 게 '책에 대한 10문 10답'이다. 보통은 '식상한' 질문들이 나열되기 마련인데, '특집 이벤트'라고 예외는 아니다(한몫 거들기로 했다면 궁시렁거리는 건 또 뭔가). 아니, 그런 게 '이벤트 본색'일는지도 모른다. 원래 MT가면 다들 유치하게 노는 것처럼!
1.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깔끔하게 한 줄이면 더 좋고, 길게는 두 줄 정도까지요.
네, 저는 '로쟈'입니다. '로쟈'는 '로지온'의 애칭이고요, '로지온'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름입니다. <죄와 벌>의 그 살인자 말입니다. 무섭죠?
2. 일 년에 몇 권 정도 책을 읽으세요?
읽는다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 같은 경우엔 보통 50권의 책들을 대출해놓고 있고 매주 10여 권 이상씩 새로 손에 듭니다. 하지만 첫페이지에서 끝페이지까지 읽는 책들은 많지 않습니다. 언젠가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도 적은 적이 있지만, 보다 많은 책을 '읽기' 위해서 대부분의 책들을 '구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유감스럽긴 합니다(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책의 세계는 이 우주처럼 점점 팽창해가고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많은 책을 읽더라도 안 읽은 책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이런 건 어린이날이나 성탄절 같은 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버스나 지하철 운행을 하시는 분들의 심정 같다고나 할까...
3.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건) 가장 충격적이었던 책은?
이건 좀 어릴 때 읽은 책을 골라야 할 것 같네요. 나이 먹을수록 충격에 좀 둔감해지니까요. 그런 걸로 치자면 단연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입니다(요즘은 <수레바퀴 아래서>라고 나온 책이 더 많군요). 아마도 중 2때 읽었던 듯하고 그때 요절했다면 '이 한권의 책'이 될 뻔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허약한 우등생 한스 기벤라트와 스스로를 동일시했었지요. 그리곤 대학 1학년 때 읽은 <시지프의 신화>에 상당히 매료됐던 듯싶네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도 '충격'을 주었던 책이고(이 경우엔 '진동'이 더 적합하겠지만). 답하면서 보니까, '충격'이란 말이 무얼 뜻하는지 모호해지네요. '자극' 정도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은데, 실상 그런 책들을 꼽으려니까 너무 많네요. <장자> 또한 유쾌한 혹은 통쾌한 책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모두 20년도 더 전의 일이군요(참고로, 아래 이미지의 책들은 제가 읽은 것과는 모두 다른 판본들입니다).
4. 읽는 도중 3번 이상 웃었다, 라는 책이 있습니까?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러시아문학쪽에서만 꼽아보겠습니다. 모두 대학에 들어와서 읽게 됐는데, 고골의 단편집,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과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니진스키의 자서전 <영혼의 절규> 등은 읽을 때마다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책들입니다. 그런 탓인지 저는 개그 프로그램을 따로 보지 않습니다.
5.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또는 닮고 싶은 책 속 인물은 누구인가요?
'로쟈'야 물론 라스콜리니코프를 닮았겠지요. 아니, 자기 자신을 닮는다는 건 좀 이상한 말이네요. <수레바퀴 밑에서>의 한스 얘기는 했으니까 이후의 닮은 꼴을 찾아야 할 텐데 <말테의 수기>가 그래도 먼저 떠오릅니다. 대학 2학년때 전방에 입소했을 때는 별명이 '슈호프'였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나오는 주인공. 역시나 갓 20대에 읽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 히스클리프, 그리고 석사논문에서 다룬 <우리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 등이 떠오릅니다. 이 역시 딱 꼬집어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로군요.
6. 이 작가의 책만큼은 챙겨 읽는다, 누구일까요?
좋아하는 작가들을 말해보라는 것인데, '챙기는' 작가들의 원조는 밀란 쿤데라 같습니다(요즘은 책이 안 나오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의 최근간 에세이집 <커튼>까지는 챙겨두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후에 '의식적'으로 그의 책들은 구입하고 바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시대 국내 작가로는 장정일과 김훈이 그런 부류에 속했구요(김훈의 소설들은 좀 예외이지만). 철학자들 가운데는 데리다와 지젝의 책을 가급적 챙겨두는 편입니다. 국내 철학자로는 박이문 교수의 책을 즐겨 읽었고, 또 비평가로는 김현, 김윤식 교수의 책들을 사모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벌써 오래전 일들이 돼 버렸군요. '관심저자'로 좀 시야를 넓히면 20-30명은 족히 될 거 같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는 조금씩 늘어나는 편이어서 이들을 '관리'하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7. 남에게 선물로 줬던 책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남에게 준 걸 왜 기억해두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니 전혀 없는 건 아니네요. 주로 생일날엔 시집들을 선물했는데(시집이 저렴하니까요), 이성복, 황지우, 김중식 등의 시집이 아니었나 싶네요. 산문집으론 김훈의 <풍경과 상처>, 그리고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도 몇 차례 선물하던 책들입니다. 아,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도 즐겨 선물하던 책이고, 반응도 괜찮았습니다(한 사람만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선물한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 <올가의 반어법>입니다. 얼떨결에 '감수'를 맡았던 책이기도 합니다.
8. 소장하고 있는 책 중 가장 고가의 책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이건 국내서를 기준으로 하는 건가요? 별로 '신선'하지 않은 질문인데, 책이야 화보가 들어간 두툼한 책이 당연히 비싼 거 아닌가 싶네요. 소장본은 아니지만 옆에 있는 걸 기준으로 하면 <단테의 신곡 화보집>이 액면가 8만원짜리 책이군요(생각보다는 비싸지 않네요). 이건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입니다(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어서 유감인 책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 셰르의 <천사들의 전설>, 마트롱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 등도 모두 무게와 가격이 꽤 나가는 책들인데 선물로 받은 '소장도서'들입니다.
9. '책은 나의 oo(이)다'. oo는?
<롤리타>의 표현을 빌자면,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입니다. 덧붙이자면, '나의 굴레, 나의 지옥이자 연옥이자 천국이며, 나의 연인이자 친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무덤'. 책에 파묻혀 죽을 거란 예언을 들은 바 있습니다. 내가 한 예언이던가?..
10. 이번 달에 읽은 책 중 '내맘대로 좋은 책'은 어떤 것일까요?
흠, 이건 호주머니 뒤집어보라는 질문이네요. '이번달'이 '5월'을 가리키는 거라면 어제오늘 읽은 책 중에서 고르는 것인데, 그 경우엔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밖에 없습니다(오늘 원고를 쓰느라고). 조금 읽은 것도 포함하자면,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와 타리크 알리의 <1960년대 자서전>도 포함되구요, 이제 원고 때문에 들춰봐야 하는 로트만의 <기호계>도 '내맘대로 좋은 책'입니다(지금 책상머리에 있습니다). 4월까지도 포함한다면 물론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테지요...
흠, 빨리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오래 걸리네요...
08. 05. 02.